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8
008 변화(4)
“이제부터 무엇을 하고 살 생각이냐?”
“저야 제 안사람하고 자식들이랑 놀러 다닐 겁니다. 함께 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이잖아요.”
“그게 아비한테 할 말이더냐?”
“아버지가 건강하셔서 저는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란 말로 들린다만.”
“삼십 년은 거뜬하시죠?”
“잘한다고 했더니, 끝도 없구나. 괘씸한 녀석, 그만 나가 보거라.”
“무호는 잘할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무진은 회의실에서 퇴장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의논하기는 했어도, 서운함이 없다면 거짓말일 텐데 아내는 다가와서 다소곳이 손을 잡아 주었다. 이 시대의 여인상과는 다른 꿋꿋함이 담겼다.
내 여자지만 정말 당차다.
“당신은 제가 먹여 살려요.”
“요리하고 빨래는 나한테 맡겨. 당신은 바깥일에만 최선을 다해.”
“괜찮거든요.”
“내가 안 괜찮아. 같이 하자고.”
돈 벌어오는 아내를 위해 가사일 정도는 직접 하는 게 남편의 도리였다. 이제부터 조금씩 배워가고 싶기도 하고. 나가서 일하는 게 꼭 좋지만은 않았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데.
“많이 서운하지?”
“전 오히려 좋아요. 당신 적성에도 안 맞았잖아요. 못하기도 하고. 솔직히 나 믿고 너무 설쳤죠.”
“너무 대놓고 말하면…… 아냐, 맞아.”
보면 볼수록 예쁘고, 예쁜 짓만 하냐. 이런 여자를 두고 밖으로 나돌았다니. 다시 생각해봐도 멍청한 짓이었다. 내가 정말 그때는 뭔가에 씌우지 않고서야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다.
이 좋은 날 그냥 넘어갈 순 없지.
-확실히 몸이 참해.
‘넌 좀 닥쳐.’
분위기 좋았는데, 깨고 지랄이야.
상황 파악 못 하는 건 죽기 전이나, 후나 똑같네.
한 번 더 죽여야 하나?
-그럼 동귀어진이다.
***
송호문은 후계자가 바뀌는 중대한 결정이 있었음에도 어제, 오늘, 낼처럼 다르지 않은 하루가 되었다. 일상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파격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평온한 후계 구도의 교체였다.
무진의 존재감이 이렇게나 희미했다.
있으나 없으나, 타격은커녕 분위기만 더 좋아졌다. 분란의 씨앗을 제거했기에 문파는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다들 제자리를 찾아가고 무진도 나름 일거리를 찾았다.
청양엔 구화산에서 이어지는 산의 줄기가 있는데 송우산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문파에 필요한 나무를 해왔다.
무진은 매일 아침에 나가 한 짐 가득 지게를 지고 왔다.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앙증맞은 시선이 있었다. 보면 볼수록 무진은 깨물어 주고 싶어 안달이다.
저 조그만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걸 보면 나도 참 잘 생겼어.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고 너무 막 굴린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빠가 나무꾼도 아니고,”
“우리 태진이는 아빠가 나무꾼이라서 싫어?”
오빠로서 동생 앞에서는 의젓한 척해도, 어렸다. 아빠가 나무꾼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송호문은 무인의 문파였다. 아빠가 무인으로서 능력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응, 싫어.”
“아빠는 좋은데.”
“나무꾼이 어디가 좋아?”
“노는 것보다 낫지, 그럼 백수할까?”
“그건 더 싫어!”
삼촌이 후계자가 되어 문파를 받친 이후로 활기가 돌았다. 모두가 만족할 일이었다. 그러나 문파에서 유일하게 태진은 속이 상했다.
삼촌이 싫지는 않아도, 아빠 자리를 빼앗은 거잖아. 아빠가 비록 말썽을 부리고, 돈도 사기 맞고, 행패도 부린다지만…… 흠. 많이 부족하고 문파에서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아도.
아빠는 아빠다.
“나무 팔아서 태진이 좋아하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그만해야겠다.”
“아빠, 나 고기!”
“어이구, 우리 미주. 아빠가 나무 많이 팔아서 고기 많이 사줄게.”
색색의 당과로 모셔주마.
“응, 아빠!”
아들딸 구별 말고 잘 키우자면서, 미주만 예뻐하고. 아무리 의젓한 척 노력해도 태진은 꼬맹이에 불과했다. 안아 줄 줄 알고 손을 뻗다가 뻘쭘해서 뚱해졌다.
흥!
아빠 미워!
쪼르르!
태진이 나가자, 미주가 뒤뚱거리며 따랐다. 남매 사이가 좋다 못해 진드기가 따로 없다. 어딜 가든 미주가 태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 미주가 귀찮을 만도 한데, 태진은 잘 놀아 주었다.
오전 일과를 끝낸 무진은 아내와 밥을 먹고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을 만끽했다. 처마에 앉아 있는 이 평온하고 따분한 시간이 그리웠다. 집 나가면 개고생은, 진리였다.
-정말 생각 없이 사는군.
‘삶에 꼭 계획이 있어야 하냐.’
-마신교가 두렵지 않나?
‘나 전왕이야, 천천히 해도 돼.’
-자신감 하나는 천하제일이군.
‘당대의 천하제일이었거든.’
천경이 답답해하는 거 같아 말구멍을 터주었더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깟 나부랭이들이 세봤자 얼마나 세다고.
-진심이군.
‘당연하지.’
천경과의 사투는 사흘 밤낮으로 치를 만큼 치열했었다. 무공 수위만 놓고 보면 반수 가량의 미묘한 차이였으나 다시 싸운다면 무진은 하루 안에 승부에 마침표를 찍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싸운다면 6시진, 다음에는 10초 지적 안에 끝장을 낼 수 있었다.
어찌 그리 자신하냐고?
상대도 손 놓고 있지 않고서야.
맞는 말이나.
그것이 무장투의 무서운 점이다.
싸우면 싸울수록 진화를 한다. 단순히 공력의 수준이 높아지는 깨달음과는 다르다. 철저히 실전적인 감각으로 완성되는 초감각의 무공이었다. 한 번 싸워봤던 무공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본질을 탈탈 털어버린다. 설령 실력을 높인다고 해도 약점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승패는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전왕공은 완성되지도 않았다.
칠단의 전왕공만으로도 천경을 제압했다. 8단이나 9단에 이른다면 누가 됐든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땐 마신교든, 마신교 할아버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십 년이 길진 않을 거다.
‘짧지도 않지.’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시기를 따지면 굉장히 늦었다. 20살이 되어 탁기가 몸에 쌓이고, 정체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지배했던 무진이다. 따지고 보면 대기만성형이었다.
‘그리고 꽤 빠르잖아.’
-내 덕인 걸 잊지 마라.
‘생색내긴.’
-알았으면 통로 개방해라. 나도 보고 싶다.
‘닥쳐! 보길 뭘 봐.’
-오해하지 마라. 하늘이 보고 싶은 거다.
‘웃기고 자빠졌네.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이 자식이 마왕 주제에 아주 음탕했다. 마왕이면 끝판왕답게 근엄하게 행동을 해야지. 색마가 저리 가라 할 만큼 속이 시커먼 음란마왕이었다.
-왕년엔 나도 잘 나갔다. 알지 않나?
‘강제로 잡아다 가둬 놓고서 할 말이냐.’
-자발적인 계집도 많았다.
‘인질로 잡았잖아.’
-오해다.
‘오해는 무슨, 허수아비 주제에 할 건 다 했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만날 싸움만 어떻게 해.
‘네가 사람은 아니잖아.’
마왕이 직접 지시할 필요는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반감이 생기지 않을 순 없었다. 마신교는 피를 숭상하는 광신도의 집단이었다. 인간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고 보면 마왕의 성향이 나쁘다고 할 순 없었다. 혹독한 환경에서 사육을 당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놈들은 진정 마신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알았어, 몇 번을 말해.’
-수백 번을 말해도 부족하다.
‘나도 나름 계산적이거든. 걱정하지 마라.’
회귀 후 한가롭게 시간을 죽인다고 보면 곤란하다. 그간 전왕공은 3단을 넘어섰다. 짧은 시간 빠른 성취였다.
그러나 전왕공의 진정한 무서움은 공력이 아닌, 단련된 정신과 육체에 있었다. 극대화된 감각으로 극한의 상황에서도 공수가 가능해져야 한다.
무진은 나무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산에 가서 아침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 번 가봤던 길이라 불필요하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진 않았다.
‘너는 운기행공이나 계속해.’
-약았군.
무진은 가만히 있어도 운기행공을 하는 상태와 다르지 않았다. 천경이 마공을 운영하여 전왕공의 행공을 돕고 있었다. 통제권을 넘겨서 굳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공력을 쌓는 중이다.
공력이 늘어나는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너도 존재하고 있을 거 아냐.’
-그렇겠지.
‘만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모른다.
‘알고 있을 텐데.’
-생각해 둔 바는 있다.
‘호오, 꼼수는 쓰지 않겠다?’
-너 혼자만의 힘으론 힘들지 모르고. 나도 빚은 갚아주는 성격이다.
무진도 조금은 천경을 믿고 있었다.
사흘 밤낮을 싸워보니 어떤 성향인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배신을 할 거였으면 굳이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하지 않았다.
노리는 수가 짐작은 가는데 가급적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굳이 내가 직접 복수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었다. 실상, 보지도 못한 놈들인데,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더 이상했다.
‘얼추 궤도에 올랐고. 슬슬 보여줄 필요가 있겠지.’
-꼼수의 대가는 내가 아니라 너군.
‘혼자서 다 할 수 있다는 건 오만이야.’
-그런 주제에 홀로 잘도 설쳤더군.
‘옛날이야기지.’
-시간으로 따지면 지금이 과거다.
무진은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처마에서 빈둥거리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산에서 잡아 온 토끼의 가죽을 벗기고 피를 빼놓았다. 전왕 시절에도 혼자 생활을 해오다 보니 노숙 시 간단한 수준의 요리는 했었다.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름 발전된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나쁘지 않은 실력이긴 하나 구이가 최적화되었다.
비법 양념으로 비리지 않도록 간을 맞추고 시간을 달래며 노릇하게 구워주었다. 얼추 시간대를 보니 아내가 돌아올 때쯤엔 완성이 될 것이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괜찮아. 봐서 알잖아.”
유진을 따라 문파로 온 전칠과 그의 아내인 공진댁이 요리하는 무진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요리와 땔감은 원래 그들의 몫이었다. 일거리가 줄어 편하긴 한데, 마음이 편치 않다.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쉬어.”
“그러시다면 조금만 쉬겠습니다.”
전칠과 공진댁은 행여나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괜한 기우였다. 토끼를 손질하고 양념을 만드는 것이 하루 이틀에 완성된 솜씨가 아니었다.
“많이 할 거니까 가져가서 먹도록 해.”
“감사합니다. 나리.”
산토끼를 10마리나 잡아 왔다.
토끼 요리는 손질을 잘 못 하면 비린 맛이 나기에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무진은 20년간 독거 노총각으로서 나름의 비법을 터득했다.
“냄새가 좋네요.”
“그렇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요리 감각은 있다니까.”
전칠과 공진댁은 주인 나리의 솜씨에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여태까지 손에 물도 안 묻혀 본 양반이 이렇게나 칼솜씨가 좋을 줄 몰랐다. 무공을 배운 무인은 요리도 잘하는 모양이다.
특히 고기에 새긴 칼질이 예사롭지 않았다. 토끼의 결을 찾아 단숨에 베어냈다. 평생 주방에서 칼질만 해본 사람처럼 능수능란하다.
츠으으으!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익어갔다.
저녁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유진은 남편의 요리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건 함께 하는 이 자리였다. 싫은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항상 밖으로만 나돌았던 남편이었다. 요즈음 남편은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수고했어.”
“제가 뭘 했다고요?”
“바깥일이 얼마나 힘든데.”
“당신도 고생했어요.”
“나야, 방구석에서 빈둥대기만 했는데 뭘.”
방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아주 쉬웠다.
시간이 도리어 남는다.
반면에 아내는 문파의 재정을 담당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재정 관리가 보기보다 어렵다. 탁상에 앉아 시간만 보낸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문파의 예산에 맞추어서 집행해야 한다. 혹여, 모자라기라도 하는 날엔 각종 문제가 꼬리를 물고 발생하게 된다. 문파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내는 뛰어난 재정담당관이다.
어린 시절 상단에서 자란 여인답게 셈이 정확하고 빨랐다. 하물며 단호한 면도 있어 가볍게 봤다간 큰코다친다. 문파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작은 물건 하나, 아내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