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48
어느쪽이든 레녹에게 손해되는 일은 아니었다.
단지 빚을 지는 대상이 약선이 아니라 제니에게 옮겨갔을 뿐.
약선에게 닥친 비극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레녹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오히려 약선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고위 술사들이 함부로 스스로에게 제약을 거는 것에 대한 반면교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레녹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돌아보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레녹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언젠가는 바라는 것에 손이 닿기만을 기도할 뿐.
멈춰선 이를 동정하는 것조차 레녹에게는 사치에 가까웠다.
언젠가 그녀가 건넨 충고를 되새길 날이 레녹에게 찾아올까.
하지만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에 레녹은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할 말이 다했다는 것을 깨달은 레녹은 미련없이 돌아서 약선의 집을 나섰다.
호수 언저리에 잠들어있던 제니가 깨어나는 기척이 손에 잡힐듯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늘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지나쳐왔던 모든 일들을 수습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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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베스라…..”
제니는 골치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얇은 손가락 사이에는 어느샌가 길쭉한 장초가 하나 들려있었다.
약선의 산맥을 내려와 다시 돌아온 제니의 술집.
레녹은 약선과 나눈 대화를 간단하게 축약해서 제니와 조든에게 들려주었다.
그의 몸에 관해 나눈 대화들은 어디까지나 약선과 레녹만이 공유해야 하는 비밀.
말라베스라는 식물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마약왕의 금고를 털어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도 이름은 들어본 적 있어.”
“확실히 구하기 쉬운 물건은 아니겠군.”
가만히 레녹의 말을 듣고 있던 조든이 입을 열었다.
“조든, 뭐라도 아는게 있는거야?”
“그쪽 업계에서는 이미 흘러간 전설로 취급받는 물건이다. 무너진 섬이 정화된 뒤로 새로운 약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데다, 그것보다 효율이 좋은 마약들이 많이 개발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공급이 완전히 끊긴거나 다름없지만, 수요량도 극히 한정되어있다보니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물건이라는 의미인가.
확실히 약선이 말한대로라면 레녹과 같은 희귀한 증상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면 구할 이유도, 필요성도 없는 물건이기는 했다.
“꼭 마약왕의 금고를 털어야 할 필요는 없어.”
레녹이 말했다.
“주스마스터와 거래를 할 수도 있다는 의미야?”
“결국 그에게 말라베스를 받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일테니.”
도미닉 카바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레녹이 알 바가 아니다.
그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던, 레녹과 직접적으로 얽힐 일이 없다면 무탈하게 지나가는 편이 가장 좋지 않겠는가.
약선의 말을 듣자마자 레녹이 생각한 것은 마약왕의 금고에 잠입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통해서 물건을 얻어내는 쪽이었다.
만약 레녹이 주스마스터가 탐낼만한 장물을 구할수만 있다면, 먼저 거래를 요구해서 원하는 약재를 받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테니.
“확실하게 정하고 들어가야 해.”
제니가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약왕에게 거래의사가 있다는 걸 밝히는 순간, 놈의 신경이 금고에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야. 우리쪽에서 거래가 틀어진 다음에 금고를 털려고 한다면 난이도는 이전보다 몇배는 더 어려워지겠지.”
“……….”
우리, 라.
제니가 레녹의 일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준다는 사실은 감명깊었지만, 일단 당장의 문제에 집중하자.
확실히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다.
주스마스터가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있는지는 제쳐두더라도, 일단 거래를 신청한 순간부터 그가 말라베스가 든 금고쪽에 신경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이 될테니.
시작부터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시작할 이유는 없다.
제니는 레녹이 어떤 식의 일처리를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두가지 방법을 동시에 사용하면 되겠군.”
조든이 거들었다.
“이쪽에서 마약왕을 거래 테이블에 불러내는 그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그의 금고쪽의 방비도 허술해지겠지. 그 틈을 타서 반 자네가 마약왕의 금고를 터는 건 어떤가.”
“너무 리스크가 큽니다.”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거래를 진행하는 도중에 일이 터진다면 자연스럽게 양쪽에서 일어난 일의 커넥션을 의심받게 될 겁니다. 거기에 하필 거래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던 물건인 말라베스를 훔쳐온다? 마약왕과 완전히 척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시도해서는 안되는 방법이죠.”
레녹은 다양하게 변하는 얼굴과 추적마법이나 술식에 저항하는 강력한 대상지정저항능력으로 신상이 깊게 파헤쳐지는 것을 피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다르다.
아무리 완벽하게 신분을 변조한다고 하더라도 제니나 레녹같은 경우에는 복마전의 눈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칼에 조든의 의견을 거절한 레녹이 씩 웃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주스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았습니다.”
“음…….”
“하하, 티났어?”
조든이 침음성을 흘리고,제니가 멋쩍게 웃었다.
두 사람은 굉장히 완곡하게 다른 방식을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대안들은 처음부터 마약왕이 거래에 제대로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뒷세계의 사정에 빠삭한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빙 돌려서 말할 정도라면, 마약왕의 인성이 얼마나 개차반인지는 굳이 들을 필요도 없다.
“반 네가 그 새끼를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놈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멀쩡하게 거래를 주고 받는다는 생각을 안 할걸.”
“………”
“가장 저열한 마약업계에서 정점에 오른 남자일세. 배신과 야합이 숨쉬듯이 이뤄지는 정치판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할 필요도 없지. 단순하게 거래로 간다면 순순히 끝날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어.”
조든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마약왕과의 거래에서 원하는 물건을 얻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일 터.
“가장 좋은 건 말라베스를 마약왕의 금고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겠지만…. 결국 마약왕의 물건에 손을 대야한다면 뒷구멍으로 몰래ㅡ”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그게 차선책이겠지.”
제니가 말했다.
“다행히 반 당신은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유능한 마법사들 중 한명이야. 다른 프리랜서들이 이런 일에 연루되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라고 하겠지만, 정면대결이 아니라면 오히려 시도해볼만 해.”
타다다닥!!
노트북을 들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딥웹의 화면이 정신없이 켜졌다 사라지면서 점멸하는 사이 제니가 입을 열었다.
“말라베스의 다른 소재지를 우선하고, 그 뒤로 주스마스터의 대외적인 일정과 금고의 위치를 기준으로 데이터를 수집해볼게.”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어?”
“…..시작한 뒤에야 감을 잡을 수 있겠는데. 넉넉히 잡으면 아무리 늦어도 2주는 필요할거야.”
제니가 레녹 혼자만을 관리하는 것도 아닌데다, 데이터를 다른 곳에 요청하고 받아오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가늠한다면 납득이 되지 않는 기간은 아니다.
레녹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잔을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그 시간동안 다른 일을 좀 해야겠군.”
“뭐?”
제니의 얼굴을 보며 레녹이 씩 웃었다.
“대천사의 연민. 이대로 놔둘수는 없잖아.”
약선을 만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해서 아직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레녹은 수중에 들어온 무지갯빛의 보석을 멍청하게 내버려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탐사단쪽에서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고대 유물을 회수하려 들테니, 추가적인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
대천사의 연민을 목숨보다 아낀다는 이리나 페스필드가 이대로 물러날리는 없다.
어차피 한판 붙어야 한다면, 이쪽에서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직성에 맞았다.
“탐사단과 결착을 짓고, 이리나 페스필드에게서 남은 아티팩트를 받아온다. 마약왕의 정보를 털어내기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군.”
경매장에서 마지막으로 아티팩트를 낙찰받은 노신사를 추적하다보면 이리나 페스필드에게 닿을 수 있겠지.
한번 날을 세웠다면 뒤끝이 남지 않도록 결착을 본다.
이리나의 얼굴을 직접 보기 전까지 레녹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조사 (1)
불빛이 모두 꺼진 병원 복도.
느지막한 밤에 울려퍼지는 느릿한 발걸음.
구둣소리를 올리며 병실 문을 열어젖힌 것은, 경매장에서 마지막으로 대천사의 연민을 손에 넣었던 노신사였다.
“몸은 좀 어떤가?”
“………”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그는 모자를 벗으면서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 표정을 보니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군.”
침대위에 앉아 푸석푸석한 머리를 축 늘어뜨린 젊은 여자.
머리칼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는 차가운 살의로 번뜩이고 있었다.
메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일이 실패했더군요. 그것도 아주 끔찍한 형태로.”
“………”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브룩의 죽음은 유감이네. 신의있는 동료를 잃었군.”
노인이 생각하기에도 브룩이 가지고 있는 연기력과 탐사단을 향한 충성심은 범상치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인재를 잃어버린것은 확실히 뼈아픈 일이겠지.
여자는 잠시 침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신경쓰고 싶지 않군요. 물건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의 죽음을 두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참으로 지독한 냉혈한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런 성정을 지니고 있기에 노인은 무엇보다 그녀를 신뢰했다.
“여기 있네.”
노인이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튕겨올리자, 그의 등 뒤에서 베일이 벗겨지듯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으로 매달린 날개가 인상적인 한 자루의 지팡이.
그와 대비되는 지팡이 중심부의 텅 비어있는 구멍.
경매장에서 완벽하게 도난맞았다고 생각했던 유물, 대천사의 연민이었다.
“이제는 반쪽에 불과한 물건이지만…..”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지팡이를 여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차가우면서도 그리운 감각.
손이 하얗게 변할만큼 지팡이를 강하게 움켜쥔 여자, 이리나 페스필드가 중얼거렸다.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을겁니다. 내 보물을 되찾아 올 거예요.”
이제 와서 어느쪽에게 명분이 있는지가 무엇이 중요할까.
한번 피를 보기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다.
탐사단은 이 도시의 규칙에 그리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결코 어리숙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던 브룩이 죽었으니, 다른 동료들도 그의 복수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할 터.
“일단 자네의 부상을 가라앉히는 것이 우선일세. 약선만큼 비밀을 지켜줄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실력이 있는 의사를 불렀어. 자네도 만족할거야.”
노신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리나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는 자네가 가진 유적탐사능력을 굉장히 높게 사는 것 뿐만 아니라, 동료를 아끼는 자네의 품성도 존중하고 있네. 자네가 탐사단을 아끼는만큼,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도록 하지.”
“…..발목이나 잡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매정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도 빈센트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 역시 브룩이 어떤 방식으로 약선의 부적을 가져오려고 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취한 방식이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 역시.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흘러갔고,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적을 만들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언제나 살아남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다.
빈센트는 그녀에게 죽을뻔한 어느 이름모를 술사보다는, 인정머리가 없지만 유능하기 짝이없는 탐사단장이 더욱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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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스캐빈저 43구역의 지부장, 야드 매링슨은 미친듯이 발을 놀리면서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늘 그렇듯, 단순한 작업이었을 뿐이다.
이름모를 화물에 번호표를 붙이고, 적당히 철도역까지 옮긴 뒤 운임료를 받아먹는 딱 그 정도의 일.
시정부의 검문이 끝난지 시간이 꽤 흐르기는 했지만, 아직 이 거리의 뻣뻣한 분위기는 채 가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몸을 사려가면서 걸려도 안전할 것만 같은 일만 맡아서 해오지 않았던가.
물론 그 과정에서 지나가는 사람도 몇놈 잡아 죽이고, 근처에 있던 가게도 약탈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오늘도 돈을 받은 뒤, 밑엣 놈들과 같이 40구역의 클럽에서 진탕 퍼마시고 피비린내를 말끔히 씻어낼 생각이었다.
비쩍 마른 남자가 나타나 모든 것을 망쳐버리기 전까지는.
콰아앙!!
온갖 기물들로 쌓아올린 바리케이드가 부서지고, 앞에서 기를 쓰고 문을 털어막던 스캐빈저들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허공을 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