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28
227 악마를 보았다(1)
휘리릭!
바람처럼 가벼운 동선 속 천변의 변화를 일으키더니 어느새 상대의 사각을 점했다. 놀란 상대가 반응하기도 전, 발이 목에 닿았다.
퍼억!
아래에서 위를 선점했지만, 발은 위에서 아래로 찍듯이 변화하여 목을 강타했다. 목을 내어 준 상대는 바닥에 찍히며 무너져 내렸다.
쿠억!
승복하지 못한 상대의 저항에도, 선기를 잡은 그는 놓치지 않고 연이어 발을 썼다.
퍼퍼퍽!
반사적으로 일어났다가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싸대기가 아닌 발싸대기를 맞은 것이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며 코피가 홍수처럼 흘렀다.
“더 할래?”
“……졌소!”
“그런 실력으로 잘도 도전했네. 용기는 가상해. 하지만 내가 바로 천운권이야, 천운권! 아니지, 이젠 천권이지. 뭐, 너한테는 영광스러운 대결이었겠지.”
“……그럴 리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나름 이 바닥에서 이름이 있었다. 귀영각 비호 하면 발재간으로 따를 자가 없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각법을 써 보기도 전에 발에 당했다. 완패였다. 인정해야 마땅하나, 저 인간의 자랑질에 소모된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크억!
주화입마가 오려는지 더는 버티지 못했다. 비호는 삶의 회한을 객혈로 표현하며 기절해 버렸다.
“자, 다음.”
“……!”
많지 않은 도전자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당해도 너무 추하게 당하고 말았다. 핏줄기를 경쾌하게 뿜으며 쓰러진 귀영각은 자신들과 비교해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다. 명성을 좇다가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크하하하하, 네놈들은 운이 좋구나. 하긴, 내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겠지.”
천운권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절정의 무력은 확실했다. 그러나 저 주둥이와 마주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현실을 망각하고 달려들게 되었다.
귀영각도 처음에는 도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 얍삽한 주둥이를 뭉개 버리려다가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한 것이다.
권선징악은 이상에 불과했다.
두둥!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도에 천운권에게 도전하려고 했던 무인들의 시선을 주목하게 했다. 자신들로선 감히 다가서기 어렵게 하는 위엄이 서렸다.
‘허어, 신검마협이라더니!’
‘청양이 아니라 안휘십수에도 들겠어!’
‘과연 고수답다. 저래야 고수지.’
‘젠장, 이놈은 왜 이래?’
그에 반해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천운권은 고수라기보다는 말만 많은 사기꾼처럼 보였다.
“형님께선 선약이 있으시오. 그러니 대결은 이쯤 합시다. 원한다면 내가 대신 상대해 주겠소.”
“아닙니다. 우리도 선약이 있는 걸 깜빡했습니다. 어서 가세!”
“가자고, 다들!”
남아 있던 몇 없는 무인들은 우르르! 파도에 떠밀리듯이 연무장을 서둘러 나섰다. 그들은 감히 신검마협에게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무장이 휑! 하고 조용해졌다.
“소문주님, 어떻습니까?”
“평소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잘했습니다. 어찌나 똑같은지 저도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선 나름의 인지도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수고해 주시오.”
“아무렴요.”
무호의 정중한 부탁에 나릉은 형제가 이렇게나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체감했다. 대인의 품격을 지닌 무호에 비하면, 주군은…… 상상하지 않으련다.
금제가 발동하면 식은땀을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강해질수록 금제도 강해지고 있었다. 성장하는 금제라니, 주군의 능력이 하늘에 이르렀다.
‘대접은 좋은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송호문에 귀환해 무호의 부름을 받은 후 주군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주군이 돌아올 때까지 적절하게 자신을 알리라는 명령이었다.
‘나야, 좋지 뭐.’
천무진경의 단계가 올라가면서 무공에 재미를 붙였다. 무인이 간절하게 강함을 좇는 심리를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동안 포기했던 상대들과 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주군에게 내 존재감을 보이겠어.’
-크크크!
‘이건 칭찬이라고.’
-누가 뭐래.
이 망할 놈의 금제,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왜 나만 금제를 해?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살아오면서 의적 소리도 가끔 들었다고!
***
북해빙궁에선 천존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그는 절대자였으며 압도적인 강자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강해도 권좌를 오래 비워 두었다. 폐관 수련이 길어질수록 궁의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흘러갔다. 외부의 인사를 맞이할 때마다 궁주의 빈자리가 부각되었다.
그럼에도 원로원은 천존이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 원로원은 스물에 불과하지만 빙궁의 핵심 세력이었다. 대소사에 관여하진 않아도, 원로원의 뜻을 대놓고 무시할 순 없었다.
하나, 권좌를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비워 놓은 적은 없었다. 천해각주는 빙궁의 역사를 거론하며 새로운 궁주를 뽑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명분은 차고 넘쳤다. 원로원도 더는 궁주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천해각주는 원로원을 설득한 후 칠가쟁패를 열기로 가주들과 협의를 보았다.
이제 가주들과의 경쟁을 통해 궁주를 뽑으면 그만이었다. 폐관 수련실에 틀어박힌 천존의 생사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가 설령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고 해도, 한 번 물려받은 궁주 위를 되돌리진 못한다. 찬탈이 아닌 모두의 뜻으로 추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뭐? 다시 말해 봐!”
“북궁세가에 북해성의 후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북궁사는 뭘 하고?”
“북궁사는 모든 실권을 잃고 자택에 연금을 당한 상태입니다.”
한소천은 또 한 번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리나케 연락해 오던 북궁사에게서 소식이 끊겼다.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고 보내왔었다. 북궁혜가 가문의 비전을 외인에게 전수했으니 책임을 묻겠다고.
도리어 당해서 자택에 연금을 당한 상태일 줄이야. 이는 자신의 동생도 갇혀 있다는 뜻이 되었다.
‘쯧, 멍청한.’
북궁사에게 기대가 크진 않았지만, 이렇게나 모자란 놈일 줄이야.
북해성의 후인은 예상하지 못한 절대적 변수였다. 차라리 북해성의 후인을 아무도 모르게 죽였어야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북해성의 후인임을 증명한 꼴이 되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다.
자신이 가주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궁의 각주가 된 것도, 여동생을 북궁세가에 시집보낸 것도 궁주가 되기 위한 초석이었다. 북해에서 북해빙궁의 궁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 누구도 궁주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는 북해빙궁의 불문율이었다.
그런 궁주조차도 넘지 못하는 벽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북해성이었다. 북해성은 북해의 모든 무인을 굽어보는 전설이었다. 이렇게 되면 궁주가 된다 한들 북해를 통제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놈의 무위가 어느 정도나 되지?”
“북궁사는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미련하기는 해도 북궁사는 제법 강했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를 일방적으로 제압했다면 최소한 화경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 그처럼 젊은 나이에 화경에 오른 고수라니, 천존을 능가하는 괴물 같은 천재성이었다. 북해성의 후인다운 자질을 겸비했다.
“죽일 놈, 하필이면 이때!”
북궁사와 무력단을 홀로 무력화시킨 놈이다. 살수나 용병을 쓰기도 마땅치 않았다. 가문의 힘을 쓴다면 흔적이 남을 수도 있었다. 다른 세가가 북해성을 감시하고 있다면, 자신이 손을 썼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우선은 칠가쟁패를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 힘을 쏟아.”
“예, 각주.”
칠가쟁패를 내세워 북해의 이목을 끌어온 후, 될수록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하는 수 없지.’
마지막 방점을 찍지 못하면 실패자가 된다.
한소천은 실패를 원치 않았다.
***
북궁세가의 세력 구도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북궁사에게 기울었던 힘의 균형추가 북궁혜를 향한 것이다. 북해성의 후인이 북궁혜를 지지한 효과였다. 천존이 건재했을 때와 같아졌다.
가솔들의 태도도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졌다. 대세가 기울었을 때와 달리, 북궁혜의 수족이 되려고 움직였다. 북해성은 물론, 천존이 돌아왔을 때를 고려한 것이다.
슈슈슈슉, 채채챙!
가주의 거처인 북천각을 되찾은 북궁혜는 연무장에서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놀람을 금치 못하게 하는 성장 속도였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검공이었다. 북해칠성검이 칠성에는 올랐을 것이다. 기존의 성취를 뛰어넘는 천재성을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북궁혜의 자세였다. 전혀 흐트러짐 없이 힘든 수련을 홀로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혹독한 훈련을 끝까지 수행해 냈다. 천재성뿐만이 아니라 독기까지 갖추었다.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범이었군.’
원 장로를 필두로 장로들은 북궁혜의 혹독한 훈련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들도 혈기 왕성했던 시절에는 무공에 몰두하여 하루를 보냈었지만, 북궁혜와 같은 독기를 갖추진 못했다.
하물며 방향성 없는 무모한 훈련이 아니었다. 검공의 발전이 놀라웠다. 곧, 대를 이어 천존의 반열에 오를 실력이었다.
‘우리가 늙었군. 보는 눈이 없었어.’
천존께서 입마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궁사를 차기 가주로서 선택했었다. 하지만 그는 북궁세가의 역사에 남을 치욕적인 행보를 해 왔다. 설천한가의 눈치를 보며 가주 위만 탐을 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북궁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저 어린아이가 아비를 지켜 내고, 가문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려 하고 있었다. 다 늙어 빠진 육신을 보신하려고 했던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자신들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비록 칠가쟁패에서 소득이 없다고 해도, 이번에는 북궁혜를 지켜야 했다.
“가세, 우리 일을 하자고.”
“예.”
장로들이 돌아간 후에도 북궁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 훈련에 집중했다.
하아, 하아.
차오르는 숨이 거칠었다. 체력은 물론, 내력의 소모도 극에 이르렀다. 육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결과였다. 그동안의 훈련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깨닫게 된 셈이었다.
“훈련하는 거야?”
“그런데요.”
“그렇구나.”
“왜요?”
“아냐, 아무것도. 애들아, 훈련해라.”
이전 무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자체로는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철호와 육칠의 훈련을 본 후에는 자신이 얼마나 나태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매번 할 수 있다고 입으로만 지껄인 꼴이었다. 다시 무진을 봤을 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근본적으로 노력의 양에서도 뒤진다고 말했던 것이다.
‘훈련의 밀도도 달랐어.’
단순히 훈련량만 많아서는 안 되었다. 하나의 초식을 익히는 데도 모든 걸 쏟아 내야 했다.
북해칠성검의 탐랑부터 파군까지 일곱 초식을 천천히 정확하게 펼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자 여태 보이지 않던 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북해칠성검의 겉모습에만 치중한 채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질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나아가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깨달음의 기쁨이 컸다.
성취는 자연히 따라왔다. 즐겁다고 해야 할까? 이 순간 느끼는 감정치고는 이상할 수 있었다. 가문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살얼음판의 균형이었다.
그런데 검을 수련할 때는 심란한 현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검에만 몰두하여 물아일체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