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90)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90화 >
“27번, 105만 달러―!”
이태리 화가 앙리의 빛과 그림자, 얼핏 보기에는 여섯 살짜리 아이가 붓으로 캔버스에 장난을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이보다 아방가르드한 작품이 없었으니. 훗날 지금 가격의 열 배가 된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까.
“121번, 110만 달러.” “98번 115만 달러.”
5만 달러 단위로 호가되는 옥션이었다. 본래라면 마지막 낙찰자를 제외하곤 패들을 부르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프라이빗한 경매장이다보니 한 명 한 명씩 다 호명해주는 것이 특징이었지. 그때 임혜라 이사장이 번호판을 들었다.
“77번, 120만 달러.” “120만 달러.” “120만 달러.”
역시 쇳복은 타고난 여자였다. 돈이 되는 작품마다 쏙쏙 낙찰받지 않는가. 하물며 수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들을 대하는 태도에 거리낌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곧이어 세 번 호가가 끝나자 경매대를 두드리는 낙찰봉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아, 어때 재미있지 않니?”
아무렴,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신기한 것투성일 테지.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값비싼 경험이리라. 허나.
‘골백번을 다녔다고요.’
지난 삶 지겨울 정도로 옥션을 찾아 다니지 않았던가. 특히나 임혜라 이사장의 밑에 있을 때 주말마다 홍콩 소더비에 출근 도장을 찍듯 했었다. 이사장의 눈에 들고자 법전을 공부하듯 현대미술을 공부했던 나다. 과장을 더 하자면 노련해 보이는 늙은 경매사보다도 내
가 더 아는 바가 많을 것이다.
“다음 작품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루비 드 르랭의 생각하는 여인입니다.”
어?
나도 모르게 눈이 번뜩였다. 값비싼 작품이냐고? 작품이 호명되자마자 득달같이 번호판을 들어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도 못 느끼겠는가. 아마 이번 옥션의 가장 핫한 품목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훗날 르랭의 생각하는 여인은.
‘위작으로 밝혀지니까.’
때때로 콜렉터들의 입김에 따라 위작이 진품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르랭의 경우는 달랐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이 르랭의 작품을 매입해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정밀 검사결과 위작임이 들통난 것이었으니 빼도 박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짜인지도 모르고 득달
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니 뭐가 미술품을 사는 것인지 주식을 사는 것인지 모를 정도다.
“현이가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니 이번 건 사면 안 되겠네.”
“네?”
설마하니 내 표정을 보고 여태껏 계속해서 낙찰을 진행해왔다는 것인가. 임혜라 이사장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월드컵 승리를 알아맞혔다는 어항 속 문어가 된 기분이었으니 앞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다음 작품은 1743년에 제작된 올드바이올린 과르네리 입니다.”
내 심장이 사정없이 뛰기 시작한 것은.
*
“영감탱이, 운남성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일세.”
왕회장이 마치 보물을 자랑하듯 진한 보이차를 따라주었다. 보이차의 발현지이자 차마고도의 교점 중 하나인 보이현에서 값비싼 가격을 치르고 가져온 것이다. 숙성년도가 아주 오래되었다 보니 돈만 가지고는 구할 수 없는 아주 진귀한 상품이었다. 오죽하면 산삼에
비견되고는 하겠는가.
“손가, 이 귀한 걸 어째 혼자서 아껴먹지 않고?”
“어허,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섭섭하게 먹을 것을 탐하겠는가. 더군다나.”
“더군다나?”
“함께 식장에 앉아야지 않겠나.”
장례식장을 말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 들뜬 얼굴을 보니 결혼식장을 말하는 것일 터.
“영감탱이, 내 재밌는 걸 하나 보여줄까?”
왕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주섬주섬 무얼 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 사진 한 장이었다. 도통 표정의 변화가 없는 왕회장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이니 총각시절 찍었던 첫사랑 사진이기라도 한 걸까. 이윽고 사진을 확인하던 유회장의 눈이 화등잔만 하
게 떠졌다. “사진관에 부탁해서 내 몰래 한 장을 더 인화해왔지. 욘석들이 이제보니 아주 죽고 못살지 않나.”
“공항에서부터 눈 여겨봤는데, 이 사진은 완전 영화의 한 장면 같구만.”
“그려, 마음 같아서는 거실에 큼지막한 액자로 걸어버리고 싶네만 주책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싶어 참았네.”
“손가, 사진을 몰래 인화해온 건 주책이 아니고?”
“크흠, 욘석들이 보통 귀여워야지.”
풋풋한 사랑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서로 입을 맞추는 사진이 아닌가. 화려하게 피어오른 분수대가 축포를 쏘아 올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할아버지 된 심정으로 입꼬리가 안 올라가고 못 배길 것이다.
“참, 그리고 내 손녀사위를 위해 선물도 준비해놨네.”
“손녀사위?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유회장,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좋은 것일수록 먼저 침을 바르지 않으면 누가 채간다는 것을 말이야.”
도대체 무슨 침을 바르려고?
*
“103번 80만 달러―!”
어째 경쟁이라도 하듯이 가격이 치솟고 있었다. 과르네리쯤 되는 올드바이올린은 보통 특유의 별명이 붙기 마련인데 녀석은 없었다. 경매사의 말에 의하면 부호의 저택에서 관상용으로 보관되었던 악기라고.
“99번 95만 달러.” “120번 100만 달러.”
고작 악기 하나가 너무 비싼 게 아니냐고? 아서라, 훗날 옥션 타리시오에서 경매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레이디 블런트’는 1590만달러를 호가했을 정도이니. 하물며 낙찰가를 비밀에 붙이는 소더비의 블라인드 경매까지 더해진다면 그 가격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악기
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으로 취급하는 것이 맞았다.
두근 두근 두근.
지난 삶 그 흔한 시계나 자동차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돌이켜보면 취미생활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니. 헌데 어찌해서 저 올드바이올린 하나에 심장이 이렇게 뜨겁게 요동치는 것일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앞에 있는 번호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
지만.
“130번 110만 달러.”
가격이 천정을 치솟고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저작권 수입이 짭짤하다고는 해도 한 번에 저만큼 되는 큰 금액을 지불할 능력은 없으니.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새 과르네리의 가격은 벌써 130만 달러를 돌파했다. 못 먹는 감 쳐다나 보자는 심정으로 관망했지만
어째 애만 더 타는 기분이다. 여자들이 명품 핸드백을 좋아하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스트라디바리우스 ‘환상’이 있음에도 과르네리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순간.
“77번, 150만 달러―!”
옆자리에 앉아있던 임혜라 이사장이 번호판을 들어 보였다. 어째서? 현대미술에만 관심이 있는것이 아니었던가. 화룡점정을 찍는 낙찰가에 결국 경매대를 두드리는 낙찰봉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때였다. 임혜라 이사장이 나를 바라보며 윙크를 한 것은.
“현이 네 거야.”
“네?”
“아버님이 작곡료라고 하면 알 거라던데?”
장난처럼 말했던 것이 아닌가. 제일그룹 사가를 작곡하는 대신 삼신기 중 하나를 사달라고 했던 것이. 어째 이렇게 비싼 걸 받아도 되나 싶었지만 이미 들뜬 가슴만큼이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 * *
“니콜로 파가니니에 관한 영화를 제작한다고요?”
찻잔에 띄워진 꽃잎이 싱그러운 내음을 냈다.
“정말이지 행복한 여행이군요. 이태리에서 파가니니의 영화가 제작될 줄이야.”
“마에스트로,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설마하니 마에스트로께서 이태리에 계실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만약 에덴 씨가 제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안타까웠을 겁니다.”
장피에르의 얼굴에는 행복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앞에 앉은 노신사가 누구인가.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이지 않은가. 벨기에 교향악단의 지휘자 에덴과 친분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만날 수조차 없는 인물. 음악과 관련한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가들
의 첨삭이다. 이론으로 아는 것과 실전은 다르니.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노신사는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이 늙은이가 촬영장에 가는 것이 혹 실례가 되는 건 아닐는지요? 다들 예민할텐데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건 아닐지 우려가 되는군요.”
“마에스트로, 누가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독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군요. 헌데 동시 녹음을 맡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누구입니까?”
아무렴, 궁금할만도 핬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재현하는 이가 아닌가. 구스타프의 주름진 눈가에는 호기심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현입니다. 아실지는 모르시겠지만 아시아의 전도유망한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그 순간 찻잔에 띄워진 꽃잎이 흔들렸다.
“장피에르 감독님은 영화를 보는 안목이 뛰어날뿐더러 음악가를 보는 안목도 뛰어나군요.”
“네?”
“아무래도 이태리에서 좀 더 오래 머물러야겠습니다.”
예상에 없던 구스타프의 미소였다.
*
숫제 가슴속에 뜨거워진 돌맹이가 있다면 이럴 것이다. 옥션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심장이 계속해서 두근 되고 있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과르네리의 현을 켜보고 싶은 마음이 절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매에도 낙찰품을 인도받기까지 절차가 있었기에
내 손에 들어오려면 시일이 필요했으니. 그나저나.
‘제대로 코 꿰이는 거 아니야?’
어째 왕회장이 엄지를 치켜든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제일그룹 사가 작곡료로 바이올린 삼신기 중 하나를 받기로 했었지만 구두계약이었으니 법적인 효력은 미미했다. 일순 할아버지가 ‘데릴사위는 안된다’라고 말했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다 왔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촬영현장은 일전에 바이올린을 켰었던 공연장이었다. 첫 크랭크인부터 파가니니의 연주로 막을 올리니 아무래도 지금 가장 긴장되는 것은 니콜로 파가니니역을 맡은 배우 알렉산드로이리라. 며칠 전 내가 묵었던 호텔까지 찾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경
매장을 다녀오는 통에 시간이 엇갈려 끝내 만나지는 못했다.
“현,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십니다.”
“손님이요?”
“영화 전반적으로 조언을 해주실 저명한 음악가이십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찾아간 것이었는데 그분께서 너무나도 흔쾌히 수락을 해주시는 바람에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허나 장피에르의 상기된 얼굴을 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아무렴, 음악 영화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을수록 그 빛이 발하는 법이었으니.
“알렉산드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잠시 자세를 봐 드릴 수 있을까요?”
“크흠,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겠습니다. 현.”
파가니니처럼 분장을 끝마친 알렉산드로는 바이올린 자세를 잡는 것에 열중이었는데, 듣던 대로 대학 때까지 바이올린을 전공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자세가 남달랐다. 하루 이틀 배워서 흉내 낼 수 없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한 부분은 있
었으니.
“파가니니는 실제로 연주를 했을 때 검지 손가락을 좀 더 구부렸을 거예요. 남들보다 손가락이 길고 기형적으로 관절이 꺾어졌기에 가능한 연주기법이죠. 어깨의 자세도 좀더 틀어졌을 겁니다. 지금 알렉산드로 씨의 자세는 너무 정형적이거든요.”
알렉산드로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바이올린을 배운 이에게는 이 자세가 말이되지 않게 느껴질 테니. 샤펠에서도 그러했고 런던 심포니의 단원들도 그랬듯 대부분 처음에는 이렇게 믿지 못한다. 허나.
지잉.
한껏 달라진 선율에 알렉산드로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하니 자세를 교정해주는 것 때문에 선율이 달라질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마법같은 일련의 광경에 알렉산드로가 입을 떼지 못할 무렵이었다.
“어?”
시선 너머로 촬영현장으로 들어서는 휠체어 한 대가 보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휠체어를 밀고 있었고 그 앞에는 낯익은 노신사가 앉아있었다. 내 표정에 알렉산드로도 고개를 돌려 휠체어를 확인했다. 그 뒤 그의 눈이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졌으니.
“구, 구스타프?”
바이올린을 전공했더라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영원한 마에스트로의 등장에 장피에르가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알렉산드로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인지 분간이 안가 연신 옷소매로 눈을 비벼대고 있었다. 그때 장피에르와 인사를 끝마친 노신사가 내 쪽으로 향해 다
가오는 것이었으니.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가 내게 손을 먼저 내밀었다.
“오랜만이군요, 어린 마에스트로.”
어린 마에스트로?
알렉산드로는 이미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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