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34
약먹는 천재마법사 334화
이해자
아리스 리첼렌은 명민한 사람이다.
자신의 감각과 재능을 믿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마법사로서 경지를 이룬 다음에도 그 안에서 즐거움과 열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현실을 볼 줄 알면서도 내면의 선성을 가치로서 여길 수 있는 사람.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아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올바른 마법의 탐구자.
재능에 어울리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섣부르게 동정하지 않는 그 모습이, 유달리 눈에 밟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선한 사람이기에 가까이하려 했고, 뛰어난 사람이기에 멀리하려 했다.
그 타고난 선성에 마음을 열었다, 언젠가는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항상 생각해 왔으니까.
그리고 아리스는 그런 레녹의 사소한 실수를, 단순한 위화감으로 치부하고 넘길 만큼 느슨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긴장하고 있군요.]품 안에서 다비가 속삭였다.
[긴장하고 있어요, 마스터.]“……조용히 해.”
[왜 그러시죠?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요?]“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우으읏.]품 안에서 다비를 꺼내 거꾸로 들어 올린 레녹이 그녀의 꼬리를 꽉 움켜쥐었다.
[정령 죽어요~ 정령 아파요~ 마스터가 괴롭혀~]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요들송을 부르듯이 흥얼거리는 새끼여우를 바라보던 레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꼬리 간수나 잘 해줘.”
집안에서 하루 종일 쿨쿨 곯아떨어져 있던 다비는 사흘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꼬리 개수를 숨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와서 이런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심과 확신은 전혀 다른 말이 아니겠는가.
일단 아리스가 먼저 약속을 잡자고 한 만큼, 레녹도 나름대로 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꼬리 두 개를 앞발로 끌어안고 웅크린 다비가 대답했다.
“…….”
[조크. 조크.]능청스레 흥얼거리던 새끼여우는, 거리 저편에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꼬리 두 개를 흐릿하게 만들고 코트 안으로 숨는다.
레녹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약속장소에 먼저 와 있는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채로 거리의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아리스의 뒷모습.
인파 사이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 황금빛 머리칼은 선명하게 레녹의 눈에 들어왔다.
아리스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레녹의 모습을 담았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아리스를 확인하고 빠르게 행색을 점검한다. 헛기침을 한 레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그런가요?”
“……연구실에서 뵙지 못한 지 일주일이 넘었으니까요.”
웃으면서 되묻는 그녀의 말에, 레녹이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이런 곳을 약속장소로 잡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번잡한 곳을 싫어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번화가는, 레녹이 아리스의 연락을 받은 순간 생각했던 곳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으니까.
만약 정말로 아리스가 대답을 듣고 싶은 것뿐이었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다면 이것보다 더 조용한 장소를 고르지 않았을까.
아리스는 그런 레녹의 말에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저희, 그동안 너무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만 만났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정령술식에 대한 연구도 슬슬 벽에 부딪히고 있으니, 머리라도 환기시키는 게 좋은 것 같아서 불렀어요.”
“환기 말입니까?”
“네. 저도 마탑에서 생활할 때, 스승님께서 종종 이런 경험을 시켜주셨거든요. 속세의 문물을 경험하고 인지하는 것도 마법사의 소양이라고. 이제는 제가 레녹에게 그런 경험을 시켜주는 거죠.”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무안한 듯 웃었다.
“그런 김에 하고 싶은 말도 좀 있고요.”
“…….”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서 걷기 시작하는 아리스를 보며, 레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다. 이 도시의 편의시설을 경험하기 위해 돈이나 시간을 투자해 본 기억은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아리스가 바란다면 함께할 수밖에.
살짝 신난 듯이 경쾌하게 걷는 아리스의 뒤를 따라, 레녹도 발걸음을 옮겼다.
* * *
속세의 경험을 시켜주겠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아리스는 작정한 것처럼 레녹을 끌고 번화가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레녹, 이 마법개론서 어때요?”
“조악한 수준이군요. 개론서치고는 난해하지만, 전공 서적치고는 깊이가 얕-”
“저희 마탑 원로님이 쓴 책이에요.”
“지 않고 심오한 편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개론에 기재하는 대담함이 엿보이는…… 후우. 놀리시는 건 그만하시죠.”
“우후후……!”
서점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들춰보고.
“방금 본 영화. 결말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저도 모르게 살짝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레녹은 어땠어요?”
“남자 쪽이 여자 주인공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부분이 좀 어색하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눈치가 없을 수가 있나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
“교수님? 갑자기 걸음이 빨라지신 것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오며 감상을 말했다 헛발질을 하고.
“여기 케이크가 그렇게나 맛있다고 그러더라구요.”
“도서관에서 멀지는 않은 위치군요. 혼자는 안 와보셨습니까?”
“그, 혼자 먹기는 좀 많은 양이라…….”
“…….”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층 카페테리아에서 거리의 경치를 내려다본다.
두꺼운 머그잔, 피어오르는 커피의 연기 사이로, 맞은 편에 앉은 아리스의 얼굴을 눈여겨본다.
그리고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그것과 비슷한 미소가 어느새 자신의 얼굴에도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는 것을.
“…….”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뒤로, 이런 순간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끝도 없이 내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이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아리스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레녹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오늘 번거로운 연락에 나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의 끝. 발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도서관 옥상.
온갖 혼돈과 욕망으로 가득 찬 이 도시에서조차, 자정을 넘어서는 시간의 야경은 덧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옥상 난간에 손을 올린 채 밤거리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아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레녹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운 밤하늘 사이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금색 머리칼.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동자.
그 모습을 온전히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이 순간, 이 기회가 두번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버렸기 때문에.
알고 있을까. 아니, 기다리고 있겠지.
확신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럼에도 아리스는 그녀만이 알 수 있었던 흔적과 실수를 따라 여기까지 도달했고.
이미 정답에 도달했으면서도 답안지를 확인하는 그 순간을 미뤄두고 있었다.
오직 레녹의 입으로 직접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
“…….”
입술을 달싹였다.
수십 수백번은 고민했던 그 순간이 막상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만 레녹의 생각을 전할 수 있을까.
말이라는 것은 온전하지 않고, 비틀리고 왜곡되며 오해를 낳는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지 않는 진심이라는 것이 허상이라는 것도, 레녹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해야 한다.
바로 그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늘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당장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못하더라도, 확신을 주어야 했다.
아리스의 의문과 기다림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정도라면. 고작 그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 사실을 마음속 한구석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아리스.”
레녹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늘 여기 오기 전에 원래 하려던 말이 있었어요.”
아리스가 레녹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듣고 싶은 말도 있었고.”
“…….”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
레녹이 그녀와 만날때마다 몇번이고 보아왔던 미소.
하지만 레녹은 더 이상 아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등을 돌린 아리스가 천천히 레녹을 향해 걸어와, 그를 살짝 지나쳤다.
서로를 등지고 선 두 사람. 아리스가 가만히 레녹의 등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저, 마탑으로 돌아가요.”
“…….”
“다음 학기에 제가 진행하기로 예정된 강의와 연구도 모두 미루고, 다른 교수님께 인계할 거예요.”
“마탑의 원로들 때문입니까?”
“아뇨. 제가 결정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리스가 물었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죠?”
“…….”
“저도 그래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가기전에 확인하고 싶었어요.”
“확인…… 말입니까?”
“네.”
그녀가 대답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믿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 그런 감정들이 여전히 제 안에 존재하는지.”
“…….”
“사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끝을 흐린 아리스가 천천히 레녹과 거리를 벌렸다.
“겨울이 지나면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거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웃어보이는 아리스의 모습.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레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돌아오시면……. 그때 저도, 말씀드릴 게 있을 것 같군요.”
아리스가 웃었다.
“기다릴게요.”
“…….”
아리스와 레녹 모두 알고 있었다.
서로의 대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고, 이제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기다리던 대답을 미뤄버린 것은 레녹이 아니라, 아리스라는 것 역시.
* * *
밤거리 사이로 사라져가는 레녹의 뒷모습을 아리스는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아까와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깐의 즐거움은 이것으로 마지막.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삐릭!
약속한 것처럼 울려 퍼지는 핸드폰의 벨소리.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댄다.
온화한 장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스. 네 목소리를 듣는 건 오랜만이구나.
“스승님.”
-결재는 전부 끝났어. 네 앞으로 티켓을 보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이제 와서 이걸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마탑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뭐니?
여성은 살짝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윗선의 늙은이들이야 네 사정을 크게 궁금해하지 않고 좋아라 하고 있지만, 나는 다르단다.
“……”
-마탑의 기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는 네 판단을 존중하고 있어. 넌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고, 일가를 이룬 성위마법사니까. 아니면 그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거니?
“그건 아니에요. 다만…… 당장 그것보다 더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요.”
아리스가 대답했다.
“마탑의 힘을 빌려서 학계의 고대서적 자료를 조사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원로분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드려야겠죠.”
-질서의 원에 들어오는 것도 내키지 않아 하던 네가 하는 부탁이라니……. 이유가 뭔지 들을 수 있을까?
“그건…….”
아리스는 여성의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레녹이 사라진 거리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녀라고 진실을 전해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리스 역시 수백 번이 넘는 고민 사이에서 오늘 이 순간을 상상해 왔으니.
하지만 그가 그때 남겼던 그 말이, 머릿속 한구석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다.
시간. 남은 시간이라 했던가.
“…….”
아리스 리첼렌은 명민한 사람이다.
남들은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일말의 흔적을 더듬어, 진실의 파편을 움켜쥘 수 있을 만큼.
가볍게 흘려듣고 넘어갈 수 있는 어떤 말이라도, 그녀는 기억하고 되새긴다.
온갖 신비와 기적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은 그리 많지 않고,
그녀가 알고 있는 레녹은, 그 어떤 말도 허투루 내뱉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레녹이 지금까지 그녀에게 보여줬던 애매한 태도에, 그만한 이유가 있던 거라면.
아리스에게조차 비밀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존재하고 있는 거라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확신에 가까운 직감과 함께 아리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수명…… 혹은 불치병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요. 성위마법사의 힘으로도 손댈 수 없는 금기에 대한…… 해결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