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4
043 일승일패(1)
무진은 남궁세가 인근 대하객잔에 짐을 풀었다.
우선 먹고, 자고, 놀고 푹 쉰 후에 내일 남궁세가를 찾을 예정이다. 참가 신청은 간단했다. 소룡대회에 참가하는 소룡에겐 배첩이 따로 보내졌다.
남궁세가 주변이 인파로 객잔을 잡기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황보세가의 도움을 받았다. 황보세령이 신분을 밝히자 일사천리였다. 역시 오대세가란 배경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래서 명성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이다.
객잔의 이층 식탁에 앉았다. 객잔 내에서 식사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방에서 식사하기 불편한 구조였다.
“냉채는 뭐가 있죠?”
“맛에 따라 다릅니다. 신맛과 단맛을 좋아하시면 당초황과를 드시고, 맵고 짠맛을 원하시면 산랄황과를 드십니다.”
“당초황과, 고노육, 궁보계정, 마파두부, 도삭면을 먼저 주세요. 아버님, 백주로 고정공주 어때요?”
“우리 령이가 주도를 아는구나.”
무진은 황보세령의 대담한 고백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지만, 시아버지로서 며느리의 사랑을 지켜 주었다.
절대 오해하진 마라.
고정공주에 현혹되지 않았음을 천지신명에게 천명하는 바이다. 이를 부정하고 싶으면 전왕의 십격을 받아 내면 된다.
-그새 맘이 또 바뀌셨냐! 전왕이 아니라 팔랑귀였어!
‘고정관념은 버려야 발전하는 법이야.’
대하객잔은 황보세가와 연이 있었다. 객잔의 주인, 이항성이 황보세가에 은혜를 입고 삼십 년이 넘도록 인연의 끈을 이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전망이 좋은 이층의 창가로 잡아 주었다.
“황보장성 대협은 언제 오신다냐?”
“내일 남궁세가로 온다고 했어요. 대회 전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우선 한 잔 드세요.”
“나중에 따로 인사를 드려야겠다.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캬아, 좋구나.”
고정공주는 맑고 투명한 백주로, 맛과 향이 진하며 뒷맛이 깔끔했다. 다만 도수가 워낙 높아서 맛있다고 퍼마시면 패륜이 남의 일이 아니다.
‘맛보단 가격이지.’
일단 비싼 술이 맛있다. 부정하고 싶으면 해라. 그처럼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왜 그런지 따져 봐라. 비싼 술치고 맛없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싸구려 술은 맛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저 가격 대비 맛이 다를 뿐이다.
‘가성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도둑놈이 따로 없군.
내가 살 땐 가성비, 남이 살 때는 사치.
무진의 생활신조다.
그러면 아예 싸구려를 마시지 그러냐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무진은 최소한의 도리를 안다. 싸고 맛있는 술을 권했다.
나는 비싸고 맛있는 술을 마시고.
“가문에서 소호채 토벌 소식이 퍼지지 않도록 했어요. 혹, 불편하진 않으시죠?”
“개방이나 하오문이 냄새를 맡았으니 언제든 퍼질 일이야.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대하객잔, 괜찮네.
술맛이 끝내준다. 지금껏 마셔 보지 못한 극한의 맛을 끌어냈다. 그 미세한 맛을 찾아내는 자만이 주도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도 소룡대회에 나갔었다면서요?”
“그랬던 적이 있었지.”
태진은 아버지의 소룡대회에 대해서 다들 말하기 꺼려한다는 걸 문파에서 느꼈다. 아무도 그때 일을 되짚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강함을 알고 있기에 솔직히 이해가 되진 않았다. 망나니란 소문도 어쩌면 자신을 숨기기 위한 위장 아닌가? 그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황보세령과 철호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이 괴물 같은 양반의 과거사에 대해서 세심하게 알아볼 흔치 않은 기회였다.
“어땠어요?”
“어땠긴, 나가자마자 바로 탈락했지.”
무진의 자백에 황보세령과 철호는 고개를 저었다. 기연을 얻기 전이라고 해도, 실력 차가 그렇게나 크게 날까? 말하기 귀찮아서 회피하는 것 같았다.
‘기억 안 날 땐, 기억하지 않는 게 이롭지.’
무진의 당시 실력으론 죽었다 깨도 소룡대회 진출 자체가 불가능했다. 가문에서 어렵사리 힘을 보태, 청양의 대표로 뽑혔다. 따지고 보면 인재가 많지 않아 겨우 올라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나가자마자 보란 듯이 떨어졌다. 아버지와 장로들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실망 역시 크지 않았다.
‘나 때문에 무호가 피 봤지.’
그래서일까.
무진은 소룡대회에 오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기어이 가자고 했고, 아버지가 등을 떠밀었기에 하는 수 없이 왔을 뿐이다.
-잡놈이었군.
‘그 잡놈한테 뒈진 놈이!’
***
머리를 쓰는 가문으로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세가가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 제갈세가를 떠올린다. 이는 부정하기 힘든 역사였다. 신기제갈, 지략의 신으로 불리는 자들이 세가 단위로 모여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혈통.
피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때론 불특정의 변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파격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혈통의 굴레를 벗어나긴 힘들다.
자식을 보면 부모가 보인다, 호부 밑에 범이로다, 이런 말들이 왜 나왔겠는가.
제갈세가는 대대로 무림맹의 군사부를 장악하고 대군사를 배출했다. 그리고 환란이 있을 때마다 역할을 충실히 해 주었다.
대대로 군사의 가문으로 불린 제갈세가.
지략으론 따를 세력이 없다고 한다. 그럼 만족할까? 천만의 말씀. 그들도 엄연히 무림의 세가다.
군사의 가문이라고 하여 무공이 약하다고 본다면 명백한 오산이다. 기관진법과 군사전략에 특화되었을 뿐, 순수 무공에서도 명문 세가에 올려놓을 무력을 갖추었다.
그럼에도 제갈세가는 항시 무력에 목이 말랐다. 머리로는 강호제일로 평가받지만, 무력은 항상 오대세가의 말석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주이십일강.
스물한 명의 초인에 드는 무인의 양성. 제갈세가는 천하제일을 노리진 않았다. 다만, 그에 버금가는 절대고수가 필요했다.
제갈세가는 두뇌가 아닌 무력으로도 다른 명문 세가에 비해 부족하지 않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남궁세가에서 개최한 소룡대회도 그 일환이었다.
제갈세가에선 제갈현의 동생인 현악검 제갈군이 대회 참가를 위해 제갈민과 제갈묵을 데리고 왔다.
제갈민은 천기의 흐름을 검에 녹여 냈다고 하여 천기신검으로 불리는 현 가주의 막내아들이었다. 위로 두 형이 있기는 하나, 재능만 놓고 보면 세가에서도 기대가 컸다. 그에 반해 제갈묵은 제갈민과 나이가 같았지만, 거는 기대 자체가 달랐다.
“걱정하지 마세요. 민이만 아니면 누가 와도 제 상대는 아니에요.”
“어허, 방심은 실수를 부르는 법. 항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강호에서 방심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조차 너보다 못할 거라 여기지 마라.”
제갈군은 남궁세가의 객실에서 나와 아들과 함께 객잔에 들렀다. 가문에선 민이와 비교를 하지만, 검술만 놓고 보면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잘난 체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소룡대회에 출전하는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를 얕봐선 곤란하다. 적어도 오대세가의 후기지수와 붙기 전에 떨어져선 안 된다.
“자리는?”
“이층에 한 자리를 비워 놓았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서 창가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창가를 못 주겠다는 거야!”
아들이 객잔 주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나서려고 하자, 제갈군이 제지했다. 의창이었다면 아들의 불만을 받아 줄 수 있다. 그러나 여긴 남궁세가의 영역이었다. 불필요한 사고를 일으켜서 화젯거리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좋지 않았다.
“안내해 주게.”
“이리 오시지요.”
객잔 주인은 부자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입고 있는 무복만 봐도 그들이 제갈세가임을 알고 있었다. 무인은 자존심에 사는 동물이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원하는 대접을 해 주기 곤란할수록 조심해야 했다. 작은 꼬투리에 객잔이 망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층으로 올라선 부자는 주변을 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갈세가를 상징하는 푸른색의 무복을 떡하니 입고 있으니 당연했다.
흥!
제갈세가를 배경으로 둔 제갈묵의 눈엔 전부 하찮게 보였다.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했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띄는 일행이 있었다. 사실 일행이라기보다는 소녀가 제갈묵의 시선을 끌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사내는 미녀를 눈에 담아 두었다.
그래서 객잔에서는 미녀와 밥을 먹는 게 아니라고 했다.
절대고수가 아니고선.
“황보세가의 아이다.”
“황보세가의 묘녀 황보세령이겠군요.”
제갈세가의 정보력이 개방이나 하오문에 비하면 부족해 보이나, 실제로 큰 차이는 없다. 각 세가의 인물을 파악하는 작업은 그들에게 기본이나 다름이 없었다. 무림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보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저들은 누구죠?”
“눈에 익지 않구나.”
제갈군은 아들의 의도를 간파했다.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다.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아하, 이제부터 알아보면 되겠군요.”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창가에 앉아 있는 황보세령과 일행을 향해 제갈군과 제갈묵이 다가갔다.
‘다툼이 없으면 객잔이 아니지.’
무진은 두 놈의 관심이 맘에 들진 않았으나, 공짜로 얻어먹는 주제에 나대진 않았다. 사람이라면 받을 때의 성의를 기억해야 한다. 더욱이 남의 가게에서 자기 기분에 따른 분탕질은 상도가 없는 무뢰배나 하는 짓거리다.
‘인사나 하자는 거군.’
-과연 그럴까.
‘빈정대지 좀 마.’
-내기할까?
‘이거 맛있네.’
무진은 말을 돌렸다.
괜히 발목 잡힐 일은 애초에 하지도 않는다. 살면서 체감한 현실은, 호언장담은 통하지 않는다는 거다. 불상사는 항시 발생할 수 있기에 매사에 조심해야 했다.
황보세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군이 원하는 대접을 해 주었다. 명문일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은 필연적으로 따라왔다. 반대로 모른 척하면 자신을 무시했다고 속에 담아 둔다.
“제갈군 대협을 뵈어요.”
“십 년이 넘었을 텐데, 잊지 않았구나. 이리 만났는데 합석할 수 있을까?”
황보세령은 순간 망설였고, 제갈군은 머뭇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 자리의 주인은 황보세령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얜 열여섯 살입니다, 제갈군 대협.”
크흠!
제갈군은 무의식적으로 철호를 돌아봤을 뿐이지만, 무진은 잊지 않고 사실 적시를 해 주었다. 저 애의 액면가는 불혹이나, 마음만은 여린, 발랄 십육 세라고.
쯧쯧쯧!
어른이 돼서 애한테 상처나 주고.
말리는 시누이, 무진이었다.
부글부글!
차라리 말을 말지!
철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사내답게 생겼다고 사부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밤에는 가급적 돌아다니지 말고 자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자넨?”
“청양현 송호문의 강무진입니다.”
무진이 대답을 바라고 밝힌 건 아니다. 송호문을 아는 대륙의 무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의문이 되어야 했다. 그럼 간략하게 설명을 하면 된다.
“기억나는군.”
“기억이 난다고?”
“잊지 못할 기억일 텐데.”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