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3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39화 >
“벌써 촬영을 하라고요?”
퀸엘리자베스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콩쿠르. 선율의 여명이라 불리는 샤펠에서의 일정은 국영방송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된다. 하지만 아직 최종 명단이 선별되지도 않았을 텐데.
“해외에서도 기자단이 입국하기 시작했어. 떡밥이 좋으니까 낚시꾼들이 몰리는 거야.”
국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콩쿠르 명단을 톡톡 건드렸다. 유럽의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벨기에는 총인구 천만의 소국가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만큼 중요한 국가적 행사로 주요 관광수입원 중 하나.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각국으로 수출되기에 이르는데 이러다가 내 집 안방에서 홀라당 벗겨 먹히게 생겼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은 까닭은 간단했다. 각국의 걸출한 신예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브뤼셀로 향했으며. 더군다나.
“히로세와 스펜서의 추천장을 받은 인물이 있다지?”
들리는 소문이 그러했다. 현의 여왕과 런던 심포니의 추천장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 브뤼셀에 도착했다고. 겉도는 소문들을 하나하나 종합해보니, 믿기지 않는 인물이 탄생했다.
“모차르트가 환생이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한국 나이로 14살의 소년, 물론 아주 어렸을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는 신동들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 소년이 바이올린을 켠 지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이올린을 한 달 배운 아이가 전 세계 바이올리니스트 신예 중 24명의 명단에 뽑힌다? 소설에서나 등장할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국장은 콧잔등이 간질간질한 것을 느꼈다. 깊은 눈두덩이는 여전히 소년의 이름을 향하고 있었다. 영국의 윌리엄, 중국의 장옌, 북유럽의 에릭도 아닌 이름 모를 동양계 소년에게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 방송국에 몸담으며 길러진 촉이 이 아이를 맹렬히 가리키고 있었다.
“리아, 이 동양계 소년을 직접 촬영해. 인터뷰도 가장 많이 따놓고 말이야.”
분명, 이번 퀸엘리자베스의 하이라이트는 이 소년이 될 것이다.
*
에취―!
또다시 기침이 나오는 걸 보아하니 누군가 내 얘길 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뒤꽁무니를 졸졸 따르는 영국 샌님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갑작스레 등장한 것도 모자라 나를 노려보지 않는가.
확.
머리칼을 휘어잡고 한 대 쥐어 박아줄까 했다가 코피를 거칠게 닦아내는 걸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부류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삶 사법연수원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타고날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수재.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내가 자리에 멈춰 서자, 샌님도 따라 멈춰선다.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섣불리 말을 열지 못하는 모습.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쯤되면 누군가가 생각날 만큼 그 애 못지않게 끈질기다.
“바이올린을 켜려는 건가?”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퀸엘리자베스 참가자들을 위해 콩쿠르 측에서 따로 마련해준 연습실이었다. 호텔과 연동되어있어 언제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연습할 수 있었다. 영국 샌님은 짐짓 고민하는가 싶더니 나를 바라봤다.
“좀 봐도 되겠지?”
“좋을 대로.”
2차 심사때는 각자가 준비한 자유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곡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연습을 보여줘도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다수의 예민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자신의 연습을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을 꺼려했지만. 영국 샌님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지 말을 아끼며 조용히 자리했다.
*
그 순간.
지잉.
활이 현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내림활로 연주하는 선율이 마치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만 같았다. 한 치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스산한 소리를 낸다. 그때였다. 송진이 묻은 활이 현을 강하게 눌렀다.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쥐고 있던 손을 움켜쥐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저 아이가 정말 스펜서의 추천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헌데 연주가 계속될수록 매료되는 자신을 느꼈다. 어떻게 저런 선율을 표현할 수 있는 거지. 하물며 자세와 기본기는 어떠한가? 마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매만졌던 거장이 자세를 잡는 것 같은 숨 막히는 긴장이 느껴졌다. 저런 것은 오랜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 그런데 저 아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해내고 있었다.
왕립음악원에서 수학한 윌리엄은 수많은 수재들을 마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항상 어디에서든 자신이 최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수재들도 자신 앞에서는 평범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갈 뿐이었으니. 그런데 지금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모차르트를 마주한 살리에르가 이러한 감정이었을까.
두근 두근 두근.
냉랭하던 가슴이 사정없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아슬아슬한 선율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고 있었다. 고고한 모습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저 아이의 모습에 이유 모를 분노가 치솟았던 것도 잊을 정도로 온몸에서 땀이 장대비처럼 흘러내렸다. 어느새 연주는 끝났지만 윌리엄은 아직 마지막 선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똑똑.
그때였다. 연습실로 에바가 들어선 것은.
“윌리엄?”
내 모습을 보고는 놀란 에바였지만 난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대답이 없자 의문스런 시선을 거두곤 곧장 소년을 바라봤다.
“현, 지금 손님이 왔어요.”
* * *
아침 댓바람부터 평창동 대저택이 요란하다. 연못을 유영하던 잉어들이 시끌벅적한 소리에 자취를 감췄을 정도. 왕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반해 손일선은 골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김비서, 유하가 벌써 몇 시간 째 저러는 겁니까?”
손일선의 물음에 김비서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보기 좋지 않으냐, 일선아.”
“아버지?”
손일선은 자신의 딸이 꾸린 짐들을 보았다. 단순히 바이올린을 전달해주고 오면 되는 일이었다. 허나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누가 보면 해외로 이민이라도 가는 줄 알겠다. 강현이 있는 벨기에에 간다고 하니 잠도 자지 않고 짐을 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 같았으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있을 녀석이.
“혼자 보내는 것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건 그렇고 톈진은 어떻게 되었느냐?”
왕회장의 물음에 손일선이 자세를 바로했다. 더 이상 딸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에.
“금년 안으로 허가절차가 끝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중국 당국에서 외국계 자본유치에 적극적인 입장이 아니다보니 공격적인 투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되었다. 첫 물꼬를 트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외국계 자본유치야 머지않아 저절로 풀릴 문제고 말이다. 그리고 요즘 회사에 좀도둑들은 없느냐?”
손일선은 왕회장의 물음을 단박에 이해했다. 단순한 좀도둑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자재를 빼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횡령과 산업기술을 해외로 유출시키는 행위. 현성그룹이 이 때문에 큰 몸살을 앓았다지 않는가. 하물며 덩치가 클수록 좀먹을 부분은 많은 법이다.
“일선아, 자주 하다 보면 장표에 장갈이 하는 것만큼이나 쉬워지는 것이 이 도둑질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초장에 싹을 자르고 구멍을 막는 것이 제일 중요해. 혈육이라고 해서 의심을 거두지 말고 항상 주시하거라. 무슨 말인지는 네놈이 더 잘 알게야.”
손일선은 등 뒤로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왕회장 눈 밖에 나 평생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삼남을 챙겨준 적이 있었기 때문. 왕회장의 눈과 귀는 제일그룹 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었다.
“이런 것을 보면 더욱 그 아이가 탐이 나는구나.”
그때 왕회장이 짐짓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손일선은 저 미소의 숨겨진 속 뜻을 모르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가진 아버지가 무언가 강렬히 원하는 게 생겼을 때 짓는 표정이었으니.
*
“저를 촬영한다고요?”
지난 삶 사법연수원에서 다큐5일을 촬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나 시달렸던가, 제아무리 다큐멘터리라고 할지라도 각색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송국 사람들을 한번 겪어봤던지라 그리 기분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헌데 박선영의 말에 의하면 분명.
“원래 샤펠에서부터 촬영을 하지 않나요?”
“지난 콩쿠르 때까지는 그랬습니다만 규정이 바뀌었어요.”
에바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동유럽 미녀였다. PD라기보다는 연예인이 더 어울릴법한 페이스. 모국어인 불어가 아닌, 영어로 말하는 통에 오히려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곁에는 해그리드를 연상케 하는 아저씨가 촬영 카메라를 안고 있었는데, 훗날 그를 롤모델로 해그리드 캐릭터가 탄생한 건 아닐까 착각마저 들 정도로 유사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부탁도 드리지 않습니다.”
내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PD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무렴, 국가적 행사로 지정된 콩쿠르였다. 예민한 음악가들을 촬영하는 문제이니 연출적 요구는 심하지 않을 테지.
“혹시 저 혼자만 먼저 촬영하나요?”
24명의 인원이나 남아있었다. 단순히 카메라맨만 보냈어도 이상치 않을 일이었거늘. PD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물론, PD가 단순히 한 명은 아닐테지만 들리는 말로는 다른 참가자들은 아직 찾아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설마 추천장 때문은 아니겠죠?”
PD가 당황한 듯 했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현의 여왕과 런던 심포니의 명성은 음악계에서 혁혁하다. 이름 모를 동양 꼬마가 두 사람의 추천장을 거머쥐었으니 관심이 가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24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가.
“알겠습니다. 대신 연습을 할 때는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PD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 누구보다도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연예인이 더 어울리는 외모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때아닌 한국어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호텔 정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눈을 강하게 감았다 떴음에도 실루엣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유하라면 저렇게 말하지 않을 텐데?’
오라버니는커녕, 오빠아! 하며 나를 보자마자 뛰어왔을 손유하다. 헌데 지금은 요조숙녀처럼 조신하게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보면 양반집 규수인 줄 알겠다. 물론, 실제로는 재벌가의 후계자였지만. 이윽고 손유하의 뒤편으로 따라 걸어오는 정체에 내 눈이 커졌다.
“어머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손유하가 저리 행동하는 것이.
“오라버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손유하가 인사말을 건네며 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다짜고짜 나를 살포시 껴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해그리드가 촬영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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