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20
319 필연인가?(1)
강바람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무진은 갑판 위에 있는 한 무리를 보았다. 배에 탈 때부터 어떤 부류인지는 알고 있었다.
‘화산파가 호북엔 어쩐 일이려나?’
-알아서 뭐 하게.
‘그러네.’
-자꾸 여자만 보면 동생이랑 엮지 좀 마라. 여난에 시달리는 네 동생이 불쌍하지도 않느냐.
‘무호는 그런 애가 아니잖아. 안 그래?’
-밝히긴 하지.
삼남일녀.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여인이 있었다. 화산에 저런 미녀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었다. 갑판의 사내들도 본능적으로 여인을 돌아보고 있었다.
무진은 잠시 돌아봤을 뿐, 흥미를 잃었다. 미래에 유명하지 않은 무인은, 남녀노소 중요하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여인을 보고 있을 바엔 집에 있을 아내를 그리워하는 편이 이득이었다.
관심을 끊으려는데.
“한 잔 주실래요?”
“비싼 건데.”
무진의 반문에 다가섰던 여인이 헛바람을 삼켰다.
그녀로선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
항상, 주변의 시선을 달고 살아왔기에, 자신을 보고서도 담담한 무진이 인상적이었다. 더욱이 이번 사건으로 심적으로 편치 않았었다. 술이 생각나서 마음이라도 달래려고 말을 걸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예상을 벗어났다.
그것이 한편으로 재밌기도 했다.
“독특한 분이네요.”
“그런 말 처음 듣습니다. 저는 매우 평범한 사람입니다.”
마왕이 지랄하지 말라고 계속 발광하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평범이란 말을 운운해선 안 된다고, 대역죄인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물론, 나를 역도로 몰면 그다음 날 황제는 맞아 죽을 거다. 이왕 역도가 됐으면 모함한 놈들을 시원하게 쳐 죽여야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평범한 사람 못 봤거든요.”
“안목이 높으신 소저군요. 맞습니다, 저는 굉장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혹, 절대고수일지도 모르니.”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이상해지는 묘한 사람이었다. 설마 자신을 상대로 대놓고 농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굉장히 신선했다.
“호호호호, 정말 재미난 분이시네. 저는 화산파의 홍설이라고 해요.”
“사정이 있어 신분을 밝히진 못하겠습니다. 대신, 진무라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대신, 무진은 새 잔을 꺼내 술을 따라서 홍설에게 건넸다.
그녀는 술잔을 받으면서.
“진무는 너무 노골적인데요. 그거 무당파의 진무대제를 딴 거 아니에요?”
“하면, 홍 소저께서 이름을 지어 주시면 되겠군요. 그걸로 하겠습니다.”
“신분을 숨길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뭐, 좋아요. 이것도 나쁘진 않네요. 천우진 어때요?”
“천우진이라고 합니다, 홍 소저.”
무진은 개명이 귀찮아서 대충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말했을 뿐이었다. 다른 의도는 없었음에도, 홍설에게는 흥미로운 대상이 되었다.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관심을 끌고 말았다.
‘이만하면 평범하지 않냐.’
-어디가?
‘홍설이 누구지? 유명하냐?’
-모른다.
‘하찮구나.’
-그렇겠지.
미래의 인지도는 현재를 파악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사람을 판별하는 데 이보다 적합한 방법도 드물었다. 홍설에 대한 작은 관심조차 대폭 줄어들었다. 쓸 만하면 연을 만들어 마왕의 말대로 동생에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나랑 달리 무호는 좋아할 거다.’
-줏대 없는 놈이구나.
한 여자에게 구속받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동생은 잘 몰랐다. 그러나 사람마다 각자의 성향이 있고, 취향은 존중해야 했다. 하물며 형으로서 강요는 하지 않는 편이다.
-강요가 아니라고?
‘대들면 맞아야지.’
한 잔을 마신 홍설은 깜짝 놀랐다.
주향이 예사롭지 않기는 했어도, 이렇게나 맛이 깊고 좋을 줄은 몰랐다. 시중에서 흔하게 구하기 힘든 명주가 분명했다. 그녀도 이런 명주는 마셔 보지 못했었다.
“이렇게 좋은 오량주는 처음이에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요.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아요.”
“염치는 없는 분이군요.”
“사양하면 안 줄 거잖아요.”
“눈치는 빠르군요.”
무진은 가지고 온 만두를 홍설에게 건네주었다.
홍설은 봇짐에서 계속 술과 안주가 나오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 다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저럴 거면 집에 있지, 살림살이를 들고 다녔다.
“수저를 가지고 다니시네요.”
“여행의 기본입니다.”
무진과 홍설의 대화가 길어지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도사들이 참지 못하고 다가왔다. 평소처럼 짧게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사내가 절세의 미남이나, 명성 높은 무인도 아닌 것 같고.
“저는 혼인했으며, 딸이 있습니다.”
“……?”
웬 사내놈이 사저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기에 다가섰던 적양, 적하, 적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가오자마자 이딴 식으로 철벽을 치는 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호호호호, 우리 사제들이 한 방 크게 먹었네요.”
“홍 소저에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테니, 오해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신분을 밝힐 수 없습니다.”
홍설은 이 사내가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밌었다. 대화를 하면서도 표정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런 데다가 혼인했다고 미리 못을 박아 사전에 오해를 차단해 버렸다. 신선하긴 한데, 살짝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본 도는 적양이라고 하오.”
“적하요.”
“적일이오.”
통성명을 원하자, 무진은 홍설이 지어 준 천우진이라고 소개했다. 뒤에서 다 들었던 적양, 적하, 적일 도사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무진을 보았다. 귀가 밝지 않아도 주목하면 들렸다. 하물며 자신들은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그 앞에서 대놓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걸 무례하다고 해야 할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젊은 도사들로선 겪어 보지 못한 유형이었다.
“좀 전엔 아내와 딸을 그리워한 건가요?”
“가까이 있어도 보고 싶고, 멀리 있으니 더 보고 싶습니다. 제 인생에서 아내와 딸을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와, 부인과 따님은 좋겠네요. 그런데 무남독녀인가요?”
“아들이 있긴 한데, 영 시원치 않아서.”
“차별은 나쁜 거예요.”
차별이라니, 아들에겐 심득을 전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아비의 정성을 몰라주고,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는 거지, 안 그래.
-그 나이에 강기면 괜찮은 수준 아닌가?
‘내 아들이자, 네 제자다.’
-안타깝군.
‘그러니까.’
전왕과 마왕의 아들이자 제자라면 최소한 절대경에 올라서야 했다. 그 정도도 되지 않으면 자신들의 무능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술은 안 됩니다. 이젠 제가 마실 양도 부족합니다.”
“아쉽네요. 혹, 파실 수는 없나요?”
“한 병에 금자로 스무 냥입니다.”
“……?”
“의심스럽다면 확인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 입이 호강했네요.”
홍설과 달리 도사들은 언짢은 기색이 완연했다. 한 병에 금자 스무 냥이라니. 그런 술을 저딴 식으로 처마시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수작 부리는 것 같아 솔직히 괘씸했다.
“믿기 어렵겠지요. 이러면 안 되지만, 한 잔씩은 드리지요.”
“어머, 그냥 저 세 잔 주세요.”
“홍 소저, 보기보다 욕심이 많군요.”
“금자로 스무 냥이면, 한 잔에 두 냥은 되잖아요.”
“도사는 욕심부리면 안 됩니다.”
“흐응, 저는 등선할 생각 없어요.”
홍설의 애교에 젊은 도사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문파에서 홍설은 폭군이었다. 얼마나 살벌하게 애들을 닦달하는지, 사제들 사이에선 악명이 자자했다.
그런 사저가 애교를 부리다니, 사문의 제자들이 봤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여하튼 관심은 갔다.
도사들은 무진이 따라 주는 술을 한 잔씩 마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었다. 혀를 만족시키는 깊은 풍미와 목을 타고 내려가는 부드러운 흐름까지. 명주를 마셔 보진 못했지만, 이것이 명주라고 확신했다.
아~~!
스무 냥 맞다.
적양, 적하, 적일은 한 잔으로 만족을 하지 못했다. 더 마시고 싶은지, 도사의 체면도 잊고 입술을 적셨다.
“어떻습니까?”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젊은 혈기로 호기로운 편이긴 해도 적양, 적하, 적일은 때가 묻지 않은 자들이었다. 무진의 기준으로 봤을 땐 부족한 실력과 더불어 성격적으로 크게 모나진 않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제가 인심을 쓰겠습니다.”
“호오, 천 형께선 반드시 복을 받으실 겁니다. 혹, 부적이라도 하나 적어 드릴까요?”
이거 나중에 화산에 말코도사들이 날뛰는 거 아닌지 몰라.
뭐, 내 문파 아니니까.
무진은 화산파의 도사들과 갑판에서 술판을 벌이며 강호의 소식을 나누었다. 근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무신총, 천무자, 암중 세력은 대화에 꼭 들어갔다.
“저는 그들보다 천운권이 궁금하던데요.”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굳이 그런 식으로 나올 필요가 있나 싶어요. 마치 의도한 것 같기도 하고.”
“호오. 홍 소저는 핵심을 간파하는 안목이 대단하군요.”
“천 형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람마다 특색이 다르니,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단정은 금물이지요.”
“그렇긴 해요.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친해진 것도 이상한 일이잖아요.”
젊은 도사들도 그 점이 특이하긴 했다. 홍 사저는 저런 식으로 사람과 대화를 잘 나누는 성격이 아니었다. 혹,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동인가 살폈지만, 이 사내는 팔불출이었다. 아내와 딸 자랑이 어찌나 심한지, 듣고 있으면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한편으로, 소외당하고 자란 아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음에도 안쓰러웠다. 나중에 만나면 복 받으라고, 부적이라도 적어 줄 요량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호북으로 넘어오게 된 겁니까?”
“공공연한 비밀이고, 숨긴다고 능사는 아니겠죠. 음적에게 당한 피해자 중에 제 사매가 있었어요.”
“저런, 대체 어떤 놈이 그런 간악한 짓을 했답니까?”
“색혼수사예요. 놈이 호북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추적하는 중이에요.”
색혼수사란 말을 듣자, 무진과 마왕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여태 홍설과 도사들을 띄엄띄엄 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어째서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겠네.’
-나도 몰랐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아예 다른 사람인 줄 알았으니.’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모르겠군.
마신대전 때 구파일방의 절반가량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시발점 중의 하나였다. 물론, 자세한 내막까지는 정확히 모른다.
관심이 없으니,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턱대고 따라다닐 수는 없으니 곤란하게 되었다.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말하면 여태 해 온 일들이 전부 뻘짓이 되지 않나.
‘운이 따르면 좋겠지만, 아니면 별수 없잖아.’
-그럴 거면서 고민은.
기억하고는 다른 모습일 뿐, 무진은 그녀의 가치를 약간 높이는 수준으로 정정하는 데 그쳤다.
시간은 흘러가고,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다고 무작정 따라가겠다고 하면 홍설과 도사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의심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무진은 운에 맡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사람의 운명을 이런 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잔인할 수도 있겠지만,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다음 선착장에 내렸다.
호북에서 안휘로 넘어가는 경계인 영산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무진은 선행을 베풀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더라.’
-귀신이 돼서 달라붙을까 봐, 염불하는 거냐?
‘안 죽을 수도 있지.’
-행여나.
알면서도 외면해서 살짝 양심의 가책을 받기는 했다. 그래서 적선하는 기분으로 홍설과 젊은 도장에게 진수성찬을 차려 주었다.
“이러다 돼지가 되겠어요.”
“무인치고 돼지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무공을 익혔는데 몸이 비대하다, 그건 그 자체로 흠이 된다. 익히고 있는 무공이 비대함을 원한다면 또 모를까. 무공은 뼈를 깎는 훈련과 성찰이 필요한 분야였다. 무인으로서 비대하다면 나태하다는 증거가 된다. 아니면 금분세수하여 강호를 등졌거나.
영산으로 가기 전 평야가 있었다.
무진은 평야에 들어서자 반대쪽에서 오는 자들의 기척을 읽었다.
‘하, 이런! 만날 사람은 만난다더니.’
-운이 좋군.
단순히 운이 좋다고 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반대쪽의 기운을 살펴보니, 이쪽과의 대비가 확실했다. 눈치 빠른 쥐새끼가 대놓고 나섰다면 자신만만하다는 의미가 되었다.
무진은 멈춰 서서 사실대로 밝혔다.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며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았고.
“색혼수사입니다.”
“예?”
“반대쪽에서 오고 있습니다. 한데, 혼자가 아니군요. 적어도 그에 준하는 놈들이 열 명은 됩니다.”
“……무슨?”
“옵니다. 화산파에 검진 같은 거 있다고 들었는데, 그거라도 펼치세요.”
무진의 돌연한 행동에 홍설과 도사들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너무 진지해서 자신들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렸다.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은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