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78
약먹는 천재마법사 278화
대리전(3)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아스이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 제가 해냈군요!”
그는 오히려 자신이 사군의 대리인과 멀쩡히 싸우고 당당하게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 안에도 삼촌과 같은 훌륭한 전사의 본능이 잠들어 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제 술식적인 역량에 억눌려 있던 짐승 같은 본성이 이번 일을 통해서 각성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쟁쟁한 대리인들 사이에서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지…….”
[이 자식, 살아나오니까 굉장히 꼴 보기 싫게 변해 버렸는데.]맨슨이 질린듯이 중얼거리고, 레녹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버려 둬라. 아스이의 진짜 역할은 어차피 대리전이 아니니까. 차라리 승리의 기쁨으로 정신이 고양되어 있는 게 낫겠지.”
“아니, 애초에 승리한 적도 없잖아?”
“아, 그렇군.”
첸의 말에 레녹도 잠깐 헷갈렸는지 픽 웃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나?”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아스이의 패배를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사지 멀쩡하게 기권에 성공하고 사군의 대리인을 엿먹인 시점에서 관중들의 시선은 이쪽에 쏠린 상황.
이제 대리전의 무게추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다른 이들에게 알려준다면 충분했다.
“바로 시작할 거다. 감당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
첸이 가볍게 몸을 풀면서 대꾸했다.
“이날을 위해서 그렇게 연습한 거잖아.”
허리춤의 곡도를 매만지면서 커튼을 젖히고 장원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와아아아아!!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귀청을 울리는 함성소리.
땅을 미미하게 울릴정도로 웅장한 호응 속에서 처형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이를 살려보낸 일로 멘탈이 흔들릴법도 한데, 이미 마음을 가다듬은 듯 호흡이 안정되어 있다.
투구 너머로 번뜩이는 안광이 차분하게 첸을 내려다보았다.
첸은 말없이 곡도를 뽑아 들고 천천히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전신에 묶여 있는 마력사의 감촉은 이미 충분히 익숙해졌다.
중요한 것은 레녹의 조작에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전투논리를 이해하고 미리미리 취할 행동에 대비하고 반응하는 것.
그것만으로 첸은 자신의 감각이 한결 더 날카롭게 갈고 닦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처형인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투구 안쪽으로 나직한 말을 흘렸다.
“오륜가의 서자. 이야기는 들었다.”
“…….”
“설마 아버지를 벤 손으로 아들까지 손을 대게 될 줄은 몰랐군. 처형인들 사이에서는 혈족을 함께 손대는 것은 금기로 여겨진다만…….”
쿠웅!!
묵직한 참마도를 어깨에 얹은 채로 처형인이 자세를 숙인다.
“오늘 같은 날에는 귀신들도 사정을 봐주시겠지.”
후우우웅……!!
거침없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처형인의 모습.
그 언동에는 단 한 자락의 방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스이와의 일전에서 망신을 당한만큼, 두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살기등등한 풍채를 마주하며 첸도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동시에 레녹이 꽂아넣은 마력사가 반응하며 첸의 몸에 흐르는 마력을 날카롭게 다듬어낸다.
키이이잉……!!
칼날처럼 곤두서는 전신의 감각을 느끼는 사이, 머릿속에서 레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짧게 끝낼 거다.]“뭐?”
곡도를 들어올리던 첸이 멈칫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녹이 이어서 말했다.
[아까 아스이에게 손을 대면서 대충 감을 잡았거든. 덕분에 재밌는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다.]“아니, 미안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실험을 자제하고 연습한 대로…… 우읍……!!”
대답은 없었다.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첸의 팔다리가 흔들리면서 그대로 장원을 내달리기 시작한다.
상체를 낮추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리를 놀리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몸의 균형이 맞아들어가며 가속.
순식간에 주위의 풍경이 흐릿하게 변하지만, 엄청난 가속력에도 불구하고 첸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너무 단순한데……!’
레녹이 첸의 몸을 조작해서 이런저런 전투논리를 실험해 보는 사이, 첸도 마냥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태생이 사업가에다, 머리를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그로서는 레녹이 사고하는 방식에 대해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치열한 전투 도중에서도 확실한 우선순위를 매겨두고 매 순간마다 수싸움과 심리전을 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무모하거나 과감한 수를 서슴없이 던지지만 그것 역시 타이밍을 빼앗고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
전투라는 행위를 큰 국면에서 내려다보듯이 관측하고, 순간순간의 선공권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공방의 총합에서 상대방보다 많은 선택지를 가져간다.
선택할 기회만 있다면 반드시 최선의 판단을 골라낼 수 있다는 광오하기 그지없는 자신감.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레녹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첸은 짐작조차 해볼 수 없었겠지.
레녹의 조작능력이 성장하는 것 만큼이나, 첸이 레녹의 전투논리를 이해하며 시너지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
반대로 말하자면 레녹이 첸의 몸을 조작하는 순간 첸 역시 레녹의 의중을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껏 속도를 내서 내달린 돌진. 언뜻 보기에는 기세가 좋아 보이지만, 저만큼 체급 차이가 나는 적을 상대할 때는 그리 좋지 않은 수다.
이런 식의 돌진을 통해 바랄 수 있는 합리적인 결과는 격돌 직후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려 적의 선택을 좁히고, 반대로 자신의 선택지를 늘려나가는 것.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절대적인 심리전의 우위에서는 것이 바로 그동안 첸이 경험해 온 레녹의 방식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처형인의 떡 벌어진 체격과 두꺼운 갑주를 감안한다면 첸이 제 아무리 마력을 때려박아도 상대가 균형을 잃을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
한마디로, 무모한 선공이다.
카아아앙!!
빠르게 처형인의 안쪽을 파고든 첸의 곡도가 갑주 안쪽을 깊숙하게 찔러내고.
기다렸다는 듯 뒤로 한발 크게 물러난 처형인이 거칠게 참마도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돌진을 받아낸 충격이 없지는 않겠지만, 갑주의 단단함과 체중의 힘으로 인해 균형을 잃는 일은 없다.
심지어 마치 그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뒤로 걸음을 밟으며 참마도를 들어 올리는 그 모습.
처음부터 몸의 균형을 뒤로 빼고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쉬익!
처형인이 거리를 벌리는 것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다.
첸의 곡도로는 닿지 않고, 처형인의 참마도는 능히 커버하고도 남는 리치.
이대로라면 첸의 몸이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깔끔하게 쪼개지는 미래밖에 남지 않을 터.
“잘 가라.”
투구 속에서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던 그림자술사와는 달리, 전사로서 행하는 수싸움에는 처형인 역시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첸이 입술을 깨물며 무심코 양 팔을 들어올리려던 그 순간, 체내에서 흐르던 마력이 제멋대로 회전하며 알 수 없는 술식을 자아낸다.
그가 현재 지닌 술식적인 역량으로는 이해도, 인지도 불가능한 원리와 구성의 집합체.
마치 몸 속에서 퍼즐이 제멋대로 맞춰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과 함께 순식간에 쌓아올려진 ‘의지’가 마력을 담아 하나의 의미로서 발현되고.
파아아!!
무형의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직후 그의 뒤에서 일어난 그림자가 그대로 첸의 등에 달라붙어 날갯짓했다.
쐐애애액!!
세걸음 정도 떨어진 두 사람의 거리.
쿠웅!!
“으윽……!!”
멀지도 짧지도 않은 그 절묘한 간극을 뛰어넘은 첸의 몸이 그대로 처형인의 뒤쪽으로 튕겨 나가고.
서걱!!
첸의 뒤로 잘려나간 처형인의 머리가 투구째로 튀어올라 장원의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희미한 핏줄기를 흩뿌리면서 나뒹구는 처형인의 머리를 이 자리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남김없이 마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가주들이 두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누가 이겼는지, 혹은 누가 이겨야 했는지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 상관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채 주민들이 한데 모인 만큼이나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그런 점에서 방금 있었던 첸과 처형인의 격돌은 한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배경은 보는 이들에게 짜릿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인 처형인과 장성한 아들 간의 대결.
연유가 어찌되든 그럴듯한 복수극으로 보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제각기 힘과 속도를 무기로 찰나의 대결을 펼쳐서 첸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역시, 극적인 승리로 보이기에는 차고도 넘쳤다.
“젠장……. 이럴 거면 미리 말을 해달란 말이다.”
첸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처형인의 목을 베고 떨어져내린 곡도를 주워든 그가 팔을 힘껏 치켜드는 것과 동시에, 장원 안에 울려 퍼지는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수천명의 함성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첸의 시선은 장원 무대 뒤쪽의 커튼을 향했다.
무대 뒤쪽에서 손목을 매만지던 레녹이 그 시선을 눈치채고 웃었다.
‘여기까지는 일단 계획대로군.’
비록 그 과정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결과는 레녹의 입장에서도 만족스럽다.
선봉으로 아스이를 내세워 장원 곳곳에 미리 그림자들을 배치한 선수.
중견으로 첸을 내세운 뒤, 대리전에서 승리를 가져오며 균형을 맞춘 두번째 수.
그 과정에서 아스이의 술식을 훔쳐 첸의 몸으로 재현해 본 것은 반쯤 즉흥적인 결정에 가까웠지만, 결과적으로 효과는 확실했다.
심드렁한 눈으로 첸을 바라보던 다른 가주들조차 잔뜩 곤두선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술식에 대한 소양이 없던 첸의 몸으로 그림자술식을 구현해냈지만, 내막을 모르는 다른 가주들의 입장에서는 실력을 숨기고 있던 것으로 보이기 충분하겠지.
“사군가의 처형인이…….”
“일 합에 목이 날아갔어. 말도 안 되는 결과로군.”
“격돌 직후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한 번 더 가속했다. 두 번째 가속은 나도 잠깐 놓쳤어.”
“어느 쪽이든 처형인이 반응조차 못 했다는 건 우연이 아니겠지. 팔둔의 대리인 자격을 빼앗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군.”
“…….”
다른 가주들의 수군거림에 불구하고 팔둔의 가주는 가만히 고개를 숙일 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섯 가문의 연합에 들어서지도 못한 데다, 대리인 자격을 빼앗겨버린 팔둔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첸이 활약할수록 이쪽의 대리인 자격을 빼앗긴 면이 선다는 것이 다행인 일일까.
레녹은 커튼 사이로 그런 가주들의 모습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동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정한 계획을 최대한 유지하는 선에서, 판을 깨고 상황이 비틀리는 결과만을 선택해 움직여왔으니까.
양쪽에서 각자 한 명의 대리인이 패배했을 뿐이지만, 다른 가주들 사이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에는 충분할 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리전의 흐름이 기묘하게 변해간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는 반드시 다른 행동을 취한다.
레녹이 굳이 먼저 나서지 않고 대장으로 앉아 사태를 관망하는 것 역시, 대리전이 진행되는 동안 가주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 아니었나.
귀도 교단.
놈들이 정말로 이번 성채의 대리전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추가적으로 손을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대규모 술식…… 교단의 노림수가 정말로 그쪽이라면, 가주들 중 누군가는 그녀를 돕고 있을 거다. 대리전이 끝나기 전에 협력자를 알아내야 해.’
선교자, 윌터 마르티네스가 무엇을 노리고 이 팔굉성채에 잠입했는지 대충 알고 있다.
성채 내부에 존재하는 시공간의 괴리. 그 유적지에 담긴 비밀을 수거해가기 위함이라면, 이본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주들에게 손을 뻗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오렌을 포섭하고, 수련을 오륜가의 가주로 만들어 저 자리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의 눈썰미라면 틀림없이 가주들 중에서 이본과 가장 밀접하게 결탁한 가주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파악해낼 수 있을것이다.
남은 것은 대리전의 판도를 계속해서 예상을 뒤흔드는 쪽으로 바꿔가면서 가주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뿐이다.
* * *
생각에 잠긴 사이 대리전은 계속해서 진행됐다.
체력을 거의 온존하는데 성공한 첸과 상대방 쪽 두 번째 대리인의 대결.
무대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권사.
레녹은 이미 삼영가의 정보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애덤 브로벡. 칠현의 대리인이자, 유명한 용병 출신이다.
거대도시에서도 안타레스에 필적하는 용병집단, 플라톤 사무소의 일원으로 굉장히 뛰어난 수준의 권사이자 그래플러.
칠현은 매드 맨슨을 고용했던 육령과 같이 외부 인사를 대리인으로 고용한 가문들 중 하나.
기억 속에 있는 정보를 되새기던 레녹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플라톤…… 다시 마주치는 건 꽤 오랜만이군.’
레녹이 이제 막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1년 차.
이벨린의 의뢰를 받아 에이전트들과 함께 흑마법사들을 처리하던 그때만 하더라도 플라톤의 멤버들이 이곳저곳에 끼어들지 않았던가.
좀 규모가 큰 의뢰를 받을 때마다 밟히지 않는 곳이 없던 그들이 행적을 감추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거대도시의 온갖 사건에 사사건건 끼어들던 이들이 이제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 연유는 무엇일까.
특유의 비정상적인 자본력이 시의회의 고위층과 연관되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은 과연 어디까지 진실과 닿아 있을까.
머릿속에서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가는 것과는 달리, 레녹은 담담한 표정으로 마력사를 튕겼다.
동시에 마력전성이 첸의 귓가에 울려 퍼지며 나직한 메시지로 변했다.
[지금부터는 사전에 얘기했던 대로 진행할 거다. 괜찮겠지?]“언제부터 그런 걸 물어봤다고 그래?”
첸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욕 좀 먹어도 어쩔 수 없지. 시작했으니 끝을 보기 전까지는 해보자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리전이 시작된 지 5분이 지나자마자, 첸이 곧바로 기권을 선언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