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of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36
135화 수확(1)
-카이저.
머릿속으로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신은 흠칫 놀랐다.
그는 현재 파리로 향하는 레벨린 가문의 전용기 안에 있었다.
태블릿PC로 다운받아 놓았던 지난 경기 영상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왜 그러세요?”
곁에서 함께 보던 주디가 물었다.
“아냐. 잠깐 눈 좀 붙이고 올게.”
이신은 태블릿PC를 주디에게 건네주고는 전용기 내부에 있는 작은 침실로 향했다.
-카이저.
다시금 울려 퍼지는 음성.
바로 그레모리의 목소리였다.
‘그레모리 님?’
-그래요. 잘 지내고 있었나요?
‘예.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카이저를 마계로 부르고 싶은데 양해를 구하려고요.
그 말에 이신은 의아함을 느꼈다.
‘한 번도 저를 부르실 때 미리 양해를 구하신 적이 없잖습니까.’
-호호호, 서열전을 앞두고 부르는 일은 계약에 명시된 사항이니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럼 이번에는 서열전과 관련된 용건이 아니군요?’
-엄밀히 따지면 그렇죠.
‘무슨 일이십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들려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부르도록 할게요.
‘예.’
그러자 흑색의 작은 점이 허공에 나타났다.
파아앗!
흑색 점은 블랙홀처럼 이신을 빨아들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위의 환경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터라, 이신은 놀라지 않고 눈앞에 있는 그레모리를 응시했다.
“어서 와요, 카이저.”
“…예.”
이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는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레모리는 날씬한 허리 맵시를 잘 살린 검정색 계통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가슴골과 눈처럼 하얀 피부, 붉게 칠한 입술.
살짝 스모키하게 화장한 눈매는 예쁘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기묘한 위압감.
그레모리는 악마군주다운 기품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뽐내고 있었다.
“어떤가요?”
“예쁩니다.”
이신은 솔직히 칭찬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고마워요.”
그레모리는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해졌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그레모리였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유독 화려하게 치장한 듯한 인상이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이신이 용건을 물었다.
그레모리는 옥좌에서 일어나 이신에게 다가왔다.
“이리로.”
그녀는 이신을 창가로 안내했다.
창밖에 보이는 하늘을 가리켰다.
섬섬옥수 같은 하얀 손가락을 따라, 이신의 시선도 하늘로 향했다.
흠칫.
이신은 놀랐다.
현실세계에서 볼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이 마계의 하늘에 수놓아져 있었다.
매우 밝은 낮임에도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름달이 떠 있었다.
어찌나 큰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달의 10배쯤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곧 만월(滿月)이에요.”
“그렇군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이신은 넋을 놓고 달에 빠졌다.
시리도록 푸르고 큼직한 달은 이신을 홀리듯이 빛나고 있었다.
어쩐지 이신은 그 달빛에 시선을 빼앗긴 채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저 푸른 달빛을 보고 있노라니 몸속에서 무언가가 충만하게 차오르는 듯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어떤 욕망의 충족보다도 더 만족스럽게 그의 마음을 채워주고 있었다.
“아름답죠?”
“예.”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는 건 마계에서도 1년에 딱 한 번뿐이에요.”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은 악마들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특별한 날이죠.”
“어째서입니까?”
“인간으로 치자면 수확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죠.”
“수확?”
“이날은 마계의 마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해져요. 저 달빛을 받고만 있어도 마력의 총량이 늘어 각성하는 악마들이 대거 발생하죠.”
그레모리는 계속 설명했다.
“그리고 영지를 가진 악마들은 영지로부터 다량의 마력을 수확할 수가 있죠. 그래서 이때 하급에서 중급으로, 중급에서 상급으로 진화하는 악마가 많이 생기죠. 악마군주들도 서열전으로 소모한 마력 총량을 보충하고요.”
“그렇다면 저도……?”
“물론이죠. 카이저도 영지를 보유한 악마이니까요. 게다가 이제는 능력까지 각성하신 것 같네요?”
“예.”
“어떤 능력이던가요?”
“치유였습니다.”
“후훗, 역시 그렇군요.”
손목을 다쳐 은퇴해야 했던 때, 간절히 복귀를 원했던 한 맺힌 기억이 치유 능력으로 발현된 이신이었다.
“제가 선물한 반지를 사용해 보셨나요?”
“반지는 아직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사용해 보세요. 반지에 제가 새겨 넣은 기능을 알아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말에 이신은 왼손 약지에 낀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파앗!
그러자 반지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터져 온몸을 감쌌다.
이신은 삽시간에 포근하고 안락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어떤 메시지가 머릿속에 나타났다.
[마력: 2,641/2,858]이신은 흠칫 놀랐다.
‘2,858마력이라면 현재 내가 가진 마력 총량인데, 그 옆의 2,641은 뭐지?’
“어떤가요?”
그레모리가 물었다.
이신은 이 두 가지 숫자에 대해 물었다.
“2,858은 마력 총량, 그리고 2,641은 현재 보유한 마력량이에요.”
그녀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력 총량이 그릇이라면 현재 보유한 마력량은 그 안에 담긴 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 물을 채워주는 것이 저 달과 영지예요.”
그레모리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신이 현재 보유한 마력량이 적은 이유는 현실세계에서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을 사용해 마력을 소모했다고, 그 소모한 마력을 영구히 잃는 건 아니었다.
그릇이 비면 안에 다시 물을 채워 넣어주는 역할을 바로 달과 영지가 한다.
마계의 달을 받고만 있어도 마력량이 다시 회복되며, 영지에서 쉬고 있으면 영지로부터 마력을 흡수해 회복할 수도 있다. 물론 영지의 규모와 질에 따라 마력 회복 속도가 달라지지만 말이다.
마력 총량, 즉 그릇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서열전.
인간은 악마를 이겼을 때 소원을 빌 수 있다.
물론 한 악마당 딱 1번씩밖에 기회가 없다. 그 뒤로는 같은 악마에게 여러 번 더 이겨도 소원을 빌지 못하는 제한이 있다.
어쨌거나 그 소원으로 마력을 받으면, 그 마력은 고스란히 마력 총량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악마군주들이 소원으로 마력을 주기 꺼려했다.
자신의 그릇의 크기가 영구히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만월의 밤.
바로 오늘이었다.
충만한 만월의 빛을 받거나 영지로부터 마력을 수확하여서 마력 총량을 늘릴 수 있다.
안에 담긴 물이 아닌, 그릇 자체를 키울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이날이 악마들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카이저를 부른 거예요. 오늘 같은 날을 놓쳐서는 안 되니까요.”
“그렇군요.”
마력을 그리 특별히 여기지는 않는 이신이었다.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 자체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마력이 많으면 사도를 더 임명할 수 있고 무기·방어구·능력을 부여할 수 있으므로 많을수록 좋다고 여겼다.
“능력을 마음껏 사용해도 마력을 다시 회복할 수가 있는 거군요?”
“맞아요. 하지만 지나치게 사용해서 전부 고갈되어 버리면 그릇이 손상되니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은 연회가 열릴 거예요.”
“연회?”
“네, 수확을 기념하는 연회죠. 그리고 최근 서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해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제 서열과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하죠.”
“사람, 아니 악마들이 많이 참석하겠군요?”
“물론이죠. 제 휘하의 권속들이 모두 참여할 거예요.”
악마들이 득시글거리는 연회. 대단히 시끌벅적한 사교의 장이 되리라.
이신은 대번에 가기 싫다는 기분이 밀려왔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모쪼록 참석을 부탁드릴게요.”
“전 그런 자리가 불편합니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카이저가 참석하지 않으면 전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저 하나 빠졌다고 그레모리 님이 휘하의 권속들에게 비웃음을 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저를 위한 중요한 축하의 자리인데 카이저가 빠지면 계약자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모두에게 줄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아름답게 치장한 그레모리가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는 악마군주.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때가 되면 부를게요. 그때까지는 영지에서 쉬고 계세요. 달빛을 쬐고 영지로부터 수확도 하며 지내세요.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거예요.”
“예.”
이신은 방에서 나와 궁전 뒤뜰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로 갔다.
잘 지어진 커다란 오두막 한 채가 그를 반겼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음에도 오두막은 더럽혀지지도, 앞마당에 잡초가 무성해지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앞마당에 커다란 나무 몇 그루와 꽃들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서 이신은 깜짝 놀랐다.
꽃들이 종류별로 나뉘어서 가꿔진 것을 보니 분명 누군가가 꾸며준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곧 이신 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계약자 이신님.”
궁전에서 자주 보았던 시녀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빛나는 은빛 머리칼이 인상적인 미녀.
“저는 위대하신 악마군주 그레모리 님의 권속, 하급 악마 세리시아입니다. 그레모리 님의 명에 의하여 계약자 이신님의 영지 관리를 맡았습니다.”
“딱히 관리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리시아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영지에 사는 생명체가 많을수록 더 많은 수확과 빠른 마력 회복 속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꽃을?”
“네, 계약자 이신님께서 만족스러운 수확의 날을 보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영지 안에 들어서자 예의 그 포근한 기분이 밀려왔다.
몸이 나른해져서 당장 드러누워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졌다.
오두막 안, 거실에 흔들의자가 있었다.
흔들의자에 앉은 이신은 등을 부드러운 쿠션감을 가진 등받이에 맡겼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만월의 달빛이 이신을 아침 햇살처럼 따스하게 감쌌다.
옆의 탁자에 따듯한 차를 가져다놓은 세리시아가 친절하게 속삭였다.
“푹 쉬세요. 연회 때 깨워 드릴게요.”
이신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그대로 스르륵 잠에 빠졌다.
잠든 사이에 현실세계에서 치유 능력을 써서 소모했던 마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마력: 2,713/2,858] [마력: 2,858/2,858]그리고 달빛이 극에 달하여 완전한 만월이 마계를 뒤덮었을 때,
[마력: 2,858/2,864]마력 총량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급 악마가 되어 능력을 각성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만월의 빛을 쬐며 수확의 밤을 보내는 이신.
그러한 것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가짐과 상관없이 그는 어엿한 악마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