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8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89화 >
어?
손유하가 캐비넷을 열고는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내용물에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편지와 초콜렛이 수두룩했기 때문. 고백편지야 늘상 받는 것이었고 초콜렛은 아마 시험 기간이 다가와 넣어놓은 듯하다. 정성은 고맙다만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매번 처리하는 것
도 곤욕이었으니.
“유하―!”
그때 흑인 소녀가 부리나케 손유하를 찾아왔다.
“뭐야? 또 언제 이렇게 받은 거야?”
캐비넷의 상황을 본 흑은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어째 친구의 인기가 하루가 멀다하고 천정을 치솟고 있는 듯 하다. 오죽하면 다른 학교에서도 손유하에게 고백을 하러오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됐어?”
맑은 눈동자에는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것도 그럴 것이 시험이 코앞이거늘 일주일이나 한국을 다녀오지 않았던가. 특별한 공연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닐 터였다. 분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온 것이리라. 손유하의 들뜬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놀이공원 같이 다녀왔어?”
“응, 다녀왔어.”
“역시―!”
흑인 소녀가 두 손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연애필승법을 전수해주지 않았던가. 좋아하는 이성과 함께 놀이공원에 간다. 위험한 어트랙션을 차례대로 접수해서 상대방의 심장을 들뜨게 한다. 심리학적으로 심장박동수가 빨라질수록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니. 분명 고백은 단번에 성공했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명문 필립스의 퀸카, 손유하이지 않은가.
“드디어 사귀기로 한 거야?”
“아니.”
“뭐어?”
고백할 타이밍을 놓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유하의 얼굴에는 행복한 홍조가 가득했다. 지갑을 손에서 꼭 놓지 않는 것이 꼭 저 안에 무언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도대체 얼음장미 손유하를 홀린 남자가 누구일지, 분명
탑건의 톰쿠르즈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모델 카야보다 다리가 길쭉하리라.
*
키가 작은 꼬마였다. 헌데 저 위압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꿀꺽―!
알렉산드로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첫 번째 현이 끊어짐과 동시에 소품팀의 막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바이올린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허나 장피에르가 곧장 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알렉산드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분명.
‘일부러 끊었어.’
바이올린을 배운 알렉산드로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활을 강하게 짓눌러 현을 끊는 모습이. 하지만 헤진 현이라고 할지라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E현은 가늘지만 금속현을 사용하지 않는가. 습도를 머금었다고 해서 저리 단칼에 끊어지지는 않는다.
분명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지잉―!
또다시 날카로운 고음이 천정에 닿았다. 이번에는 A현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활이 현을 베었다. 경종을 울리는 그 소리에 여배우 마르티나까지 대본집을 내려둔 채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또다시 현이 끊어졌다. E현을 시작으로 A현과 D현에 이르기까지 높은 음을
내는 순서를 따라 현이 끊어지고 있었다. 마치 두고 보라는 것처럼. 알렉산드로는 저도 모르게 손에 진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
문득 백아절현이 떠올랐다.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의 줄을 끊어버린 백아처럼 끊어진 현들이 힘없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음색을 내지 못할 만큼 헤져있었으니 미련은 없으리라.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며 모든 현을 끊어버린 한편, 어찌 보면 난 모두를 설득
시키기 위해 그런 것이니 이유는 판이하게 달랐다. 드디어 폐부를 휘젓는 것처럼 날카로운 활 끝이 마지막 남은 현과 닿는 순간이었다.
······!
이전과는 다른 풍부한 선율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바하 그리고 빌헬미가 G선상의 아리아에서 G선을 선택한 이유는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풍부한 음색은 물론 상대방의 눈과 귀를 앗아갈 만큼 현혹 적인 글리산도 때문이리라. 활이 현 위를 매섭게 보잉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놓는다면 장력 때문에 브릿지는 물론 활 또한 튕겨 나갈 것이다.
현, 여왕의 포르타멘토.
일전에 백정훈이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히로세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곡이 있냐고. 물론, 당시에는 미완의 곡이었던 여왕의 포르타멘토를 며칠 밤낮을 고생한 끝에 겹세로줄 위 페르마타를 찍을 수 있었다.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던 현의 여왕에게서 영감을
받은 곡. 현 하나로 연주를 하지만 마치 4개의 현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해야 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청중들이 보였다. 아무렴, 어떨 때는 애절한 선율이 귓가를 파고들었고 또 다른 때에는 화려한 선율을 자랑하지 않는가. 음색이 가장 낮은 G현에서 나는 선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하다. 하나의 현이었지만 현을 짚은 손가락을 그 어느 때
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무뎌질 것 같은 비브라토를 시작으로 몰아치는 파도처럼 활이 현 위를 끊임없이 보잉했다. 우아한 음색 뒤에 찾아오는 구슬픈 선율에 청중들이 또다시 숨을 집어삼켰다. 낭만주의 시대를 재현한 공연장이었다. 곡의 색조 또한 낭만주의 시대를 표현하고 있
었다. 어느새 팔이 엷게 떨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낡은 바이올린이 현을 번들거리며 기쁨의 아리아를 외치고 있었기에.
마치 고고한 붉은 장미를 보듯 아름답지만 범접할 수 없는 선율의 연속. 붉은 드레스를 펄럭이던 현의 여왕을 떠올리며 작곡한 악보였다. 청중들은 이미 마지막 남은 현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이 하나 남은 현을 비추었다. 낡은 연습용 바이올린에
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일 것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나갈 차례다.
서슬 퍼런 칼날처럼 활이 현 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듯 낡은 바이올린이 소리치고 있었다. 굵은 땀방울과 함께 몰아치는 선율이 비장하고 서슬 퍼렇기까지 하다. 이제는 관심 없던 배우들조차도 하나의 청중이 되어 두 손을 가득 움켜쥐고 있
었다. 그러나 황홀했던 연주에도 마지막은 있는 법이다. 낮게 깔리던 음색이 활화산처럼 피어오르던 그 순간.
지잉―!
청명한 고음과 함께 마지막 현이 끊어졌다.
* * *
“감독님, 도대체 그 아이 정체가 뭐에요?”
여배우 마르티나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처음에는 감독이 황소고집을 부리는 줄만 알았다. 것도 그럴 것이 세트장에 나타난 바이올리니스트는 영락없는 꼬마였으니까. 무대 위에 올라 당당히 이목을 끌 때만 해도 그랬다. 나이에 비해 꽤나 배짱이 있는 아
이구나하고 말이다. 허나 바이올린을 켜는 순간 주변의 온도가 확 달라졌다.
“심장이 마치 요동치는 것 같았다니까요?”
헐리우드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륜 있는 마르티나였다. 신인 시절 처음 촬영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만큼이나 떨렸다면 그 누가 믿을까. 낡은 바이올린의 현이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심장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종국에 하나의 현으로 아리
아를 펼쳐나갈 때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으니. 니콜로 파가니니의 일화가 과장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머리에 경종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장피에르는 달라진 촬영장의 풍경에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어린 바이올리니스트의 기용에 불신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투자사마저도 장피에르의 선택에 만류를 표했을 정도이니. 아무렴, 라비안로제 때와는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
를 번갈아 가며 로케촬영을 해야 할 정도로 촬영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단 한 번의 연주에 청중의 눈과 귀를 앗아가다.’
니콜로 파가니니가 그랬다지. 자신을 악마라 칭했던 종교인들을 단 한 번의 연주로 현혹했다고 하니. 마치 전설 속 일화가 눈앞에서 재현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알렉산드로, 어땠습니까?”
알렉산드로는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연주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고장 난 손가락으로는 따라갈 수 없으리라. 내기의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클래식에는 관심도 없던 마르티나가 어린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 비디오를 보고 싶다고 매니저에
게 재촉할 정도였으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감독님.”
“아닙니다, 그의 연주를 보기 전까지 다들 알렉산드로와 똑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오만이고 자만이었다. 부족한 것은 어린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자신이었기에. 걸출한 파가니니의 외형을 만들고자 다짐하지 않았던가. 헌데 과연 그의 연주를 흉내 낼 수나 있을까. 자존심을 살필 시간조차 부족했으니. 알렉산드로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감독님, 그 바이올리니스트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
“현아, 여기 스파게티 정말 맛있지 않니?”
로마의 골목길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맞이한 저녁이었다. 칼국수 모양의 파스타 위에 치즈를 뿌린 페투치니 알프레도부터 시작해서 라자냐, 나폴리피자에 이르기까지 성대한 한상 차림이었다. 부자들이라고 해서 매번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몸에 좋은 식사를 하는 것
은 아니다. 하물며 임혜라 이사장은 안성탕면을 즐겨 먹었으니. 겉으로 두른 옷은 명품일지라도 속은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역시 이태리에 오면 라자냐는 꼭 먹어줘야 해, 여기가 아줌마가 처녀 시절 때 여행하다가 발견한 맛집인데 이십 년이 지나도 맛이 그대로인 거 있지? 그때는 일선 씨랑 자주 왔었는데 말이야.”
나도 모르게 스파게티를 입 밖으로 뿜어낼 뻔했다. 손일선 사장의 이름을 저렇게 정답게 부르는 이는 몇 없을 것이다. 어째 들뜬 임혜라 이사장의 얼굴을 보니 업무차 보호자로 온 것이 아니라, 여행을 온 것 같았으니.
“참, 아까는 한 방 제대로 먹였던데?” “그냥 고생하시는 배우분들과 스태프분들을 위해 연주한 거뿐이에요.”
“아줌마는 현이 네가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갈 줄은 상상도 못 했는걸? 거기다가 바이올린 줄을 끊어서 연주할 줄은 정말이지. 왜 장피에르 그 친구가 현이 너를 그토록 원했는지 알 것 같더라. 겸손할 필요 없어, 오히려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되는거야.”
임혜라 이사장 또한 촬영현장의 기류가 이상했다는 것을 진즉에 눈치챘을 것이다. 허나 내가 그런 식으로 흐름을 타파할 줄은 몰랐을 테지. 세트장을 벗어날 때까지 날 멍하니 바라봤던 알렉산드로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로마에 왔으면 아무래도 포폴로 광장으로 가봐야겠죠?”
식사를 끝마치고 로마의 북문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로마가 영원의 도시라 불리며 유명 관광지였지만 너무 들뜬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러다가는 괴테가 머물렀다는 하우스는 물론 트레비 분수 앞에서 동전까지 던질 기세였으니.
“사장님, 저는 호텔에 먼저 가서 쉬면 안 될까요?”
“현아, 아줌마한테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유하가 알면 아줌마 혼나.”
임혜라 이사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그나저나 손아귀가 조금 아려왔다. 아무래도 세트장에서 했던 연주 때문일 터. 팽팽하게 부푼 현과 활이 어긋나지 않게 장력과 마찰력을 고스란히 견디지 않았던가.
“오늘 일정의 끝은 경매장이야.”
“경매장이요?”
“그래, 같이 안 갈래?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야.”
미술품 옥션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난 삶에서 몇 번 가봤던 곳이다. 보통 유럽에서는 오전에 열리지만 아무래도 이번 이태리에서는 저녁에 시작되는 듯 했다. 하물며 초대장이 없고서야 아무나 참석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수억 원이 호가하는
현대미술을 봐서 뭣하겠는가. 미리 사놔서 값을 불리자고? 아서라, 그렇게 돈을 벌 거였으면 주식부터 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이번 경매에 과르네리가 출품된다고 하던데?”
바이올린 삼신기 중 하나를 일컫는 말에 상념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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