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5
044 일승일패(2)
제갈세가와 비교하면 송호문은 존재조차 안개처럼 희미한 무명 문파였다. 그런데 기억이 난다고? 제갈세가가 청양으로 세력을 넓혔다면 또 모를까.
나 모르는 사이에 우리 문파가 유명해졌나?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무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제갈세가의 머리 좋은 인간들은 잠시 스치는 얼굴도 기억하는 특이한 놈들이니까.
그래서 제갈세가, 사천당문하고는 다툼을 벌이지 않는 편이 이롭다. 이 쫌생이들이 기억력은 좋아서 두고두고 짜증 나게 했다.
제갈군은 무진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뭐, 이해는 되었다.
“소룡대회에 참가했을 텐데, 이래도 떠오르지 않나?”
“……?”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떠벌리고 다닐 일도 아니고, 현재의 나는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을 텐데.
“혹시 최근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군요.”
도둑이 제 발 저렸네,
소호채를 토벌한 소문을 접한 건 아닌가 하여 조심스럽게 찔러보았는데, 다행이었다. 입단속 못 하고 소호채를 언급했다면 머리 좋은 제갈세가 놈이 눈치챌 수도 있었다.
“당시의 충격이 컸나 보군.”
“중요한 일 아니면 기억할 필요 있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자자,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식사나 하시지요.”
황보세령은 제갈군이 아버님과 만난 적이 있다고 하자 의아했다. 성향상 밖으로 싸돌아다닐 것 같지도 않고, 인맥이 넓지도 않았다. 하물며 제갈군이 기억하고 있다면, 아버님도 알고 있어야 했다.
제갈묵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황보세령처럼 신중하진 않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이자를 알고 있는 거예요?”
“소룡대회의 일차전에서 실력을 겨루었었다.”
“아버지는 삼십이강에 올랐었잖아요.”
“그렇지.”
이 부자 놈들이 뭐하는 거야!
왜 남이 밥 먹고 있는 데서 만담을 하고 지랄이야. 은근슬쩍 말도 놓았네. 이 버릇없는 애새끼가!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과거 무진은 소룡대회 일차전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철저히 농락당하고, 바지 끄덩이를 잡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다들 그 자리에서 나를 비웃었다. 실전도 아니고 비무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수를 쓰는 일은 위험했다. 그런 짓을 머리 좋은 제갈군이 감수할 리 없지 않은가. 그저 철저히 농락당했을 뿐이다.
‘놈은 내가 뛰쳐나가게 만든 원흉이었군.’
소룡대회의 비참함이 쌓이고 쌓여 무공에 대한 한이 컸다. 그러나 개화를 하기도 전에 세월은 흘러갔다. 모든 일의 원흉을 그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니 또 어이가 없네.
‘그러고 보니 이 새낀 어떻게 된 거지?’
-제갈세가는 귀찮은 존재거든. 가장 먼저 처리했지.
그래서였나?
무림맹의 군사였던 제갈신정이 용무길을 받아들인 것이. 그로서는 마신교를 대적할 자신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가문을 멸문시킨 마신교에 대한 뼈에 사무친 원한의 결과였다. 전쟁이 터졌을 때 제갈세가의 가주가 군사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원인이었다.
쩝, 아쉽네.
‘내가 처리하려고 했는데.’
-기억도 못 하면서 잘도 떠벌리는군.
어쨌든 이놈이 기분 나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과거를 다시 꺼냈을 땐 처맞을 각오를 한 거겠지.
‘이 원한은 갚아 줘야 제맛이겠지.’
-거봐, 넌 대형 사고상이라니까.
빌어먹을!
인정하긴 싫지만, 화딱지가 나서 참지를 못하겠다. 일단 깽판을 친 후 생각을 정리해 볼까? 망할, 아들이 걸렸다. 소룡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왔는데, 아비란 자가 깽판을 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왔다고 해 봐라.
‘아버지가 날 가만두지 않겠지.’
가장 중요한 아내는!
아내를 볼 낯이 없게 된다. 다른 일이야 욕이나 먹고 끝날 일이지만, 아내에게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매일 먹는 게 욕이다. 더 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평판도 아니고.
-천하의 전왕이 아내가 무서워서 뜻을 굽히다니, 어이가 없군.
‘흥, 결혼도 못 하고 뒈진 놈이 어따 대고 신소리야.’
무진은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돌아온 시간까지 계산하면 수십 년도 더 지났다. 지금까지 억하심정을 품는 것도 우스웠다.
당시의 울분을 토해 내고, 통쾌함을 맛보고 싶은 것은 인간인 이상 당연한 감정이다.
확 마, 내가 그때의 무지렁이인 줄 알아!
나 전왕이야, 전왕!
이렇게 소리를 치면 분이야 풀리겠지. 그러나 기억에도 흐릿한 분풀이를 하자고 아들의 노력을 뭉갤 순 없잖아.
‘이거, 아빠 다 됐네.’
-자화자찬도 이 정도면 병이야. 뿌듯해하지 마라!
무진은 인자한 아빠 미소로 아들을 보았다.
오싹!
아빠의 이상한 눈초리에 태진은 순간 오한이 들었다. 이건 분명 경고다. 아비의 굴욕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집에 가서 가만두지 않겠다는.
‘미안하지만 곱게 내려가진 못할 거야.’
태진은 오해는 해도 어리석진 않았다. 투기를 속으로 갈무리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아버지는 작은 원한도 잊지 않는, 좁쌀보다 작은 성향이었다.
제갈군이 태진을 훑으며 무진에게 물었다.
“자네 아들도 대회에 참가하나 보군.”
“그렇습니다.”
제갈군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소룡대회 일차전에서 질질 짜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던 무진이 떠오르자, 오랜 수양을 거쳤음에도 비웃음을 참아 내기 힘들었다.
“식사를 주문하지.”
제갈군은 주인을 불러 요리를 다시 내오라고 했다. 반 정도를 끝냈던 무진의 식사도 포함했다. 넓은 아량 같지만, 무진을 하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양반, 신경 긁을 줄 아네.’
무진은 제갈군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아들을 위해 참아 주었다.
고마운 줄 알아.
‘흥, 버러지 같은 놈이!’
제갈군이 이쯤에서 마무리하려는 것과 달리, 제갈묵은 황보세령의 옆에 앉아 있는 태진이 맘에 들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황보세가에 달라붙으려는 거머리에 불과했다.
“소룡대회도 이젠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이는 대회가 되었나 봐.”
제갈묵은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선은 태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너 같은 실력 없는 놈들 때문에 소룡대회가 퇴색되었다고.
의도가 분명했다.
‘제갈세가 놈들은 하나같이 음험하네.’
태진이 반응하기를 바라고 던진 회심의 수인 듯했다. 대응하지 않는다면 본인이 어중이떠중이임을 인정하는 게 될 테고.
“령 매, 마파두부가 참 맛있네요. 자요.”
“내가 해도 되는데.”
너는 짖어라, 그래서 어쩔 건데.
누차 말하지만, 태진은 오해는 해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제갈묵의 시선이 황보세령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분란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 굽히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보란 듯이 애정 행각을 벌이며 우리가 이런 사이라고 대놓고 밝혔다.
부르르!
령 매!
그런 단어는 평범한 사이에서 쓰지 않는다.
마치 연인을 빼앗긴 비련의 사내처럼 제갈묵의 눈빛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저놈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제가 뭘요?”
“아비나 그 아들이나 눈치가 없군.”
“눈치를 볼 일은 하지 않았는데요.”
제갈묵이 노려보자 태진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네가 노려봐 봤자, 승자는 따로 있는 법! 태진은 가진 자의 우쭐함을 만끽했다.
“황보 소저, 처신을 잘하지 않으면 세가를 욕먹이게 됩니다.”
“제가 처신을 잘못하고 있다는 건가요?”
“주변에 눈이 많습니다. 소저의 행실에 따라서 가문의 평판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제 처신은 제가 알아서 해요. 이 이상 무례를 범한다면 가문 차원에서 항의하겠어요.”
황보세령은 여지를 주지 않았다. 제갈묵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흠칫.
제갈묵은 가문을 들먹이려다가 멈칫했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녀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하물며 여인의 뒤에 숨은 저따위 형편없는 놈을 옹호하고 있으니 열이 받았다.
제갈묵은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문을 들먹이다니, 겁이 없구나.”
제갈군은 아들의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더욱이 가문을 들먹인 이상 물러서선 안 되었다. 오대세가는 동등한 위치처럼 보이나, 알게 모르게 알력 다툼이 있었다.
“거기까지!”
무진이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제갈군은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눈빛으로 돌아보다 흠칫했다. 감정의 기복이 사라진 무심한 두 눈에 담긴 차가움이 뇌리를 스쳤다.
움찔!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던 제갈군은 무섭게 인상을 구겼다.
“지금 그 말, 내게 한 건가?”
“그럼 너지, 누구겠어! 나이 처먹더니 귓구멍이 막혔냐?”
“……?”
무진의 막말에 제갈군만이 아니라 모두는 말문이 막혔다. 비록 시비를 먼저 걸기는 했어도,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제갈세가의 직계를 향해 막말을 대놓고 할 줄이야.
“지금 그 말로 네놈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시끄럽고, 뒤뜰로 따라와.”
무진은 주인장에게 별채가 어디인지 물었고 곧장 그곳으로 내려갔다.
휑!
덩그러니 남겨진 제갈군의 얼굴 근육이 좀처럼 풀리지 않은 채 푸들거렸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모욕이었다.
그렇다고 객잔 내에서 손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도망친다면 모를까, 밖에서 싸우자고 하는데 객잔 안에서 소란을 떨면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것이다.
‘네놈, 몸성히 끝나리라 생각하지 마라!’
제갈군도 무진을 뒤따랐다. 혹여 이대로 도망친다면 대륙 끝까지 추격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우르르!
사람들도 무진과 제갈군의 뒤를 따라나섰다.
소룡대회를 보러 왔는데, 의도치 않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관심이 천의무봉에 이른 종자들이 이런 재미난 대결을 놓칠 리가 있나.
“배짱 좋네. 상대는 제갈세가의 현악검이잖아.”
“아까 송호문이라고 했지?”
“그런 문파가 있기는 한 거야!”
“몰라, 저렇게까지 떠벌렸는데 뭔가 있지 않겠어?”
“없으면 웃기겠다.”
“비참하겠지.”
객잔에서 밥 먹다 말고 우르르 내려가자 이층이 한산해졌다.
태진, 철호, 황보세령은 자리에 앉은 채 득의양양한 제갈묵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너희 아빠 큰일 났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면 아버지께 말이라도 해 줄 수 있는데.”
“어서 먹어요. 음식 식으니.”
제갈군인지, 자갈군인지 잘 모르지만, 황보장성보다 강하진 않았다. 황보세령이 넌지시 자기 아버지가 좀 더 강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면 별 볼일 없다.
꿈틀!
아비가 사지로 끌려갔는데, 아들이란 놈이 밥이나 먹고 있었다. 제갈묵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자 재차 언급했다.
“네놈은 아비가 걱정되지도 않아!”
“마파두부 맛있네요.”
제갈묵은 이놈의 터무니없는 허세에 화가 났지만, 당장은 참았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그땐 상황이 아예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