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31
131. 리솔루토 (Risoluto, 결연하게)
고민이 사라진 내게 가만히 멈춰있을 이유는 없었다.
타건이 가벼워지자 연주는 흐르는 물처럼 유려한 음색을 들려주게 되었고,
“와, 어떻게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다채롭지? 대단해 성현아.”
교직에 있을 때부터, ‘칭찬만 하는 교사’라 오명이 붙었었던 선생님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내 연주 하나, 하나에 격한 반응을 들려주었다.
“지금 연주한 에튀드는 일부러 더 통통 튀게 연주한 거니?”
“네? 아, 예. 지금 기분이 좋아서요.”
“기분의 변화가 바로 연주에 투영된다니 The 프로! 라는 거구나?”
“예? 으으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닌데 말이죠.”
선생님의 오버하는 리액션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나는 금세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직접 이렇게 풍부한 칭찬을 듣는데, 좋아하지 않을 학생이 어디 있겠어.
‘칭찬만 하는 교사’
얼핏 좋게 들리는 이 명칭은 미향예고에 최윤설 선생님이 재직 중이던 당시, 조롱의 의미로 붙여졌던 이름이었다.
보통 호승심이 바짝 오른 고등학생들은 오탑을 알고 싶어 하거든.
왜 같은 나이의 김민호는 콩쿠르에 올랐고, 자신은 예선 탈락을 한 건지.
그 원인을 찾아 교정을 거듭해, 한 단계 나은 연주자가 되고 싶은 거다.
그래, 피아노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 좋은 연주자가 되고 싶지.
나도 그 마음 자체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만, 그렇다고 잘한 부분을 제대로 짚어주시는 내 은사님께 그런 오명을 씌우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모든 미향예고 학생들의 1학년 1학기를 담당하는 김기택 선생님을 떠올려보자.
김기택 선생님은 학생을 쉽게 칭찬해주지 않는다.
애초에 그분이 신입생을 맡는 이유가 그간 몸에 새겨진 나쁜 버릇을 지적해, 개선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니까 말이다.
허나, 이 교육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멋모르던 신입생 시절,
김기택 선생님의 뼈 있는 지적에 자신의 나쁜 버릇을 고치며 실제로 연주가 개선되는 것을 체감한 학생들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생각한다.
앞으로도 ‘잘못된 부분을 계속 개선하길 반복’하면 자신이 언젠가 김민호, 최지은과 같은 멋진 연주자가 될 거라는 착각말이다.
오답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
그게 김기택 선생님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리고 나의 은사님이시자, 그 괴짜 교장이 직접 스카우트할 만큼 대단하신 우리 최윤설 선생님은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존재셨다.
‘와아아, 정말 잘했어. 성현아.’
어떤 연주를 들려드려도 박수와 감탄을 아끼지 않으시던 선생님.
오답 찾기에 매몰된 학생들은 누구에게나 칭찬을 선사해주는 선생님을 대놓고 싫어했지만, 그건 멋모르는 고등학생의 오만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아무렇게나 칭찬을 해주시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네 연주는 정말 상냥한 음색을 가졌구나.’
선생님은 병적으로 남의 눈치를 보며 연주하던 학생에게 그런 말을 하셨었다.
얼핏 들으면 대충 적당한 말을 골라 해준 것 같은 이 칭찬은, 그렇게 가볍게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귀가 좋으시다.
반주자로 몇 년 단위의 시간을 살았던 내가 온 정신을 집중해야 비로소 들려오는 연주자의 특징을 그냥 듣는 것만으로 확실하게 구분해낼 만큼 엄청나게 말이다.
전생에는 솔직히 나도 잘은 몰랐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선생님의 칭찬에는 뼈가 있다.
그리고 그 뼈는, 정성스럽게 갈고 닦는다면 연주자만의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을 만큼 굵직굵직한 것이었으며, 긴 시간, 큰 노력을 아낌없이 그것에 집중해낼 수만 있다면, ‘뼈’는 연주자만의 ‘특별함’이 되어줄 것이다.
고등학생 때야 단점의 보완이 곧 실력의 상승으로 이어지지만, 프로의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다.
프로는 관객을 매료시킬 힘이 있어야 다른 연주자들에게 묻히지 않을 수 있거든.
실제로 나는 ‘기본’을 갖추는 데 시간을 많이도 소모했지만, 어느 임계점을 돌파해낸 뒤에는···.
나를 욕하고, 조롱하던 그 미향예고 학생들이 모두 실패했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입단에 성공해냈으니 말 다 했다.
여하튼,
전생에도 나는 선생님께 그토록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현생에도 큰 도움을 받게 생겼다.
“이번 연주는 어땠나요?”
나는 약 20분간의 연주를 마치고 땀을 닦아낸 뒤 선생님께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까와 같이 으으음, 하며 앓는 소리를 내시더니 입을 여셨다.
“음, 너무 음색이 예뻤어. 예쁘긴 했는데, 주제마다 상응하는 음색이 다 달라서 조금 찡하게 울리는 느낌이 부족했다고 할까···?”
하, 역시.
선생님은 분명 칭찬해주시면서도 뼈 있는 말을 덧붙여주셨다.
다시 말해 이런 거다.
방금 나는 다양한 주법을 교차해가며 곡의 음형을 넓히는 데 최대한 집중을 했었는데, 너무 다양한 주법을 섞어내니 음색이 휙휙 변해 연주의 깊이가 얕아졌다는 것.
이를 단 한번에 짚어낸 선생님께 속으로 감탄하며, 나는 물었다.
“다채롭게 변하는 연주와 깊이가 있는 연주. 뭐가 더 좋을까요?”
조금 전의 내 오점을 그대로 드러낸 질문에 선생님은 말씀해주셨다.
“방금 연주한 곡은 야상곡이었으니까. 독주회라면 전자, 콩쿠르라면 후자를 택할 것 같아.”
그 거침없는 조언에 나는 오오, 감탄하며 팬과 수첩을 꺼내 이런저런 말을 메모했다.
“메, 메모할 정도의 조언은, 아니지 않아?”
이에 당황하시는 선생님이셨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해요.”
자랑은 아니지만, 난 ‘주법’이 많다.
보통은 동반자라 여겨도 좋을 만큼 날카롭게 갈고 닦은 주법 하나와 평생 함께하는 다른 연주자들과 다르게 말이다.
처음에는 이를 좋게만 여겨, 급변하는 연주, 그러데이션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변주에 활용하기 위해 더, 더 많은 주법을 흡입하듯 터득했었는데, 너무 다양한 ‘주법’을 터득한 것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필요한 건데요?”
“너무 많은 연주를 ‘흉내’ 내다가 잊어버렸거든요. 제 근원을요.”
스스로 듣기에도 꽤 꼴사나운 말이었지만, 방금 내가 한 말은 쓰라린 현실이었다.
그 어떤 음색도 자아낼 수 있다는 장점만 키워내다 보니 연주에 깊고, 깊게 꾹꾹 눌러, 감정을 담아내던 내 본래의 강점이 흐려졌던 것.
그렇기에 나는 선별하고, 구분해야 했다.
내 수많은 ‘주법’ 중에서 무엇이 본래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인지 말이다.
이런 작업이 말이 쉽지, 직접 연주하다 보면 스스로 이를 판단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프로들도 곧잘 자신의 연주를 녹음하고 다시 들으며 부족한 부분, 짧은 실수를 검토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게는 선생님이 계셨다.
듣는 것만으로도, 칭찬과 함께 연주자의 ‘특징’을 정확히 짚어주시는 최윤설 선생님이.
선생님의 예민하고 영민한 귀는 현재의 내가 처한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1번에 1시간씩은 소요되었을 작업을 절반, 아니 3배로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파라치’라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동안 나와 함께 있게 되신 선생님.
정말 죄송하긴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번 일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고민도 단번에 끝내, 연습 시간도 단축돼.
누군가 고의로 날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정말 운이 좋았다.
“한 번 더 갈게요. 아, 혹시 듣고 싶은 곡이 있으세요?”
“듣고 싶은 곡? 음, 난 그거!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곡 중에서 아무거나.”
“좋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고 건반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자,
“후후후”
선생님이 앉아계신 간이의자에서 그러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내 연주를 듣는 걸 꽤나 즐기시는 듯했다.
그렇게 미소짓는 선생님을 보고 있자니 전생의 선생님이 떠올라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할 수 있어. 성현아. 넌 재능이 없지만, 나도 재능 없는 인간인걸?
지금도 떠올리면 코끝이 찡해지는 그 연습실에서 들었던 선생님의 진심 어린 응원.
나는 지은이와 찰싹 달라붙어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차오르는 만족감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내 은사님과 있으면 몇 번이고 고민하게 된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돌려드릴 수 있을지를 말이다.
***
최윤설은 솔직히 요 일주일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비록 계기는 다시 생각해봐도 소름 끼치는 파파라치를 피하고자 이곳저곳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다소 기이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윤설에게 있어 너무나도 흡족한 형태가 되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최상위권 피아니스트들이 모두 모여드는 ‘한국 종합 콩쿠르’.
그 ‘결선 진출자’의 연주를 들으려면 보통 얼마를 내야 하는 줄 아는가.
어림잡아도 10만 원 돈은 우습게 사라지는 게 바로 ‘한국 종합 콩쿠르’의 결선 진출자의 연주회다.
그런데 윤설은 참 우연히 상담 거리가 있다는 성현의 옆자리를 지키게 되었고, 그녀의 매일, 매일은 최상위권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를 감상하는 날이 되었다.
원래부터 솜씨 좋은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를 곧잘 다니던 최윤설이었기에 이런 상황은 그녀에게 행운 그것도 하늘이 내린 천운과 다름없었다.
‘흐어어, 귀가 녹는다···.’
매 순간, 진지한 얼굴로 성현의 연주를 듣던 그녀였지만, 속으로는 달콤한 솜사탕을 입안 가득 머금은 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윤설.
지금껏 숱하게 많이 ‘최고’라 불리는 연주를 들어봤던 윤설에게 이성현이라는 아이는 참 놀랍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성현은 자신의 모난 면을 감추질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연주를 선보인 뒤, 조언을 구하는 성현의 태도.
“어땠나요?”
분명 윤설은 성현에게 패배해 결선에 오르지 못한 연주자일진데도 성현은 매사 진지하게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게다가 자신의 별것 아닌 말을 하나, 하나 메모하는 모습은···.
정말 일주일이 다 지나간 이 시점까지 적응이 되질 않는 것이다.
게다가 성현은 지금까지 윤설이 가지고 있던 ‘천재’는 노력하지 않는다는 편견을 정면에서 깨부숴버렸다.
일례로, 윤설이 성현과 연습실에 함께 하게 된 지 넷째 날이었던가.
이젠 앉아서 듣기만 하던 윤설이 지쳐서 집중력이 떨어질 정도였는데, 성현의 연습은 멈추질 않았다.
서늘한 날씨에도 땀을 주르륵 흘리고, 체력적으로 지쳤는지 연주를 멈췄을 땐 손끝이 떨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심장이 두 개라도 되는 듯 그럼에도 멈추질 않는 성현.
정말···.
자기 나름, 노력을 중시하며 살아온 윤설도 혀를 내두를 만큼의 광경이었다.
게다가,
음,
자신보다 더 뛰어난 연주자에게 이렇게 말하긴 뭐하다만, 윤설은 성현을 가르치는 맛이 있는 학생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뭔가 아쉬운 부분 하나를 지적하면 웬만한 것들은 바로 다음 연주에서 보완해냈으며···.
당장 오늘 보완에 실패하더라도, 바로 다음 날 만났을 때 성현은 그 미스를 완전히 바로잡아 나타났다.
‘대체···.’
그것도 딱, 하룻밤 만에 말이다.
도통 무슨 마법을 부른 건지, 윤설이 이에 흥미를 느끼자 지금껏 신경 쓰지 않던 것이 보였다.
평소 윤설은 저녁 7시가 되면 먼저 금천문화재단 기사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알고 보니 성현은 8시나, 9시에 집으로 향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귀가하는 시간은 무려 자정.
농담이 아니라 정말 00시 00분이 되어 경비원이 문을 잠그러 올 때까지 연습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윤설은 진심으로 이성현이라는 피아니스트에게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그런 숱한 의문과 한도 끝도 없는 성현의 노력.
그건 정말이지 윤설이 평소 꿈꿔왔던 이상적인 연주자의 모습 자체였다.
매일 같이 마법처럼 실력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케스트라의 재정비와 결선곡 선정이 끝나 드디어 연주곡이 발표되는 날이 되었다.
예로부터 ‘한국 종합 콩쿠르’의 결선 방식은 같았다.
본선에서 함께했던 ‘오케스트라’가 지정한 한 곡.
주최 측에서 이번 결선 진출자들에게 어울린다고 선정한 곡이 한 곡.
마지막으로 결선 진출자가 무대 위에서 홀로 연주하게 될 자유곡이 한 곡.
이렇게 세 곡으로 올해의 영예로운 우승자가 정해지는 것이다.
결선곡을 확인하는 것만큼은 아무리 성현이라도 떨렸는지, 그는 한참이나 홈페이지를 켜기를 주저했다.
“괜찮아. 성현아. 할 수 있어.”
그래서 윤설은 옛날부터 주문처럼 자신에게 되뇌던 말을 성현에게 해주었는데, 성현은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러다, 심호흡을 크게 쉬고 다시금 빙그르 웃는 천재의 모습에 윤설은 새삼, 성현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을 탁, 탁! 이루어내며 다녀도 결국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걸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 윤설.
그때, 성현은 드디어 버튼을 눌렀다.
딸깍,
드디어 펼쳐진 홈페이지.
그런데 그 속에 적힌 결선곡은 윤설과 성현은 물론이고 같은 스튜디오에 있는 민호와 지은의 예측을 모두 벗어난 곡들이었다.
“응?!”
너무 놀라서 새된 소리를 내지른 윤설.
그리고 성현은 그 옆에서, 다소 낯선 이름의 결선 지정곡들을 쳐다보다 공통점이 되는 한 작곡가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히···. 히사이시 조라고?”
‘명작’이라는 호칭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애니메이션 영화들.
그 영화의 OST를 작곡한 일본 음악계의 거장, 그의 이름이 바로 히사이시 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