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Mythic creator is a regressed player RAW novel - Chapter 94
표행 (1)
정미년 병오월 계해일.
강소성 회안시에 위치한 청목표국의 정문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터벅, 터벅, 터벅-.
뺨에 새겨진 오래된 흉터 자국이 인상적인 사내의 발걸음에선 상처 입은 야수의 노련함이 엿보였다.
청목표국 문지기인 추굉은 그 상처가 그저 계단에서 굴러 생긴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뉘, 뉘시오.”
“곽용.”
비장한 표정만큼이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문지기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선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으니(善者不辯, 辯者不善).
어쩌면 상대가 청목표국에 원한이 있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창을 움켜쥔 그의 손이 순식간에 땀으로 흥건해졌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다.
“어쩐 일로 오셨소.”
문지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순간, 맞은편 사내의 입 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계약직 표사를 모집한다 해서 왔소.”
“에잇, 그 말을 하는데 무슨 무게를 그리 잡소! 안으로 들어가시오!”
“···거 참, 성질은.”
흉터 자국의 사내, 곽용은 툴툴거리는 무사를 뒤로 하고 표국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 귀하다는 청강석이 빈틈없이 채워진 뜰을 지나자 팻말에 적힌 안내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좌, 쟁자수 시험장] [우, 표사 시험장]“내가 아무렴 쟁자수 급은 아니지.”
이름난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었으나, 나름 강호에서 칼밥을 먹었다고 자부하는 몸.
그는 망설임없이 오른쪽 길을 택했다.
잠시 뒤, 시험장에 도착하자 입구에 앉은 안내인이 그를 향해 지필묵을 내밀었다.
“산동을 지나 하북성 형수가 최종 목적지요. 산동에서 표행 멈출 거라면 이쪽, 하북까지 함께하길 워한다면 이쪽 명부에 이름을 기입하시오.”
“보수는 어찌 되오?”
“산동행은 은 한 냥, 하북행은 그 세 배요.”
“세 배!”
하북까지의 거리는 산동행의 대략 두 배이니, 안 하면 손해인 일거리다.
일정이 조금 길어지긴 하겠으나 돌아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하북행 명부에 이름을 기입한 그가 마침내 시험장에 들어섰다.
표사 선발이 한창인 너른 마당에는 청목표국의 위세를 보여주듯 각양각생의 사람들이 모여 몸을 풀고 있었다.
정말 힘깨나 쓸법한 거한부터, 벌써부터 견제에 들어간 듯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까지.
물론 개중에는 이런 힘쓰는 일과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듯한 인물들도 더러 존재했다.
지금 곽용 근처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는 한 쌍의 남녀처럼 말이다.
“빈 랑, 아직도 졸려?”
“하음-. 응, 좀 그렇네?”
“일찍 자라니까··· 여기 눈곱 붙었다.”
혼인한지 얼마 안 된 듯한 부부의 애정행각을 보며 곽용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둘은 곧 떨어지겠군.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
중요한 시험장에서 저리 태평한 것을 보니 실력에 웬만큼 자신이 있거나 세상모르는 철부지, 둘 중 하나일 텐데···.
곽용의 눈에는 무조건 후자였다.
보아하니 은 석 냥이라는 거금에 눈이 뒤집혀 덜컥 지원한 듯한데, 표행을 얼마나 만만히 봤으면 부부 동반으로 온단 말인가.
두 사람 모두 체격이 비리비리한 것이 표사가 아닌 쟁자수 일을 맡겨도 시원찮아 보이는데, 시험에서 떨어지고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갈 것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쯧쯧.”
곽용이 혀를 차는 사이에도 그들의 닭살 행각은 계속됐다.
“이리와 봐, 너도 머리카락 붙었어.”
“여기?”
“아니, 여기.”
“으응, 간지러워어.”
그리 빼어난 인물들도 아니건만 뭐가 좋다고들 저리 난리인지.
하긴 제 눈에 콩깍지라지 않는가.
지들끼리 좋다는데 남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일은 아니지.
근데 꼭··· 내 앞에서 그래야만 했냐?
관심을 끄려 해도 자꾸만 근처에서 알짱거리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있나.
그러나 곽용은 스스로 마음이 넓다 자부하는 사내였다.
참자, 참아.
어차피 좀 있으면 안 보게 될 얼굴들인데.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그 때, 콧수염이 멋들어진 청목표국의 시험관이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고굉! 고굉 지원자 안 계시오?”
“여기 있소!”
곽용은 하나둘 불려나가는 사내들을 보여 다시금 전의를 다졌다.
‘훗···. 어디 어느 정도의 강자들이 모였나 실력 좀 볼까?’
그로부터 반 시진 뒤,
“허억, 헉, 겨우 붙었다.”
하마터면 짐이나 나르는 쟁자수가 될 뻔했던 곽용은, 시험장을 떠날 생각도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표두도 아니고 일개표사를 뽑는 기준이 언제부터 이리 높아졌단 말인가!
과연 강소성의 터줏대감이라 이건가?
혀를 차는 그의 곁으로 때마침 아까 본 신혼부부가 지나갔다.
“쉬웠지?”
“그러니까. 이래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물건을 맡길 수나 있겠어?”
“임시직이라 그런 거겠지. 여기 나름 유명한 표국이라던데.”
“그런가?”
“그나저나 출발이 모레라고 했지? 아직 졸린데 들어가서 좀 더 잘까?”
슬며시 허리를 감싸는 남자의 손길에 여인이 펄쩍 뛰며 상대를 밀어냈다.
“으응, 그만 만져. 이 음적아.”
“방에선 막 달라붙더니.”
“사람들 있잖아.”
콧소리를 내뱉는 여인의 모습이 결코 남편의 추파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은 않았다.
서른일곱 노총각인 곽용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시험에 붙은 것도 분명 낙하산일 거야···.
그러나 아무리 그들을 몰래 흉봐도 그의 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
“저 사람 아까 시험 보기 전부터 자꾸 우리 쳐다보는데.”
“네가 자꾸 만지니까 그러지.”
“넌 나 안 만져?”
“아, 하지 마아. 흣, 간지러워어.”
약빈이와 가벼운 장난을 치며 청목표국을 빠져나왔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초식을 수련한 탓에 피곤이 덜 풀리긴 했지만, 해가 중천이라 더 자기엔 죄책감이 드는 시간이다.
조가장을 떠난 나와 약빈이가 호북성과는 이백여 리 떨어진 이곳 강소에서 표사 일을 하게 된 까닭은 모두 아버지의 조언 덕분이었다.
‘평범한 여행은 그동안 학관을 오가며 충분히 겪었으니, 이번에는 상행이나 표행을 경험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보통 표국에선 전속 계약을 맺은 표사와 쟁자수를 운영하지만, 일손이 달리는 경우에는 일시적인 고용 계약을 맺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우리 집 역시 신비조 개발 이전에는 서역에서 들여온 물건들이 주 수입원이었던 만큼, 상행이나 표행으로 쌓은 경험이 훗날 상가의 경영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신 모양이다.
굳이 우리 가문이 아닌 다른 표국에 의탁한 것은, 소가주라는 신분에서 잠시 벗어나 실무의 고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표행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둘만 다닐 때는 알 수 없는 강호의 정세나 지역별 관광 명소, 맛집 정보 등도 손쉽게 귀에 들어오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원래 기사식당 밥이 제일 맛있는 거니까.
약빈이도 이 의견에 찬성했다.
표행 도중 들르는 마을에서 얼마든지 따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일시적인 계약이니 만큼 원한다면 언제든지 일행을 떠나 둘만의 여행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약빈이도 어떤 조건에 대해서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으니,
“남매는 싫어. 부부로 해.”
“어?”
“부부 아니면 안 가. 부부로 해.”
여행하는 동안 위장할 신분을 정하는 대화에서 약빈이가 보인 단호한 태도에 시청자들은 대견하다는 반응이었다.
[yhs21cm : 맨날 기둥 뒤에서 깐휘랑 우희 노는 거 훔쳐보던 약빈이가 이렇게 컸습니다] [ad맨 : 수련도 포기하고 왔는데 뽕 뽑아야지 ㅋㅋㅋ] [원퉁사 : 출발할 땐 둘이지만 돌아올 땐 셋이겠지?]신분뿐만 아니라 얼굴과 이름도 위장했다.
무림대회를 통해 제법 이름을 알렸다고는 해도 강호행이 처음인 우리를 알아볼 이는 드물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나도 약빈이도 눈에 띄는 외모다 보니 괜한 잡음이 일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처럼 둘만의 여행을 제3자에게 방해받기 싫다는 말에는 약빈이도 적극 찬성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둘 모두 어디서나 볼법한 평범한 얼굴로 역용도 한 상태였다.
이름의 경우에는 각자의 이름을 한 글자씩 교환해서 적당히 만들었다.
나는 휘빈, 약빈이는 가약
괜히 중딩 때 같은 반 여자애랑 학생증을 바꿔 걸고 다니던 옛 추억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첫 표행은 호북에 근거지를 둔 만강표국에 의탁하여 안휘성으로 표물을 운반했다.
가는 김에 남궁세가에 들러, 학관을 떠날 때 남궁현이 소희에게 전했던 서신의 답변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려서 오빠랑 결혼하겠다던 때는 언제고, 이젠 날 사랑의 큐피드로 부려먹다니!
남궁현이 워낙 좋은 녀석이라 불만은 없지만.
이후 안휘에서 강소까지는 약빈이와 둘만의 여행길이 이어졌다.
그녀와의 여행은 가족처럼 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설렜다.
“아, 여기 할아버지랑 온 적 있는데! 우리 저거 먹자.”
“바, 방은 하나만 주세요.”
“으응, 간지러워어.”
“휘 랑, 손 잡아줘···.”
작년 초까지 그저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그녀가 언제 이렇게 귀엽고 매력적인 여인으로 변모한 걸까?
시청자들은 밤이면 밤마다 잠자리를 촬영해 달라 성화였지만, 내가 아무리 떳떳해도 엄연히 약빈이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재하는데 그럴 수야 없는 일이지.
약빈이와의 여행에 푹 빠지긴 했으나, 각 마을에 위치한 액괴다루 지점의 순찰도 잊지 않았다.
간간히 홍서현에게 전해들은 대로 액괴다루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물론 아직 군데군데 개선할 점이 눈에 띄긴 하지만, 처음치고 이 정도면 훌륭하지.
그렇게 우리는 집을 떠난 지 한 달 보름여 만에 강소성의 청목표국에서 두 번째 표행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 산동을 거쳐 하북으로 향하는 표행이 시작됐다.
***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니 오늘은 이 공터에서 하루를 머물겠소!”
선두에서 들려온 표두의 외침에 길게 늘어선 행렬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다리야.”
“어후···. 어제보다 오늘이 더 힘드네 그려.”
“이제 절반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그래서 어쩌려고.”
여기저기서 사내들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곽용이 지키는 수레 주변만큼은 나들이라도 온 듯 깨가 쏟아지고 있었으니,
“빈 랑, 나 오래 걸었더니 다리 아파.”
“다리 주물러 줄까?”
저, 저, 저것들이 또 시작이구나!
눈꼴 시린 광경이었으나 곽용은 더 이상 질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열흘 가량 함께 여행하는 동안 그들 부부에게 제법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궂은 일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부부는 고된 표행길을 불평 한 번 없이 여유롭게 따라왔다.
지닌 재주 또한 남달라서 남편 쪽은 수백 장 떨어진 장소의 사냥감도 기가 막히게 찾아냈으며,
아내는 한 자루 비수로 가죽과 살코기를 분리해내는 솜씨가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그 덕에 건량이나 뜯던 여행길에 예정에도 없던 기름기로 배를 채우게 됐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까.
“표사 일을 하기 전엔 사냥으로 먹고 살았나 보지?”
“아···하하, 어떻게 아셨나요?”
“그치? 척보면 알지. 내가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 곽용에게 사내가 육포 한 조각을 내밀었다.
“드시죠. 저흰 아직 많은데.”
“커험. 매번 이렇게 신세를 지는구만. 산동에 도착하거든 내가 거하게 한턱 쏨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곽 대형.”
“으허허. 대형이란 말이 듣기 나쁘지 않구만.”
닭살 행각만 제외하면 제법 괜찮은 사람들, 그것이 곽용이 내린 그들 부부에 대해 평가였다.
그리고 지금 막,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다.
쐐애액-!
파르르르-!
“허억!”
뒤늦게 자신의 눈앞에서 멈춘 화살촉을 발견한 곽용은 기겁하여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만일 휘빈이 제 때 손을 뻗어 화살을 잡지 않았다면···?
이제 막 물에서 건진 물고기마냥 힘차게 요동치는 깃대를 보고 있자니 오금이 다 저려왔다.
“고, 고맙···.”
미처 감사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야영지에 불이 하나둘 밝혀지며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이다!”
“화살이다! 숲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이어서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수십 장정이 청목표국의 야영지를 둘러쌌다.
산적의 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