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61
약먹는 천재마법사 361화
미궁 레이스(4)
“크크크, 그래……. 이번에는 내가 졌군.”
자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레녹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설마 자운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블록을 억지로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간파해 냈을 줄이야.
숨겨놓은 블록에서 거리를 벌렸던 것이 레녹에게 블록을 빼앗긴 결정적인 패착.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 블록과 거리를 두려 했던 건데, 설마 그것을 순식간에 눈치채고 역으로 공략해 올 줄은 몰랐다.
이벨린이 애지중지하며 데리고 다니는 저 마법사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따라잡기 전에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그때는 너희 둘 모두-!”
팟!!
자운의 모습이 그대로 전이되어 지상에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 이벨린이 보기 드물게 활짝 웃었다.
“속이 시원하네. 빨리 가자!”
“계산이 끝났다. 바로 출발하지.”
레녹은 곧바로 이벨린과 함께 남은 블록들을 가볍게 즈려밟고 그대로 관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익!!
이 미궁에서 제대로 통과한 첫 번째 관문.
빛이 이는 것과 동시에 그 너머의 공간에 발을 내디딘 순간, 공동안에 가득하던 소음은 싹 사라지고 차가운 고요가 다시 레녹을 반겼다.
휘오오오오……!!
“여기는…….”
“세 번째 관문으로 향하는 길 치고는 지나치게 삭막하긴 하군.”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 품 안에서 단망경을 꺼내 들어 올렸다.
끝도 없이 뻗어 있는 거대한 아치형의 다리.
그런 거대한 다리가 어두운 공허 사이에 족히 수백 개는 넘게 뻗어 있다.
마치 간이우주를 형성한 듯한 광활한 배경을 중심으로 어둠 속에서 서로 연결된 다리들의 모습.
공허 너머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절로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출발하지.”
레녹이 말했다.
“아무래도 마이야가 무슨 길을 골랐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레녹의 시선이 닿은 오른쪽 언저리의 다리들 중 하나.
버려진 털조각들의 모습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 *
덜컹!!
관문 너머로 사라지는 레녹의 모습을 올려다보던 자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 X발…….”
바닥에 침을 탁 뱉은 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앞에 선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사늘한 살기가 어린 데인의 얼굴. 양 손으로 검을 움켜쥔 그의 모습은 일말의 빈틈도 없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데인을 상대하고 있던 주시자, 지엘과 래퍼드 역시 슬쩍 그의 살기가 향하는 방향을 확인하고 뒤로 물러났다.
앞서나간 두 사람을 위해서 데인을 묶어두고 있었을 뿐, 두 사람의 원한 관계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방해하던 주시자들까지 무시하고 자운에게 집중할 정도라면 보통 원한이 있는 게 아닐 터.
이런 것에서 둘이 싸우다 양패구상하는 것도 주시자들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우우우우우웅!!!
네명의 성위능력자들이 제각기 회전시키는 마력으로 공동이 요란하게 들썩인다.
그 폭풍의 한가운데, 다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격전의 중심에서 자운이 데인에게 말했다.
“이봐, 분하지도 않나?”
“…….”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저 마법사한테 농락당한 거야. 여기서 우리 둘이 한판 붙으면, 저 새끼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거라니까?”
자운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이 미로에 모인 놈들 보이지? 여기서 모인 놈들 말고, 진짜 한가락 하는 놈들은 다 어디 있을 것 같아?”
“……다른 관문을 지나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데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천자의 생사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유물 그 자체일 테니.”
당연하지만 이 미궁에 모인 7레벨의 성위능력자가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륙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몰려온 다양한 실력자들이 미궁 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이 지금 이 공동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운은 물론이고, 데인 역시 그 이유를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천자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어도 충분…… 오히려 유물의 위치를 발견해낸 순간부터 진정한 쟁탈전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힘을 아끼고 있는 것이겠지.”
검을 고쳐잡은 데인이 말했다.
“미궁으로 나가는 길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진입자들의 중심에서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만 속도를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걸세.”
“아니 씨발, 그걸 알면서 이렇게 답답하게 나올거야?”
자운이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걸 알면 빨리 관문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냐고. 괴물들 사이에서 유물을 손에 쥐어라도 보려면 일단 먼저 앞서나가야 할 거 아니야, 이 멍청한 새끼야!”
다른 이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자운은 공동에 숨어 레녹과 이벨린의 대화를 지켜보며 누가 진정으로 위협적인 경쟁자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파티의 핵심에 서 있는 이벨린은 어디까지나 레녹의 지시에 따르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에반이라는 그 마법사의 몫.
거대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인 현궁이 작전에서의 판단을 맡길 정도라면, 에반이라는 마법사의 판단과 직관이 얼마나 날카로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는 목소리의 지식에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헤쳐나오기는 했지만, 잠깐의 방심으로 레녹에게 추월당하고 말았으니 언제 또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법.
하지만 데인은 그런 자운의 설득에 꿈쩍도 하지 않고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미궁을 돌파하는 일. 중요하지. 이 곳에서 죽어나간 내 기사단원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고.”
“그래, X발!!”
“하지만 네가 훔쳐간 왕묘의 유산은 그들의 죽음 이상의 가치가 있다.”
후욱!!
데인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비틀고 꺼지듯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태회검련(殆回劍鍊)] [3식 전위(戰圍)] [강백(强白)]쐐애애액!!
대기가 갈라지다 못해 찢어지는 듯한 소음.
마치 공간이 구부러지듯이 일그러진 아지랑이 사이로 백색의 검광이 눈을 뜬다.
자운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상반신을 찢어발긴 눈부신 검광이 그대로 그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촤아아악!!
핏물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자운의 시체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 너머의 공허를 향해 칼날을 뻗은 데인이 조용하게 으르렁거렸다.
“선왕폐하의 유골을 훔쳐간 무뢰한의 말을 듣는 일은 없다. 이 자리에서 목숨으로 그 죗값을 대신하도록 하지.”
“진짜, 이래서 쓸데없이 적을 많이 만들면 안 되는 건데…….”
그 말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가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자운이 입맛을 다셨다.
“다 내 업보니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로브 안쪽을 스쳐 지나간 그의 비쩍 마른 손 위로, 투명한 보석해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키이이잉!!
보석해골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일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며, 사방으로 차가운 마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공동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던 초인 전원이 그 기이한 위압감을 인지했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유물.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데인의 눈동자에는 격렬한 불똥이 튀었다.
“감히…….!!”
파아아아앗!!
보석해골의 왼쪽 눈동자에 틀어박힌 화려한 푸른 빛의 보석이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고,
직후 자운의 몸을 둘러싸고 거대한 빛의 기둥을 일으켜세운다.
“난 분명히 그만하자고 이야기했다.”
쿠와아아아!!
족히 수십개가 넘는 빛의 기둥의 회전 속에서 마력을 끌어올린 자운이 씩 웃었다.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이걸 꺼낼수밖에 없잖아.”
“왕국을 통째로 적으로 돌리고도 네가 정녕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그래봤자 작디작은 도시국가 하나일뿐이지.”
자운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대기를 경직시키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빠르게 굳어져가는 공간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자운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협조할 생각이 없으면 뒤져. 여기서 끝장을 보자고.”
* * *
부아아아앙!!
레녹은 이벨린을 뒤에 태운 채 바이크를 몰고 있었다.
어두운 공허 속에 떠오른 수백 개가 넘는 기나긴 다리.
두 사람은 그 중 마이야가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길을 골라잡고 그대로 직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털조각을 떨어뜨리고 간 것 자체가 함정일지도 모르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함정이라 생각된다면 언제든지 다른 다리로 건너가면 될 일. 다리 사이로 몇미터 정도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바로 옆 다리에서 미친 듯이 질주하는 새로운 손님의 등장이, 적어도 레녹과 이벨린에게는 훨씬 더 신경 쓰이는 일이 분명했다.
“캬하하하핫!!”
“따라잡았다, 이 새끼들!”
“죽어, 죽어!!”
레녹이 선택한 다리 두어개 건너편. 징이 박힌 오프로드 장갑차에 올라탄 초인들이 어깨에 짊어진 바주카포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미궁 이 깊숙한 곳까지 어떻게 장갑차를 끌고 왔는지도 의문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화약병기에 담긴 강력한 마력덩어리.
장갑차 뒷면에 박힌 해골마크를 발견한 이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드로 군벌이야. 거대도시 근방에서도 활동하는 저항군이지. 구성원 대다수가 마약에 절여져 있다는 소문으로 유명한데, 마냥 틀린 말은 아닐걸.”
“……동향 친구들이라 이거군.”
레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사이, 얼굴에 문신을 덕지덕지 박아넣은 이들이 광소를 터트리며 방아쇠를 당긴다.
포구에서 쏘아진 미사일이 날아올라 바이크는 물론이고 다리 곳곳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흔들리는 바이크를 꽉 붙잡으며 레녹이 혀를 찼다.
“이상할 정도로 순조롭긴 했지. 일할 때가 됐군.”
“아니, 그렇다쳐도 너무 이상하지 않아?”
순식간에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온 이벨린이 장갑차를 노려보면서 빠르게 말했다.
“우릴 따라잡았다는 건 두 번째 관문을 돌파했다는 말인데, 자운이나 다른 괴물이 아니라 저런 놈들이 먼저 도착했어.”
“…….”
“저런 생각 없어 보이는 놈들이 블록의 순서를 맞추고 우리 뒤를 따라잡았다면, 뭔가 비밀이……!”
콰아앙!!
연이어 쏟아지는 화력의 폭발에 이벨린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휙 숙였다.
레녹은 그런 이벨린의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면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미사일의 폭발이야 레녹이 실드로 막고 쳐내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다리의 약하디 약한 내구성에 있다.
후두두둑……!!
바이크의 격렬한 움직임에도 쉽게 흔들리던 다리의 내구도라면, 바주카포같은 화력에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할 터.
아니나 다를까 레녹이 내달리는 다리가 바이크 뒤쪽으로 빠르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십수미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갑차의 갱스터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성공했다!!”
“역시 선빵이 짱이지, 이 새끼들아!”
“저격수같은 놈들은 그냥 죽어버려!!”
“빨리 떨어져 뒈져라!!”
그 모습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이벨린이 등허리에서 화살 한 대를 꺼내 들었다.
“일단 조용하게 만들고 생각할까?”
왼팔의 단궁을 펼쳐 시위를 매기는 이벨린의 말에,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늦었다.”
“……뭐?”
“다리가 무너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두두두두두!!!
바이크 뒤쪽으로 충격을 익지 못한 다리가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바이크가 달릴 공간을 없애 버리고 있다.
살짝 당황한 이벨린이 레녹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바이크를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
“괜찮아.”
레녹이 브레이크를 걸고 오히려 무너지는 다리 사이로 바이크를 떨어뜨렸다.
후우우우웅!!
“꺄악!!”
이벨린이 어설프게 비명을 내지르며 레녹의 목덜미를 끌어안는 동시에, 레녹이 순식간에 마력사를 뻗어 올렸다.
촤라라라락!!
떨어지는 차체와 옆에 있는 멀쩡한 다리를 마력사로 연결. 다리 아래쪽을 그네처럼 회전한 바이크가 순식간에 무너진 다리를 벗어났다.
휘이이잉!!
다리 아래쪽 공허 사이로 길게 부유한 바이크가 허공에서 균형을 잡고 위로 치솟아오른다.
레녹은 그 타이밍을 마력감지로 깔끔하게 계산해서 정확한 순간에 마력사를 끊어버렸다.
후우우웅!!
허공을 날아오른 바이크가 순식간에 장갑차가 내달리던 다리 위로 접근.
바이크의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들의 얼굴 위로 드리우는 것을 깨달은 갱스터들이 입을 쩍 벌리고.
우지지지직!!
정확하게 장갑차 위로 떨어져내린 몬스터바이크가 차량에 탄 갱스터들을 짓눌러 터트려 버렸다.
부아아앙!!
완전히 고물이 되어버린 장갑차를 발판삼아 바이크가 그대로 전진.
단 한 번의 기동으로 장갑차를 통째로 압사시킨 모습에 이벨린이 레녹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잘했어!! 운전 왜 이렇게 잘하는거야!”
“꾸준한 연습의 결과물이지.”
[마스터는 전뇌정령의 근로시간을 인정하라!]품안에서 시위를 벌이는 다비의 목소리를 무시한 레녹이 태연하게 둘러댔다.
“확실히 이벨린 네 말대로, 방금 이런 놈들이 나타난 이유가 있긴 할 것 같군.”
스로틀을 한번 더 강하게 당기자 곧바로 바이크가 앞으로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조금 더 거리를 벌린 다음에 생각을 해보자고.”
* * *
레녹과 이벨린은 장갑차를 박살낸뒤로 대략 한 10여 분을 더 내달린 뒤 멈춰섰다.
이 공허의 다리 사이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적의 존재.
그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레녹과 이벨린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
“충돌 직전 장갑차의 속도는 시속 150㎞ 언저리였어.”
이벨린이 다리 사이에 걸터앉은 채로 말했다.
“우리를 추격하기 위해 엑셀을 풀로 밟고 있었다고 해도, 바이크에 비하면 지나치게 느린 속도지.”
“……그걸 육안으로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인가? 궁사의 동체시력은 정말 대단한 수준이군.”
그 정신없는 3차원 기동 와중에 자신과 장갑차의 움직이는 속도를 비교해서 객관적인 속력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니.
육체능력자들의 기이함은 술사의 능력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면이 있었다.
어색하게 웃은 이벨린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놈들보다 한참 전에 출발했고, 훨씬 빨랐고, 거의 한번도 멈춘적이 없잖아. 그 속도로 우리를 따라잡았다는 것 자체가 이상해.”
“짐작가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더라도, 어떤 다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달시간이 달라진다면 어떨까?”
“무슨 뜻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벨린을 뒤로 하고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길게 말할 필요 없겠지. 서로 다른 다리로 건너가서 시간을 재보자.”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품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 생각에는, 다리 간의 이동이 자유롭게 허락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군.”
두 사람은 곧바로 수미터 옆에 떨어진 다리에서 1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돌아왔다.
“1분. 그쪽은 얼마나 걸렸지?”
“……잴 필요도 없었어.”
이벨린이 다리 위로 돌아온 레녹을 멍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여기서는 10초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몇번만 더 실험해 보자.”
그 뒤로 레녹과 이벨린은 근방에 놓인 다리 여러개를 건너면서 시간을 재는 일에 집중했다.
그 사이 수복되었던 원래 선택한 다리의 시간까지 재보고 나서야, 비로소 레녹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공간의 다리들은 서로 다른 시간선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 차이도 일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동하고 있군. 놈들이 선택했던 이 다리는, 우리가 선택한 다리보다 시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갱스터들은 레녹보다 한참 뒤에 출발했음에도 두 사람을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이벨린이 얼굴을 굳혔다.
“잠깐만, 반…… 그 말은…….”
“방금 그 갱스터들은 바로 다음으로 관문을 통과한 게 아니었겠지. 두번째 관문이 뚫린지 한참이 지났고, 이미 다른 사람들도 이 다리 위에서 각자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운의 영역이 맞았군. 지금 당장 시간선이 빠른 다리를 선택해도, 다리 자체의 시간선이 언제 느리게 변할지 모른다는 말이니…….”
부아아아아앙!!
바이크의 스로틀을 연이어 잡아당기며 다시 다리 위를 내달린다.
익숙하게 바이크 뒤에 올라탄 이벨린이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공간과 시간의 불연속성…… 한 공간 안에 그 법칙을 겹쳐서 구현할 수 있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공간은 유동적이고, 시간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기준점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주위를 비교해서만 그 간극을 측정할 수 있을 뿐.
세계의 구성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세워진 가설을, 진둔은 자신의 미궁안에 고스란히 구현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자이기스 이더노어가 진정으로 하나의 독립된 이계를 이 미궁 안에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의미.
승천에 도전한다는 것은 이 정도의 과업과 법칙을 자신의 의지에 아로새겨야만 가능한 일인 것인가.
자기개변을 마치고 위계를 완성한 7레벨의 초인조차 경악하게 만드는 승천자의 미궁.
하지만 레녹은 이벨린의 말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이다. 세계이자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자 세계이기 위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위업에 도전하고 있는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거야?”
“글쎄…….”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단망경을 꺼내 마안 위에 가져다 댔다.
“내가 여기서 다리를 선택하는 일에 신중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으니까.”
단망경 너머로 보이는 수백갈래 다리의 풍경.
그 모든 다리 위로 레녹을 이끌던 환영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수백개가 넘는 노인의 환영이, 제각기 하나씩 다리를 맡아 건너며 레녹을 돌아본다.
이제는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선명한 의지. 하지만 레녹은 거기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끝까지 가자. 미궁의 끝까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바이크, 계속 꺼내놔도 괜찮겠어?”
등받이 뒤쪽 좌석에 올라타 레녹에게 몸을 기댄 이벨린이 물었다.
“그건 반의 신분으로 사용하던 물건이잖아. 혹시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중신분을 유지하기 어려울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철컥, 철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이크의 외형 부품이 뒤집히듯 회전하면서 기존의 바이크와는 완전히 다른 유선형의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쿠쿵!!
“4가지 커스텀 외형을 탑재할 수 있도록 개조했거든. 프로타타입이라 용량이 크지 않아 많이 넣지는 못했지만, 당장은 이걸로도 충분할 거다.”
“그, 그렇구나…….”
이벨린이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는 사이, 레녹이 고개를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냐. 에반 바일런의 신분은 그러지 않아도 너무 허술하게 만들어져 있어.”
스로틀을 홱 잡아당기면서 레녹이 대꾸했다.
“그건 내가 이 도시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것도 상대적으로 염가에 제작한 신분 중 하나다.”
“…….”
“어쩌다보니 우연이 겹쳐서 그 이름을 여기까지 끌고 오기는 했지만, 솔직히 위험하지…… 라피스나 그리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번 갈아치울 때가 됐어.”
“마약왕을 토벌했다는 명성을 어디가서 쉽게 얻기는 어려울 텐데, 그것도 포기하려고?”
이벨린의 말에 레녹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농담이군.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지?”
레녹이나 이벨린이나 눈앞에 보이는 명성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다.
반의 이름으로 실적을 쌓아올려 빠르게 인지도를 끌어올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레녹이 원하는 시공간 계열의 아티팩트나 유물을 찾기 위한 일환이었을 뿐.
그런 특수한 사정이 아니라면 레녹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를 그리 반기지는 않았으니까.
하물며 마약왕을 상대한 것은 당시변장했던 염열마법사 ‘바이젠’의 신분으로 했던 일.
그것이 에반이라는 마법사가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앞으로도 퍼져나가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벨린은 레녹의 말에도 불구하고 웃지 않았다.
“반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갈아치울거야?”
“…….”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네가 그렇게 숨어버리면…… 이렇게 같이 일하는 것도 끝이겠네.”
짙은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 고개를 돌린 이벨린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녹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벨린 역시 반이라는 이름 역시 가명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