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73
약먹는 천재마법사 173화
등대(2)
“주시자라…….”
등대지기를 보필하는 놈들을 지칭하는 말치고는 굉장히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천견의 유지라고 한다면, 아마 외해에서 다가오는 재앙들을 관측하는 등대지기의 의무와 관련된 일이었겠지.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단 한 번도 주저해 본 적도 없습니다.”
아몬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안개 너머로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둠 속을 더듬는 것처럼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죠.”
천천히 레녹을 돌아보는 아몬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비탄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주 조금의 단서라도, 희미한 희망이라도…… 그분의 눈으로 보고 남겨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항상 생각했습니다.”
“…….”
“어째서 그분께서는 마지막 전언을 당신 같은 외부인에게 남기고 떠난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제 하찮은 욕심이었죠.”
“유감이지만 승천자가 남긴 말에 너희가 원하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아.”
레녹이 대꾸했다.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사정과 관련해서 몇 가지 말을 나눴을 뿐이지.”
연초를 문 채로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입술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씨는,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빛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다.
이 긴 여정의 끝에서 레녹이 남길 수 있는 빛은 결국 어느 쪽이어야 할까.
그 대답을 미리 엿보기 위해 레녹은 지금 등대지기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래서, 등대는 지금 어디에 있지?”
등대지기를 만나기 위해서는 결국 등대를 찾아가야 할 터.
필레놈 자치령에서도 베일에 싸여 있는 그 고대의 유적에도 어느 정도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아몬은 레녹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운전대를 잡고 윙보트를 높게 하늘로 추켜올렸다.
“자세한 설명은 그분께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 직후, 밤하늘에 낀 구름이 걷히고 달이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몬의 윙보트가 달을 향해서 날아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녹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오오오오오…….
귓가를 스치는 나직한 바람과 함께 달의 표면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동시에 마치 눈이 뜨여지듯이 달의 중심에서 피어오른 거대한 구멍이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한다.
마치 달을 향해 통로가 열린 것만 같은 신비로운 정경.
하지만 레녹은 강력한 마력감응력과 직관력을 토대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달이라는 개념을 매개체로 해서 출입이 가능한 결계군. 그것도 굉장히…… 정교하고 수준 높은 결계술식이야.”
“……안목이 굉장하시군요.”
레녹의 생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기 시작했다.
방금 아몬이 문을 열어내기 전까지는 레녹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
아주 수준 높은 결계술사가 아득한 시간을 걸쳐서 만들어낸 결계.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굳이 달을 매개체로 삼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레녹은 그 답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무심코 감탄했다.
“그랬군……. 외해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은, 행성 밖에서 공전하는 달의 반사광을 의미하는 것이었나?”
“…….”
“종말을 관측하는 등대가 달빛을 동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등대의 위치를 숨길 때도 달을 매개로 삼았군. 이 정도의 천체(天體)술식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발동시간이 굉장히 느리고 준비에도 아주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천체술식은 눈이 돌아갈 만큼 막대한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다양한 단점을 안고 있지만, 술식이 발동되는 규모와 체급만큼은 다른 술식들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특질계통의 술식으로 유명하다.
달이라는 위성을 통해 등대의 위치를 숨기고 있다면 아마 자치령의 모든 공간을 망라할 만큼 거대한 술식을 펼치고 있을 터.
이미 자치령의 마력에 익숙해진 레녹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마약왕이 그의 금고를 숨길 때 주시자들과 같은 수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아몬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레녹을 돌아보았다.
“천견 님께서 어째서 당신을 선택하셨는지, 이제 짐작이 가는군요.”
“그런가?”
“……저는 이 이상 말을 아끼겠습니다. 남은 말은, 모두 그분과 함께 하시길.”
두 사람은 곧바로 달의 표면에 깨진 금을 따라 안쪽 공간으로 향했다.
언뜻 보기에는 달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여기 숨겨진 것은 또 다른 부유섬의 일종.
규모만 보자면 자치령 군락지에서 가장 거대한 일곱 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족히 수백 명이 넘게 자리할 수 있을 만큼 드넓은 초원이 우거진 섬.
그리고 그 초원의 한복판에, 거대한 규모의 탑이 비스듬히 무너져 있었다.
탑의 둘레와 길이를 보아하니 원래라면 하늘을 뚫을 듯이 높게 치솟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높이.
그러나 지금은 탑의 상층부는 완전히 사라져서 온데간데없이, 중·하단부만이 지상에 묶인 채로 쓰러져 있을 뿐이다.
검고 푸른 빛을 띠는 알 수 없는 재질. 마력의 투사율이 상당히 낮은 광석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듯한 탑은 이미 원래 형태를 잃었음에도 기품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
아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말없이 레녹을 탑 안쪽으로 안내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탑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상당히 정돈되어 있었다. 널찍한 입구 로비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며 제 할일을 찾아 돌아다닌다.
속세와는 떨어진 구도자들의 모임을 상상했던 레녹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주시자들의 조직은 레녹의 생각보다 더 바쁘고, 또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레녹이 이런 점을 아몬에게 묻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무리 등대를 기점으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맨땅에서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조직의 중심을 잡고 원래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활동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자치령 정부에게 따로 지원 같은 걸 받지는 않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아몬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그제야 레녹이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기라도 한 태도였다.
“등대가 자치령의 영토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저희는 자치령에게 묶여 있지는 않습니다.”
“…….”
“서로가 서로에게 일체 간섭하지 않는 관계. 그렇기 때문에 천견 님의 마지막 외유가 그렇게 화제가 되었던 것이죠. 유달리 속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는 했지만, 설마 발칸과의 휴전 협상에 직접 몸을 움직이실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아몬은 그렇게 말하면서 스쳐 지나가듯이 말했다.
“모두가 그것과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죠.”
그 다른 이유가, 지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널찍한 로비를 지나 탑의 상층으로 향했다. 역시 예상과는 달리 상당히 쾌적했다.
레녹도 마력을 바짝 돋궜지만, 바람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 특별한 무언가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나긴 복도를 지나, 숨이 확 트이는 널찍한 홀로 나온다.
홀의 끝자락.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거대한 청색 삼안(三眼)의 문장.
그 청명한 등대지기의 상징 아래쪽에 놓인 큼지막한 의자에 않은 한 소녀가 눈을 감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말없이 몸을 틀어 레녹에게 길을 내주었다.
레녹은 좌우로 5m는 되는 듯한 널찍한 융단을 따라 걸어 소녀에게 향했다.
소녀는 레녹이 근처에 다가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을 텐데도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위의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듯한 기분이 든다.
그녀가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분명 두 눈으로 보고, 마력으로 감지하고 있음에도 텅 비어 있는 허공을 마주하는 듯한 공허한 감각.
고작 열 살 언저리로 보이는 어린 소녀. 이것이 차기 등대지기의 모습인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녀였다.
“오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왜지?”
“그날로부터 어떤 대답도 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속세의 재능있는 술사들 중에는 더 이상 승천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두지 않는 분들도 많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이 허황된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죠.”
“…….”
“에반 님 역시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혹은 내가, 이미 너희들과는 완전히 목표가 다른 조직에 몸을 담았을 거라고 생각했거나.”
이번에는 소녀가 입을 다물었다.
레녹은 주위를 휙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 세워두고 이야기를 할 건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공간에 부여된 고대 술식이 다른 물건이 오래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탓에…… 원하신다면 융단에라도 앉으셔도 괜찮습니다. 매일 청소를 해서 깨끗할 거예요.”
“…….”
갑자기 분위기가 좀 가벼워진 감이 있지만, 레녹은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그녀의 말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붙일 생각은 없었다.
이 자리는 엄연히 그녀의 말을 듣고 앞으로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자리다.
등대지기를 굳이 압박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보여서도 안 되겠지.
레녹은 주저앉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소녀의 뒤쪽에 떠오른 청색의 삼안.
세 개의 눈동자가 겹쳐서 떠오른 그 문장은 아마 틀림없이 아몬이 말한 ‘청의 눈’이라는 조직의 상징이겠지.
“나와 접촉했을 때는 조직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사이 이만한 규모의 조직을 만들어낸 건 아니었겠지.”
“그 말이 맞습니다.”
소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이끌고 있는 조직, 이 청의 눈은 등대지기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부족한 저를 따라주는 주시자들을 모아 만들어낸 결사단입니다.”
그녀가 눈을 살짝 반개하는 것과 동시에, 막대한 양의 청광이 양쪽 눈에서 흘러나왔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
“청의 눈을 이끌고 있는 수장. 라피스 팔시어. 천견 마드레아 팔시어의 유일한 혈육이자, 지금은 그분의 유지를 물려받은 등대지기입니다.”
“에반이다. 라바테논 대학에서 일하고 있지.”
레녹은 여기서 어떤 신분을 드러내야 하는지 잊지 않았다.
소녀, 라피스가 레녹에게 접촉했던 순간은 엄연히 레녹이 에반의 신분, 다시 말해 라바테논 대학의 조교수로서 학회에 참가했을 때의 시점이다.
반이고 레녹이고, 라피스에게는 공식적으로 정보를 드러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지금 그녀가 레녹을 부른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마드레아 팔시어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
“일전에 잠시 대화를 나눴을 때, 청의 눈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에반 님이 자치령에 오실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라피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아예 이쪽의 제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
“그 나이에 벌써 발칸 시정부 직속으로 운영되는 라바테논 대학의 조교수. 거기에 소속된 연구실은 그 아리스 리첼렌의 공방이라고 들었습니다. 에반 님 역시 틀림없이 이론과 실전 양면으로 우수하신 분이겠죠.”
설마 라피스의 입에서 아리스 리첼렌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레녹은 조금 놀랐다.
그녀가 발칸에서 이름이 알려진 천재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자치령의 등대지기가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십 대의 나이에 6레벨에 오른 마법사가 가지는 재능의 힘은 그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레녹의 재능이 드러났을 경우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는 그야말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레녹이 품 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말을 가려서 할 필요가 있다.
“글쎄. 네가 보고 들은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
“…….”
“내 뒷조사를 했다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라피스가 입을 다물었다.
레녹의 말대로, 결국 그의 뒤를 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져 아리스의 연구실로 편입한 기인이다.
최근에 갱신된 정보는 그나마 그가 정령술사라는 것 정도인데, 이건 이미 라피스가 학회에서 그와 접촉할 당시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
도대체 천견은 그에게서 무엇을 보고 마지막 전언을 남겼던 것일까.
라피스는 안광이 줄줄 흘러나오는 눈을 다시 감았다.
고민의 시간은 충분했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으니까.
이제 그에게 선택의 기회를 넘겨줄 차례였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시자가 되어주세요.”
“…….”
“바로 얼마 전. 발칸 근처에서도 ‘관측’을 위협하는 거대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흑마법사 크레이그 틸리언이 테러조직과 교단의 손을 빌려서 ‘멸목’ 아크로트리니어의 파편을 강림시켰죠.”
“그 사건은 반이라는 어느 무소속 마법사의 손으로 해결되었지만, 이와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으음.”
뜻하지 않게 낯이 익은 이름을 듣게 된 레녹의 입꼬리가 무심코 실룩였지만 라피스는 알지 못했다.
“하늘이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더없이 무거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공동의 천장이 어두워지고, 투명한 밤하늘이 비치며 별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레녹은 그제야 이 공동이 일종의 플라네타리움처럼 기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쓸데없이 거대해 보였던 공동은 앉은 자리에서 수천 리 밖의 하늘을 내다보기 위한 등대의 시설이었던 것이다.
“이 땅에 세워놓은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혼돈이 찾아오겠죠. 그리고 판데모니엄과 같이, 그것을 바라고 환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별빛이 빛나는 공동의 하늘 아래서 라피스가 속삭였다.
“청의 눈은 바로 이 하늘에 새로운 문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을 막고, 관측의 사명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 땅에…… 지옥이 내려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