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07화 >
손장원.
제일그룹을 일으켜 세운 초대회장.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북출신이라는 것이다. 본래 함경북도에서 크게 도매업을 벌였던 손장원은 한국전쟁이 터질 즈음 월남했다. 손장원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같았던 서울에 제일그룹의 모태인 제일상회를 세웠다. 그는 폐허 같았던 서울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기회다, 인생을 역전 시킬 수 있는 기회!
지난 삶 읽었던 왕회장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 내가 제일그룹의 장학생이 될 때만해도 왕회장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전설로만 전해 듣던 왕회장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훗날 제일그룹에서 신성시 여겨지는 평창동 대저택에 들어서니 감회가 남달랐다.
운동장을 방불케 할 만큼 널찍한 정원이다. 신선이 가꿀법한 노송들이 풍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밀짚모자를 쓴 늙은 정원사가 허리를 굽혀 잡초를 뽑아내고 연못의 황금잉어들이 유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저기 있구만.”
할아버지가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어이, 손가!”
손가?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늙은 정원사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헉.’
나는 절로 숨이 집어삼켜졌다. 평범한 정원사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밀짚모자아래 자서전에서 보았던 얼굴이 드러났다. 왕회장은 자서전에서 봤던 사진보다 훨씬 정정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일흔이 넘었을 터인데.
“어허, 영감탱이가 집주인 허락도 안 받고 들어와?”
왕회장은 미소를 띠며 할아버지를 반겼다. 기업비사에서 느낀 왕회장의 성품은 한마디로 불같은 호랑이였다. 손일선 사장조차도 자신의 아버지를 독대하는 것이 두려웠다고 자서전에서 밝혔을 지경이었으니. 허나 왕회장은 마치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막역지우莫逆之友.
“네가 유회장이 그렇게 자랑하던 손자로구나.”
“예, 강현이라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자세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머니, 여기 커피 두 잔하고 오렌지 주스 한 잔 내오세요.”
“예, 회장님.”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즐비한 서재였다. 할아버지 집과 마찬가지로 사치스럽기 보단 절제의 미가 느껴졌다. 성향이 비슷하시다보니 친구가 된 것일 테지.
‘미래와 똑같구나.’
지난 삶에서 봤던 가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훗날 평창동 대저택은 제일상회의 터와 마찬가지로 제일그룹에서 신성시 여겨지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손일선이 얼마나 자신의 아버지를 우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일례로 손일선은 사업이 잘 안 풀릴 때면 평창동으로 와서 잠을 청했을 정도이니.
“그래, 학급에서 전교일등을 했다고?”
“예, 어르신.”
어르신이라는 말에 손장원이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허,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제일그룹의 왕회장을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될 줄이야. 인생사 참 모를 일이다.
“예, 할아버지.”
“현아,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라. 자기 손자도 아니면서 말이야.”
“영감탱이가 고약하구만. 그럼 우리 손녀도 자네더러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할까?”
그 뒤로도 할아버지와 왕회장은 티격태격하며 말다툼을 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로가 막역한 사이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유회장, 사업을 늘려볼 생각이 없는가. 이제 계열사 좀 만들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화학 산업에만 목매고 있을 거야.”
왕회장이 커피 잔을 들어 입을 축이곤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두 분의 대화를 들었다. 이런 자리는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백화점 사업도 좋고 말이야, 아니면 항공 산업도 나쁘지 않을 테지. 앞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 말이야. 유회장, 자네의 경영능력을 동주화학에서만 썩히기는 아깝지 않는가.”
왕회장의 선견지명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손회장, 우리는 이미 늙었어. 내가 죽고 난 다음이면 장남과 차남이 기업을 이어받을 텐데 그 아이들이 그만한 그릇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분에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일세.”
할아버지의 확고한 말씀에 왕회장 또한 더 이상 부연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할아버지!”
서재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왕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회장이 손수 문을 열어 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소개하지, 내 손녀 손유하일세.”
“안녕하세요. 손유하라고 합니다.”
손유하는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허어. 나는 익숙한 얼굴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제일그룹은 과거부터 사업일선에 여자들도 뛰어들었다. 성별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왕회장의 손녀이자, 손일선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인 손유하는 훗날 제일물산을 도맡는다.
‘얼음여왕’
사내에서 손유하를 가리켜 부르는 별명이었다. 웬만한 남자들조차도 기겁을 할 정도로 깡다구가 대단했으며, 사업을 추진하는 능력은 자신의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 몇몇 고령의 임원들은 손유하를 가리켜 손일선이 아닌 그녀의 할아버지 왕회장과 똑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녀가.
“안녕, 난 손유하야.”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 * *
“너 시골에서 올라왔다며?”
시골?
저택을 구경시켜주던 손유하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이다.
“나도 시골 놀러 가보고 싶다.”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순수하기 때문에 꺼낸 말일 테지.
지난 삶, 제일그룹 법무팀에 머물면서 손유하를 마주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봐온 그녀는 얼음여왕이라는 별명처럼 차가웠고, 까다로웠다. 작금의 모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골에서는 공부 조금만 해도 전교 일등 한다는데 정말이야?”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냈다.
“나는 지금 고등학교 일학년 선행학습하고 있거든, 너는 어디까지 했어?”
마치 자랑을 하듯이 말하는 모습이다. 훗날 얼음여왕이라 불리며 제일물산을 손아귀에 넣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저 앳된 11살 소녀일 뿐이다. 입시공부는 이미 정점을 찍은 전력이 있는 나였다. 손유하의 행동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
“너보다는 많이 했을 걸.”
“뭐?”
손유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못 믿겠다는 눈치.
“따라와 봐.”
손유하를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정말 넓은 저택이다. 아직 체구가 작기 때문일까, 지난 삶에서 느꼈던 크기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가다 손유하가 어느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른 방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많은 방이다. 레이스가 달린 침대 또한 소녀취향이 물씬 풍겼다.
“이거 풀어봐!”
손유하는 책장에서 문제지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척보아도 중학교 수준의 문제들을 넘어섰다. 하긴 머지않아 제왕학도 배울 손유하다. 이정도 선행학습쯤이야.
“줘봐.”
문제지가 깨끗했다.
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손은 계속해서 정답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정답을 미리 알고 있었기라도 하듯 모든 것을 암산으로 풀어냈다. 기껏 해봐야 고등학교 일학년 수준의 문제들. 하지만 손유하의 눈동자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다 풀었어.”
“거짓말!”
이십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문제지를 도로 건넸다. 손유하는 못 믿겠다는 눈치. 그런데 이 애는 언제까지 나한테 반말을 하는 거야? 나는 버릇을 고쳐주려다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늘 지나고 나면 다시 만날 일 없는 인연이니.
“진, 진짜 다 맞았어.”
정답지를 꺼내 문제지를 체크한 손유하가 입을 벌렸다. 이렇게 보니 귀엽네.
그 순간 내 시선을 잡아끄는 물건이 있었다.
“유하야, 너 바이올린도 켜니?”
요즘 따라 바이올린 케이스가 눈에 자주 밟혔다. 재벌이다 보니 사교적인 취미가 항상 뒤따르는데.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는 재벌가 여식에게 필수항목이라 볼 수 있었지.
“응, 나 바이올린 잘 켜!”
손유하는 얼른 바이올린으로 화제를 돌렸다. 여느 아이들이 그러듯, 자신이 잘하는 것이 나오면 자랑하고 싶기 마련이었으니. 공부로는 이미 강현을 이길 수 없다고 그 짧은 시간동안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강현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손유하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바이올린의 종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얼핏 보아도 꽤나 값 비싸 보이는 케이스였다. 손유하는 작은 손으로 케이스를 열어보였다. 손유하의 체구에 맞춰진 소형 바이올린 이었다. 현과 활의 상태를 보아하니 관리를 잘해온 것이 티가 났다.
“잘 봐.”
손유하는 능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턱과 어깨사이에 바이올린을 올리고는 체형에 맞춘 어깨받침대까지 끼워 넣었다. 왼손의 위치와 활을 잡는 모습까지 정석, 그 자체였다. 단순히 자세를 잡는 것만으로도 손유하가 얼마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잉.
바이올린의 선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곡은?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건가?
손유하의 시선이 바이올린 끝을 향하고 있었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감는 일은 없었다.
“비발디 사계 겨울 3악장.”
음악 선생이었던 강혜정이 연주했던 곡과 같은 곡이었다. 나이로 보면 스즈키 교본을 보며 연주하고 있어야할 손유하였다. 사계는 분명 난이도가 있는 곡임이 분명했지만 손유하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미 반복된 학습 속에서 악보가 머릿속에 아로새겨졌으리라. 하지만 노력을 제외하고도.
‘재능이 있네.’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었다.
특히, 박자감이 상당히 뛰어났는데 짧은 손가락 때문에 느려지는 선율을 보완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어때?”
손유하가 곧장 강현을 바라보고는 물었다.
“잘했어.”
강현은 미소를 지으며 칭찬을 해주었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이정도 연주를 하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유하야, 혹시 바이올린 선생님이 이 곡을 연습하라고 시켰니?”
“아니! 내가 하고 싶어서 졸랐는데?”
역시.
어울리지 않은 곡이다. 아직 손유하가 연주하기에는 연륜이며, 기교가 턱없이 부족하다. 아직까지는 몸에 맞지 않는 곡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어린 아이가 부모의 옷을 훔쳐 입은 것 같은 느낌. 욕심이 많은 아이를 가리키는 바이올린 선생이 여간 곤란해 할 것이 눈에 선했다.
“음, 이 곡 말고 다른 곡을 연습해 보는 건 어떨까?”
“왜? 나 연주 안 틀리고 잘했는데?”
뭐라 설명해야할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자주 입다보면 좋지 않은 버릇이 생기기 마련이다. 유하에게 그 차이를 설명해주려면 완벽한 사계의 연주를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헌데,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오빠도 바이올린 켤 줄 알아?”
“어?”
바이올린을 켤줄 아냐는 물음보다, 앞서 들려온 오빠라는 단어에 놀랐다.
살다 살다 제일그룹 왕회장을 할아버지라 부르고, 제일물산 손유하 사장에게 오빠라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
“한 번 보여줘!”
손유하는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넣고는 내게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엉겁결에 바이올린을 건네받기는 했지만, 바이올린을 배운 것은 아주 오래전 불과 한두달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재능이 없어서 포기했었더랬지.
그런데 왜일까.
바이올린과 활을 손에 쥐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작은 바이올린이 마치 나를 연주하라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과연 바이올린을 켤 수 있을까.
나는 심장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어?”
손유하의 눈이 토끼눈이 되었다. 바이올린을 받아든 강현이 곧장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헌데 그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켰던 사람처럼 순식간에 악기와 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활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손유하는 저도 모르게 숨죽였다.
활과 현이 맞닿는 그 순간.
지잉.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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