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26
약먹는 천재마법사 326화
전뇌공능(3)
거대한 삼미호의 모습을 올려다본 트레펜이 나직한 신음을 토해냈다.
[잠깐, 이건…….]다비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물끄러미 트레펜의 모습을 내려다볼 뿐.
그녀의 발밑에서 회오리치는 무채색의 파동만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개하지.”
레녹이 턱을 괸 채로 앉아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파트너이자, 지금까지 나를 대신해 요새의 통제권을 빼앗고 있던 녀석이다.”
[……들어본 적 없다. 이런 괴물이 지금까지 이 구체 안에……!!]“당신 몰래 이 요새의 동력원을 야금야금 빼먹고 있던 범인이기도 하지.”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연상중추를 장악하면서 일시적으로 대폭 증가한 다비의 연산능력, 기계구체에 가득 들어찬 막대한 동력, 그리고 기어사이드를 상대하며 쌓아 올린 경험의 총체.
다비라는 전뇌정령이 걸어온 모든 시간의 궤적을 이 자리에서 한 번에 쌓아 올려 만들어내는 결실.
토양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한계까지 힘을 빼먹은 다비에게, 레녹의 마력이 담긴 뇌전술식을 열쇠 삼아 전해주는 것.
집뢰편향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압축되어 있던 마력은, 바로 전뇌정령을 진정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마지막 열쇠였던 것이다.
츠즈즈즈즈즈!!!
시간을 뛰어넘어 성장한 삼미호의 장대한 풍채.
그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트레펜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기계로 육체를 갈아탄 존재만이 느낄 수 있는 위화감.
그것은 틀림없이 전뇌세계를 자유롭게 뛰노는 유일무이한 정령이,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겠지.
레녹을 힐끗 올려다본 다비의 입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스터. 준비됐나요?]“지금까지 판을 짠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레녹이 웃으면서 수인을 맺는 것과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퍼져나온 파동이 다비의 파동과 겹쳐지며 공명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어.”
파아아아아아아아!!!!
중첩되어 발산하는 파동의 빛무리가 순식간에 거대한 기계구체 전역을 뒤덮고 회전했다.
그제서야 트레펜이 뒷걸음질 치던 몸을 멈춰 세우고,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빌어먹을, 안 돼…… 안 돼……!!]눈앞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 여우가 아니다.
트레펜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저 위에서 마치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여유롭게 바라보는 마법사.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그가 공간도약을 통해 레녹에게 달려들려던 그 찰나의 순간.
레녹과 다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자성영역 전개.”
[자성영역 전개.]자성영역 전개 : 정령공명
전뇌위계 심상구현
[몽상전의경(夢想虛擬境)]레녹의 대답을 투영하는 황금빛 만화경이 떠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펼쳐지는 자성영역의 심상은, 다비를 중심으로 레녹이 보조하며 각인해나가는 마음의 정경.
정령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술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정령술식의 정수였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소환을 통해 긴밀하게 쌓아 올려야만 성립할 수 있는 정령과의 유대.
그것은 레녹이 다비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그 순간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니.
이 삭막한 세상에서 레녹이 자신의 손으로 처음 창조해낸 피조물.
레녹의 내면에서 다비가 차지하는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츠즈즈즈즈즈!!!!
다비의 몸에서 피어오른 수천 갈래 전격의 파편이 하늘을 날아오른다.
사방에서 나풀거리며 눈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것은 어느새 전격이 아니라 푸른 입방면체를 그리고 있었다.
면과 꼭짓점 사이로 뻗어 나가는 무수한 도형의 선이 기계구체의 벽면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그린다.
전뇌세계 안에서만 살아가던 전뇌정령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고유 네트워크.
시작은 이토록 미약하지만, 그 세상의 정경은 다비가 배우고 익혀나가는 것들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져 나갈 것이다.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정령이 그리는 자성영역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트레펜이 이상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쩌저저저적!!!
굳게 닫혀 있던 기계구체가 꿈틀거린다.
직후 갑판 위쪽을 뒤덮은 구체의 천장이 천천히 열리면서 하늘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트레펜의 육신의 일부로서, 체내에 소우주를 형성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원동력.
더불어 그의 육신을 구체 내부에서 자유롭게 공간도약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구체의 통제권을 통째로 빼앗기고 만 것이다.
[처음부터…… 이것만을 노리고 있었군.]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얼굴은, 그 딱딱한 금속질의 피부가 어울리지 않을만큼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연산중추뿐만이 아니라, 아예 이 요새 전체의 통제권을 빼앗아올 속셈이었던 거야.]“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뛰노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다.”
트레펜을 내려다보던 레녹이 대답했다.
“네 공간도약 능력을 잘라놓고 나서야 어느 정도 대화가 될 것 같았거든.”
공간술식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 그가 이 구체 내부에서 자유롭게 몸을 이동시켰던 이유.
근본적으로 이 거대한 기계구체와 그의 육신을 동조시켰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정의된 공간 내부에서는 마치 의식을 옮기듯이 자유롭게 전투용 소체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결과로서 시공에 간섭하는 8레벨 극위에 다다랐다는 증거.
불완전하게나마 트레펜이 진정으로 인간을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한계까지 질량을 압축시킨 그의 중량과 공간도약으로 인한 이동능력으로 힘과 속도라는 두 가지 모순을 양립시킨 그의 전투능력은 가공할 지경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거대한 기계구체가 트레펜의 육신으로 정의될 때에 한해서 발생하는 기적.
그렇다면 기계구체의 통제권을 통째로 빼앗아올 수만 있다면, 트레펜의 의식을 저 무거운 전투소체에 가둬버리는 일 역시 가능하지 않겠는가.
파아아앗!!
다비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지듯 움직여 레녹의 등 뒤에 나타난다.
“전투를 위해 모든 전력을 그 소체 하나에 집중시킨 선택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레녹은 그 거대한 여우의 모습을 뒤에 둔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기계구체를 내버려 둔건 실수였어. 유지만 가능할 정도로 만들어놓으면 내가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트레펜에게 계획이 없던 것은 아니겠지.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능력으로 보아 구체가 파괴당해도 그 겉면을 수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테고.
레녹이 구체를 파괴하고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발악한다면 그것으로 트레펜은 중앙외회로 진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이동요새의 통제권을 통째로 빼앗길 거라고는 결코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레녹이 기어사이드의 치명적인 급소를 찌르기 위해 감춰놓았던 한 수였으니까.
말없이 레녹의 말을 듣고 있던 트레펜이 손을 들어 올렸지만, 구체 내부의 그 어떤 부품들도 더 이상 그의 의지에 호응하지 않았다.
다비가 퍼트린 입방체, 그 사이로 뻗어 나간 무수한 네트워크의 선이 구체 전체를 그녀의 네트워크로 정의하고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쿠구구구궁!!
구체의 천장이 활짝 열리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환해진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명의 끝에 시작된 공략작전이 진행되는 사이, 어느덧 지상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격리된 공간이 개방되는 것과 동시에 갑판의 잔해들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트레펜의 소우주가 희미하게 옅어지며 사라져 간다.
인간의 몸을 버리고 이 거대한 육체와 의식을 동조시켰음에도, 결국 이제 와서 그에게 남은 것은 인간시절과 같은 크기의 소체 한 대뿐.
“시의회는 당신을 산 채로 붙잡고 싶어 하겠지. 이번 일에 대한 완벽한 승리로서 그 증거를 남기고 싶어 할 테니까.”
레녹이 말했다.
“모든 전투능력을 버리고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게 싫다면……. 여기서 직접 끝을 내는 수밖에.”
[그렇군…….]트레펜은 그렇게 대꾸하며 멍하니 갑판 구덩이 깊은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하게 빛나는 인공안구 너머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을 따르는 방위군과 이동요새, 그리고 새롭게 개조한 육신까지 모조리 놓쳐버린 그가 이제 와 선택할 수 있는 결말은 무엇인가.
파멸을 향해 내달린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을 터. 다만 그 길의 끝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 남은 시간 동안 내게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 할 수 없었다면, 언제라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다만 혐오스러운 의원 놈들을 길동무로 데려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트레펜이 천천히 몸을 숙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갑판 지하층 아래쪽으로 더욱 깊이 파고든다.
그의 등이 알 수 없는 부품더미로 뒤덮여 꿈틀거린 직후 거대한 강철의 날개가 터트리듯 펼쳐졌다.
촤르르르륵!!
[8레벨의 신위나 승천문의 비밀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 자리에서 비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거늘!!]콰앙!!
날개 사이사이로 거친 불꽃이 새어 나오더니 그대로 트레펜의 무거운 몸을 거세게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갑판 지하를 벗어나 하늘 위로 날아오른 트레펜이 레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나는 다음으로 나아가겠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야!!]레녹은 그런 트레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비를 돌아보았다.
새파란 전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여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파앙!!
망설임없이 다비의 등 뒤에 올라탄 레녹이 하늘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도도도동!!
족히 3m 크기로 자라난 거대여우가 우아한 몸짓으로 천장이 열린 기계구체 벽면을 내달린다.
다비의 네 다리가 섬전처럼 움직이며 허공을 지르밟듯이 빠르게 부유했다.
이 근방은 다비의 정령영역으로 정의된 물리 네트워크 공간의 일부.
실체를 부여받아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물리법칙에서도 정령만큼이나 자유롭게 운신이 가능함은 당연한 일이다.
순식간에 개방되는 구체 천장 꼭대기까지 도달해 내려선 레녹과, 상공 위로 떠오른 트레펜의 시선이 마주쳤다.
백여 미터 상공. 천장이 개방되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구체의 최정상.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부적합한 전장이지만, 망설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상보다 구름이 가까울 정도로 아득한 상공 한복판. 새파란 하늘 아래서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내뻗었다.
콰아아아아앙!!
강철의 날개가 거침없이 지상을 휘젓고, 마른 하늘에서 전광이 번뜩인다.
새하얗게 탈색된 백광이 회오리치며 수백 번이 넘는 충격파를 터트리지만, 트레펜은 그 모든 공세를 거침없이 받아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불꽃. 거칠게 펄럭이는 날개가 그 육중한 몸을 그대로 앞으로 던지듯이 밀어 올린다.
후우웅!!
양쪽 팔꿈치가 개조되기 시작하며 그대로 부스터를 내뿜고, 무게와 가속을 완벽하게 조합해 낸 주먹이 허공을 때린 순간.
일대 상공이 그대로 밀려나며 원형의 충격파를 그렸다.
두두두두두!!!!
[하아아아아아!!!]망가져 가는 기계 구체 꼭대기 위에서 두 초인이 필살의 공세를 수십 번씩 꽂아 넣으며 서로의 결말을 그려낸다.
무너진 균형과 바닥을 드러내는 마력, 쉴 새 없이 닳아 없어지는 부품의 한복판에서도 단 한 번의 공격조차 낭비하지 않는다.
한 번의 실수가 주도권을 내주고 공세의 균형을 어그러뜨릴 만큼 격렬하기 그지없는 마력의 폭풍.
스스로가 만들어낸 충격과 술식의 반동에 잡아먹히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이어나갔다.
[축압퇴(築壓頹) : 투반(鬪反)] [칠전섬경(七電閃鏡)]콰아아앙!!
레녹과 트레펜이 흘려낸 화력과 충격량이 그대로 두 사람을 지나쳐 구체 표면과 지상에 내리꽂히며 폭격처럼 터져 나온다.
눈이 먼 살기와 폭발의 향연.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충격파가 메아리처럼 하늘 위로 울려 퍼지며 구름을 싹 몰아냈다.
강철의 날개를 펼치고, 끊임없이 거리를 좁히며 달려드는 트레펜과 그 모든 공세를 받아쳐 밀어내는 레녹.
뒤얽히는 마력의 패턴이 수십 수백 갈래로 분화하며 하늘 위로 눈부신 청색의 무지개를 띄고.
중첩되어 터져 나온 충격과 중량의 압력이 공간을 짓무르고 시야각을 구겨 비틀었다.
[끝이 아니야……!!]철갑날개를 활짝 펼치고, 양 팔뚝과 등허리에 수십 갈래 부스터를 부착한 트레펜이 울부짖었다.
한 서린 전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그 육중한 중량을 담은 강철의 육체가 한줄기 유성으로 변했다.
기계구체의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겼음에도 그 전투력은 실로 고절하기 그지없다.
노쇠한 육체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마력과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기계의 정수를 뽑아내 자신의 의지대로 개조하기 시작한 육신의 힘.
이 세 가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뤄내는 트레펜은 사실상 8레벨에 반쯤 발을 걸친 괴물이나 다름없다.
그를 인간이 아니게 만들어주었던 기계구체도, 사령관으로 만들어주었던 방위군도 잃었지만 본신의 무력 하나만큼은 끄덕도 없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스스로를 확실하게 마주 볼 수 있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
생과 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절절하게 실감한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간극의 끝자락에서 레녹이 마력을 움켜쥐었다.
의지와 함께 번개가 된다.
파지지지지직!!
[대라전(帶羅電)] [군청사뢰(群靑社雷)]레녹의 손안에서 회전하는 전격의 회오리가 그대로 사방으로 터져나가 거침없이 창공을 내달린다.
[팔사뇌우(八射雷雨)]여덟 갈래 방위를 점하고 쏟아지는 번개의 빗줄기 사이를 트레펜이 날개를 길게 둘러 받아내고, 빗줄기가 길게 늘어져 번개의 창으로 변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사방에서 공명하며 터져나가는 전격의 폭발.
[자중쇄(磁重鎖)]기다렸다는 듯 바닥에서 일어선 구체 벽면이 미친 듯이 변형되며 트레펜을 붙잡기 위해 회전한다.
묵직한 강철의 사슬이 날개를 붙잡고 그를 땅에 붙잡아두기 위해 몸을 비틀지만, 트레펜은 어깨를 비트는 것 한 번으로 그 모든 저항을 끊어내고 날아올랐다.
[가자.]강철의 몸으로 만들어낸 유성이 내리꽂힌다.
우지지지지직!!
이동요새의 수만 가지 부품을 그대로 옮겨 담은 중량. 속도가 붙은 무게에 더해진 힘은 인간의 몸으로 실현가능한 범주를 아득하게 벗어나 있다.
한계까지 압축된 질량이 공간마저 희미하게 구부리고 짓누르며 장벽을 찢어발겼다.
쩌저저적!!
극한까지 압축되어 회전하던 실드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찢어지고, 그 뒤에서 벽처럼 일어선 수십 중첩의 빙벽조차 돌파.
팔을 옭아매는 자색의 사슬과 발밑에서 솟아오르는 그림자 손아귀, 턱을 올려치며 균형을 뭉개버리는 충격마법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콰드드드득!!
과거 철벽의 트레펜이라 불리며 그를 이 자리에 존재하도록 만들었던 소우주의 능력.
다가오는 모든 것을 멈춰 세우고 밀어내는 극한의 방어심상.
한차례 육신을 벗어던지며 비틀리고 변질되어 잃어버린 줄 알았던 힘이 다시금 그의 내면에 자리 잡아 회전하며 모든 것을 밀어내고 받아냈다.
8레벨의 신위를 잃기 직전까지 떨어져 내린 트레펜의 심상에, 이미 잊혀진 줄 알았던 마음의 정경을 다시 한번 그려내는 기적.
그리고, 한발 뒤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레녹의 손에서도 파문이 일었다.
“시간이 됐군.”
[뇌인(雷印)]우웅!!
레녹이 처음으로 고유마법에 대해 인지하고 각성상태에서 사용했던 성위급의 절기.
시거 뱅의 보스였던 에덴을 단 한 번에 증발시켰던 뇌전의 인이 이 자리에 내리찍히고, 모든 것을 쓸어버릴 광채로 화한다.
파아아아아아아!!!
손안에서 터져 나온 빛의 기둥이 그대로 트레펜의 정면에서 터져 나오며, 떨어지던 유성에 정면으로 내리찍혔다.
[……!!!]새파랗게 번뜩이는 뇌전의 광채가 길쭉한 빛의 기둥을 그리며 트레펜을 휩쓸고 뻗어 나간다.
먼 하늘에 유성우를 그리는 것만 같은 아름다운 빛의 궤적. 하지만 레녹은 그 모습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마력소모가 상당하지만, 그 위력 하나만큼은 레녹이 영역 없이 사용하는 성위마법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붕성포.
레녹조차 시전시간을 필요로 하는 최상급의 화력마법이 마침내 트레펜의 질주를 멈춰 세우는 데 성공한다.
투두두두두두두둑!!!
박살나고 녹아내린 부품들이 그대로 트레펜의 몸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아직이다.]하지만 트레펜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자세를 잡은 채 날개를 한껏 웅크렸다.
[아직 한참은 더 싸울 수 있어?]“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뭐라고?]레녹은 그런 트레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슬슬 눈치챌 때가 됐을 텐데. 내가 왜 자성영역을 전개하고도 굳이 정면에서 상대를 해줬는지.”
[…….]투두두두둑……!!
그의 육신에서 떨어져 내리는 부품만이 침묵을 메워줄 뿐.
하지만 트레펜은 반대로 그 침묵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고 시선을 내렸다.
[몸이…….]투두두두두두두두두!!!
단순히 전투의 여파로 인한 피해가 아니다.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그의 육체에 극한까지 압축해 조립되었던 부품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발아래 쪽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부품의 물결.
여태껏 그의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부스터를 뽑아내던 강철의 날개가, 조금씩 얇아지고 있었다.
그의 새로운 육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조금씩 통제를 벗어나 사라져 간다.
[그렇군…….]그제서야 레녹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트레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녹은 처음부터 자신의 손으로 트레펜과 사생결단을 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공방을 계속 이어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기까지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순간도 신경을 돌릴 수 없는 격전 사이, 그의 몸에 치명적인 이변이 발생하는 그 순간을.
[이제 와서 이 몸뚱어리까지 빼앗아가려는 셈이냐.]영역 내부에서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작은 입방체가, 트레펜의 육신 내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강철의 육신 안으로 침투한 다비의 권한은 트레펜의 몸을 통째로 빼앗아오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몸을 이루는 부품들을 분해하고 그대로 통제권을 빼앗는다.
“전뇌공간의 물리구현……. 이 공간에서 모든 명령과 권한은 다비의 의사에 우선하지.”
레녹은 어느샌가 자신의 등 뒤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는 다비를 쓰다듬으며 트레펜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의 의식을 피해서 육신의 점유권을 가져오느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인간의 몸을 포기한 시점에서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팔을 뻗어 새빨갛게 타오르는 열 자루의 창을 불러낸 레녹이 대답했다.
“그 몸에 압축되어 있는 부품을 전부 털어내고 나면, 이 전투도 끝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