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1)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61화 >
“피콜리 씨, 이번 곡 랑데부는 어떨까요?”
생떼밀리옹의 짙은 아로마향이 입안을 감돌았다.
“수많은 팬분들이 피콜리 씨의 새로운 음반을 기다렸습니다. 팬들을 위해 한 말씀만 해주시죠?”
애가 타는 듯한 기자의 목소리였다. 것도 그럴 것이 미셸 피콜리와의 인터뷰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허락됐기 때문. 작금 프랑스 전역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싱어송 라이터가 아닌가, 항간에는 록스타 자니 할리데이에 이어 새로운 별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피콜리의 음반은 찍어내는 데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죄송하지만 이번 곡은 팬들을 위한 곡이 아닙니다.”
“예?”
“팬들을 위해 만들었다면 좀 더 활기차고 화려한 멜로디를 사용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 곡은 전혀 그렇지 않죠. 한마디로 헌정입니다.”
“그럼 ‘랑데부’는 누구를 위해 바치는 곡이란 말입니까?”
아직 새로운 음반의 제목만 발표되었을 뿐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미셸 피콜리의 랑데부가 장피에르의 영화에 테마곡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사실까지도. 미셸 피콜리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통 받고, 핍박받았던 이들을 위한 곡입니다. 아직도 그들의 흔적을 세계 곳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죠. 독일의 다하우,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그리고 프랑스의 나츠바일러. 랑데부는 그들이 울부짖었던 자유의 약속이자 선율입니다.”
기자는 뜻밖의 이야기에 수첩을 재빨리 꺼냈다.
“참, 그리고 이번 랑데부는 제가 부르지 않습니다.”
일순 기자의 만년필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 여태껏 싱어송 라이터 미셀 피콜리에게 러브콜을 보냈던 가수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는 가수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지만 작곡가로서의 재능 또한 뛰어났기에. 하지만 미셸 피콜리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곡을 주지 않았다. 수첩에 잉크자국이 선명히 남을 즈음 기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누가…?”
기자의 눈이 행운의 주인공을 찾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강현이라고 합니다.”
꿈에 그리던 미셸 피콜리이지 않은가. 가슴이 사정없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지난 삶 클래식도 좋아했지만 팝송 또한 즐겨 들었기 때문. 특히 미셸 피콜리의 명반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소장했을 정도였으니.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랑데부였다. 그녀의 친필사인이 담긴
랑데부의 초판을 구하기 위해 거금을 들이기도 했었지. 고리타분했던 삶 중 유일한 취미생활이었으니.
“반가워요, 미셸이라고 부르면 된답니다.”
미셸이 프랑스식 인사법인 비쥬를 해왔다. 한국어로 풀이하자면 간단한 볼뽀뽀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했지만 미셸과 인사를 나눈 어머니는 당황한 게 눈에 보였다. 장피에르가 말했던 사람이 바로 미셸 피콜리! 설마하니 미셸 피콜리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
은 꿈에도 몰랐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드문드문 느껴졌다. 아무래도 미셸은 지금 프랑스에서 가장 핫한 가수였기에.
“미셸, 궁금한 점이 있는데 여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현.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몰라요.”
“왜 저를 선택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듣기로는 곡을 쉽게 주시지 않는다고 들어서요.”
지난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싱어송 라이터의 정점을 찍은 미셸 피콜리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곡을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다.
“현, 그건 오해에요.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만든 곡의 의미를 잘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 뿐이죠. 랑데부도 그러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아니면 소화하지 못할 곡이라 생각하며 음반을 준비했죠. 헌데, 현의 연주영상을 보게됬고 혹시 편집의 힘은 아닐까
궁금해서 결국 한국까지 다녀왔죠.”
뭐?
“파가니니의 퍼포먼스를 눈앞에서 실제로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답니다.”
미셸이 예술의 전당에 왔었을 줄이야.
“그날 랑데부는 제가 아니라 현의 손에서 연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머니와 장피에르는 나와 미셸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계셨다. 물론,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실 테지만 흘러가는 분위기상 어떠한 이야기인지 눈치 채신 듯 했다. 일순 미셸이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는 레스토랑을 훑었다. “현, 이 레스토랑은 과거 살롱으로 이용되던 곳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음악 살롱이었죠. 밤마다 음악가들의 악기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찬사와 웃음이 영원하던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저 그랜드 피아노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번에는 제가 부탁
을 해도 될까요?”
무엇을.
“방금 전 제가 연주했던 곡을 바이올린으로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이곳에는 피아노 말고도 바이올린도 구비가 되어있답니다. 음악 살롱답게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장피에르조차 당황한 게 눈에 보였을 정도였으니. 물론, 바이올린을 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황한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전 미셸이 연주했던 피아노곡은 미발표 자작곡이었기 때문. 단 한 번 들었던 피아노곡을 그 자리에서 바이올린으
로 편곡해서 연주할 수 있을까.
‘어째 일이 묘하게 돌아가네.’
나는 속말을 삼켜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의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는데 척 봐도 꽤나 공들여 만든 바이올린이었다. 관리 또한 잘되어온 것이 현과 활의 상태가 아주 좋았다. 레스토랑의 사람들은 다시 이야기를 멈춘 채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과거 음악 살롱이었다는 것이 사실인지 손님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아주 익숙한 듯 하다. 간단히 조율을 끝마치고.
내가 거리낌 없이 활을 들어올리자 미셸의 눈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가 주춤거릴 줄 알았던 모양.
지잉!
활이 현을 베어버릴 듯 강하게 가로질렀다. 천장에 닿은 날카로움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화음이 몰아치는 곡이었다. 왼손의 기교는 아크로바틱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따라잡기 힘들 정도. 레스토랑안의 사람들은 이미 어린 소년의 연주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악기에서 여러 음색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 같지 않은가, 단음악기로 4성부의 음을 모두 내는 것이 슈베르트의 마왕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훗날 미셸 피콜리가 이 곡을 슈베르트의 마왕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니 연관이 아주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
때였다. 호흡을 가다듬던 활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잉―!
미셸이 연주했던 피아노곡의 모든 음표가 머릿속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오선위의 음표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편곡되어 현위를 질주했다. 손가락이 따로 놀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4번이 한음을 잡고 1번이 G현에서 트릴을 하기 까지에 이르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미셸이 조금 전 연주했던 자작곡 ‘단죄’는 지난 삶 내가 질리도록 즐겨들었던 명곡이었기 때문. 수많은 음악가들이 리메이크를 하고 바이올리니스트 거장들도 편곡을 마다하지 않았었다. 발달된 소프트웨어 덕분일까, 한순간 지나친 악보
가 머릿속에 선명하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찢어질 듯 아리지만 연주를 멈추고 싶지 않다.
* * *
아침 일찍 호텔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와인을 마신 것도 아닌데 몸이 찌뿌둥한 것이 아무래도 연주를 너무 열정적으로 한 모양. 그에 반해 부지런하신 어머니는 이미 이불을 개고 계셨다. 프랑스 아동 노동보호법에 따라 일을 할 때면 항상 어머니와 다녀야했는데 뭔가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와 난 촬영팀이 준비해준 차량을 타고 교외로 이동했다.
촬영 장소는 실제 나치 수용소였던 나츠바일러를 재조명해 더욱 뜻 깊었는데 장대비라는 지독한 악명이 있는 곳이었다. 도망치는 유대인들을 향해 어찌나 총을 쏴댔던지 그 소리가 마치 장대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지. 벽면에는 총알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어머
니가 내가 놀랄까봐 손을 꼬옥 잡아주셨다. 그때였다.
“현, 인사해요. 여기는 주인공 모세 역을 맡은 아이작 볼튼. 참고로 현과 아이작은 동갑이에요.”
장피에르가 모세 역을 맡은 아역배우와 나를 인사시켰다. 키는 나보다 조금 컸지만 얼굴은 꽤 앳되다. 머리색이 짙은데 반해 눈동자가 푸른색이라 눈에 띠는 소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연기를 해와 훗날에는 오스카상도 거머쥐는 배우로 거듭나니까. 라
비안로제의 출연진과 감독은 훗날 드림팀으로 평가받지 않던가.
“안녕, 난 아이작 볼튼이라고 해.”
“반가워, 난 현이야.”
아이작은 상당히 낯을 가렸는데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헌데 촬영카메라에 불이 들어가는 순간 눈빛이 바로 돌변하는 것이 역시 천상 배우는 배우였다. 일순 촬영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던 장피에르가 나를 바라봤다.
“현, 모세가 왜 수용소를 떠나지 못한지 알아요?”
알다마다, 이 명작을 내가 몇 번이나 돌려 봤는데.
“모세는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니까요. 자신의 세계라고는 수용소가 전부였죠. 만나는 사람들 또한 한정적이었고요. 수용소에서 모든 수감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모세는 수감자들을 위해 연주했어요. 그의 선율이 자유를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죠. 자유를
갈망하는 선율 또한 모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들어왔던 절규니까요. 하지만 결국 모세가 수용소를 떠나지 못한 건 어머니의 뱃속 같았던 이곳을 사랑했기 때문일 거에요. 어떻게 어머니를 놔두고 갈 수 있겠어요.”
장피에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역시 현은 라비안로제를 정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사실 많은 동시녹음자들이 촬영현장을 찾는 이유를 모르죠. 간단히 후시녹음을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현장에서의 그 생동감을 모른 채 어떻게 주인공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왜
미셸이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라 하루빨리 테마곡을 녹음하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지 알겠어요.”
매번 나에게 존대를 해주던 장피에르였다. 항상 신사 같았던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기쁨에서 나오는 흥분 때문이었으리라.
“감독님.”
주인공 모세가 낡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는 장면이었다. 아이작이 능숙하게 자세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눈에 거슬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이 장면을 촬영하기 전 씬이 모세가 교도관한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이죠? 엎질러져서 손가락까지 다치고요.” 장피에르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모든 콘티를 외우고 온 거예요?”
장피에르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당연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씬을 찍는 촬영날만 나를 촬영장소로 부르기로 했기 때문. 더군다나 영화촬영이 꼭 순서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영화의 모든 흐름을 알고 있지 않는 한 이전 씬이 뭐였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어
쩔 수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잠깐, 제가 모세의 자세를 봐줘도 될까요?”
장피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망설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이작은 내가 갑자기 다가서자 당황해했지만 이내 침을 꼴깍 삼키곤 나를 바라봤다.
‘자식, 잘생기긴 했네.’
훗날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남배우 중 한명이 되니 새싹부터 남다르긴 했지. 난 아이작의 자세를 고쳐 잡아주었다. 새끼손가락을 좀 더 구부리게 만들고 검지를 평소보다 더 부정확하게 현을 짚게 했다.
“아이작, 내가 모세라면 보잉을 할 때 손목을 크게 사용했을 거야. 다친 손가락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이니, 평소에 손목에 힘을 빼라고 배웠겠지만 지금만큼은 의식을 하면서 연주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