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27
약먹는 천재마법사 427화
달라진 것들에 대해(2)
‘클라리스 리첼렌이라…….’
레녹은 클라리스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리첼렌이라는 성에 대해서는 더없이 잘 알고 있었다.
아리스 리첼렌. 레녹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몇 가지 이름들 중 하나.
하필 이 메시지가 싱클레어 마탑에서, 그것도 아리스와 동일한 성을 가진 마법사의 이름으로 도착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아리스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임은 거의 틀림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레녹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두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마탑이 하는 일은 중앙전선에 개입해 이권을 취하는 것뿐만이 아닐 텐데.”
“……?”
“지금 이 명단이 단순히 무력적인 측면이 아니라, 학계 쪽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고 봐도 되겠나?”
처음 했던 말대로 이 시점에 마탑을 따라 중앙전선에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학계 쪽은 다르다.
아리스가 했던 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무력보다는 연구자적인 측면에서 싱클레어 마탑과 접촉하는 것이 뒤탈이 적을 터.
레녹의 말에 두 남자가 물끄러미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확신할 수는 없군. 토르번 마탑 역시 물론 주기적으로 학회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그 비중은 크지 않다.”
“…….”
“우리는 연구와 학문을 주도할 수 있는 곳은 아니야. 학계 쪽에 대해서는…… 다른 마탑에 문의를 해보는 게 좋겠군.”
토르번은 대륙 곳곳에 퍼진 대규모 마탑들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전쟁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마탑 중 하나.
전쟁사업 쪽에 매진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연구자적인 성향이 강한 학계 쪽에 소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마탑의 마법사들 답지않게, 취약한 분야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토르번 마탑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강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마탑이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과, 그 확신을 가질 만한 자격의 높은 위계.
레녹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대등한 협상상대로 여기는 그 태도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중앙전선에서 오래 구른 초인들은 저런 느낌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방금 그 대화까지 메시지에 넣어두지.”
클라리스 리첼렌.
마탑 원로회 3석에 위치할 정도의 고위직이라면 틀림없이 공식석상에도 몇번 모습을 드러냈을 터.
따로 정보를 찾아보고 그 관계도를 확인하는 것 정도는 레녹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히 아리스의 변덕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생각하면 꼭 그럴 수만은 없었다.
방위군 이동요새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그 사이 크로켄을 마주치고 도망치는 사이.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오간 대화조차 그녀는 결코 허투루 흘려넘기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아리스는 레녹이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 이미 한참 전에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그것을 생각하면 어째서 그녀가 마탑으로 돌아갔는지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 두 사람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레녹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아리스를 만나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괸 채로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두 마법사가 물끄러미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야.”
“뭐지?”
“에덴이라는 남자. 누구인지 알고 있나?”
“…….”
레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술잔을 내려놓고 희미하게 웃었을 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만으로 충분하네. 협조에 감사드리지.”
* * *
“알고 있던 눈치더군요.”
“무슨 소리야?”
제니의 술집을 나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가를 피해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츠츠츠……!!
동시에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전격이 사방의 소음을 틀어막고 시야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전격마법을 응용해 만든 강력한 전류장.
희미한 자기력이 섞인 필드가 통신을 비롯한 일대 연락망을 차단하고 오롯한 격리지대를 만들었다.
술식이 완성되자마자, 그동안 침묵하던 상대적으로 젊은 청년이 물었다.
“에덴의 일 말입니다.”
“…….”
“마탑 직전제자의 죽음을 걸고 거래를 하면, 좀 더 긴밀한 협조를 부탁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르칸 님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셨을 텐데.”
하지만 다르칸이라 불린 남자는 그런 청년의 말에도 서슴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한 괴물에게 강요뿐인 약속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런 사정을 따지고 있을 때가…….”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의 태도는 아슬아슬했어. 알고 있나?”
겉으로는 크게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확실한 상하관계.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같은 전장에서 보내온 두 사람에게 큰 허물은 없었다.
사소한 예의와 직위에 얽매여 생각을 그르친 동료들은 이미 모두 죽었으니까.
토르번 마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중앙전선에서 살아남은 최정예 전투마법사.
살아남는 것이 단순히 가진 힘과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참 전에 깨달은 이들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레녹의 명성과 힘에 짓눌리지 않고 뻔뻔하게 군다는 도박수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르칸이 레녹을 상대로 존대조차 없이 대꾸한 시점에서 레녹의 마음에 들었다면 오히려 선방.
그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죽음에 가까운 전투를 무릅쓴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발상은 아니었다.
“에덴은 스스로 마탑을 뛰쳐나간 외인이었다. 뇌정의 탑에서 이름을 지우고 제적당한 이상, 깊게 파고들 명분 역시 마땅치 않아.”
“…….”
“견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지. 오늘 이 자리는 그자가 우리를 살려 보내준 것뿐이야.”
마지막에 레녹이 대답대신 흘린 의뭉스러운 웃음.
그건 바로 토르번 마탑에서 이제와 에덴의 죽음을 조사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르칸은 마지막 순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추잡한 단서에 의존하려 한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설령 그자가 에덴을 통해 고유마법을 습득했음이 의심 간다 해도, 우리에겐 증거도 명분도 없다.”
나지막하게 탄식한 다르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탑주님께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오는 게 아니었어. 좋게 끝날 수도 있던 대화였는데, 마지막에 그만 실수를 해버렸군…….”
“으윽…….”
적지 않은 시간동안 대화를 주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레녹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레녹이 마력을 사용한 것은 두 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한 한순간.
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였던 고차원의 도약 직후, 곧바로 이어진 레녹의 말에 정신을 차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것이다.
자신들의 의도를 훤히 내다보고 메신저로 써먹으려는 그 노골적인 의사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영민하고 차분해 보였기에.
이 거리에 떠도는 흉악하기 그지없는 소문과는 달리, 훨씬 더 말이 통하는 상대로 보였기 때문에 살짝 마음을 놓고 말았다.
“돌아가지. 적어도 견뢰가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미치광이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충분하다.”
“……그걸로 충분할까요?”
“견뢰는 우리에게 다른 마탑에게 대신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했어.”
좁은 골목길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다르칸이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견뢰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드러내도 좋다는 말이겠지.”
미련이 남은 시선으로 49구역을 돌아본 두 남자의 전기장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흐릿한 중얼거림만이 거리에 남아 울려 퍼졌다.
“오늘은 그걸로 만족하자. 하지만 다음에는…….”
* * *
“저……. 조교수님?”
“네?”
햇살이 내리쬐는 연구실의 풍경.
온갖 다양한 마법이론 서적이 꽂힌 책장을 정리하는 것은 언제나 레녹의 몫이다.
늘 그렇듯이 사람들이 없을 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력사로 정리를 하곤 하지만,
이렇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삭신이 쑤시는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야 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언제쯤 나가주려나 생각하고 있을 즈음, 뒤에서 그를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주홍빛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학생이 쭈뼛거리면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프리실라와 같이 다니던 학부생들 중 하나다. 아마 이름이……. 페이네였던가.
“그, 혹시 죄송한 일이지만……. 보충 강의를 조교수님께서 대신 맡아주실 수 있나 해서요…….”
“편하게 말해줘요. 보충 강의 말인가요?”
칼라일 연구소의 시설을 써먹기 위해 바일라와 내기를 한 뒤로, 레녹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은 이곳 라바테논 대학도 마찬가지다.
전력과 마력의 치환 논문에 레녹이 상당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그의 이론 연구 능력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선반에 남아 있는 책을 정리해서 꽂아 넣으며 레녹이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 보충 강의는 카시아 조교수님이 담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는데요.”
“그, 정말 카시아 조교수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큰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페이네가 눈을 꼭 감고 말했다.
“그분의 보충 강의는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워요……!”
“…….”
“가뜩이나 원소변환에 대한 심화이론이 어려운데, 어떤 부분에서 저희가 이해를 못 하는지 아예 짐작하지 못해서…….”
“그래서 차라리 제게 강의를 맡기고 싶다는 말인가요?”
“물론 카시아 조교수님이 나쁘신 분이라는 건 아니에요. 정말 저희를 잘 챙겨주시려고 노력하고, 강의 도중에도 이상한 농담을 던지시곤 하는데…… 아차.”
“…….”
말실수가 많은 편이군.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책을 모두 정리하고 손을 가볍게 털었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페이네가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에반 조교수님은 엄청난 논문을 쓰셨을 정도로 이론에 대한 이해도 훌륭하시고, 원래 저희를 담당하시는 조교수님이시기도 하니까…… 혹시, 부탁드릴 수 있나 해서…….”
확실히 다비를 이용해서 착실하게 친밀감을 쌓아온 성과가 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학부생이 레녹에게 이런 부탁을 해올 줄이야.
아니면 그만큼 카시아의 강의가 평범한 학부생들에게는 알아듣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말일까.
바일라 연구소장도 아니고, 설마 카시아에게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사람의 적성은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다.
당연하지만 레녹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일. 적당히 페이네를 타일러서 기숙사로 돌려보내고 고개를 돌렸다.
“실시간으로 강의평가를 들은 소감이 어떻죠?”
“……부끄럽군요.”
선반의 뒤쪽에서 걸어 나온 카시아가 대답했다.
처음부터 레녹이 선반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건 페이네가 아니라, 같은 조교수였던 카시아였던 것이다.
시무룩한 기색으로 축 처진 그녀의 어깨를 보며 레녹이 웃었다.
“제가 보기에는 실망한 것 같은데요.”
“학부생들이 제 강의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요.”
충격받은 표정으로 카시아가 중얼거렸다.
“재수 없는 천재 소리는 제가 학생 때도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는데, 설마 취직을 한 뒤에도……!!”
“…….”
그러고 보니 정직처분을 받았던 이벨린에게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백수 생활을 하게 됐다고 처져 있던 기색이 역력했는데, 언제 한번 불러서 야채 주스라도 먹여야 하지 않을까.
일단 당장은 패닉에 빠진 듯한 카시아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음……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일단 의심에서 시작하는 게 편합니다.”
“의심…… 이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거라는 의심.”
레녹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저기, 에반?”
“내 강의능력이 내 이해와 습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살짝 질린 기색의 카시아를 보며 레녹이 싱긋 웃었다.
“뭐 그런 거죠. 사실 저도 훌륭한 선생님은 아닌지라.”
“…….”
“그래서, 선반 정리가 끝난 다음에 말씀드릴 용건이 뭐였죠?”
원래라면 다른 이들이 출입하지 않는 아리스의 연구실에 괜히 카시아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그녀의 말이 있었고, 레녹이 자연스럽게 선반 정리 핑계를 대며 그녀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왔을 뿐.
그사이 뜻하지 않게 페이네가 레녹을 찾아오면서 잠깐 일이 꼬였던 것이다.
“그게…….”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카시아를 등진 레녹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마드리치 오니온과의 전투로 입은 부상과 수확을 전부 정리하지 못한 상황.
이 시점에서 학교를 찾은 것은 클라리스 리첼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녀의 목적과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아리스의 연구실 안에서 싱클레어 마탑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면 공석에서 공개된 그녀의 정보와 대조해 볼 수 있을 테니.
물론 아리스가 완벽한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녹이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새기면서 그녀의 용건을 들어주기 위해서 등을 돌리려던 순간.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전부 듣고 잊어버리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 주세요.”
카시아가 가볍게 호흡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에반이 이 연구실에서 썼던 논문에 대한 이야기에요.”
“……네?”
“논문의 내용을 훔쳐서 악용하려는 이들이 있어요.”
그렇게 말한 카시아가 살짝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한 번 더 낮췄다.
“라바테논 대학의 학장님과 안면이 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친분이죠. 그분을 통해서 따로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거예요.”
“…….”
라바테논 대학의 학장이라.
레녹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학교에 재직하며 조교수로 일하는 동안, 그 소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전해 들은 바가 있다.
굉장히 나이가 많고 교활한 수완가이며, 학장이라는 직함에만 머무르지 않는 사람이지만 능력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한다 했던가.
오래 살아온 면면에 걸맞지 않게 꽤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들었다.
하기야 그러지 않고서야 시정부와 직접 협의해서 도시 안쪽에 이 정도 대규모 교육기관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아리스 역시 지나가는 말로 학장의 존재에 대해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다.
흐릿한 기억을 뒤져보면, 아마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카시아가 재차 말했다.
“대학의 이름을 걸고 제출된 논문을 보호하는 것은 학교의 일이라, 따로 학부처에서 조치를 취한 모양이에요.”
“……틀에 박힌 대답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하는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현장에 파견된 관리직원 일곱 명 전원이 사망했어요.”
싸늘한 대답.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현재 이 사실은 담당 학부처 관계자들과 학장님 본인만이 알고 계세요. 원래라면 시정부에 직접 연락해서 이번 안건을 상부에 넘겨야 하지만…….”
카시아는 말을 망설였지만, 레녹은 어째서 그녀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 의향을 들어보기 위해 학장님이 전언을 보내왔다는 말이군요.”
“……혹시 이미 관련된 사항을 전해 들으신 건 아니죠?”
살짝 놀란 표정으로 카시아가 물었다.
“방금 그쪽이 본론이라는 말을 드리려고 했는데.”
“비슷한 경험이 있긴 하죠.”
그동안 레녹이 경험했던 시정부의 일처리와 특무기관들의 특이성을 생각하면 한번 그쪽에 일을 넘기고 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겠지.
“이번 안건이 위쪽으로 넘어가면 아마 논문의 저자로서 일이 귀찮아질 거예요. 조교수의 신분만으로는 거부할 수 없겠죠.”
“그렇겠죠.”
“학교 측 입장에서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스케일을 키워야 하죠. 그 사이에 학장님께서 개입하셔서 에반의 의견을 들으시려는 것 같아요.”
학부처 입장에서 논문 악용 피해 사례가 범죄까지 번졌다면,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하고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레녹의 입장에서는 이 일이 커져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것 자체가 손해나 다름없는 일.
학장은 그것을 인지하고 도중에 개입해서 레녹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정했다는 것일까.
그 과정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그동안 고의적으로 아리스의 이름 뒤에 숨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군.’
레녹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라 짐작하고, 이번 일을 키우는 것에 대해 미리 의사를 물어보기로 결정했다는 걸까.
“그 사정을 직접 전해줄 만큼 카시아는 학장님의 신뢰를 받고 있군요.”
“…….”
카시아가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학장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해 줄 만큼 막연한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레녹에게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 사정까지는 공개해 줄 수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자치령에서 다른 신분으로 들었던 그녀의 본명이 아카샤라는 것을 생각하면, 카시아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거기까지 신경 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레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거기에 대해선 묻지 않는걸로.”
“고마워요.”
“다만 그 말만 듣고 무언가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군요.”
“그럼 어떻게……?”
“학장님을 직접 만나 뵙고 싶습니다.”
레녹이 말했다.
“아마 오늘은 학교에 자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약속을 잡을 수 있을까요?”
라바테논 대학의 수장이자, 굴지의 마법사.
학장과 직접 만나서 이 대학 생활에 대해 담판을 지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