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4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48화 >
할아버지의 집무실에 앉아 있으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절로 떠오른다.
위엄이 넘치는 리더의 모습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군주의 눈에 한 번이라도 들고자 하는 신하들 말이다. 정직한 이들도 있는 반면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한 아첨꾼은 물론 말도 안 되는 실적을 부풀려 보고하는 이까지 군상이 다양했다. 예나 지금이나 회사는 정글이었
으니.
하지만 할아버지가 누군가.
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까지 겪으신 분이다. 리더는 무릇 여우의 간사함과 곰의 우둔함을 함께 가져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스킬이 장난이 아니니. 나이가 지긋한 임원들이 모두 등허리가 흠뻑 젖은 채로 집무실을 나서지 않는가. 전직 검
사로서 판단하기에, 검사 생활을 하셨어도 잘 어울리셨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현아, 심심하지 않으냐? 학교에 빨리 가고 싶지? 바이올린을 잘 배울 수 있는 예술학교를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려무나.”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 학교보다 회사 나오는 게 더 좋아요.”
거짓은 아니었다. 이미 동주의 구석구석까지 알 정도니까. 애사심이 느껴진다면 믿겠는가. 직원들은 일전 내 얼굴이 신문 일 면에 보도된 것을 보고 사인까지 받아갔었다. 물론, 그 이후에 별다른 이벤트는 없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사람들의 관심에는 응당 대가가 따르
는 법이니.
그때였다.
똑똑.
아버지가 보고서를 들고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사적인 자리에서야 사위와 장인이었지 회사에서는 해당되지 않았다. 다이렉트로 보고서를 올릴 짬밥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타이트하게 단련시키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1대1 맞춤 교육이라면 이
해가 쉽겠다.
“보고서가 말을 하는 것 같구만, 이런 건 어디서 배웠나?”
아버지가 힐끔 나를 바라봤다.
아아, 저는 틀만 마련했을 뿐 내용은 건들지 않았으니 당당히 자신이 했다고 하셔도 됩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무렴, 보고서 작성의 정수가 집대성된 기틀인 데다 내용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과거에 도대체 어디서 공부를 하셨던 것일까.
아버지가 나가고 나자.
“현이 네가 얘기 한 거냐?”
설마 할아버지가 관심법이라도 배운 것일까! 하지만 정말 내용은 건들지 않았는데.
“유하 말이다, 벌써부터 내조를 하더구나.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가지려는 집념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 따로 없을 게야.”
유하?
내가 더 설명을 바란다는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할아버지는 말없이 미소만 지으셨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엄습했다. 것도 그럴 것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얼음꼬맹이였기에.
*
“오빠아―!”
그래, 이제는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손유하가 정원 너머에서부터 내게로 달려왔다. 김비서는 언제나처럼 땀을 흘리며 뒤따른다. 그나저나 매미처럼 내 옆에 철썩 달라붙는데 어째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것만 같네. 그러고 보니.
‘얘 인기 많았었지?’
괜히 얼음 여왕이라고 불렸겠는가, 훗날 재벌가에서 미모로는 견줄 자가 없었으니. 들리던 소문으론 여러 재벌가에서 교제를 원했으나 손유하가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웬만한 남자들은 손유하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일 깜냥도 되지 않았다.
“오빠, 오빠. 내가 홀인원 할 수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공이 조금 빗겨나갔어!”
그런데 내 앞에서는 왜 이럴까, 도통 신기한 노릇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와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데 어찌나 흥분한 것인지 볼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볼살이 통통한 토끼같이 귀엽다.
“어이구, 그랬어?”
“응. 오빠한테 바이올린 줄 수 있었는데, 힝.” 뭐?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져 진 것 같은 느낌.
그 순간.
“현이, 왔느냐.”
왕구렁이 영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응접실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왕회장은 여유롭게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유하는 아직도 볼에 바람이 가득 들었다. 마치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같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가.
“유하가, 현이한테 바이올린을 선물해주고 싶은가 보더구나. 솔직히 할애비 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기는 한데…”
그럼, 주십쇼!
하지만 한두 푼 하는 물건이 아닌데다, 상대는 왕회장이었으니 무작정 받았다간 후에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현아, 할아버지끼리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는 알지?”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바이올린을 그냥 공짜로 줄 수는 없고 일단은 빌려주마, 완벽히 네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조건이 있단다.”
조건?
일순 왕회장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날 바라봤다.
“지금 동주의 회사 가치가 화학 회사 중에는 약 10위권이란다.”
시가총액을 말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 힘든 말인데도 왕회장은 스스럼없었다. 마치 넌 알고 있지? 라는 눈빛으로.
“만약 동주가 7위권 안으로 진입한다면, 그때 내 바이올린을 온전히 현이 네게 넘겨주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나 마찬가지. 동주 또한 화학산업의 선두에 있다 평가 할 수 있지만, 최상위권은 달랐다. 대한민국 대기업들의 계열사이지 않은가. 당장만 해도 제일그룹 산하의 케미컬계열사가 무서운 속도로 치솟고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정말이죠, 할아버지?”
딴말하기 없습니다.
왕회장이 내 표정을 보고는 놀람을 속으로 삼켰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느냐? 현아.”
아무렴, 이해만 했겠습니까.
동주를 키우고자 마음먹지 않았는가. 이미 계산까지 끝냈습니다.
“당연하죠.”
사실 시간문제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수많은 회사가 도산하기 시작하니. 신소재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동주도 그 돌풍에 휩쓸렸으리라.
* * *
“대박인데?”
강성욱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방송의 묘미는 편집과 부각이란 말이 있다. AD에서 CP에 이르기까지 일원화된 개성이 그 방송의 묘미를 살린다. 그래서 간혹 요리사에 비유해 말하기도 했다. 같은 촬영분이라고 할지라도 누구의 손에 맡기냐에 따라 맛과 색깔
이 달라지는 법이었으니.
여태까지 퀸엘리자베스 다큐멘터리는 날 것 그대로였다. 조리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예민한 음악가들이 겪는 고충을 그들의 감정변화에 따라 숨김없이 보여주었으니. 하지만 이번 기수만큼은 달랐다. 최연소 대상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소식으로 음악계를 들썩
이게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그 뚜껑을 열어보자 더욱 놀라웠으니.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인물 하나하나가 캐릭터가 넘쳐 흐르는 것이 다큐멘터리임에도 시종일관 시선을 놓을 수 없다. 화룡점정은 단연코 최연소 대상의 영예를 거머쥔 강현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물론 원어민 같은 유창함과 특유의 어
휘에서 마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기실에서 긴장하며 떨고 있는 안나를 향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는 뭔지 모를 휴머니즘마저 느껴진다. 연주실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물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외모 또한 지금 당장 하이틴 드라마에 섭외되어도 이
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성욱아, 시청률 얼마쯤 나올 거 같냐?” 수화기 너머에서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상을 확인하고 싶을 테지만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지 않는 한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이번에도 죽 쑤면 웬만한 시말서 정도로는 안 끝나. 웬만한 다큐멘터리 서너 개 사 오는 것보다 그거 하나 가격이 더 세잖냐. 위쪽에서도 말이 많았어, 이번에.”
“국장님 우리가 라이벌로 생각하는 프로그램이 뭐죠?”
“동물 왕국이지, 설마 아프리카에서 뛰어노는 짐승들한테도 밀릴 정도냐?”
국장의 불안한 목소리와는 상반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국장님 아무래도 동물 왕국하고 비교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뭐? 야, 설마 지금 와서 죽 쑨다는 이야긴 아니겠지!”
걱정도 팔자시다.
두근 두근 두근.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다큐멘터리가 끝나자 진한 여운이 밀려왔다. 아직도 그 아이의 목소리와 선율이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포만감은 말해서 무엇하랴, 유명한 미슐랭 레스토랑을 다녀온 기분 못지않았다.
“국장님, 주말 저녁 드라마가 몇 프로 나오죠?”
아무래도 경쟁 프로그램을 바꿔야 할 것 같다.
*
키야―!
왜 아줌마들이 드라마에 열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눈물 어린 신파는 물론 혼을 쏙 빼놓는 웃음까지 사람을 완전히 들었다 놨다 하지 않는가. 간혹 예고편 없이 끝날 때면 절로 혀를 차게 될 정도였다.
“아들이 이렇게 드라마 좋아하는지 몰랐어.”
저도 몰랐습니다, 어머니.
지난 삶 TV조차 맘 놓고 볼 시간이 없었지, 헌데 왕년의 스타들이 나오는 추억의 명작이 이토록 내 시간을 빼앗아갈 줄이야!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시 정립해야 할 판이다.
저녁 식사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조용하던 저택에 사람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물론 활기가 감도니 가정부 아주머니의 손맛이 더 좋아진 건 기분 탓일까.
“강서방, 곧 있으면 중국에서 기업인 한 명이 올 게야.”
“예, 장인어른.”
“사업차 바이어는 아니고 겸사겸사해서 들어오는 것인데, 그 친구가 원래 우리 쪽과 연이 깊어. 원래는 범경이가 전담했었는데 이제 손이 없어졌으니 자네가 맡게나.”
할아버지 또한 왕회장과 함께 있으며 무언가 느끼신 게 분명했다. 머지않아 중국이 굳게 걸어 잠근 외국계 자본유치를 풀 것이다. 어찌보면 반도체는 물론, 화학산업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캐시카우가 되는 기술력도 중요했지만, 관세와 유통 경쟁도 빠질 수가 없
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금싸라기인 땅이 따로 없었다.
“강서방, 중국인들은 말이야,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모든 사람을 차등해서 대한다네. 누구에게는 물건을 200위안에 파는 반면 또 다른 이에게는 150위안에 팔지. 오죽하면 공자가 하늘에는 열 개의 태양이 있고, 사람에게는 열 개의 등급이 있다 했겠는가.”
아무렴, 괜히 중국을 일컬어 꽌시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삶에서도 종종 보지 않았던가 중국의 재벌들이 저들끼리 손수 대학교를 만들어 인맥을 교류하는 현장을. 아버지는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이셨다. 하긴 직접 맞닥뜨려본 적이 없으시니 그럴
만도 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장인어른.”
아버지의 대답에 할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아버지가 회사생활에 적응을 잘하시는 것 같아 흡족하신 듯했다.
“원래는 중국어 통역으로 비서실에서 한 명을 내줬는데.”
어머니가 만드신 게장을 드시던 할아버지가 일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현이를 데려가게나. 그쪽도 영어를 꽤 잘하니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게야.”
“장인어른?”
“사업차 방문하는 것도 아니니 친목을 다진다는 점에서 더 좋을 테지. 더군다나 그쪽 자제도 함께 온다고 했으니 오히려 위화감도 적게 느껴질 테고, 현이가 웬만한 통역전공인 직원보다도 낫지 않나.”
할아버지의 눈가에는 흥미로운 기색이 가득했다.
“현아, 잘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할아버지 맡겨만 주십쇼!
“강서방 어때, 그 사람을 자네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어?”
헌데 왜일까, 할아버지의 물음이 마치 날 향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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