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0
10. 어 템포 (A tempo, 본디 빠르기로)
김민호와 최지은의 당찬 선언과 교장 선생님의 기나긴 자장가를 끝으로 입학식은 막을 내렸다.
단상에서 교장이 내려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걸어 나오는 교직원.
그는 음악과 미술과 무용과로 먼저 학생들을 정렬시킨 뒤 다른 선생님에게 인솔을 맡겼다.
그리고 전공을 호명하며 그 숫자를 확인했고 당연하지만, 음악과 중에서도 피아노 전공생의 수는 단연 으뜸이었다.
‘그게 좋은 건 아닌데 말이지.’
나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예 멀찍이 앉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떨어진 미술과와 무용과 학생들.
어차피 과부터 다르다 보니 이젠 3년간 서로 엮일 일은 없다.
남은 것은 음악과.
그 음악과에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는 물론 성악과 작곡으로 세부 전공이 나뉘어있다.
건반악기인 피아노 학생들이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의 3분의 1이 사라진 음악과의 자리가 휑해 보일 수준이었다.
“건반악기 학생들이 먼저 이동할 겁니다.”
곧바로 각자의 반으로 이동하는 40여 명의 학생들.
나는 1반이었다.
과거에는 분명 5반이었을 텐데 이렇게 확연하게 변한 것을 보니 역시 1학년의 반은 입시 고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본 적 있는 얼굴의 학생이 보였지만, 막상 반이 바뀌다 보니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은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맨 앞자리에 가방을 걸고 앉은 나.
괜히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중간한 자리에 앉아 눈치나 볼 바에 이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피아노 학생들이 모두 들어오고 나서야 다시 들리는 발걸음 소리.
다양한 전공의 학생이 한 반에서 골고루 섞일 수 있게 꽤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아. 성현!”
조금 지루한 감을 참고 앉아있으니 강아지상의 엘리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엘리나도 분명 1반이 아니었었는데,
“너도 1반이었어?”
“맞아요. 1반이에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으며 아까와 같은 미소를 보여주는 엘리나.
그녀는 한국어에 서툰 면이 있으면서도 교우관계가 원만했다고 들었는데···.
“왜 그랬는지 알겠네.”
이렇게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활짝 웃어대니 아마 남녀노소 싫어하는 사람이 더 드물었을 것이다.
그때, 단상에서 열심히 선언문을 읊던 최지은이 앞문으로 들어왔다.
“안녕.”
단상 위에서 눈은 마주쳤었지만,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니 내가 손을 들어 말을 건네자.
지은은 그 특유의 찡그리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래 안녕.”
대답은 착실하게 하면서도 쌀쌀맞게 바로 등을 돌려 뒷자리로 사라지는 지은.
M스튜디오에서도 나를 보면 우물쭈물 뭔가를 말하려다 마는 모습을 계속 보여줬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내게 화가 난 것이리라 추측하고 있다.
그 원인은 당연히 실기 날의 갑작스러운 참견과 아는 척, 거기에 한의사들이 들으면 뒤로 뒤집힐 초콜릿 농담 때문이겠지.
“그래도 저 정도로 오래 삐질 줄이야.”
설마 방학 두 달 내내 저런 미묘한 태도를 고수할 줄은 몰랐다.
피아니스트 최지은이 이렇게 애 같을 줄은 솔직히 몰랐다.
다음에 사탕이라도 사주든가 해야지.
앞으로 조별실습도 함께 할 사인데 이러고 있을 순 없지.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장대한 계획을 다시 확인했다.
이 미향예고에는 일반고에서 치르는 중간, 기말고사 외에도 큰 점수를 차지하는 실기 고사가 있다.
실기 우수자 2명과 종합 성적 1등.
전액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한 학기에 이 셋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쩌긴 뭘 어째, 특출난 사람과 한 조가 되는 것이 최고의 방법 아닌가.
다른 이들이 좀 치사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김민호와 최지은에게 같은 조가 되자고 권유할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M스튜디오 소속 아닌가.
적어도 대놓고 차갑게 거절하지는 않겠지.
“자. 다들 자리에 앉아.”
그때 닫혀있던 앞문으로 선생님이 들어왔다.
빨강색 단정한 니트에 새카만 바지를 입고 나타난 여선생님.
“만나서 반가워. 나는 너희 담임을 맡게 된 문혜선이고 전공은 작곡이야.”
작곡 전공에 문혜선 선생님.
솔직히 나와는 연이 없던 사람이다 보니 떠오르는 추억 같은 건 없었다.
“우리 반에도 작곡 전공이 여러 명 있던데. 너희는 계 탔다고 생각해도 좋아.”
와, 상당히 자신감 넘치는 선생님이다.
그리고 1학년을 하드코어로 보내게 될 것 같다는 것을 직감한 작곡 전공의 학생들이 뒷자리에서 탄식을 내질렀다.
보통 담임선생님이 같은 전공인 것은 좋지 않다.
오후 수업이 모두 끝나고 전공 시간이 되어도 계속 보던 얼굴을 또 보아야 하니까.
“휴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그렇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입을 닫은 선생님이 나를 말 없이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성현이니?”
심지어 내 이름을 부르며 대놓고 말을 건다.
당연하지만 엄청난 이목이 내게 쏠렸다.
이 반에는 입시 수석과 차석도 있는데 왜 날?
일단 떠오르는 의문은 접어두고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빙긋.
뭔가 재미있다는 듯한 선생님의 시선. 그 아리송한 눈빛을 내가 차분하게 마주 보고 있자,
선생님은 이내 고개를 쓱 들어 반 전체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입학식이라 정식 수업은 없지만, 그렇게 쉽게 기숙사에 돌아갈 수 있다면 여기가 미향예고 일리가 없지 않겠니?”
역시나, 입학식 때의 전통.
“이번 임시 시험을 끝낸 사람부터 기숙사에 가면 돼. 알겠지?”
미향중학교나 예술중 출신의 학생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짧게, 그리고 그 외의 학생들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야유를 보냈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니까 이 선생님이 더 힘이 난단다.”
그러나 그런 야유 따위는 거뜬히 무시하고, 곧바로 빈 종이를 나눠주는 선생님.
“바이올린 엘리나, 성악 김송아 앞으로 나오렴.”
“에?”
내 옆에 있던 엘리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는 반면 성악전공생은 뚜벅뚜벅, 힘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마 미향중 출신이겠지.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하실 거야.”
“아. 그래요?”
내가 조용히 알려주자 엘리나는 당황했던 얼굴을 펴며 앞으로 나갔다.
역시나 선생님은 엘리나와 석악과 학생에게 각각 악보를 하나씩 주었고, 연주를 부탁했다.
미향예고의 전통이자. M스튜디오의 마주혁 원장님도 중요하게 짚어줬던 내용.
바로 동기 피드백 시간이었다.
미향예고의 졸업생 중에서 작곡과는 항상 유명한 작품을 자신의 해석대로 편곡한 졸업작품을 남긴다.
그리고 그 졸업작품들은 이렇게 신입생들의 실력 테스트용으로 쓰이게 되는데.
이를 통해 연주자는 낯선 곡을 얼마나 능숙하게 연주해내는지. 그리고 듣는 이는 그 연주가 어떻게 들렸는지 적합한 피드백을 넣어야 한다.
설명을 마친 선생님은 언뜻 다행이라는 듯 숨을 몰아쉬는 학생들을 정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안심하지는 마. 앞으로 여기 있는 둘만이 아니라 너희도 모두 한 번씩은 이렇게 갑자기 연주하게 될 테니까.”
선생님의 말에 나는 괜히 뜨끔했다.
지난 생에서 나도 안 뽑혔다고 안심하는 사람 중 하나였거든.
“우리 반에 음악과 탑 피아노 전공생이 셋이나 있어서 꼭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치?”
“네에~”
“그래도 지금 이 두 친구도 바이올린, 성악에서 각각 수석을 먹은 친구들이니까 잘 들어두렴.”
“네~”
앵무새마냥 대답은 곧잘 하는 학생들.
미향중 출신의 애들도 이런 시험이 있다는 것만 알지 점수에 크게 반영된다는 사실은 모르는지 긴장한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자 그럼. 송아부터?”
선생님이 학생에게 전달 사항을 전하는 동안, 간신히 악보를 외운 여학생이 긴장한 듯 앞에 섰다.
“아아아-”
동그랗게 말아 올려진 음색. 시원한 소프라노를 거뜬히 내지르는 걸 보니 역시 그녀가 성악과 수석이란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선생님이 준 악보의 베이스는 아마도 오페라 에 소프라노 아리아인 ‘울게 하소서’인 것 같았다.
오페라는 나도 조예가 깊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안다.
‘울게 하소서’를 베이스로 작곡된 것 같은 이 곡은, 자유를 염원하는 알미레나의 염원이 담긴 곡이다.
그러나, 편곡 자체에서 분위기를 밝게 더 띄운 것인지 절실함이 약해져 오히려 곡이 묘하게 어긋난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피드백을 써 내려갔고, 그녀가 노래를 다 끝마치기도 전에 큰 종이의 절반을 채워 넣었다.
곡의 분위기,
편곡의 의도,
성악가의 해석.
그 다양한 요소가 한데 뭉쳐 들려오는 선율은,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다음 엘리나”
이윽고 엘리나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의 활이 현에 닿는 순간부터 10초. 나는 그녀가 연주하는 곡의 베이스가 된 곡을 눈치챌 수 있었다.
“비발디 사계 겨울 1악장.”
매섭고 음산한 분위기가 유독 돋보이는 차디찬 단조.
그 속에서 32분음표로 이루어진 음형이 덜덜 떨리는 사람을 묘사하는 곡이다.
편곡은 이를 더 우중충하고 무겁게 이루어진 듯했고, 겨울의 혹독함을 묘사한 작품이 더 무서운 작품이 되었다.
이런 편곡을 고등학교 3학년이 했다니.
아마도 엘리나의 바이올린을 울리는 이 곡은 꽤 수준 높은 학생의 작품으로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엘리나의 솜씨가 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 되는데···.
나는 이래 봬도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의 반주를 맡았던 사람이다.
조금만 훑어보아도 엘리나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심히 피드백을 써 내려가다 보니, 벌써 한 장이 꽉 차고 말았다.
열심히 연주 중인데 흐름을 끊을 수도 없고,
나는 고심 끝에 나눠준 종이를 뒤집어 뒷장에 피드백을 이어서 작성하기 시작했다.
“후우.”
간신히 엘리나의 연주가 끝나는 것에 맞춰 나는 뒷장의 절반을 빽빽한 피드백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서, 성현?”
그런데 앞에 선 엘리나가 맨 앞자리인 나를 불렀다.
다른 학생들도 집중하고 있을 텐데 이렇게 막 불러도 되나 싶어 내가 고개를 들자.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선생님이 보였고,
이내 고개를 돌리자 모든 인원의 시선 또한 내게 쏠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뭔가가 떠올랐다.
동기 피드백의 진가를 알고 아이들이 지금의 나처럼 열성적으로 임하기 시작하는 건, 중간고사가 끝난 뒤의 일이다.
“아, 오버했구나.”
즉, 나는 등교 첫날부터 원치도 않았던 관심을 끌고 만 것.
그것도 미향예고에 전공별 수석들이 모여있는 이 반에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앞으로 돌아앉으려 했으나,
“잘했어. 성현아! 아주 잘했어! 그래! 미향예고 실기 우수생이 이 정도로 음악에 진지하게 임할 줄 알아야지! 그럼!”
담임선생님은 잔뜩 흥분해서 침까지 튀겨가며 나를 마구 칭찬하기 시작했다.
아 선생님, 제발···.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창피해서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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