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99
약먹는 천재마법사 499화
불멸과 필멸 사이(7)
“오호라, 빅터와 단장에 관한 이야기라…….”
어느새 자기가 소각해 버린 시체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한쪽으로 고개를 푹 떨구는 청년의 모습.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멈춰 있던 광대가 히죽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뭐?”
“내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쪽이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 아닌가요?”
“…….”
“후후후,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던 거미가 언제부터 이렇게 깜찍한 화법을 구사하게 되었는지…….”
광대의 입가가 길쭉하게 찢어졌다.
“이거 프레이야한테 한번 물어봐야 겠군요오오.”
그가 알고 있는 아그네타는 무언가를 말할 때 이렇게 서론을 길게 늘여놓는 성정이 아니다.
필요한 말만 건네주고 사라지는 것도 모자라, 때론 전부 전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속세에 관심이 없는 고대종의 후예.
그렇기 때문에 광대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그에게 따로 원하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아그네타와 친하게 지내는 프레이야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을 터.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던 아그네타가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알겠으니까 쓸데없는 공치사는 그만하자구요.”
픽 웃은 광대가 서슴없이 등을 휙 돌려 성큼 소각장을 벗어났다.
“애초에 당신한테 오랜만이라는 시간개념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서슴없이 복잡한 뒷골목을 걸어 다시 처음 있던 거대한 도박장으로 돌아온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홀 안에서 한데 뭉쳐 돈과 유흥에 열기에 취해 있는 노름판.
천장과 벽에 있는 전광판에서는 쉴 새 없이 배당과 자금의 흐름이 움직이고, 온갖 슬롯머신과 테이블이 회전하며 피 묻은 칩이 사방에서 휙휙 옮겨졌다.
광대는 어느새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픽 웃었다.
“이래서 구질구질하게 판돈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는데, 흥이 올라서 괜히 시간만 낭비했잖아요.”
“애초에 그 사제를 도박판에 앉힌 게 그쪽이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야, 거기까지 보고 있었습니까?”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 들려오는 아그네타를 상대로 낄낄거리던 광대가 말했다.
“뭐, 그러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군요.”
“한 달이 넘었어. 슬슬 괜찮아진 모양이네.”
“그럭저럭. 이제 슬슬 바깥에 나돌아다녀도 괜찮을 정도죠.”
광대가 그렇게 말하며 짙게 분칠된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그 손짓에 따라서 피부가 그대로 벗겨지며 시뻘건 피부 아래쪽 살점을 드러낸다.
뺨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몰골로 광대가 씩 웃었다.
“보다시피 아직 몸 꼬라지는 이 정도 수준입니다만.”
“……불행의 재분배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어. 아직도 부작용을 덜어내는 과정인 거야?”
“그만큼 밀림에서 있던 일이 꽤 버거운 작업이었다 이겁니다.”
광대가 툴툴거렸다.
“여기 모인 병신과 호구들을 털어먹어도 아직 한참 부족하다구요.”
밀림에서 승천자들 간의 격돌을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직후, 괜히 광대가 레야를 따라 토커퍼즈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도박과 유흥, 쾌락과 음주가무의 상징과도 같은 대도시 토커퍼즈.
바로 이곳에서 광대는 밀림에서 벌였던 현실 조작 환술의 후유증을 덜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장이 이 사실을 제대로 알아줘야 할 텐데 말이죠. 행여나 연락이 닿는다면 제 노고를 아주 구구절절하게 전달해 주세요.”
“운의 총량을 조절한다는게 솔직히 아직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 그냥 도박하다가 적당히 져주고 이기면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 나름대로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라구요.”
초월적인 환술사인 광대는 스스로의 위계를 한 가지 경지로 단정해 두지 않는다.
자신의 위계조차 제대로 확정되지 않는 불안정성 속에서 발현되는 기아스는 광대의 이성을 어느 정도 보호해 주기 때문.
뛰어난 환술사 대부분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미쳐 버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획기적인 발상과 능력.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고위계의 힘이 필요할 때 사용 전후 부담이 더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글렌의 심장 여러개를 금술로 바쳐서 8레벨의 환술사로 작전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위계를 멋대로 주무른 후유증과 전투에서 축적된 부상은 고스란히 광대의 몸에 남아 있던 상황.
광대는 바로 그 후유증을 덜어내기 위해 이 도박과 유흥의 도시에서 당겨썼던 운의 총량을 섬세하게 조절하고 있었다.
“무작위에 가까운 확률을 최대한 연속시행하며 행운의 빈도를 조정하는 겁니다.”
도박처럼 운을 시험하는 행위를 반복해서 손에 들어오는 행운과 불운의 균형을 조정한다.
그것은 위계를 8레벨까지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억지로 행운만을 끌어올려 기아스의 능력을 조정했던 밀림에서의 일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
주사위의 눈금을 강제로 조정해 위계를 끌어올렸던 억지 ‘행운’을, 통상적인 도박을 통해서 ‘불운’을 통해 균형을 조절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뺨을 쓱 문지르자 떨어지던 피가 멎고 광대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물론 이 정도로도 모든 후유증을 덜어낼 수는 없지만…… 순순히 부작용을 안고 뒈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느닷없이 도박장 한쪽 구석으로 고개를 돌린 광대가 씩 웃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 기이한 태도.
하지만 아그네타는 그런 광대의 돌발행동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역시 잘 모르겠네. 아무튼 인간의 감성을 한참이나 벗어난 추악한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거지?”
“빌어먹을, 그렇게 섬세한 조작계통의 마법을 다루면서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광대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허수차원에서 줄타기를 해대는 균형감각이 속세의 상리에는 어둡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러니까 단장이 당신을 제멋대로 풀어두고 있는 걸 테지만.”
“무슨 소리야?”
“별 거 아닙니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광대가 품안에서 트럼프 카드를 꺼내들고 자리가 난 도박판에 앉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놀랍게도 같은 테이블에 앉은 플레이어들 중에 그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광대를 신경쓰기는 커녕, 죄다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기도하고 약을 빨며 자해를 하기 일쑤.
충혈된 두 눈은 쉴새없이 테이블과 전광판의 배당을 오간다.
이런 혼란과 광기의 한복판에서 광대가 아그네타와 대화를 지껄여봤자 맨정신으로 그걸 듣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딜러가 던져주는 카드를 받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미리 준비한 카드로 교체.
순식간에 풀 하우스를 완성해 내려놓은 광대의 귓가에 들려오는 아그네타의 대답.
“단장의 흔적을 찾았어.”
칩을 밀어 넣던 광대의 손이 잠깐 멈췄다.
“……흔적 말입니까?”
“허수차원에 다녀간 발자취를 발견했어. 아마 내가 발견해 줄 거라 생각하고 좌표를 찍어둔 거겠지.”
“흠…….”
고민에 잠긴 척 하며, 서슴없이 바로 옆에서 손가락을 물어뜯는 추레한 남자의 칩을 갈취한다.
순식간에 보유한 칩의 절반을 털린 남자의 손가락은 이미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연락을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접촉은 필요했다?”
“박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고민해 볼 필요는 있겠군요. 대륙 전역에서 지금처럼 동시에 진행되는 계획이 많은 적이 드물었는데, 하필 이 시기라…… 명은 뭐라고 하더랍니까?”
그 순간, 테이블 위의 칩 하나가 튕기듯이 허공 위로 솟아올랐다.
칩의 움직임을 따라 저편의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린 광대가 헛웃음을 지었다.
전광판의 스크린 한구석에서 떠오른 속보, 이름 모를 도시 한복판에서 거대한 암흑의 기둥이 터져 나오는 광경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손패를 던진 광대가 중얼거렸다.
“뭐, 연락이고 나발이고 그럴 상황도 아니겠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저도 이쪽에서 관련 정보를 좀 수집해 보죠.”
“그럼 난 가볼게. 레야한테 안부 전해줘.”
“잠깐, 그것보다 빅터라는 술사의 이야기도 궁금한게 아니었습니까?”
기척이 사라지려는 아그네타를 불러세운 광대가, 손안에 든 칩을 느긋하게 흔들었다.
“저랑 포커 한판만 같이 해주면, 그때 있었던 일을 아주 재밌게 풀어줄 수 있는데요.”
“……내 운도 빼앗아갈 생각이야?”
“그러니까 그런 느낌이 아니라니까요?”
투덜거린 광대가 이내 가볍게 웃었다.
“뭐, 그래도 당신처럼 특이한 존재랑 도박을 하면, 그만큼 조정이 빨라지는 것도 사실이라.”
“…….”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당신과 같은 조작계통의 술사였지요.”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는 기척을 인지한 광대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길게 치솟았다.
구체적인 사정은 모르겠지만, 단장이 남긴 흔적만큼이나 빅터의 존재가 그녀의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잘만 구슬린다면 의외로 꽤 재미 있는 이야기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
순식간에 카드를 모아 쥔 광대가 느긋한 손짓으로 트럼프 카드를 흔들었다.
“세판 정도만 같이 어울려준다면 그 친구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들려줄 수도 있는데요?”
* * *
그리샤는 광활한 극동지부 신전 안을 걷고 있었다.
쌓아 올린 성세와 위상답게, 섬의 중심에 위치한 수정궁의 형태는 실로 장대했다.
격렬한 전투로 많은 곳이 불타 무너져내렸음에도 규모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막대한 수준.
자치령에서 뒤늦게 도착한 다른 주시자들이 바쁘게 오가는 복도 사이를 걷던 그녀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드레퓌스.”
널찍한 복도 창가에 기대어 선 채, 말없이 궁 아래쪽을 바라보는 부적탈을 쓴 술사.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다소 피곤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지만, 그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군.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게 좋아 보이는데.”
갑선이 힐끗 그리샤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섰다.
“사실상 이번 일에서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많은 손해를 입었겠지.”
[에반이 아니었다면 시작조차 불가능했던 일이지.]어딘가 피곤한 목소리로 갑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신전에 잠입해, 결계를 뚫고 연락을 취할 방도를 찾아냈소. 내가 한 일은 이번 일의 전말을 알려준 것뿐.]그리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라피스의 공능을 보조해 우리를 이 섬에 당도하게 한 것 역시 당신의 힘이야.”
갑선은 레녹에게 건네받은 제어코드를 이용해 대결계에 구멍을 내고 라피스와 연락을 취하는 데 성공했다.
라피스는 갑선의 연락을 받은 시점에서 곧바로 강력한 주시자들을 증원하기로 결정.
드레퓌스는 라피스의 공능과 자신의 부적술을 합쳐, 그리샤와 라이자를 비롯한 몇몇 주시자들을 단체로 공간전이시키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교단 조차도 인신공양을 통한 사도술식을 통해 간신히 사용가능했던 대규모 공간전이.
등대지기의 공능을 기반으로 시도했다 하더라도, 갑선이 그러한 위업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8레벨에 도달한 극위능력자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대놓고 공간을 조작하는 것은 본신 동력을 뿌리부터 갉아먹는 자살행위.
그런 일을 벌이고도 곧바로 전투에 참가하여 여러 대행자들을 상대했으니 그 반동이 얼마나 심할지는 뻔한 일.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지만, 체내는 그야말로 타들어가는 실정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라피스도, 당신도 많이 무리했다는 거 알아. 당분간 그쪽에게 정식 작전이 할당될 일은 없을 거야.”
[…….]“원한다면 굳이 이 섬에 남아 뒤처리를 돕지 않아도 좋아. 따로 생각해둔 행선지가 있나?”
[……있지.]갑선이 대답했다.
“…….”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그리샤는 그런 갑선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피식 웃었다.
“저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군.”
궁 안뜰에 위치한 호숫가, 정원 아래쪽에서 그녀에게도 친숙한 다섯 명의 주시자들이 서로 투닥거리고 있다.
두 쌍둥이와 래퍼드, 라이자와 에반까지.
다섯이서 뭐가 그리 열심인지 쉴 새 없이 마력을 주고받으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동조 술식 없이는 안정화 상태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해. 이걸 배워봤자 큰 도움은 되지 않을걸.”
“두 사람이 괜찮다면 일단 마력흐름이라도 확인해두고 싶군.”
레녹이 붕대를 감은 어깨 부근을 매만지면서 대답했다.
“초융합 술식에 흥미가 있다.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두려고 하는데.”
이중공명 복합계통 고유술식 [초융합(超融合)].
성위급에 머물러 있는 두 사람을, 완성된 극위능력자로 만들어주었던 고유술식.
전투에 참가했던 주시자들끼리 모여 휴식을 취하는 며칠 동안에, 레녹은 쌍둥이들에게 융합 술식을 배울 수 있는지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온갖 신비를 마주해 온 레녹으로서도, 위계 자체에 간섭하는 술식을 직접 목격한 것은 다섯 번도 되지 않는다.
위계 자체를 속이는 광대의 환술은 레녹이 시도하기에는 지나치게 도박성이 짙고 안정성이 떨어졌지만.
쌍둥이가 사용하는 초융합은 조건과 위험성이 비대할 뿐, 배워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적합한 조건과 상대를 찾는다면 레녹 본신의 위계나 힘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이 될 터.
레녹은 그것을 생각하고 피오와 지오에게 초융합 술식의 원리를 가르쳐줄 수 있는지 묻고 있던 것이다.
“초융합 술식 자체가 두 사람의 비전이라기보단, 두 가지 계통의 조합으로 빚어낸 토대에 가까워 보이더군.”
레녹이 물었다.
“융합을 통해 더 높은 위계의 변이와 동조 술식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 그것이 너희 두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겠지?”
만약 초융합 술식 자체가 변이와 동조계통 각자의 비전이나 극의였다면, 레녹이 섣불리 그것을 묻는 일도 없었을 터.
다만 술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융합이라는 결과를, 변이와 동조를 통해 구현한 원리 자체를 레녹은 알려달라 말하고 있던 것이다.
제아무리 특이하고 이질적인 술식이라 하더라도 원리나 이론 면에서는 다른 계통과 호환되는 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변이와 동조 두 가지 계통의 정수를 뽑아 만든 초융합 술식은, 그 자체만으로 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할 터.
레녹은 초융합 술식에 대한 이해를 통해 쌍둥이가 다루는 술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해둘 생각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려주지 못할 건 없지만…….”
피오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시연은 못 해. 알고 있지? 이건 우리도 사용할 때마다 굉장히 운에 맡겨야 하는 도박이라고.”
“흥, 그런 반쯤 요행에 기대는 술식을 사용하니 더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라이자가 콧김을 훅 내뿜으며 말했다.
“에반, 차라리 내 결정화 능력을 배워가는게 어떠냐!! 너처럼 약한 마법사에게는 이런 능력을 배우는 것 만으로 큰 도움이 될 터!!”
“라이자, 제정신인가?”
호숫가에 앉아 조용히 기도문을 읽고 있던 래퍼드가 고개를 돌렸다.
“네 능력은 애초에 기술적인 영역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아니잖나. 설마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알아야 하나?”
“…….”
“애초에 왜 초융합 술식을 배우려고 하는 거냐?”
살짝 무심한 표정의 지오가 물었다.
“이건 네 생각과는 달리 마냥 유용하거나 강력한 술식은 아니야. 혼자선 끝내 해결할 수 없던 한계점을, 우리 둘이 가능한 방식으로 뛰어넘은 것뿐이지.”
“음.”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고, 그럼에도 시도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지. 너 정도 되는 수준의 마법사라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육체변이와 심신동조, 변화와 안정이라는 양면의 모순을 극한까지 추구해서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경계선.
쌍둥이라는 선천적인 조건,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계통의 술식을 7레벨까지 익혔다는 기적.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위계를 뛰어넘겠다는 강인한 결의까지.
환경과 재능,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흔들림없는 믿음을 지니고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녹이 괜히 그들에게 융합 술식에 대한 원리를 들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다.”
“뭐가 말이지?”
물끄러미 호수를 돌아본 레녹이 말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뛰어넘어야 하는 한계점이, 내게도 있다는 말이지.”
“…….”
레녹의 담담한 말에, 주시자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래퍼드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너 같은 재능을 가진 마법사도 그런 고민을 하는군.”
“그러게. 이건 좀 의외인걸.”
라이자가 웃으면서 레녹의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난 솔직히 이번 작전에 참가하면서, 승천자들이 인간 시절에는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는데 말이야!!”
“…….”
“어라, 아무도 그 반박 같은 거 안 해주나……?”
떨떠름해진 라이자의 얼굴을 보며 레녹이 말없이 얼얼해진 어깨를 주물렀다.
“술식 자체의 가치나 전수의 위험성이 상당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 두 사람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아니. 상관없다.”
지오가 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동생이 네게 목숨을 빚졌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기본적인 요령과 마력흐름은 전수해 주겠다.”
“이 새끼가 또 은근슬쩍 형인 척하려고…….”
피오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군말없이 지오와 함께 초융합 술식에 대한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중요한 건 마력흐름을 2의 3배수, 즉 8방위로 두고 융합에 필요한 두 사람의 마력을 각자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관조하게 하는 거야…….”
“합일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안정과 회귀를 고려해야 해. 그걸 위해선 반드시 서로 다른 마력흐름의 원본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무슨 소리인지 들어도 전혀 모르겠군.”
그나마 관심 있게 듣고 있던 래퍼드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설명.
“이쪽 계통의 술식을 익히지 않았다면 단어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너랑 라이자는 애초에 기억도 못 할 테니까 괜찮지.”
“……칭찬 아니지?”
주시자들끼리 투닥거리는 사이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겠군.”
“엥, 벌써?”
“그럼 곧바로 시험해 볼까.”
레녹의 파격적인 선언에 다른 쌍둥이들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누구랑? 설마 이 자리의 다른 주시자들이랑 그걸 해보겠다는 건 아니겠지?”
“진정해라, 적어도 자신과 비슷하거나 호환되는 계통의 술식을 익힌 상대가 아니라면-”
“걱정하지 마라. 생판 타인과 그런 걸 시도할 만큼 미치지는 않았으니까.”
우우웅!!!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떠올라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래퍼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개머리거인의 두 눈이 보기 드물게 부릅뜨여 있었다.
“화, 화신……!!! 도대체 언제부터!!”
“이번 작전에서도 그렇고, 항하사미궁에서도 한번 보여준 적이 있었지.”
레녹이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웃었다.
“두 번이면 흉내 내는 것 정도는 충분해.”
물론 지금 레녹이 만들어낸 것 자체가, 래퍼드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제대로 된 화신은 아니다.
또 하나의 자신을 가리키는 진정한 아바타(Avatar)라기보다는, 마력을 기화시켜 의념으로 붙잡아 구현해낸 영체의 일종.
마드리치 오니온과의 결전을 통해 강령과 군령술의 감각을 체득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고작 이것만으로도 레녹이 원하는 실험을 해보기에는 충분했다.
“……미쳤군.”
래퍼드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화신과 융합을 시도한다는 건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신이든 영성이든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서슴없이 왼팔을 걷어붙이고 내밀었다.
제대로 완성된 화신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든지 없애버릴 수 있다.
융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레녹 자신에게도 유효한지 안전하게 실험해 보기에는 더없이 적합할 터.
동시에 등 뒤에 떠오른 화신의 왼팔과 함께 레녹의 몸이 겹쳐지듯 결합하고.
파아아앗!!
그 순간 호숫가에서 눈부신 광채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