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0)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60화 >
지글지글―!
“강현 학생, 벌써 일어났어요?”
목에 수건을 두른 채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자 가정부 아주머니가 반겼다. 아무래도 날 깨우러 오신 모양인데 참 부지런하다는 말을 남긴 채 밑으로 내려가셨다. 사실 어젯밤 설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미셸 피콜리의 랑데부를 연주하는데 잠이 오겠는가, 피곤에
침침해야할 눈은 그 어느 때 보다 형형했다. 마치 숙면을 취한 것처럼.
“강서방, 오늘이 그라이핀 1차 개발 날이지?”
“예, 장인어른.”
“실패해도 너무 낙담하지 말게나. 첫 술에 배부를 수가 없는 법이니 말이야. 설령 1차 개발에 성공한다고 한들 필드테스트와 DIY테스트까지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니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인어른.”
아침부터 아버지의 표정이 무거운 이유가 있었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그라이핀은 동주를 살릴 구세주 같은 존재이니. 할아버지께서는 상용화가 될지 걱정이시지만 개발이 완료됨과 동시에 전 세계에서 달려들지 않는가. 물론, 지난 삶에서는 그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외국계 자본에 흡수당했지만.
“참, 현아. 프랑스는 언제 가느냐?”
“다음 주 일요일로 예정되어 있어요,”
드디어 다음 주면 프랑스로 떠난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 하시면서 떠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참 임작가가 현이가 사업수완이 대단하다며 칭찬일색 이더구나.”
“이사장, 아니 임작가님이요?”
“그래, 임작가가 깐깐하기로는 시부모 못지않은데 말이야. 현이 이야기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던데? 이러다가 영락없이 손자를 제일그룹에 뺏기는 건 아닌지 몰라. 벌써 평창동에서 세 사람이나 홀렸지 않느냐. 허허.”
할아버지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순 머릿속에 왕회장을 비롯해 임혜라, 손유하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어째, 등 뒤로 굵은 땀방울이 맺히는 것만 같다.
*
학교를 등교할 때마다 시선이 더 늘어나는 것만 같다. 다행이라면 먼저 다가와서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 아무래도 이름난 기업의 자제들이다보니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은 것이겠지. 그나저나 이놈의 학교는 흙먼지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시설물과 잔디밭 운
동장만 보면 중학교가 아니라 대학교라고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정말 축제에 나가준다고?”
짧은 단발이 거칠게 출렁였다. 반장은 흥분한 눈가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숨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축제에 나가달라는 제안을 내가 정말로 수용할지는 몰랐던 모양새였다. 애써 표정을 숨기고 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저 볼이 그 증거였으니.
“그런데 정확히 축제가 언제야?”
“원래는 이맘 때 즈음 했다고 하는데 공사 중이라서 연기됐어.”
“공사 중? 조금 있으면 날씨 금방 추워질 텐데 뒤로 미뤄졌다고?”
내 말에 반장은 되려 고개를 갸우뚱해보였다.
“현아, 어차피 축제는 대강당에서 하잖아?”
아아, 강당이 있었구나. 난 또 운동장에서 하는 줄 알았지. 역시 제일재단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내가 프랑스에 다녀오면 이미 축제가 끝나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반장은 오히려 고개를 완강히 저어보였다. 일절 문제없다는 듯이.
“일단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올게! 현이 네가 축제무대에 서기로 했다고 말이야!”
말릴 새도 없이 교무실로 향해 뛰어가 버린다. 어째 뒷모습에서 손유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이윽고 음악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전부 음악실로 향했다. 처음 와 보는 음악실 또한 평범한 중학교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리코더나 단소만 불어대는 게 다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방음은 물론, 연습용 악기들 또한 수준급이지 않는가. 웬만한 음대 못지않은 시설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네가 그 유명한 강현이구나, 정말 만나고 싶었단다. 난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김하연 선생님이야.”
어쩌다 보니 전학 후 처음 찾는 음악실이었다. 음악 선생님이 감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는데 그 이유는 뒷말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현아, 선생님은 네가 런던 심포니와 협연하는 것도 직관했단다. 정말 멋있었어!”
아담한 키의 음악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조심스레 엄지까지 치켜세우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졌다. 교과과정을 살펴보니 바이올린의 기초에 대해는 배우는 시간이었다. 헌데 활을 쥔 음악선생님의 시선이 계속해서 나를 향하는 것 같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중학교였다면 바이올린이 하나 있을까 말까했지만 이곳은 모두가 연습용 바이올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자세를 잡으며 이따금 나를 훔쳐보는 시선들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으니, 결국 음악 선생님이 호흡을 가다듬곤 나를 바라봤다.
“현아, 친구들과 선생님을 위해서 한곡 연주해 줄 수 있을까? 모두 현이가 어떻게 바이올린을 켜는지 궁금해 하는 모습이니까.”
“제가요?”
“응, 그런데 부담되면 안 해도 돼.”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괜히 선생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죄송해서요.”
음악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완강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다른 학생들도 곧장 자세를 연습하던 것을 멈추지 않는가. 난 앞으로 걸어 나가 학생들을 바라봤다. 내가 물 흐르듯 자세를 취하자,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여학생들은 물론 김하연
선생조차도 이미 감동한 눈빛이지 않은가. 연습용 바이올린이었지만 관리가 잘 되었다는 것이 자세를 취하자마자 느껴졌다. 사실 이토록 좋은 녀석이 제대로 된 연주한번 해보지 못했다니 안타까웠다. 번들거리는 현을 향해 묻고 싶어졌다.
무엇을 연주하고 싶냐고.
활을 쥔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 지던 그 순간,
지잉―!
현이 말했다.
* * *
아침부터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가을바람이 한겨울 못지않다는 이야기가 새삼 실감이 났다. 그래도 잠시 동안이나마 교복을 벗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중학교로 전학을 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김포 공항의 전경은 여전했다. 해외여
행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지만 그것도 가까운 동남아에 한해서였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는 패키지여행이었지만.
“오빠아, 이거 갈 때 꼭 먹어!”
손유하가 작은 손으로 내게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토끼 같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했지만 애써 입술을 꼭 다물고 참아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줬는데 손유하가 순간 와락 안기는 것이 아
닌가. 할아버지와 왕회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고 계셨다. 어째, 가슴팍이 축축한 것이 유하가 울음을 터트린 모양.
“오빠아, 빨리 와야 돼.”
확실히 얼음울보가 귀엽기는 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마세요. 유하야 오빠 빨리 다녀올게!”
프랑스 아동 노동 보호법에 따라 일전과 달리 어머니의 동행이 필요했다. 아직 직항노선이 개통되지 않은 시대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를 경유해야만 했는데 역시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승무원은 없었다. 언제쯤 국제항공법이 정립돼 출발지와 도착지의 국가에
서 사용하는 언어 둘 다를 구사할 수 있는 승무원이 배치될는지. 그때였다. 일순 한 러시아 승무원이 나를 묘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손님, 혹시 퀸엘리자베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내식을 건네주던 승무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개중에는 날 기억하는 승무원도 있었다. 아무래도 비행기에 꼬마가 혼자 앉아 브뤼셀까지 가는 경우가 흔치 않았으니 기억에 남았던 모양. 더군다나 내가 러시아어까지 구사할 줄 안다는 것을
알자 더욱 난리가 났다.
“아, 아들. 원래 비행기에 타면 이렇게 잘해주는 거니?”
러시아 항공사이지 않은가, 국내보다는 아무래도 투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귀빈을 모시는 것처럼 대해주었다. 어머니는 물론 나마저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으니. 퀸엘리자베스의 파급력이 이토록 크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이내 좌석
에 놓인 팸플릿을 보고는 깨달았다.
“안나?”
항공사를 홍보하는 팸플릿에 모델로 안나가 바이올린을 들고 있지 않은가. 수줍어 보이는 눈동자와 연한 백금발이 안나임이 분명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해 시니어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러시아 항공의 영애입니다, 손님.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무슨, 말도 안 된다.
“아들, 무슨 일 있어?”
러시아 어를 알아듣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의문스레 물으셨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이며 승무원을 물렀지만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의아한 기색이다. 아마 주말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을 깨우친 주인공의 모습과 내 표정이 흡
사하게 보였으리라. 그제야 모스크바에 꼭 놀러오라는 안나의 말이 떠올랐다.
*
동틀 녘에 모스크바를 지나.
다시 해가 질 즈음 돼서야 프랑스에 도착했다. 하루가 넘게 비행기를 타긴 했지만 러시아 항공의 배려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잘 왔다. 장시간 비행에 피곤하기는커녕 오히려 개운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어머니는 아직도 러시아 승무원들이 너무 친절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계셨지. 다시 한 번 인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쓰바시바! 러시아―!
입국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밖으로 나서자. “현!”
장피에르 감독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장피에르는 어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뒤 뒤이어 나를 반겼다.
“감독님이 직접 마중을 나오실지는 몰랐는데요. 지금 촬영 때문에 바쁘지 않으세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떻게 현이 오는 날 마중을 안 나오겠습니까. 사실 음향감독도 나오고 싶어 하는 걸 제가 현장에 놔두고 왔어요. 일단 호텔로 모실까요? 현과 어머니만 괜찮으시다면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말이죠. 프랑스에서는 귀빈에게 첫 식사
를 대접하는 것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어머니는 어떻게 감독님의 성의를 무시하냐며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지금 당장 피곤하지는 않았다. 편안한 에스코트 덕분인지는 몰라도 과장을 쫌 보태면 시차적응 또한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참, 그리고 현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저 말고도 또 있습니다.”
“저를요?”
“현은 생각보다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많답니다, 브뤼셀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워낙 인상 깊었으니까요. 일단 제 차로 가시죠. 오늘은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베스트 드라이버가 돼야겠군요.”
장피에르는 마치 영국 신사처럼 어머니와 나를 안내했다. 아직 이름을 날리기 전이라 그런지 장피에르의 자동차는 협소했다. 환상을 안 가져와서 망정이지 가져왔다면 골치가 꽤나 아팠을 것이다. 필요하면 왕회장이 경호원들을 대동해 보내준다고 했으니 문제될 건 없
었다.
한편으로 장피에르의 운전은 분노의 질주를 방불케 했다. 물론, 다른 의미의 분노의 질주. 어찌나 느리게 방어운전을 하던지 뒤차들이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으니.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화로워 보인다. 전쟁 속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주인공 모세의 얼굴과 겹
쳐 보이는 건 우연일까. 과연 명작 ‘라비안로제’를 탄생시킨 감독다웠다.
“현이 아직 어려서 안타깝군요. 성인이었다면 제가 잘 숙성시킨 샤또오브리옹을 대접했을 텐데 말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대접하는 것을 중시 여긴다. 지난 삶에서도 프랑스에 올 때면 보르도 지역의 와인들을 즐겨 마시곤 했다. 마음 같아서는 향이라도 음미하게 한 잔 달라고 하고 싶지만 옆에 어머니가 계시기도 하거니와 이 몸뚱이로 뭘 하겠는가. 그저 레몬 에이드
나 홀짝이며 군침만 꼴깍 삼켜댈 뿐이다. 때 마침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감독님, 여기서 피아노 연주도 하나 봐요?”
식당 한 가운데에 큼지막한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척 봐도 장식품은 아닌 것 같고 피아노 의자와 건반덮개에 손 떼가 묻은 것이 종종 연주를 하는 모양새였다. 헌데 장피에르가 뭐라고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묘령의 여인이 피아노 의자에 덥석 앉는 것이
아닌가. 저녁시간이라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프랑스 특유의 식사문화 때문인지 이야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묘령의 여인이 피아노 의자에 앉자마자 좌중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장피에르를 바라봤지만 그는 묘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그때 건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선율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이미 레스토랑안의 모든 사람들이 피아노의 선율에 귀를 빼앗겨 있었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음악이었다. 분명. 곡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를수록 여인의 손가락도 쉼 없이 빨라졌다. 기
다란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그녀의 가려진 얼굴이 보이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내 인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가슴속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오늘 왠지 와인을 마시지 않아도 한껏 기분이 좋을 것만 같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미셸 피콜리와 랑데부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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