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2
2. 지오이오소 (Gioioso, 즐겁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흐으으윽”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 징그러운 고통에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런데 갑자기 내 어깨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야, 성현아 괜찮냐? 야! 서, 선생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한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 성현이 얼굴이 파래요!”
“뭐라고?”
선생님?
큰 목소리를 따라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내 담임선생님이자 클래식 동아리의 고문을 맡았던 젊은 여선생님이 보였다.
그래, 이 선생님의 적극 추천으로 예고 입시를 봤다가 덜컥 나는 미향예고에 합격했었다.
근데, 저 선생님은 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셨는데?
“성현아!? 나 보이니? 이성현!”
패닉에 빠진 얼굴로 나를 흔드는 선생님.
아, 어지러우니까 그만 좀, 골이 울린다고···.
나는 솟아오르는 구토를 간신히 억누르며 내려앉는 눈꺼풀을 닫았다.
그 후로는 똑바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잘린 사진 조각처럼 모교의 풍경이 뜨문뜨문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미향예고보다도 더 이전,
피아노를 칠 때면 언제든지 미소를 짓고 있던 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향예고에서 받은 괄시와 수많은 지적 앞에 무너지기 전, 내 생에서 가장 피아노를 즐기던 시절의 나.
김민호의 연주에 좌절과 기적을 동시에 맛보고 밤낮으로 연습실에서 나오지 않았던 대학생 이성현.
오케스트라, 퀸 엘리자베스, 성탄절에 만난 아이까지.
많은 기억이 뒤엉켜 폭풍우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음악 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소녀의 기도’
클래식 중독자였던 중학교 교장의 취향으로 우리 중학교는 종소리 대신 그 음악을 틀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눈앞에 보이는 중학교 천장.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두통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없어.”
20년간 피아노를 치며 깊게 박혔던 굳은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인가.
차라리 눈앞의 광경이 모두 주마등이라는 게 조금 더 설득력 있겠다.
나는 주저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빈 보건실을 나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오렌지빛 석양.
이미 시간이 꽤 늦어 학생들은 모두 하교한 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내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순간이 정말 시간여행이건, 잠깐의 주마등이건 내가 향하는 곳은 변하지 않았다.
-음악실
2층 교장실의 정 반대편에 있는 고요한 교실이었다.
클래식 동아리원들만 아는 여비 열쇠로 문을 연 그곳에는 교장 선생님의 지원을 아낌없이 받아 마련된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띵-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건반을 눌러보았다.
저음부가 강하고 타건감이 무거워 울림이 깊었다.
내 손에 박혀있던 손가락 근육이 모두 사라졌기에 무겁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이 그랜드 피아노의 특징인지 확실히 구분되지는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칠 수 있다.”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C. Debussy – Claire de Lune](드뷔시. 달빛)
천재 김민호처럼 멋진 독주회를 열게 된다면 꼭 첫 번째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
언젠가 졸업식에서 그가 연주했던 찬란한 아라베스크 1번과는 정반대로, 애잔하고 은은한 음색을 가진 음악.
드뷔시가 바라본 우아하고도 차가운 달빛은 내게 조금 다르게 들렸다.
자신은 이곳에 있다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달빛은 내게 있어 어떤 반주자가 내뱉는 호소였다.
늘 위태롭지만, 끊임없이 색을 잃지 않으려는 발버둥 치는 외로움, 연약함.
독주회에서 나는 꼭 말하고 싶었다.
태양같이 밝은 어떤 피아니스트를 향해서.
“너처럼 되고 싶다.”
졸업식부터 늘 한결같았던 나의 갈망이었다.
“하핫.”
5분이 안 되는 연주를 마치자 나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손가락 길이가 모자라 화음을 제대로 넣지 못했다.
잠깐의 연주만으로 피로감을 느끼는 전신.
고작 한 곡 만에 땀이 흐를 것 같았다.
“엉망이네.”
근육이 모자란 손가락이 건반을 완전히 누르지 못해 음이 흐려졌다.
충분히 울려야 할 음은 짧아지고 괜히 손에 닿기 쉬운 음만 강해지다 보니 악보를 다 지키지도 못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기다렸다는 듯 건반의 울림에 맞춰 만개한 나의 미소.
내가 생각한 해석을 그대로 연주에 담아낼 때의 즐거움이 내 심장을 쿵쿵 두드리고 있었다.
드르륵!
피아노의 여운을 느끼며 충만한 만족감에 미소를 짓고 있던 와중, 벌컥 음악실의 문이 열렸다.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는 남자가 보였다.
“방금 피아노, 네가 친 거니?”
“예? 아. 네.”
어디서 본적이 있는 듯한 외향이었다.
그래서 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바라보자 그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아, 난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교장 선생님의 부탁으로 잠깐 학교에 들어온 사람이란다.”
내 시선을 경계의 눈빛으로 오해한 것인지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그보다 방금 드뷔시, 정말 네가 친 거니?”
“예?”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바로 음악가의 이름부터 나오다니···.
이 사람은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큰 하관에 오뚝한 콧날, 지금은 웃고 있지만, 인상을 찡그리면 꽤 사납게 변할 것 같은 얼굴.
아!
“정석 선배?!”
너무 젊어서 못 알아볼 뻔했다. 미향예고의 졸업생이자 콩쿠르가 있을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아 주셨던 그야말로 대선배.
이분이 왜 여기에?
“선배라고?”
“아! 아니요. 말이 헛나왔어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돌발적인 발언을 얼버무렸고, 정석 선배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물어왔다.
“그보다 친구야. 피아노는 언제부터 쳤니? 주니어 콩쿠르에서는 못 봤던 친구 같은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이 나이에 20년간 쳐왔다고 했다간 미친놈이 될 것이 뻔하고···.
우선, 미향예고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취미로만 피아노를 쳐왔으니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아뇨. 아직 정식으로 레슨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피아노는 정말 좋아해요.”
그러자 정석 선배의 눈이 위아래로 크게 찢어졌다.
적잖게 놀란 것 같았다.
“레슨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예!”
“아, 악보는 어디 있니. 설마 암보한 거니?”
나는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정석 선배를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좋아하거든요. 드뷔시.”
그 호랑이 같았던 선배를, 낙제생이었던 내게는 눈길 한번 제대로 준 적 없던 선배를 이렇게나 놀라게 할 수 있다니.
피아노의 충만감과는 또 다른 즐거움에 나의 얼굴에는 다시금 미소가 만개했다.
정석 선배는 그 후로도 이것저것을 물었다.
드뷔시는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
혹시 오늘 아파서 조퇴했다는 클래식 동아리원이 나였는지.
피아노는 왜 좋아하는지.
하나, 하나 묻는 정석 선배에게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해주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났다.
창밖의 노을이 거의 다 저물어 이젠 자리를 뜰 시간이 된 것이다.
내가 이를 말하자 정석 선배는 정말 마지막이라며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름 좀 알려줄 수 있겠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름을 묻는 정석 선배.
“반주자예요.”
“뭐, 뭐라고?”
“장난이고요. 저는 이성현이라고 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한 뒤 고개를 푹 숙여 나이에 맞는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떠났다.
이젠 반주자A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성현이라···.”
그리고 등 뒤에서 아주 작지만 또렷하게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
“성현아!”
보건실로 돌아가는 길에 들려온 목소리. 익숙하면서도 기억 속의 것보다 더 맑고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의 엄마였다.
“어?”
나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와 품에 안아주는 엄마.
피아노에 미치게 된 후로 이틀 이상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없던 터라 나를 와락 안아주는 엄마의 온기는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20년 만이었다.
“괜찮아? 갑자기 쓰러졌다면서.”
걱정이 겉으로 묻어날 정도로 따듯하게 나를 바라봐주는 엄마.
언제부턴가 직접 찾아뵙는 대신 돈만 부쳐드렸던 시절이 떠올라 갑자기 울컥하는 심정이 들었다.
“어, 엄···.”
그것 때문에 말문이 막혀 내가 말을 멈추자 엄마는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내 뺨과 머리를 매만져주셨다.
“괜찮아? 성현아. 아직도 많이 아파? 병원 갈까? 엄마가 늦었지? 미안해.”
“아, 아니에요. 잠깐 목이 좀 말라서 그래요.”
나는 금방 감정을 수습하고 미소를 지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전 생에는 돈만 툭 드리는 것으로 메말라버렸던 관계였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예술고와 대학 등록비로 고생시켜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
정석은 아직도 음악실 문 앞에 덩그러니 서서 온기가 남은 피아노를 보고 있었다.
“성현···. 이성현.”
곡에 감정을 담아낸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뛰어난 수재들도 예고에 들어가 수십 번 깨지고 수백 번의 연습을 거치고 나서야 간신히 한 곡씩 감정을 담는 법을 알아간다.
‘좋아하거든요. 드뷔시.’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나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한다 말하는 미소도, 그리고 연주에 담긴 그 끝을 알 수 없는 고독함과 절실함도.
고작 16살 나이에 어떻게 그런 묵직한 감정을 담아 피아노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얼굴을 직접 보기 전까지 정석은 무슨 40대의 고독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줄 알았다.
“그 나이에, 그것도 레슨도 안 받아본 애가 그렇게 친다고?”
그야말로 천재.
심지어 성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석이 바라본 성현의 손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에게는 없을 수가 없는, 굳은살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다.”
진짜로 천재를 만난 것이다.
심지어 기본기만 아주 조금 다듬어주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빛을 낼 원석을!
정석은 흥분되는 심정과 함께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김선생! 아이고 여기 계셨군요.”
그때 정석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머리가 반쯤 벗겨진 이 중학교의 교장이었다.
“아, 교장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화장실 한번 다녀온다는 사람이 30분째 돌아오질 않으니. 내 찾으러 온 게지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었나요?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실례는 무슨, 그보다 김선생 한 번만 더 우리 클래식 동아리를 봐줄 순 없겠나요? 아니, 미향예고에 원서를 넣어볼 학생이 하나도 없다니! 한 번만 더 들어보세요. 오늘 애들이 컨디션이 영···.”
또다시 어떻게든 미향예고 입시생을 발굴해보려는 교장.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절머리가 날법한 주제였으나, 정석은 교장의 말을 끊으면서까지 당당히 말했다.
“한 명 찾은 것 같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누굽니까. 대체 누가.”
정석은 교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성현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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