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87)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87화 >
“나이스 샷―!”
왕회장이 워터 해저드로 빨려 들어가는 골프공을 보며 소리쳤다. 때마침 솔바람만 불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홀컵으로 향했으리라. 백번 중에 한 번쯤 있을까 말까 한 천운이었으니. 어찌 된 게 나이가 드실수록 승부욕이 더욱 불타지 않는가. 아무렴, 노년에도 경영권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물론 손일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인물이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영감탱이, 이번에는 내가 이겨야겠구만.”
“손가, 내가 그리 쉬이 당해줄 줄 알고?”
목소리만 듣자면 동네 할아버지들 같았지만 실상은 재계의 거두였으니. 오랜만에 컨트리클럽을 찾은 할아버지들이었다. 한동안 뉴스에서 들끓었던 연쇄 도산이 잠잠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왕회장이 불쑥 나를 바라봤다.
“현아, 이번에는 네 말이 틀릴 것 같구나. 도미노가 멈추지 않았느냐.”
겉으로만 보자면 그러했다. 총리가 직접나서 외환위기설을 재차 부인했고 기업들의 부도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덕분에 국민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번지던 사재기 열풍이 사그라들기도 했다. 오죽하면 한동안 대형마트를 가도 찾아볼 수 없었던 설탕과 밀가루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허나.
“속단하기는 이르죠, 숨 고르기를 하는 것이니까요.”
“숨 고르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정부는 도움받는 사실조차 숨길 거라고요.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려 하는 걸 거예요.”
한국은행은 외환보유고가 수백억 달러가 있다고 발표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주가는 붕괴되고 환율은 점차 치솟고 있었으니. 아직도 도미노가 계속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정부를 맹신하고 있었다. 아마 끓는 냄비 속의 개
구리와 같은 현상이지 않을까. 입맛이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다.
“역시 내가 사위 하나는 잘 점 찍었구만.”
이게 무슨 소리일까.
“지난 공연 이후로 클래식계에서도 현이 네게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어멈한테 듣자하니 예술의 전당 이사장이 몇 번이나 현이 널 찾아왔다면서?”
독주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기도 시기이니만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끈질기게 찾아오던지 만약 임혜라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터였다. 대한민국 클래식계에서 제아무리 콧대가 높다고 한들 제일그룹의 맏며느리를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참, 유하랑 자연농원에 갔다 왔다지?”
“예, 유하가 놀이기구 타는 걸 워낙 좋아해서요.”
“동물원이 아니라?”
그 순간 왕회장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상하구나, 유하는 놀이기구라면 질색하는 아이인데 말이다.”
청룡열차, 바이킹을 몇번이고 탔는데 놀이기구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그때였다. 왕구렁이 영감님의 퍼팅 차례가 돌아온 것은. 헌데 아무리 봐도 왕회장은 골프에 소질이 없었으니. 노송들 사이로 향해 날아가는 골프공의 궤적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
“뱅상의 고개 숙인 이삭.”
현대미술의 매커니즘은 간단하다. 고흐의 작품이 모네의 작품보다 비싼 이유는 총 작품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그저 관리하기 용이해 값이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컬렉터들의 입김이리라. 어린아이의 낙서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림이 ‘회장님이 후원하시는 작품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수억 원을 호가하기도 하니. 오죽하면 유명화가들이 직접 마담뚜와 같은 컬렉터들을 찾아가 은밀히 로비를 벌이겠는가.
지금도 그러했다.
프랑스 화가 뱅상이 캔버스에 그렸다는 이삭이 수십억 원을 호가했으니. 훗날 값이 더 치솟으면 몰라도 내려가는 일은 없을 터였다. 현대미술과 자본주의가 만나는 광경에서 값을 제외한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뱅상이 젊은 시절 프랑스 남부의 농부였다는 사실을 부
자들 중 그 누가 알까.
“어, 현이 일찍 왔네?”
“네, 미현이 누나.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시네요.”
갤러리가 아침부터 분주하다. 뱅상의 작품을 포함한 소장품 몇 점이 밖으로 이관되고 있었기 때문. 저것들만 합쳐도 서울 도심의 건물을 사고도 남을 것이다. 지난 삶에는 나도 현대미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임혜라 이사장이 괜히 갤러리를 차지한 것이 아
니었으니. 어찌 보면 저만큼 합법적인 백지수표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나와 상관없는 일. “형, 도대체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어째 작업실에 빈대가 붙은 것 같았으니. 독주회를 끝마쳤지만 백정훈은 계속해서 작업실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오죽하면 임혜라 이사장이 갤러리의 제2호 음악가로 백정훈을 영입할 생각을 했겠는가.
“현아, 그런데 아침부터 옮기는 저 그림들 정말 하나에 수십억 원씩 하는 거냐? 그럼 저게다 어디로 옮겨지는 걸까?”
애써 말을 돌리기는.
“저도 몰라요.”
아무렴, 모르긴 몰라도 권력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리라. 이맘때쯤이면 왕회장이 무척이나 공을 들일 시기이니. 나라가 휘청이지 않는가, 그 사이에서도 제일그룹이 재계서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다. 톱니바퀴가 멈추지 않게 계속해서 기름칠을
해온 것이니.
“그래도 난 저 그림들보다 현이 네 악보가 탐난다. 히로세 선생님도 말씀하셨거든, 철혈을 듣는 순간 신은 정말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재능도 있는데 작곡가로서의 재능 또한 뛰어나다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현아, 혹시 저 악보 중에 히로세 선생님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도 있니?”
당연히 있었다. 현의 여왕은 보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샘솟게 했으니. 그러나 세상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내가 보기엔 아직 부족한 것 투성이었으니까.
“히로세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현이 네가 사랑을 알 나이가 되면 얼마나 명곡들이 쏟아져나올까 기대된다고. 역사적으로도 많은 음악가들이 사랑을 한 후에 엄청난 명반들을 탄생시켰잖아.”
“그건 일반론이에요, 오히려 슈베르트나 베토벤은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봤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오죽하면 두 사람의 대명사가 고독이겠어요.”
“그래도 니콜로 파가니니는 이름난 카사노바였지 않니.”
백정훈이 머쓱한지 콧잔등을 쓸었다.
그때였다.
어?
이마가 따끔해짐과 동시에 잡티 하나 없던 피부 위로 벌건 뾰루지가 올라온 것은. 백정훈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이마를 바라봤다.
왜일까,
“현아,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여드름 난다고 하던데?”
갑작스레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 * *
“현―!”
오랜만에 만나는 인물이었다. 허나 마치 어젯밤 만난 것처럼 편한 느낌이 들었으니. 괴짜스러움이 여전한 티호노프 박사였다. 오히려 더욱 특이해져 있었다. 그동안 산중생활이라도 한 것인지 턱수염이 자라난 것은 물론 부서진 안경다리를 스카치테이프로 대충 동여
맨 모습이었다.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오는 것이었다면 분명 자신의 애마를 데려왔으리라.
“오랜만입니다, 박사님. 헌데 많이 바뀌셨네요? 그동안 안 보이던 수염도 기르시고 말이에요.”
“하하, 연구소 밖을 나가지 않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현은 여전히 그대로네요? 잘생긴 얼굴이 변함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키도요!”
이거 칭찬인지 욕인지,
“연구소 직원들이 어찌나 현을 보고 싶어 하던지 저 혼자 한국으로 먼저 입국해서 부러움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그나저나 집이 아주 좋군요!”
티호노프 박사는 이촌동 저택으로 초대를 받은 몇 안 되는 외국인이었다. 근데, 어째 장피에르 감독과 느낌이 비슷하지 않은가. 역시 천재는 어딘가 통하는 공통점이 있기 마련인 걸까? 저택 안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사정없이 풍기고 있었다.
어머니와 가정부 아주머니가 또다시 앙상블을 이뤄 요리 삼매경에 빠지셨다. 어느새 집안은 고소한 닭냄새로 가득하다. 집 나간 사위가 돌아온 것도 아닌데 씨암탉을 잡은 모양.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아직 저택에 도착하시지 않으셨다. 헌데.
“환상적인 수프입니다―!”
어느새 수다쟁이 박사가 부엌에서 어머니와 가정부 아주머니를 상대로 수다를 떨고 있지 않은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바디랭귀지로 대화가 되는 모습이었다. 하물며 박사의 리액션이 어찌나 좋던지 자칫하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요리를 할 기세였으니.
“부인들께서는 정말 요리의 신이십니다. 아마 소련 시절의 레닌도 이런 진귀한 음식들을 대접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 귀한 음식을 만들어주시다니, 정말 감동 또 감동입니다. 쓰바시바 꼬레아―!”
누가 보면 일인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허나 저 글썽거리는 눈동자를 보아라,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어머니와 가정부 아주머니가 보기에도 수다쟁이 박사의 진심이 절절히 느껴지는 모양. 한편으로는 얼떨떨하기도 하실 테지. 아무렴, 요리를 대접받는 손님이 이
토록 극적인 반응을 보인 경우는 없었으니. 러시아에서 저런 모습을 자주봤던 나로서는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 할아버지 오셨어요?”
때마침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때 티호노프 박사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부엌에서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언제 앞치마까지 한 거야?’ 두 눈을 뜨고는 못 볼 광경이었으니. 앞치마를 한 티호노프 박사가 할아버지를 향해 성큼 다가가서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보스.”
정말 동명이인은 아니겠지?
*
“현아, 공항에 안 가봐도 괜찮겠어?”
아버지가 나를 향해 넌지시 물으셨다. 오늘은 유하가 출국하는 날이었다. 난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다. 이미 마지막 인사는 나눈 뒤였으니. 괜스레 복잡한 출국길에 나까지 함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족간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
“괜히 저까지 배웅을 가면 혼자서 외국에서 공부해야 하는 아이 마음만 흔들릴 거예요”
아무렴, 타지에서 홀로 공부할 때 괜히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외국이지 않은가. 손유하가 아무리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고는 해도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지난 삶 내가 그랬듯 분명 마음속에 향수병이 진하게 남아있으리라.
“미스터 캉,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십니까?”
때마침 티호노프 박사가 아버지와 나에게 다가왔다. 말끔하게 수염을 자르고 머리를 손질하고나니 쌩판 달라진 얼굴이었다. 부러진 안경만이 그가 수다쟁이 박사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수다쟁이 박사가 이촌동 저택에 있는 까닭은 이러했다.
할아버지께서 서울에 있는 며칠 동안은 이촌동 저택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했기 때문. ‘보스와 함께 한 집에서 머물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라고 외쳤던 수다쟁이 박사의 모습이 선명하다. 누가 보면 화학 회사가 아니라, 마피아 컴퍼니에 입사한 줄 알 것이다.
“현은 러시아에서부터 느꼈지만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듯해요.”
“네?”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티호노프 박사가 손가락으로 안경 끝을 살짝 올렸다. 마치 지적임을 표현하듯이.
“아니면 카사노바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요. 이렇게 여자를 울려서야, 아마 제가 그 소녀였다면 현이 출국장에 나와주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오히려 현이 배웅을 나가지 않는 것이 소녀의 마음을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 거예요. 신께서 현에게 바이올린 능력
을 준 대신, 연애 능력을 앗아간 것은 아닐까요?”
뭐라는 거야, 이 수다쟁이 박사님이.
“아버지, 저 잠시 다녀올게요!”
하지만 이미 몸은 반응하고 있었으니. 곧장 튀어나가듯 현관문 밖으로 향했다. 다행이라면 김기사 아저씨가 저택에 있었다는 점. 지난번처럼 헐레벌떡 택시를 잡아타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다 왔어, 강현 학생.”
베스트 드라이버 뺨치는 김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김포공항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말도 남길새 없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커다란 전광판에 보이는 초록색 문구는 이미 수속 완료를 가리키고 있었으니.
“허어억, 허억.”
아마 유하는 지금쯤 비행기 좌석에 앉아있을 것이다. 주머니 속 지갑을 움켜쥐었다. 어찌 보면 너무 어른의 관점에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때였다.
“너무 늦었잖아, 바보.”
땀으로 축축해진 등 뒤로 누군가가 나를 껴안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푸른색 머리핀이 시야에 들어왔다. 쿵쿵대는 심장은 아마도 뜀박질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그 순간 유하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 비행기로 미뤘어, 오빠가 올 거 같아서.”
멀찍이서 왕회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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