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2)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62화 >
“아이작, 나를 따라 해봐.”
촬영현장에서 아이작의 자세를 봐주면서 꽤나 친해졌다. 활을 쥐는 자세와 보잉을 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아이작의 신체조건은 다른 이들과는 분명 달랐지. 작중 모세는 수용소에서 험상궂은일을 당하며 자란다. 그 탓에 팔과 다리는 물론 손가락
까지 다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아이작은 영화를 위해 개인 강사에게 바이올린을 오랫동안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정형화된 자세를 고집하는 건 옳지 않지.’
내가 만약 모세였다면 자신의 상태에 맞춰 자세를 계속해서 바꿔나갔을 것이다. 품에 맞지 않는 옷을 계속해서 입고 있을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보폭을 어깨넓이보다 좀 더 벌리거나 현을 짚는 순서를 바꾸기도 어쩔 때는 손목을 연체동물처럼 힘을 빼라고 하거나 딱
딱한 고목처럼 고정시키라고도 했다. 아이작은 내 의견을 마치 선생님에게 듣는 조언처럼 수첩에 적어 내려갔다. 눈빛이 똘망똘망한 모습이 어째 손유하와 퍽 닮아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역시 현을 촬영현장에 데리고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감독인 저조차 생각지 못했던 모세의 모습을 발견해내니 말이에요. 수정을 원하는 장면이 있다면 거리낌 없이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장피에르는 이미 전적으로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주변의 조감독과 촬영감독이 당황할 만큼. 것도 그럴 것이 장피에르의 황소고집은 독립영화판에서도 꽤나 알아줬다. 상업 영화라 해서 감독 본인이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습관이 한 번에 달라지진 않는다. 그런 의
미에서 내 말 한마디에 장면을 수정할 수도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였다. 장면 하나하나에 감독 고유의 미장센과 아이덴티티가 서려있기 때문.
“현, 모세가 매번 담벼락을 쓰다듬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담벼락하게 흐드러지게 핀 총알자국에서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헌데 그 느낌을 어떻게 살려야할지 고민이에요. 모세가 담벼락을 쓰다듬다가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하잖아요. 아무리 콘티를 그려봐도 밋밋하더군요. 일전처럼 현이 내게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번 물어본 겁니다.”
콘티속의 모세는 담벼락을 쓰다듬다 낡은 바이올린을 켠다. 이미 수용소의 명물이 되어버린 모세를 교도관들은 못 본 척 내버려두는 그 광경에서는 모순적인 평화로움마저 느껴졌었지. 하지만 뭔가 2프로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지난 삶과 달라지지 않은 장면
이었지만 장피에르 또한 뭔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서사의 모든 장면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감독님, 혹시 이건 어떨까요? 나츠바일러 수용소의 별명이 장대비잖아요. 그 이유야 당연히 담벼락에 박힌 무수한 총알 때문일 테고요. 모세가 담벼락의 슬픔을 달래주며 연주할 때 비가내리는 건 어떨까요.”
외딴 이곳까지 강수차가 올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난 그냥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해주었다. 일순 장피에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떠졌다. 가장 간단한 아이디어일수록 떠올리기 힘든 법이었으니.
“현, 역시 아무리 봐도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있어요.”
한 바탕 쉬는시간이 끝나고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을 때였다. 동시녹음을 위해 녹음설비가 설치되고 있었는데 음향감독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사방이 탁 트인 장소이거니와 산바람과 벌레들의 잡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리라. 후시녹음이 보편화되
고 있는 시기였다. 특히 악기에 관한 녹음은 후시녹음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촬영현장에서 노력한다고 한들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선율만큼 선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장피에르의 황소고집은 쉽사리 꺾을 수 없는 것이니.
“현, 방금 전 모세가 연주했던 곡을 부탁해요.”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낡은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작중에서 모세가 항상 품에 껴안고 다니는 소품. 울림판은 군데군데 흠집이 있어 울림통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고 현과 활 또한 낡아서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다행이라면 수용
소 근처에 소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는 것이다. 최고급에 해당하는 검은 송진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
내가 자세를 잡자 음향감독이 설비를 만지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음향감독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역시나 헤드셋사이로 바람소리, 벌레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 난 자세를 고쳐잡았다. 평소처럼 내 몸에 맞는 자세가 아닌 방금 전 촬영당시 모세가 취했
던 자세를 마치 복사라도 한 듯이 그대로 따라했다. 새끼손가락을 좀 더 구부리고 보폭을 넓게 하고 손목을 부정확하게 비틀었다. 마치 내가 모세가 된 것처럼.
모세가 처음 연주했던 곡은 수용자들의 민요, 유대인들의 민요였지만 우리네들의 노동요처럼 구슬픈 음색이 특징인 곡이었다. 악보를 받아봤지만 단순한 메들리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그 노래를 귀로 듣는 것만으로 바이올린으로 표현해냈다. 첫 시작은 아다지
오, 아주 느리게 내림활로 현을 건드린다.
지잉.
악보를 구성하는 요소는 간단하다. 오선위에 음표와 쉼표, 그리고 박자표와 조표가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모세는 살아생전 악보라는 것은 구경도 해보지 못한 아이였다. 바이올린 켜는 법조차도 스스로 터득했을 정도였으니. 산들거리는 바람소리와 벌레소리를 반주
삼아 소리를 울려 퍼지게 만들었으리라. 활을 들어올리는 그 순간 메트로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리듬이 낡은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바람 소리를 벗 삼아,
지잉―!
경쾌한 선율이 울려 퍼지자 촬영장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분명 구슬픈 음색이었지만 주위의 바람과 벌레소리가 그들을 미소짓게 만들고 있었다. 음향감독은 종전 불평스러웠던 표정을 버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설비를 매만지고 있었다. 장피에르의 얼굴에는 황홀
감만이 가득하다. 낡은 바이올린의 음색이 마치 거짓말처럼 자연과 하나 되어 너무나도 조화로웠기 때문에.
* * *
미셸 피콜리의 작업실은 파리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센강을 중심으로 에펠탑과 노트르담 대성당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목이 좋은 자리였다. 듣기로는 값싸게 나온 저층 건물을 매입했다고 하는데 이 조그만 건물이 훗날 얼마가 될지는 가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파리는 런던과 마찬가지로 부동산값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도시였기에.
“현, 어머니는?”
“오늘은 호텔에서 계세요. 미셸하고 함께 있을 거라고 하시니 괜찮다고 하셨어요.”
사실 나갈 준비를 하시는 어머니를 오늘은 쉬시라며 한사코 말렸지. 며칠 동안 강행군이나 다름없는 스케줄이었다.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며 수 시간을 기다리는 게 오죽 힘드셨을까.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꽤 피곤하셨을 터였다. 프랑스 아동 노동보호법에도 5
시간미만의 노동에서는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 있었으니. 하물며 보호자를 대신한 미셸이 곁에 있지 않은가.
“촬영 일정이 끝나면 어머니랑 함께 나중에 샤르트르 대성당에 가 봐요. 매일 밤마다 빛의 축제가 열리는데 아주 아름답죠. 아니다, 시간이 괜찮으면 이번 주말에 제가 에스코트를 해 드리죠. 무채색의 대성당의 벽면에 역사가 아로새겨지는 그 광경이 얼마나 멋진지 몰
라요.”
“고마워요, 미셸.”
“이 정도가지고 뭘요, 그나저나 현. 일단 브런치 부터 먹고 시작할까요?”
작업실과 머지않은 곳에 있는 노천카페로 향했다. 프랑스식 브런치 갈레트와 함께 나는 카페 알롱제를 주문했다. 뜨거운 우유와 함께. 프랑스식 아메리카노였는데 뜨거운 우유를 입맛에 맞춰 타먹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지.
“현과 내 입맛은 상당히 비슷하군요, 신기할 정도로요.”
파리지앵의 칭찬을 들으며 노른자를 찍은 베이컨을 한입 베어 물었다. 이따금 미셸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으나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미셸이 이 근방에서 자주 출몰하다보니 그런 거겠지만.
“미셸, 설마 아들?”
“아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나의 귀중한 손님이니까. 이번 음반을 함께 작업할 아티스트라고.”
“오, 내가 실수를 해버렸군. 미셸과 귀중한 손님을 위해 내가 타르트를 가져올게.”
노천카페의 웨이터 또한 미셸을 친구처럼 대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익숙한 것이 평소에도 자주 있는 광경인 듯 했다. 식사를 끝마치고 테이블위에 식사 값과 함께 팁을 놔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방음작업이 잘된 녹음실이었다. 신디사이저를 비롯해 구시대의 녹음기기가 즐비했는데 당시로 따지면 최고급 작업실이었다. 물론, 나는 전자악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피아노를 한번 배워보고 싶기는 한데.
“현, 랑데부가 어떤 곡인지 알고 있어요?”
그때 미셸이 나를 바라봤다. 아직 랑데부는 발매조차 하지 않은 음반이었지. 본래라면 미셸이 반주를 하고 노래까지 했을 명곡. 지겹게 들은 곡인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안다고 말하면 골치가 아파지니.
“한번 들어봐요.”
미셸이 설비를 매만지더니 이내 녹음되어져있던 스피커에서 가이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지난 삶 내가 들었던 랑데부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같은 곡이었다.
“음, 역시 녹음한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네요. 실제로도 한번 들려봐 줄게요.”
미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로 향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미셸은 망설임 없이 건반을 두드렸는데 과연 프로는 프로였지. 악보를 따라 건반을 두드린다고 해서 다 같은 곡이 아니었으니. 세밀한 감정과 이어진 손가락의 이완이 그 곡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
다. 특히 랑데부는 감정의 해일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변곡점이 많은 곡이었다. 헌데 지금은 달랐다. 마치 단물을 쫙 빼버린 것처럼 담백한 곡이지 않는가.
“미셸, 원래 랑데부가 이러한 느낌이었나요?”
내가 기억하고 있던 랑데부와 자못 달랐다. 설마 나비효과가 여기에도 발생한 것일까. 하지만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지. 본래 음반이라는 것이 단 한 번의 작업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아니요, 그날 레스토랑에서 현을 보고 느낌을 바꿔봤어요.”
맙소사!
음악가들이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찰나의 영감이 곡 전체의 흐름을 바꿔버린 것이 아닌가.
“잠깐, 제가 악보 좀 볼 수 있을까요?”
미셸은 친절하게도 이미 바이올린으로 편곡한 악보를 내게 건네주었다. 오선위의 콩나물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점점 커졌다. 악상기호는 물론 선율의 방향성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미셸, 잠깐 제가 악보에 손을 대도 괜찮을까요?”
미셸이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작곡가에게 음반은 그야말로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하지만 미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나는 붉은 펜을 하나를 빌려 딸칵거리며 악보를 짚어나갔다. 미셸에게 계속해서 부분부분 상의를 해가며 바꿔나
갔는데 미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미셸은 눈을 비비며 악보를 다시 들쳐보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랑데부를 바이올린으로 편곡하며 가지고 가야 할 점들을 조금 더 수정해나갔다. 임혜라 이사장에게 처음 랑데부의 연주를 제안 받았을 때부터 어떻게 편곡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골
백번 생각을 끝마친 뒤였으니 망설일 것이 없었다. 달칵.
물론 내가 편곡한 바이올린 랑데부 또한 기존의 랑데부와는 다소 달랐지만 기존 특유한 분위기를 없애지 않는 선에서 시도했다. 난 이 바이올린 곡이 ‘라비안로제’의 테마로 잘 어울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셸 또한 마찬가지였지. 그녀는 이 수정된 악보가 무
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 했다.
“현, 혹시 작곡을 배워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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