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26
약먹는 천재마법사 426화
달라진 것들에 대해(1)
전직 대법원장이자, 8레벨의 위대한 군령술사.
거대도시 초창기부터 질서를 위해 많은 곳에 공헌했던 마드리치 오니온의 장례식은 실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군령도시를 떠나 발칸에 몸담으며 오랫동안 도시를 위해 헌신했던 공직자.
비록 마지막에는 율령을 대신할 통제기구를 세우겠다는, 시정부의 기조와는 어긋나는 정책을 시도하다 불미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나.
이미 죽어 없어진 영을 추모하고 넋을 기리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마드리치 오니온은 생전 어떤 가족이나 혈연도 남기지 않은 덕에 그 유산을 정리하고 공헌을 치하하는 데 있어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가 도시 바깥에 무너진 해군기지에 산제물을 잡아다 놓고 군령으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도.
그 와중에 레녹과 결전을 벌이고 패배해 소멸했다는 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이상만을 위해 굽히지 않고 살다 죽었다는 것도.
번화가 한복판에 서서 그 죽음을 추모하는 시민들은 알지 못한다.
관복을 입은 마드리치의 커다란 사진이 리무진에 실린 채 도로 한복판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 리무진의 양 옆을 호위하는 예식 차량과, 경찰들의 모습까지.
레녹은 맨 얼굴로 거리에 나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러고 보면 이렇게 맨 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어색한 손으로 까칠한 턱을 쓰다듬다보면, 자연스럽게 레녹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생각이 났다.
아리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그녀가 마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한지 벌써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라바테논 대학에 안식년을 걸어놓고 떠난 것을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도 없는 시간.
그때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않은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완벽한 마법사의 이성과 판단력을 지니고서도 항상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고 망설인다.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고 매번 다짐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과 가끔씩 깊은 교류를 나눌 때면, 레녹은 항상 그 순간이 옳았는지 돌이켜보곤 했으니까.
이벨린, 진둔, 라피스와 판데모니엄의 괴물들까지.
잊어서는 안 되는, 또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레녹은 한참 동안 거리 저편으로 사라진 마드리치 오니온의 장례식 행렬을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 음악. 연말이 다가오는 것과 함께 서로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모습.
[내년에는 올해보다 좋은 일만 가득하길.] [행복한 연말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무수한 인파 사이를 스쳐 지나 걷는 사이에도, 레녹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반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다.
얼굴과 기척, 옷차림과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요소들, 거기에 마법사의 개성을 구성하는 마력패턴까지.
예전에는 극도로 신중을 기울여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신분을 바꾸던 일조차, 이제는 숨 쉬듯이 자유롭다.
단순히 일련의 변장 과정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 때문만은 아니다.
레녹의 힘이 위계를 뛰어넘을수록, 그 재능에 걸맞은 내용물을 채워나갈수록.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할수록.
정체를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기약없는 미래를 논하던 시간을 지나, 그 그릇을 알아보고 레녹의 재능을 탐낼 누군가를 두려워하던 기억을 넘어.
스스로를 완성하고 그 이상의 경지를 넘보고 있다는 것을 레녹 역시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행여나 누군가 지금 레녹의 모습을 통해서 그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알아내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레녹은 그 진실과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감내할 만큼의 힘과 자격을 동시에 갖춰나가고 있었다.
“…….”
반의 얼굴로 모습을 바꾸고 외곽구역으로 나서면, 또 다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을 느낀다.
마드리치 오니온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불문에 붙인 채 더 파헤쳐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와 관련된 소문은 거리 곳곳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의 지명의뢰를 받은 견뢰가 마드리치 오니온을 상대해 쓰러뜨렸다.
다이크와 카르텔이 손을 잡고 아킬레우스를 무너뜨렸다.
그 과정에서 반의 무력이 하늘 끝에 닿았다는 소문이 거리 곳곳에 퍼지고 있었다.
‘역시…….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아.’
더 이상 레녹을 바라보는 시선에 증오와 질시는 없다.
이 바닥에 도는 소문이 단순히 헛소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멍청이는 없었으니까.
경탄과 경외, 혹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나 천재를 바라보는 듯한 몰이해와 두려움.
그런 감정들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한 채 시선을 피하는 음지의 사람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그 어색한 태도가, 역으로 레녹이 이 거리에서 어떤 위상을 거머쥐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한발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흔들리는 코트의 옷깃에 맞춰 다른 이들이 천천히 물러선다.
부상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절뚝이는 그 모습까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그 흔들리는 몸짓마저 진실로 견뢰가 마드리치 오니온과 싸우고 살아남았다는 증거나 다름없을 테니.
찰랑!
술집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서자, 제니가 고개를 돌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 반…….”
물론 그녀의 어색함은 달라진 레녹의 위상 때문은 아니었다.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러곳에서 연락이 왔어. 그 중에서 좀……. 따로 거절하기 어려운 곳도 있어서. 일단 확인을 받아야 할 것 같아.”
“무슨 일이지?”
조든이 건네주는 술잔을 힘겹게 받으며 고개를 숙인 레녹이 물었다.
제니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마드리치 오니온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여러 마탑에서 연락이 왔어.”
“……마탑이라고?”
레녹이 거대도시 외곽구역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로, 마탑과 엮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탑 출신을 따로 만나거나, 에이전트처럼 따로 지명의뢰를 받고 움직이는게 아니고서야 양지의 학계와 마주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프리랜서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하고, 음지의 거물들과 엮이기 시작한 이후로도 크게 신경을 써본 적은 없었건만.
아마 제니 역시 이런 식으로 마탑에게서 연락을 받은 경험이 많지는 않겠지. 그녀의 살짝 어색한 태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치 이제서야 레녹이 진짜 마법사라는 것을 실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간 건 아니지만, 대충 느낌은 와. 다들 네가 정말로 그, 음…… 그걸 확인하고 싶어 해.”
“그걸?”
제니가 눈을 뒤룩뒤룩 굴리더니 살짝 입술을 깨물고 말햇다.
“그…… 극위 마법사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살짝 이상하기는 하지만…… 네가 8레벨에 도달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
“…….”
“아, 물론 그걸 지금 나한테 말해달라는 건 아니야.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프라이버시니까.”
레녹의 덤덤한 얼굴을 앞에 두고 제니가 양 손을 내저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일단 알아두라고. 아마 비슷한 용건으로 계속해서 연락이 올 것 같거든. 그 부분에 대해서 어쨌든 네 브로커 역할을 맡고 있는 입장으로 적당한 대답이 필요하다…… 이거지.”
레녹이 픽 웃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나올 필요는 없어.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알겠으니까.”
“그, 그래?”
“숫자 하나 차이지만, 그만큼 거기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겠지…….”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술잔을 까닥이며 생각에 잠긴다.
그만큼 반의 이름으로 8레벨의 극위능력자에게 승리를 거둔 작금의 싸움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니까.
자기개변의 일곱 가지 단계를 완성시킨 성위능력자는 대륙 어디에서도 능히 한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괴물이자 초인.
하지만 그 위계를 넘어선 8레벨의 거물들은 같은 인간으로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일곱가지 위계를 통째로 벗어던진다는 리스크를 맨정신으로 감수하는 이들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8레벨의 대마법사는 대륙 역사에 남을 강자이자 거물로 대접받는 것이 당연한 일.
수천만 명이 살아가는 이 거대도시에서도, 자신들의 계파가 아닌 마법사에게는 무관심한 여러 마탑에서도.
새로운 대마법사의 탄생은 그만큼 희귀하고 드문 일이라는 증명이나 다름없기에.
아니, 설령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아직 8레벨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그에 필적하는 무력을 손에 넣었음이 증명된 마법사를 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생각을 마친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준을 바꿀 생각은 없어. 그렇게 전해.”
“지명의뢰만 받되, 보상과 테마는 시공간 계열의 술식과 아티팩트로 말이지?”
아주 잠깐, 이 기회를 이용해서 아리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레녹은 그렇게 서로의 소식을 전해들어봤자 큰 의미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레녹이 8레벨에 비견되는 힘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인정해 봤자 큰 수확은 없다.
그만한 힘에 어울리는 책임을 요구하는 이들만이 늘어날 뿐이겠지.
레녹 스스로도 아직 온전히 극위에 다다랐다 말할 수 없는 이 시점에서 굳이 그런 부분에 대해 먼저 대답하고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모든 힘과 질서를, 처음 생각했던 방향대로 새롭게 재편하는 일에 있었으니까.
“일단 기존의 태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대답을 전해두기는 했는데, 따로 한 번 더 연락을 할까?”
“아니.”
남은 술잔을 다 비운 레녹이 고개를 휙 돌렸다.
“내가 직접 이야기하지.”
후욱…….!!
그 순간, 레녹의 몸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져 널찍한 바 뒤켠에서 나타났다.
어두운 조명 아래, 직각으로 꺾인 푹신한 소파에 앉아 한창 물건을 두고 흥정하던 이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은 레녹이 등을 기대며 말했다.
“돌아가는 상황은 들었을 테니까 짧게 끝내지.”
“…….야, 넌 뭐 하는 새낀데 우리 거래에 끼어들고 지랄이야?”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꺼져.”
레녹을 보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이빨을 드러내는 두 남자.
그런 이들을 보며 레녹이 빙그레 웃었다.
“들어오기 직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방해 마법을 걸었지. 그걸 눈치채고 날 모른 척 하는 기지는 칭찬할만 해.”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하지만 내가 술집에 들어오는 순간에 말을 멈추지 않은 건 너희 둘뿐이었어. 여기 오는 손님들은 꽤 예민한 편이라, 새로운 얼굴이 들어오면 잠깐이라도 신경을 쓰는 편이거든.”
“…….”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곧바로 입을 다문 두 남자의 모습.
그런 이들의 눈빛에서 지저분한 적의는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차분하다 못해 지적인 안광만이 빛을 발했다.
“토르번 마탑이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그쪽이 날 대신해서 다른 마탑에게도 메시지를 전해줘.”
레녹은 그 반응을 무시하고 테이블에 있는 술병을 들어 그들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마탑의 지저분한 전쟁사업에는 끼어들 생각이 없다고 말이야. 전선에 발을 들이는 건 온전히 내 판단에 따른 문제가 될거야. 이해했나?”
전격계열 고유마법을 연구하는 토르번 마탑.
레녹에게 처음으로 고유마법의 존재를 실감케 했던 시거 뱅 갱단의 보스, 에덴의 출신 역시 이곳이지 않았나.
개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자신들의 무력과 지식을 이용한 전쟁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술사집단들 중 하나.
겉으로는 학문과 지성의 탐구라는 명분을 내걸고 점잔을 빼고 있지만, 이들이 중앙전선에 직접 진출해서 이권싸움에 몰두하는 주문연맹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은 레녹도 잘 알고 있었다.
일전에 방문했던 블레이버 마탑도 탑주가 직접 전선에 진출해서 끝없는 싸움에 임하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까지는 하등 신경 쓸 것 없는 힘이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도, 그 무력이 극위의 경지에 비견될 정도라면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마탑의 인사들이 벌써부터 도시로 찾아와 레녹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능만 믿고 날뛰는 오만한 천재는 아니라 들었지만, 기대 이상이군.”
방금 전까지 레녹에게 으름장을 놓던 남자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꿨다.
“하기야 이렇게 험한 도시에서 기어 올라온 마법사가 평범한 샌님일 리야 없겠지.”
“…….”
“탑주님은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한번 약속이라도 잡아보라고 말씀하셨지만, 내 생각은 달라. 오히려 그쪽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지.”
레녹이 따라준 술을 쭉 비워낸 남자가 웃었다.
“견뢰 당신의 말대로다. 지금 같은 시기에 재능있는 신성이 중앙전선에 참전해 봤자 의미를 얻어가기는 어려울 거야……. 지금 전선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거든.”
“그렇군.”
“교단의 사도 몇 명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전선이 크게 어지러워졌어. 강력한 초인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웬 괴물로 변해서 난동을 부리지…… 덕분에 장막을 뚫어내기 위한 시도가 뜸해지고 있다.”
“…….”
귀도 교단의 사도라.
외해의 종말을 신으로 섬기며 그 힘을 전해 받아 사용하는 괴물들이,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레녹은 한차례 확인한 적이 있다.
윌터 마르티네스가 그랬던 것처럼, 전장 수십 미터에 달하는 괴물들이 날뛰는 것만으로 일대 지형이 뒤집히고 사람이 죽어나가겠지.
다만 중앙전선의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관계자에게 직접 전해들을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이런 이야기는 숨기고 듣기 좋은 말로 구슬려야 하겠지만……. 당신같은 남자를 상대로 쓸데없는 수작을 부릴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 사이에 벌써 계산이 끝났다 이건가?”
“구슬리기 어렵다면 잘 보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난 현명한 판단을 했을 뿐이야.”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옆에 앉아있는 동료의 어깨를 치대며 말했다.
“다른 마탑의 회유에 넘어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쪽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차례인 거지. 편하게 생각하자고.”
솔직하기 그지없는 감상에 레녹도 피식 웃었다.
“전쟁사업에 능통하다더니, 머리가 돌아가는 속도는 나쁘지 않군. 솔직한 건 마음에 든다.”
“좋아. 그걸로 충분해.”
아직 술이 남아있는 병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마탑이 아닌 다른 조직들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알지?”
“…….”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증명했기 때문이지. 이미 극위에 비견되는 무력을 쌓아올린 마법사. 오히려 경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매력적이야.”
남자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인 레녹을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만한 힘이 어디 묶인 곳도 없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겠지. 지금까지 어떻게 평판을 관리해 왔는지 모르지만…….”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생각하지 않았다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다만……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이름을 최대한 높게 올려세울 필요가 있을 뿐이다.”
왜 이제서야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다.
그동안 레녹이 해왔던 무수한 일들은 단순히 반의 이름으로만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많고, 또 그만큼 레녹이 철저하게 스스로의 명성과 위상을 조절해 왔기 때문이겠지.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제니의 도움을 받아 섬세하게 거리의 평판과 반에 대한 평가를 조절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장 항하사미궁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 역시, 반이 아니라 에반의 이름으로 꾸미고 위장하지 않았었나.
그때부터 8레벨에 비견되는 힘을 보유했음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이제서야 반의 이름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결국 프로젝트와 시의회가 숨기고 있는 가장 은밀한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드리치 오니온을 상대하고, 그 기반을 남김없이 파헤친 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 도시를 지배하는 시의회와 직접 적대하는 한이 있더라도 알카이드의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
결국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음이 없다는 공허한 메아리에서 더 나아갈 수 없을 테니까.
흔들림 없는 레녹의 대답에, 남자는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말을 했군……. 나보다 당신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문제일텐데 말이야.”
“충고에는 감사하지.”
“좋아. 그럼 이만 가보지. 술은 잘 마셨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리려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 이건 혹시 모르니까. 우리쪽을 통해 연락을 넣어둔 마탑들의 명단이야. 견뢰 당신에게 누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아두는 게 좋겠지.”
“…….”
레녹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명단을 받아 쭉 시선을 내리다 멈춰 섰다.
[싱클레어 마탑 원로회 3석] [클라리스 리첼렌]그에게 더없이 익숙한 마탑과, 성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