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8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88화 >
“15살이라고요?”
찻잔이 거칠게 일렁였다.
“감독님, 외람되지만 니콜로 파가니니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알려진 최초의 비르투오소 말이에요. 그렇게 어린 바이올리니스트가 따라 할 수 없는 연주가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설령 그 연주자가 퀸엘리자베스 최연소 수상자라고 해도요.”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배우였다. 그렇기에 파가니니라는 이름의 무게감을 잘 알고 있을지도. 유럽의 대가들을 섭외해도 모자랄 판국에 생소한 아시안 바이올리니스트를 섭외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렴, 바이올리니스트 현은 2년간 단 한 번의 독주회도 열지 않았으
니까 말이다.
“제 손가락을 보십쇼. 다시 바이올린을 켜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파가니니의 외형이 아니라 아주 흡사한 파가니니의 외형을 만들기 위해서요. 감독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음악영화의 정수는 배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음악가라고요.”
정말 손끝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역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훌륭한 배우였다.
“감독님의 라비안로제를 몇 번이고 돌려봤습니다. 대단하고 섬세한 연주자임은 틀림없더군요. 하지만 파가니니는 라비안로제의 모세와는 궤가 다른 연주를 하는 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감독님께서 왜 그렇게 그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를 고집하시는지 의문입니다. 프랑
스와 독일, 당장 이태리를 살펴보아도 이름난 거장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저 말고 다른 배우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말들이 나왔을 정도이니. 라비안로제에서 보여줬던 현의 모습은 분명 대단했지만 화려한 기교의 파가니니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풍부한 감수성과 절제된 섬세함이 돋보였지. 한 마디로 분야가 달랐다는 것, 발라드
를 잘 부른다고 해서 락을 잘하는 것도 아니기에.
“알렉산드로, 내기 하시겠어요?”
“네?”
“만약 그의 연주를 듣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제가 깨끗하게 패배를 시인하겠습니다. 파가니니의 감독직을 그만둔다는 말이에요.”
알렉산드로가 황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두 눈가에 ‘그만큼 신뢰한단 말인가’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 같았으니. 아무렴, 니콜로 파가니니는 자신을 시기했던 이들조차도 마음을 빼앗을 정도였다고 하지 않는가. 오죽하면 니콜로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
다고 소문을 퍼트린 신부조차 그의 연주를 보고 황홀해 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정말 그 정도로 신뢰하십니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운명처럼 느껴졌으니 어찌 안 믿을 수 있겠는가. 장피에르는 말없이 엷은 미소를 띠었다. 분명 그를 만난다면 눈앞의 배우도 느끼리라. 두말할 필요 없이 파가니니, 그 자체라는 것을.
*
“현, 아침 먹어요―!”
아무래도 러시아의 수탉은 한국보다 빨리 우는 모양이다. 어느새 한국생활에 완벽히 적응해버린 티호노프 박사였다. 어찌나 넉살이 좋던지 새벽부터 일어나 가정부 아주머니의 일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숙박비를 내지 않는 대신 요리를 하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였을 정
도이니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으리라.
“제가 가장 잘 만드는 보르쉬와 펠메니입니다, 보스.”
기어코 아침부터 주방을 장악한 모양. 러시아식 된장찌개와 수제 만두가 식탁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손님이 이토록 적극적이니 부담이 안 될 수 없었다. 허나 얼마나 엉뚱한지 이미 가정부 아주머니는 물론 할아버지조차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티호노프 박사.”
할아버지의 칭찬을 들은 티호노프 박사가 감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가 보면 그라이핀 상용화에 성공한 것 같았으니. 하물며 보르쉬와 펠메니는 정말 맛있었다. 이제보니 손맛이 꽤나 대단하지 않은가.
“현아, 오늘 평창동에 간다지?”
“예, 할아버지.”
“그래, 가서 오랜만에 유하네 할아버지 말동무나 해주고 오려무나.”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시간이었다. 불쑥 공항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던 왕구렁이 영감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떨 때 보면 재계의 거두로 카리스마가 넘쳐흘렀지만, 또 다른 때에는 장난기 많은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같았으니. 때마침 티호노프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
나 상념을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제 디저트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보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말렸지만 티호노프 박사는 완강했다. 러시아에서는 손님이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 큰 영광이라며. 아무리 봐도 화학 박사를 영입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주방장을 스카웃 한 것이 아닐까.
“강현 학생, 다 왔어요.”
평창동 대저택에 도착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저택이었다. 처음에야 미로 같았지만 이제는 두 눈을 감고도 걸음을 옮길 수 있을 만큼 눈에 선했으니. 평소와 다름없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바둑판이 아니라 뜻밖의 인물이 왕회장과 함께 앉아있었다. ‘임혜라 이사장?’
워커홀릭이니 당연히 주말에도 갤러리에 출근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왕회장과 다과를 즐기며 수다를 떨고 있지 않은가. 아무렴, 시아버지와 며느리였으니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광경은 아니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가정부 아주머니가 음료를 권했다.
“강현 학생, 평소처럼 주스로 줄까요?”
“아니요, 흰 우유로 부탁드릴게요.”
머지않아 폭풍성장을 이룩하리라. 짧아진 몸뚱이에 정이 들지 않았냐고? 아서라, 옷소매가 짧아지는 광경을 하루빨리 보고 싶을 뿐이다.
“현아, 이번 영화촬영장에는 유하어멈이 따라가게 될 것 같구나.”
“네?”
그때 임혜라 이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봐도 또 다시 현이 어머님이 외국으로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으실 테니까. 아줌마가 같이 가려고 하는데, 어차피 계약상태로 보면 고용관계라 대리인을 수행하기에 별문제 없는 데다 현이 어머니께 이미 허락도 받았단다. 근데 참, 아버님께 들었는데 정말 공항
에서 유하랑 그렇고 그랬니?”
흰 우유를 입 밖으로 토해낼 뻔했다. 도대체 뭘 그렇고 그랬냐는 것인가. 방금 전 수다를 떨고 있었던 내용이 가히 상상이 갔다.
“그냥 배웅 인사하러 나간 거였어요.”
“포옹도 했다는데?”
“그건 그냥 잘 다녀오라는 의미에서요.”
이 아줌마가 나를 놀리는데 재미가 들리지 않았는가.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지난 삶 임혜라 이사장을 수도 없이 겪지 않았던가. 반응하면 반응할수록 계속해서 놀리려 드는 인물이니. 그때였다. 임혜라 이사장이 음흉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은.
“뽀뽀도 했다는데?”
왕회장이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아아, 잊고 있었으니. 자연농원이 왕구렁이 영감님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 * *
니콜로 파가니니가 희귀병을 앓았다는 말이 있다. 그의 주치의가 쓴 회고록에 따르면 파가니니의 손가락은 평범한 이들보다 길며 뼈의 골밀도가 낮아 관절이 활처럼 휘었다고 한다. 그 방증으로 엄지를 손등 위로 구부려 새끼손가락과 맞닿을 정도로 유연했다고 하니.
물론, 이 덕분에 현란한 기교가 완성된 것은 아닐 것이다.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터.
“허어억, 허억.”
알렉산드로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지금은 헐리우드의 이름난 배우이지만 학창시절 때만 하더라도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음대생이었으니. 파가니니의 위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악보를 따라 연주를 했을 뿐인데도 손가락이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가.
“이러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말이 신빙성 있었을 수밖에.”
지금에서야 파가니니의 연주기법이 연구되고 파헤쳐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악보가 공개되지 않은 것은 물론 연주기법을 비밀에 부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불세출의 천재라 알려진 피아니스트 리스트 조차도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악마의 선율이라 감탄을 자아냈을 정도.
“알렉산드로, 오늘도 아주 열심힌데?”
동료 배우 마르티나였다.
현장에서는 알렉산드로를 제외하고는 가장 연차가 높은 여배우. 평소 같았으면 정중히 고개를 숙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힘조차 없었다. 밤새도록 파가니니의 발끝이라도 따라가고자 얼마나 노력했던가. 첫 크랭크인이 다가올수록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그 순
간 알렉산드로의 머릿속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참, 오늘 그 친구가 촬영장에 온다고 했어. 장피에르 감독이 추천했다는 바이올리니스트 말이야. 이름이 현이라고 했지 아마? 난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해서는 잘 모르다 보니 처음 듣는 이름인데 아주 유명한 친군가 봐?”
유명하기는 유명했다. 불과 2년 전 클래식계를 들썩이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허나 지난 2년간 별다른 이력이 없지 않았나.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적게 협연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무대에 선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재능을 가지고서도 독주회는
커녕, 상업음반 한 장을 제외하고는 활동이 전무 했으니 기가 찰 수밖에. 알렉산드로는 불쑥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바이올린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자신의 고장 난 손가락을.
*
“사장님, 그런데 안 바쁘세요?”
“현아, 아줌마한테 사장님이 뭐야, 정 없게.”
“그래도 밖에서는 이렇게 불러야 할 것 같아서요.”
어찌 보면 갤러리의 대표이지 않은가. 난 갤러리에 속한 아티스트이고. 공적인 자리이니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았다. 헌데 지난 삶에서도 함께 못해본 출장을 할 줄이야. 것도 비행기를 장장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이태리로.
“아줌마도 겸사겸사해서 가는 거야, 영화촬영장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태리에서 이번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몇 점 나오거든. 그거 가지러 가는 거야.”
옥션을 말하는 것이리라. 미술품 경매는 그야말로 컬렉터들과 경매 주관사의 입김으로 시작된다. 하물며 경매 물품 하나하나가 수억 원은 족히 호가하지 않는가. 때마침 비행기 창밖으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촬영장으로 가죠, 장피에르 그 친구한테 얼굴을 비춘다고 말해놨으니.”
임혜라 이사장의 비서가 직접 차를 몰았다. 어째 겉모습만 보자면 어머니가 일하는 장소에 딸려온 아들 같았다.
“현, 정말 이렇게 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먼 곳까지 직접 와줘서 고마워, 혜라. ”
장피에르가 버선발로 뛰쳐 나와 임혜라 이사장과 나를 맞이했다. 세트장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장피에르와 인사를 나누곤 세트장을 살펴보는데 색감과 엔틱한 소품들이 낭만주의 시대의 공연장을 잘 재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배우들이 있었다. 촬영날도 아니었지만 세트장을 나와 동선을 파악하고 대본리딩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같이 이름난 배우들이었다. 파가니니역을 맡은 알렉산드로부터 여배우 마르티나까지 현재 헐리우드의 블루칩이라 불렸으니. 그때 알렉
산드로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반갑습니다, 알렉산드로입니다. 그쪽이 장피에르 감독님께서 그렇게 추천한 바이올리니스트 현이군요?”
알렉산드로를 시작으로 배우들과 인사를 나눴지만 분위기가 심상찮다. 대부분의 엑센트가 내가 동시 녹음을 맡은 것에 불만을 품은 기색이 역력했기에.
‘기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속된 말로 영화촬영장은 감독과 주연배우의 드잡이질이 심하다고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장피에르는 입봉작인 라비안로제를 흥행시켰을 뿐 아직 명감독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2년 차였으니 입김이 약할 수밖에. 그에 반해 알렉산드로와 마르티나는 십수 년의 세월 동
안 헐리우드에서 버텼으니 그 내공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미안합니다, 현. 분위기가 라비안로제 때랑은 많이 다르죠? 사실 바이올리니스트로 현을 기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은 배우들이 있습니다. 파가니니의 연주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좀 더 연륜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낫지 않냐면서요.”
장피에르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앞선 광경이 이해가 되었다. 아무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국제콩쿠르 수상 후에는 활동이 아예 없었으니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낙하산으로 보일 수밖에. 더군다나 이 신뢰감 없는 짧은 몸뚱이도 단단히 한몫한 것일 테지.
“감독님, 혹시 남는 연습용 바이올린 하나 있나요?”
실력에 의문이 든다면 보여주면 그만인 것이다. 하물며 타이밍 좋게 세트장도 완성되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무대 위에서 연주하면 그 맛도 색다르리라. 소품팀 막내가 연습용 바이올린 몇 개를 가지고 나타났다. 개중에는 쓸만한 것도 있었지만 난 가장 관리가 안 되고
낡은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잠깐만 주목해주십시오. 먼저 제 소개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바이올리니스트 현이라고 합니다. 휴일에도 촬영장에 나와 대본리딩에 열중이신 배우분들과 스태프분들을 위해 제가 바이올린 곡 한 곡을 들려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담한 목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졌다. 꼬마 아이가 무대 위에 당당히 서 있으니 신기하기도 할 테지. 임혜라 이사장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모두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 그 순간 낡은 바이올린을 내려다 봤다.
울림판이 녹슨 것은 물론, 언제 끊어져도 이상치 않을 만큼 현들이 헤져있었다.
일전 런던심포니 앞에서 연주하다 현이 끊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감각을 살려 G현 하나로 연주를 연습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경험 이었으니. 더군다나 시각적인 효과도 뛰어나지 않은가. 물흐르듯 자세를 취하자 알렉산드로가 자세를 앞당기는 것
이 보였다. 과연 어떤 연주를 보여줄지 흥미가 동한 것이다. 아마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연주이리라.
그 순간 천천히 들어 올려진 활이 현과 맞닿자.
지잉―!
날카로운 고음과 함께 첫 번째 현이 끊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