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08
약먹는 천재마법사 408화
니드 포 스피드(1)
“색이 변하지 않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마안을 각성한다고 양쪽 눈이 전부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것도 그리 바라는 일은 아니다.
고위계 초인들의 전투에서는 사소한 외견의 변화조차 변수가 될 수 있는 바.
이런 식으로 희미한 황금륜만이 떠오르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아직 마안을 개안시키는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올리비에라가 그녀의 마안을 직접 보여준 것은 처음 한 번뿐.
그 이후로는 마력을 일절 통제하고 이능을 다루는 행위를 관찰하며 가벼운 조언만을 툭툭 던져줄 뿐이다.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거래 관계에 가까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듯한 정보 교환의 연속.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른쪽 눈에 새로운 반응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 능력과 성과만은 확실하다고 인정해야 할까.
이능과 술식의 조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극위마법사의 지도능력.
레녹은 그 와중에도 카르텔의 회장이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떠보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회장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효과적인 방법일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당장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이쪽도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겠어.’
레녹이 그 모습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눈을 거울에 가까이 가져다 댄 그 순간.
쨍그랑!!
덜덜 진동하던 거울이 그대로 깨져나가며 박살이 났다.
“아…….”
깨진 거울 조각 파편이 팔뚝에 스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심코 그 사이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손을 가져다댄 레녹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 몸이 얼마나 나약하고 또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팔뚝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핏방울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인한 피로와 부상과는 다르다.
평소에는 실드와 갑각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있을 뿐. 강력한 초인의 공격이 아니라 깨진 거울 조각에도 부상을 걱정해야 하는 육신이다.
세면대 위로 바스라진 거울 조각들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레녹이, 흐르는 물 사이에 팔뚝을 가져다대고 피를 씻어냈다.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다비가 말했다.
[새로운 거울을 옥션에서 주문할게요. 이번에는 훨씬 단단한 걸로.]“……그래. 고마워.”
[알면 이번에는 다치치 말아요. 흥.]가볍게 콧방귀를 낀 다비가 레녹의 머리 위에 올라타 또아리를 튼다.
레녹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픽 웃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촤락!!
손가락 사이로 뻗어나간 마력사가 순식간에 거울 조각들을 잡아 쓰레기통에 정리하고 지혈한다.
마력사가 가지는 물리력을 한결 더 섬세하게 조작할 수 있게 된 이후로, 레녹은 한결 다양한 곳에 마력을 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육신의 건강과 술식의 연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무엇 하나 손에 넣을 수 없다.
다비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에 잠긴 채 하루 종일 고민하고 있었겠지.
전뇌정령의 존재는 어떤 의미로는 우연이나 다름없었지만, 레녹이 여러모로 그녀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다.
“시간이 됐군. 빨리 준비해야겠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본 뒤 곧바로 외출 준비에 서둘렀다.
오늘을 위해서 억지로 낮에 잠을 자서 체내 시계를 반대로 한번 바꾸지 않았던가.
챙겨든 옷은 반의 신분으로 항상 들고 다니던 그림자코트가 아니라,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짧은 외투.
반의 이름으로 움직이기는 하지만, 반의 신분임을 들켜서는 안 되는 자리다.
필요한 장비들을 점검하고 컨디션을 확인하는 사이, 그런 레녹을 보채듯이 휴대폰이 다시 한번 울리기 시작했다.
[반, 준비 끝났나?]어딘가 긴장된 기색이 역력한 세바스찬의 목소리.
억지로 목소리를 누르는 것처럼 숨죽인 브로커의 말이 스피커 너머로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괜찮다면 되도록 빨리 와줬으면 좋겠는데. 이쪽에서도 자넬 들여보낼 시간이 필요해. 작성된 참가자 명단을 한번 갈아치우려고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인 줄 알고 있나?]“약속 시간까지 두시간 정도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레녹이 옷을 갈아입으며 대꾸했다.
[가능한 빨리 와주면 더 좋다고 말했잖나. 돌아가는 분위기 보고 언제든지 끼어들 수 있게…….]“다 끝났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다만…….”
반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작전이다.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바꾸는 건 당연하지만, 효과적인 수단을 찾는다면 멀지 않은 곳에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
작업대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흑요석 가면.
얼굴 전체를 뒤덮는 어두운 외형에, 신비로운 광채를 내뿜는 표면이 인상적인 물건이다.
판데모니엄의 명왕에게 직접 받아 챙겨놓은 그 물건을 레녹은 단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명이 신분을 감추고 복마전과 접촉하는 방법으로 은연중에 추천한 만큼 정체를 감추기에는 저것보다 확실한 물건이 없을 터.
하지만 고민하던 레녹은 결국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가면에 별다른 추적장치나 해가 되는 힘이 없다는 건 확인했지만, 아티팩트의 능력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만약 가면을 착용한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능력이 존재한다면, 복마전과 접촉할 마음을 먹은 시점에서 저 물건을 사용해야 할 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레녹이 다비의 꼬리를 움켜쥐고 그대로 맨션을 나섰다.
[엣, 아직 낮잠 잘 시간인데…….]전뇌정령의 단말마만이 한적한 복도 사이로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 * *
저녁을 넘어선 자정 언저리.
심야에 가까워진 공기는 싸늘해서, 절로 입김이 새어나올 정도다.
작은 소리조차 크게 울려퍼지는 차가운 밤거리 사이로.
부아아아앙!!
귀청을 터트릴 것만 같은 요란한 엔진 소리가 쉴새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뱃속을 웅웅 두드리는 것만 같은 격렬한 소음을 뒤로한 레녹이, 눈앞에 서 있는 세바스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세바스찬, 미안하지만 변장솜씨가 영……. 브로커답지 못하군.”
“어쩔 수 없었어. 이런 식으로 직접 현장에 뛰어본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단 말일세.”
두꺼운 목도리와 선글라스를 쓴 세바스찬이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골목길 계단 아래쪽에 자리한 널찍한 대로변.
그 아래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완전히 다른 소음을 내면서 무언가를 기다리듯 서 있다.
쿠구구구구!!
온갖 탈 것에서 흘러나오는 엔진소리가 겹쳐서 강렬한 진동음을 내뿜는다.
기본적인 4륜구동부터 장갑차, 레이싱에 사용되는 바이크는 물론이고 지프와 트럭에 탄 이들의 모습까지.
아예 땅에 닿지 않고 부유하는 양탄자 뿐만이 아니라, 침을 뚝뚝 흘리는 짐승 위에 탄 조련사도 있다.
세바스찬이 어색하게 변장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리모어 갱단에서 주최하는 발칸 외곽구역 횡단 레이스…… 나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일세. 자네 덕분에 이런 곳에 와보게 됐군.”
발칸의 음지에서 삼두령만큼은 못하더라도 나름의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모어 갱단.
외곽 구역 두 개를 통째로 점유하다시피한 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특유의 강력한 조직력이 아니라, 비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레이스에 있었다.
레녹은 세바스찬을 따라 아래쪽에 이미 자리한 참가자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그에게 말했다.
“아킬레우스의 보안 네트워크에 연결된 단말 중 유독 강력한 하나가 갱단 최중심부에 연결되어있었지.”
“……두 조직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는 걸 생각하면 마드리치 오니온의 라인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 그리모어 갱단에 대한 소문도 그걸 뒷받침하고 있네.”
머쓱하게 뺨을 긁적인 세바스찬이 대답했다.
“그리모어 갱단이 뿌리는 시정부 공용물자는 단순한 약탈이나 횡령으로 취급하고 넘어갈만한 수준이 아니야. 그런데도 이 자들은 그런 사실을 숨기기는커녕, 자신들의 세력을 불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시정부 고위층에서 고의적으로 공용물자를 이들에게 넘기고 있다는건가?”
“그렇네. 만약 그런 일이 정말 나름의 합의끝에 발생하고 있다면, 그리모어 갱단 자체적으로 고위층의 누군가에게 연줄을 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눈을 날카롭게 빛낸 세바스찬이 웃었다.
“시의회에 자리한 내 지인들은 바로 그 누군가가…… 마드리치 본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확인해 주더군.”
“…….”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마드리치 본인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오래되었네. 사법기관의 수장으로 재직했음에도 군령을 보내 업무를 처리할 정도였으니.”
“군령술사라…….”
“자신의 의지에 반항하는 이들을 군령으로 잡아서 부려먹던 그 시절의 야인이, 기백년을 지나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가 있겠지.”
세바스찬은 그렇게 말하고 추위를 피해 목도리를 꽉 여맸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내 몫이 아닐세. 준비는 됐겠지?”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아래쪽으로 돌렸다.
어두운 도로 사이로 내려앉은 헤드라이트 불빛의 향연. 그 사이를 눈여겨보는 레녹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야행에…… 군령술사…… 그렇군. 알았다.”
레녹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세바스찬이 건네주는 장비들을 받아 챙겼다.
철컥, 철컥!!
양 손에 한가득 들리는 것은 바이크를 탈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라이더 장구류.
재킷과 부츠를 비롯해 아예 눈가가 보이지 않게 코팅된 바이크 헬멧까지.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기 위한 물건들을 받아 착용한 레녹이 소매 끝에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쿵!!
흐릿한 형체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리며 묵직한 앞바퀴를 지면 위에 찍어누르고, 육중한 체구의 몬스터바이크가 튀어나왔다.
“인계받고 난 뒤로 첫 번째 운전인가?”
“그런 셈이지.”
“좋아.”
세바스찬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녹이 오터블의 사장에게 직접 몬스터바이크 주문제작을 맡겼다는 사실은 외부에 공표되지 않았다.
거기에 바이크에 달린 10종의 외형변경 기능을 사용하면 오늘 이 자리에서 바이크의 기능을 마음껏 테스트하더라도 들킬 확률은 낮을 터.
“그럼 난 가보겠네. 레이스 시작 시간이 가까워질 수록 여기를 지켜보는 눈이 많아질거야.”
“고생했다.”
“추후에 결과 알려주는 거 꼭 잊지 말게.”
신신당부한 세바스찬이 서둘러 골목길의 어둠 사이로 사라진다.
레녹은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바이크의 스로틀을 움켜쥐었다.
현장에서 직접 뛰는 일 없이 부유한 고객들을 상대해 온 세바스찬이 모처럼 직접 나서준 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적어도 그가 보여준 호의와 기대만큼은 오늘 이 자리에서 해낼 생각이었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품 안에서 다비를 꺼내 조심스럽게 바이크의 엔진부 위로 올려두었다.
졸린 듯이 눈을 부비면서 꾸물거린 다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일할 시간인가요?]“그래.”
레녹이 웃었다.
부아아앙!!
바이크의 시스템 인터페이스에 환한 불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우렁찬 엔진소리가 울려 퍼진다.
두꺼운 바퀴가 낡은 시멘트로 굳힌 계단을 그대로 뭉개며 도로 한가운데 떨어져내리고.
쿵!!
헬멧을 쓰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라이더를 향해 사방에서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도로 한켠에 기댄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누군가 레녹에게 다가왔다.
뺨에 길쭉한 흉터가 인상적인 무표정한 여자. 한쪽 옆머리를 통째로 삭발하고 스크래치를 남긴 것이 인상적이다.
물고 있는 곰방대를 뻐끔거리며 가만히 레녹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대뜸 물었다.
“레이스 참가자?”
바이저 너머로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레녹이 대답했다.
마치 귀신이 우는 듯 유리창을 긁어대는 섬뜩한 목소리. 레녹 자신이 직접 변조하기는 했지만 음산하기 그지없는 음색이다.
“이름은?”
[빅터.]오터블의 특주제작품을 첫번째로 시연하는 자리다. 사장의 이름을 가져다 쓰는 정도는 허락해 주겠지.
“흠…….”
허리춤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 팔랑팔랑 넘겨대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기 있네. 확인해서 미안. 당신 같은 사람이 예전에도 참가했으면 기억 못할 리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레녹이 팔짱을 낀 채 말을 무시하자, 여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좋은 바이크인걸.”
바로 앞에 서 있던 묵직한 전차에 올라탄 장년의 남성이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듣자하니 이 레이스에 처음 참가하는 것 같은데, 유의미한 성과를 기대하는건 포기하게.”
바퀴가 아니라 궤도전차 형태에 가까운 체급. 속도가 아니라 힘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물건이다.
그런 전차의 궤도 끝에 걸터 앉아 연초를 피던 남자가 레녹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리모어 갱단은 시정부 고위층에 직접 연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기로 유명한 곳이야. 덕분에 이런 레이스를 통해서 그 떡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어중이떠중이들도 상당하지.”
[…….]“자네가 그런 비루한 놈들중 하나가 아니기를 빌겠네.”
레녹은 남자의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한 말을 흘려듣지는 않았다.
그리모어 갱단은 발칸 외곽구역에 자리잡은 폭력조직들 중에서도 상당히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고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갱단들 중 하나다.
세바스찬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던 것과는 별개로, 레녹 역시 제니를 통해 이들에 대한 정보를 따로 수집했던 상황.
‘시거 뱅 갱단이 롤 모델로 삼은 갱단이 그리모어라 했었지. 이들이 정말로 마드리치에게 줄을 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뿌리가 탄탄하다는 말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이런 레이스가 비정기적으로라도 꾸준히 열렸다면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이들이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가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은 상황.
당연하지만 처음 이 레이스에 참가하는 레녹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레녹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도로의 가장 앞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쉬이이이……!!
도로 사이로 스산하게 흘러나오던 밤안개가 어느 순간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특이한 등장에 레녹 역시 근방의 마력흐름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순간.
“시간이 됐군. 좀 있으면 신호가 떨어질 거다.”
왜소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 안개가 천천히 목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노인은 도로를 가득 메운 참가자들의 모습을 쭉 둘러보다가 변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캐시, 필요한 인원 수는 확보했겠지?”
그가 나타나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 캐시가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참가자까지 추산해서 112명. 기준은 확실하게 넘겼습니다.”
“좋아. 레이스를 시작하는 순간에 머릿수를 확보하는게 중요하다. 일을 처리한 모양이군.”
고개를 휙 돌린 노인이 참가자들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레이스는 갱단에서 직접 기획하는 연례행사 중 하나다. 외곽구역을 시작으로 도시 변두리를 쭉 돌아서 미개발지구 번화가에서 마무리되는 여정이지.”
“…….”
대답은 없었다. 노인 역시 큰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쭉 이어서 말했다.
“동이 트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4시간 정도. 그 안에 목적지까지 들어오기만 한다면 갱단에서 보유한 물자들을 참가자 전원에게 일괄지급할 것이다. 다만!”
강한 어조로 말을 끊은 노인이 주위를 쭉 둘러보면서 말했다.
“중간에 낙오되거나 탈락하는 참가자는 갱단이 직접 처리한다. 또한 반드시 사전에 고지해 준 경유지를 찍고 결승선을 통과해야 함을 명심해라.”
여전히 대답은 없다. 하지만 그 말에 반박하는 이들 역시 없었다.
“이 두가지 전제조건을 지키기 위해 레이스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을 철저하게 가려 받고 있다. 자의로 레이스를 포기하는 경우 참가자의 뒷배를 알아내서 불이익을 가할 것을 갱단의 이름으로 확인해두지.”
“순위권에 든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어떻게 되지?”
선두에서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던 구릿빛 피부의 청년이 물었다.
어딘가 느긋한 말투가 인상적인 그는 이번 레이스에 참가하는 것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는 고지했던 것과 상품이 달라서 좀 곤혹스러웠는데.”
“……이번 레이스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3위 안에 든 참가자들은 보스와 직접 대면해서 원하는 물자를 하나씩 받아가게 된다.”
잠깐 뜸을 들인 노인이 대답했다.
“최근 질좋은 아티팩트과 영약들이 들어왔으니, 최선을 다한다면 좋은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ㅡ”
피잉!!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 저편에서 솟아오르는 작은 불꽃.
그것을 본 주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한다.
우우우우웅!!
레녹의 주위에서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엔진과 마력의 공명음.
자연스럽게 레녹 역시 스로틀에 손을 가져다댄 채 신호를 기다렸다.
노인 역시 힐끔 뒤를 돌아보고 천천히 도로 바깥으로 물러섰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다들 앞서 고지한 사항을 잘 지켜주길 바라면서, 건투를 빌겠다.”
퍼버벙!!
밤하늘 사이로 터져나가는 이름모를 폭죽이 어느 순간 선명한 숫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3, 2, 1.
어두운 하늘을 사이로 사라지는 불꽃의 흔적.
마지막 1의 숫자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도로 위에 서 있던 발 달린 모든 것들이 일제히 앞으로 무게중심을 기울이고.
부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엔진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을 스쳐지나가는 차량과 짐승들 사이에서 레녹 역시 스로틀을 쥐고 속도를 올리려던 그 순간.
바로 앞에서 달리던 육중한 전차가 속도를 확 줄이더니 거꾸로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우지지직!!
묵직한 궤도로 아스팔트를 짓뭉개면서 가열차게 후진하는 전차의 동체.
“아하하하핫!!”
그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저열한 장년 남성의 웃음소리까지.
“멍청하게 아직도 내 뒤에 서 있었으면 대가를 치뤄야지!!”
저런 전차를 끌고 레이스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속도로 승부를 볼 생각이 아예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시작부터 다른 경쟁자들을 짓밟아버리고 순위권에 안착하겠다는 노골적인 의도.
다른 이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알아차리고 전차와 거리를 벌렸지만, 유독 레녹 하나만큼은 처음 내려앉은 전차의 뒷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몬스터 바이크가 상당한 체구를 자랑한다 해도, 전쟁에 사용되는 전차에 비할바는 아니다.
이대로 두 차체가 충돌하면 레녹의 바이크만 플라스틱 캔처럼 납작하게 짓뭉개질 터.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픽 웃었다.
[안다.] [전면부 합금장갑 3중전개. 제트 추진기 활성화. 역장 글라이더 개방.]위이이잉!!
그 순간 바이크 앞쪽에서 분해되어 모여든 합금부품들이 거대한 여우머리의 방패 모습으로 변하고.
차체 곳곳에서 튀어나온 지지대가 공기 속을 휘저으며 강제로 차체 무게를 낮게 가라앉혔다.
콰아아아!!
바이크 바퀴 뒤쪽으로 파이프가 튀어나와 푸르스름한 불꽃들을 폭발적으로 토해낸다.
소음을 울리다 못해 지상을 뜨겁게 치대고 진동시키는 엔진소리.
전차의 후면부와 바이크가 격돌하기 직전, 레녹의 바이크가 한순간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고.
[빠샤!!]뻐어어어엉!!
다비의 기합과 함께 도로 한복판에서 완전히 박살난 전차의 부품이 밤하늘 사방으로 터져 흩날렸다.
수십톤에 달하는 전차를 그 자리에서 통째로 분해하고 앞으로 질주하는 바이크의 신형.
그 말도 안되는 물리력에 다른 경쟁자들이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는 사이.
순식간에 그들 사이를 주파해 앞서나간 레녹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지금 필요한건 힘이 아니라 속도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