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3)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23화 >
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도쿄 오페라 시티 콘서트홀의 천장에 닿았다. 모든 악장의 연주를 끝마친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와 청중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연주는 현의 여왕이라는 이명처럼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특히 G선상의 아리아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청중들의 눈과 귀는 이미 그녀의 선율에 사로잡힌 지 오래. 붉은 드레스가 마치 장미꽃처럼 펄럭이며 바이올리니스트는 퇴장한다.
“고로, 한국에서 연락 온 건 없어?”
대기실을 찾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곧장 매니저를 찾았다. 장시간에 걸친 독주회에 힘들만도 하건만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녀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듯이.
똑똑.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대기실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내가 많이 신경써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해요.”
함께 독주회를 이끌어준 피아니스트였다. 사내는 손사래를 쳐 보이며 오히려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야말로 히로세 선생님과 함께 연주를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제 일생일대의 꿈을 이룬 것 같아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과장이 아니었다.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 히로세는 일본을 넘어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연주자. 특히 그녀의 독주회가 도쿄에서 열릴 때면 삿포로부터 가고시마의 청중들까지 움직인다는 말도 있었다. 히로세의 연주를 들은 청중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녀는 현의 여왕이면서, 마녀라고. 하나의 선율로 청중의 영혼을 빼앗아가기에.
“참, 정훈은 한국에서 왔죠?”
일순 히로세가 피아니스트 백정훈을 쳐다봤다. 백정훈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혹시 한국에 제 마음에 들 만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을까요? 성년이 된 연주자들 말고, 어린 연주자들 중에 말이에요.”
백정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민을 할 때면 생기는 버릇. 히로세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바이올리스트의 여제였다. 자신 또한 쇼팽콩쿠르에서 준우승을 했을 정도로 한국 클래식계에서 띄워주는 차세대 피아니스트였지만 아직 히로세에 비하면 세발의 피에 불과했다. 도통 생각해봐도.
“이미 국제적인 심포니에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선생님들을 제외하고 주니어 부문에서 히로세 선생님을 만족시킬만한 연주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연주자들을 돌이켜 생각해봐도 클래식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뛰어난 영재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순간 히로세의 표정이 자못 어두워졌다.
‘도대체 누굴까.’
백정훈도 모르는 강현이라는 아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일그룹에서 보내온 비디오의 내용은 놀라웠다. 국제 콩쿠르에도 단 한번 얼굴을 비추지 않은 아이.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밖에 알지 못하니, 히로세의 속만 타들어갔다.
“선생님, 너무 그 아이한테 신경을 쓰시는 것 아닙니까? 일본에서도 찾아본다면 그 아이만한 실력자가 분명 있을 텐데 말이지요.”
일순 고로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하지만 히로세는 고개를 완강히 저어보였다. 고로의 저러한 반응은 영상을 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자신 또한 그 비디오를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까지 하지 않았을 테니.
“고로, 그 아이는 분명 다릅니다.”
아이?
백정훈이 슬쩍 고개를 돌려 고로상을 쳐다봤다. 하지만 해답이 나올 리 만무하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
“오빠아─!”
손유하가 작은 몸으로 바이올린 케이스를 짊어진 채 뛰어왔다. 마치 한 건 했다는 듯 잔뜩 상기된 목소리.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것은 왜일까, 손유하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다시 요조숙녀처럼 조신하게 자리에 앉았다. 재벌3세가 아니었더라면 아역배우를 시키고도 남았을 정도.
“현, 숙녀께서 때마침 악기도 준비해 주셨군.”
스펜서가 노골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왕회장과 할아버지 또한 기대하는 눈치. 요조숙녀가 되어버린 손유하는 이미 자세를 앞당긴 채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귀족들을 위해 살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연주가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갑작스런 연주에 기분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주 먼 곳에서 왔으니.’
자신을 보기위해 영국에서 달려온 것이 아닌가, 것도 런던 심포니의 명지휘자였다. 스펜서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더구나 연주 한 번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
‘오호.’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작은 바이올린과 기다란 활이 꺼내자 스펜서가 눈을 빛냈다. 꽤나 좋은 나무를 사용해 만든 악기였기 때문이다. 척 봐도 크레모나의 유명장인이 만든 것일 터. 가격 또한 어린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리라. 과연 연주자의 실력은 어떠할 것인가.
“딱 한 곡만 연주하겠습니다.”
절도 있는 단언에 스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현이 건방져 보이지는 않았다. 음악가로서는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일. 아무렴, 나이가 어릴지라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일 테지. 자신감 있는 모습에 오히려 스펜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활이 들어 올려지며,
지잉.
하나의 선율을 시작으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바흐!’
스펜서가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흐 파르티타 2번중 샤콘느.
무반주로 시작되는 장대한 여정. 숨 막히는 떨림과 애절함의 연속이 활을 타고 선율로 울려 퍼졌다. 현을 짚은 손가락은 마치 어린 아이를 매만지듯 조심스럽게 음표를 다루고 있었지만 수 대의 바이올린이 동시에 연주되는 것처럼 화성이 느껴졌다. 이건 마치 보이지 않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를 하는 느낌. 거장 크레머의 샤콘느도 직접 눈앞에서 들은 적 있는 스펜서였지만 현의 연주는 그만큼 색다르게 다가왔다.
지잉.
차갑지만 그 안에 숨겨진 슬픔이 더 애절하게 느껴진다. 테크닉을 평가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악보를 넘어서 저만의 해석으로 연주되고 있는 샤콘느였다. 음색과 리듬은 이미 소년만의 것이 된지 오래. 저건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스펜서는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귓가는 선율을 쫓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 어떻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스펜서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간 자신이 생각해왔던 가치관을 부정이라도 하듯.
* * *
정원에 바람이 불어온다. 달아올랐던 몸을 식힐 만큼 차가운 바람.
왕회장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남아 있었다. 일평생 감정의 변화를 숨기는 것이 습관처럼 녹아버린 육신. 하지만 그 아이의 연주를 듣고 있자니 뜨거운 기운이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옴을 느꼈다. 단언컨대 이러한 감정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정말 대단하네, 유회장.”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일전에는 경황도 없는데다가 그저 놀라기 바빠 이렇게 온전히 손주의 연주에 빠져든 것은 처음이었다. 헌데 자신이 생각했던 음악적 재능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것이 아닌가.
“손가, 이젠 저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군.”
수십 년 간 갖은 풍파를 겪으며 격동의 시대를 지나왔음에도, 지금만큼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답이 없는 사지선다의 문제를 마주한 것만 같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한 없이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너무 깊게 고민하지 마시게나.”
왕회장은 진심어린 조언을 건넸다. 친구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현이를 너무 어리게만 생각하지 말게나. 내가 보기엔 매우 영특한 아이이니 말일세. 자기 앞가림은 물론이고 동주 또한 챙길 재목이야.”
왕회장의 말에 할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손주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때는 동주의 앞날을 부탁할 만큼 의젓해보였지만 또 어쩔 때는 한없이 어려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왕회장의 말처럼 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 넘을 만큼.
“그 아이의 선택엔 분명 우리가 모르는 뜻이 있을 테지.”
남들이 들었으면 놀랐을만한 이야기. 재계의 거두가 14살의 어린 아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가. 그때 왕회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휴, 저 녀석 된통 넘어가 버렸구만.”
왕회장은 짧은 말을 하며 고갯짓 했다. 시선 너머에는 손유하와 강현이 같이 놀고 있었는데 강현은 그저 손유하를 여동생 챙기듯 대하는 반면 손유하는 강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로미오를 바라보던 줄리엣의 눈빛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아 보인다.
*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스펜서는 몸에 배인 여운을 느끼기 위해 기내식마저 거부했다. 그 좋아하는 와인까지도. 아직도 그의 연주를 생각하면 전율이 온 몸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으니, 그 무엇에도 방해 받고 싶지 않았다. 런던 공연 일정 때문에 한국에서 채 하루도 머물지 못할 만큼 강행군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온 몸이 개운했다.
“객원이라니, 내가 생각을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했지.”
런던 심포니의 객원단원으로 데리고 와 자신의 밑에서 가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샤콘느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이미 대양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음악적 지식과 경험이 얼마나 되는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이미 자신만의 현격한 음악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직은 죄송하다라.”
소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 못했던 답변이었기 때문. 그래서 기분이 나빴냐고?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깊은 눈빛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분명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쉽사리 그 아이를 가질 수는 없으리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으로 런던의 상공이 보였다. 벌써 도착했을 줄이야. 그 긴 시간동안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스펜서는 기다란 손바닥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순 주름지고 굳은살이 가득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처음 그 아이의 하얀 손바닥을 보고는 경악했었다. 굳은살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한 번도 바이올린을 켠 적 없는 사람처럼. 그때가 돼서야 가치관이 오롯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이후에 모든 신동은 죽었다고만 생각했었지. 하지만.
“새뮤얼, 자네가 옳았어.”
스펜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게 미소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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