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06화 >
동주(垌州)
대한민국 화학산업의 선두에 있는 기업.
충북 만석꾼의 외동으로 태어난 유동율이 일제강점기 시절 서울로 올라와 세운 정미소가 그 모태가 되었다. 한국전쟁이후 일본이 버리고 간 공장을 인수해 비누공장을 차린 것이 작금 동주화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유동율은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사업일선에 여자는 자식이라고 해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가족모임에서도 며느리들은 항상 가정부들과 함께 음식을 장만해야만했다. 유교적사상이 진하게 배인 것은 어른들과 아이들의 식탁을 나눈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강현이 앉아있는 식탁에는 사촌들이 전부였는데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전 강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방증으로 유진석은 강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르신, 막내 따님이 하신 게장이에요. 한번 드셔보세요.”
오랫동안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해온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내가 들고 왔던 게장을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릇에 담아내오셨는데 삼촌들과 이모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할아버지는 게장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다 집어 드셨다.
“간이 잘 배였군.”
짧은 말 한마디였다.
그럼에도 삼촌들과 이모의 낯빛에는 불편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내느라 애썼다. 인간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길까봐 오매불망 초조해하지 않는가.
‘쯧.’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저들의 재산조차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쫄딱 망하게 되는 천치들.
할아버지께서 수십 년 동안 일궈냈던 동주화학은 불과 십 년 안에 사분오열되어 외국계자본에 흡수당한다. 그 후로 삼촌들의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큰삼촌의 마지막 소식이 강원도 정선이었더랬지?
“아버지, 아무래도 이제 손자들 재롱도 보시면서 집에서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큰삼촌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경영권을 손에 쥐고 놓지 않았던 할아버지였다. 일순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큰삼촌과 작은삼촌을 번갈아 바라봤다. 호랑이를 닮은 안광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내려깔렸다.
“범진아, 범경아.”
할아버지는 큰삼촌과 작은삼촌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불혹을 넘어선 삼촌들이 마치 기합을 받는 학생마냥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덩달아 이모와 이모부까지도 긴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동화세제 제조과정을 읊어봐라.”
동주화학에서 발매한 세탁세제였다. 큰삼촌과 작은삼촌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동화세제는 가루세제가 아닌 액상세제. 대부분이 세탁비누에서 가루세제를 사용하던 시기다. 액상세제는 세정력이 약하고 가격이 높아 다소 사용되질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앞으로 액상세제가 가루세제를 뛰어넘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전무라는 놈들이 자기네 회사에서 뭘 만드는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나보고 자리를 비켜 달라?”
“아버지, 그게 아니고······.”
“그만!”
불호령에 이모가 되레 놀라 딸꾹질을 했다.
할아버지는 큰삼촌과 작은삼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제대로 일처리를 못하면 동주화학은 전문경영인의 손에 맡길 것이다. 내 평생을 일궈온 회사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네놈들은 항상 월급쟁이라는 생각으로 회사를 다녀야 할 것이야.”
큰삼촌과 작은삼촌의 얼굴이 삽시간 만에 시뻘게졌다. 분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표정을 숨기려 애쓰는 모습이다. 나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토록 강경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그런데도 훗날 회사를 망하게 한단 말이야?’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딱 맞았다. 할아버지가 이토록 자존심을 무너뜨려가며 불호령을 했음에도 큰삼촌과 작은삼촌은 훗날 동주화학을 망하게 하는 장본인들이었다. 이모는 옆에서 부채질 하는 격이었고.
동주화학.
이제는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해져버린 상호를 들으며 나는 쓴 웃음을 삼켰다.
* * *
스피오 스피오 맴맴─!
부촌富村에도 매미울음소리가 선명히 울려 퍼진다. 창가로 스며든 햇살이 따스하게 아침을 밝혔다.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처음 누워본 침대였다. 예전 어머니가 사용했던 방이라고 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 먼지한 톨 없는 것이 언제라도 어머니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투영되어 비쳐지고 있었다.
“현아, 앞으로 뭘 하고 싶으냐.”
아침식사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북적거렸던 어젯밤과는 달리 식탁에는 할아버지와 나. 단 둘뿐이었다. 할아버지의 질문에 난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대학교 법학과를 재입학 하는 것은 물론, 사법고시 동차합격도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지. 법조인으로서 수십 년을 살아왔던 지난 삶이 있다. 비록 정의를 수호하는 공명정대한 법조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뜻밖의 대답에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
“효자구나, 돈을 많이 벌겠다는 말이냐?”
돈이라······.
알고 있는 지식만 활용하더라도 부자가 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돈에 연연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물욕과 권력에 집착해 질주하던 지난 삶. 허영을 벗겨내 보니 남는 것은 없었다. 더욱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요. 돈이 많다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더라고요.”
강현의 단호한 목소리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년전 봤던 손자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달라졌기 때문. 학급에서 전교일등을 했다기에 철이 들었다고는 생각했지만, 말투와 행동. 눈빛까지 달라져 있었다.
때마침 가정부 아주머니가 조간신문을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는 아침식사가 끝나갈 즈음 조간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경향이 있었다.
“강현 학생, 오렌지 주스로 줄까?”
나이를 생각해서인지 오렌지 주스를 묻는 아주머니였다. 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간신문 일면에는 제일전자 손일선 사장의 모습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손일선 사장의 옆에는 고진우 국무총리가 함께였다. 훗날 제일공화국이라고까지 불리는 기업이다. 수십 년 전 과거라고해도 위세는 엄청났다.
“정말 우리나라가 OECD가입을 하겠군.”
할아버지가 신문을 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OECD가입을 하기는 하지. 경제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서 좋은 순간은 단 몇 달이었다. 우리나라는 외환투기세력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훗날을 알고 있기에 할아버지의 감탄사가 그리 좋게는 들리지 않았다.
“현아, 오늘 점심은 할애비 친구와 같이 하자꾸나. 친구 녀석도 손녀를 보여준다고 성화니 말이야.”
“예, 할아버지.”
과거에는 할아버지와 이토록 단둘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집을 방문해서 잠을 청한 것도 이번 삶이 처음. 지난 삶속에서는 우리 가정을 도와주지 않는 할아버지와 무시하는 친척들을 극도로 경멸하다시피 했으니.
“어머니가 의외로 소녀감성이 있으셨네.”
핑크 톤의 벽지다. 침대보는 하늘하늘 거리는 레이스가 달려있었다. 이십대 중반 무렵까지 부잣집에서 생활해왔던 어머니였다. 지금은 어떻게 그토록 남의 옷을 세탁해주고 살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그만큼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뜻이겠지.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강현 학생, 간식 들어요.”
가정부 아주머니가 쟁반에 흰 우유와 비스킷을 담아내오셨다.
“아주머니, 혹시 할아버지 친구 분이 누구신지 아세요?”
나는 비스킷을 집으며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흐음, 나는 잘 모르겠네요.”
아주머니 또한 할아버지가 말한 친구 분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모습이다.
터벅.
나는 아주머니가 나간 다음에도 한참이나 어머니 방을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예전에 쓰셨던 물건들하며 옷가지가 그대로 정리정돈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괜스레 가슴이 미어졌다.
“어?”
책상 밑에 눈을 잡아끄는 물건이 있었다. 정확히는 케이스.
손을 뻗어 케이스를 꺼내보니.
“바이올린 케이스잖아?”
오래된 바이올린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는 게 항상 누군가가 닦아놓았던 것 같았다.
“어머니가 바이올린을 켰었구나.”
그래서 어머니께서 내가 바이올린 배운 것을 그토록 좋아헀던 것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활과 바이올린, 그리고 습도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두근두근두근.
바이올린을 보자 심장이 뛰었다.
마치 베토벤 교향곡을 들었을 때처럼.
한참동안이나 바이올린을 내려다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강현 학생, 어르신께서 찾으세요.”
문 너머에서 들려온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상념이 달아났다. 나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닫아놓고는 다시 원래자리에 내려놓았다.
90년대에 흔히 볼 수 없었던 고급세단을 타고 한참이나 달려갔다. 복장 또한 가정부 아주머니가 새로이 내주신 걸로 갈아입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정장을 갖춰 입은 듯 격식 있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기사. 내가 친구한테 우리 손자가 학급에서 전교일등을 했다고 자랑을 했거든. 그러니 그 영감탱이가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나?”
운전석에 앉아있던 기사아저씨가 미소를 띠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 글쎄, 자기 손녀도 전교일등을 했다며 자랑을 하지 뭐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내 손자가 더 뛰어나네, 자기 손녀가 더 뛰어나네 싸움이 붙었지. 오늘 맞대결 하러 가는 날이라고. 허허.”
아니?
오늘 모임이 그런 자리였어?
할아버지는 팔불출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봤다. 나도 엉겁결에 미소를 띠며 할아버지를 마주봤다. 이런 할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목적지를 말하지도 않았건만 능숙하게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두 번 갔던 곳이 아닌 모양. 헌데 왜일까.
‘뭔가 모르게 익숙한데.’
수십 년 전의 서울 도로다. 분명 많은 것이 다르지만 익숙한 도로를 나아가고 있었다.
설마?
아닐 거다. 머릿속에 가설이 하나 떠올랐지만 난 이내 고개를 저어냈다.
하지만 자동차가 점점 고급 양옥이 많은 거리로 들어서자 내 의심은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차창 밖으로 거대한 양옥집이 보였다. 높다란 붉은 담벼락이 그 안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부지크기만 보아도 주변의 고급 저택들조차 비교도 안 될 수준이다.
“다 왔습니다. 회장님.”
난 지난 삶에서 이곳을 와본 적이 있었다.
훗날에는 사용되질 않는 저택이지만, 분명 이 시대라면 그분이 살고 있을 것이다.
꿀꺽.
설마.
할아버지의 친구가.
‘제일그룹의 왕회장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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