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54
약먹는 천재마법사 554화
실패의 끝에서부터(1)
카이세의 단호한 말에, 그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희미한 코웃음이 울려 퍼지며 유령함선이 천천히 발전소의 하늘을 지나쳐 사라졌다.
동시에 흐릿한 안개가 끼었던 하늘이 걷히며, 다시 맑은 햇살이 내려오기 시작하는 모습.
카이세의 말대로 그들을 찾기 위해 라마할 구역 일대로 힘을 퍼트릴 생각이겠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카이세의 어깨를, 어느새 다가온 길레온이 부축했다.
“혈청, 얼마나 뽑아낸 거지?”
길레온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작업을 끝내자마자 너무 무리했어. 컨디션이 돌아올 때까지는 쉬는 게 좋겠군.”
카이세는 그런 길레온의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웃으며 그의 등을 가리켰다.
레녹의 극번을 막아내며 완전히 녹아버린 한쪽 날개의 형상.
“너야말로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더 날 수 있겠나?”
“어렵겠지.”
길레온이 담담하게 수긍했다.
“하지만 한 쪽만 남아 있어도 이능 발현을 보조하는 데는 문제 없다. 작전에는 문제없이 참가할 수 있어.”
“망가진 날개는 떼서 이쪽에 넘겨. 연구가 진행되는 사이 한번 고쳐보지.”
“일단 발전소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할 텐데…….”
“내가 맡겠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맥퀸이 말했다.
이리야와의 전투로 만신창이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몸을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는 수준이다.
“맥퀸. 방법이 있나?”
“내 소환수의 능력을 이용하면 일대 구역에 감각권을 확장시키는 건 어렵지 않지.”
길레온의 반문에 맥퀸은 자신이 불러낸 거대한 석상 소환수를 돌아보았다.
“다만 그렇게 되면 해방술식의 용량 대부분을 탐지에 돌리게 된다. 전투에는 거의 도움을 줄 수 없을 테니, 알아서 하도록.”
그 말과 함께 맥퀸의 등 뒤에서 서 있던 석상이 송전탑을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송전탑의 꼭대기에 올라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석상이 다각도로 뻗은 여러 개의 팔을 활짝 펼친 채 눈을 감는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석상을 중심으로 퍼져나온 노란빛의 정광이 파문처럼 발전소 밖으로 퍼져 나갔다.
석상이 올라탄 송전탑의 아래 앉아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한 맥퀸의 모습.
발전소 시설 감시에 전력을 다하는 것과는 반대로, 외부의 습격에는 완전히 무방비해 보인다.
그런 맥퀸을 바라보는 길레온의 등 뒤로, 웃음기 어린 올리비에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르덴은 원체 이런 자리에서 나서는 성정이 아니지.]“…….”
[네게 빚을 졌다고 느끼고 있는 모양이군.]“도움을 받은 건 저자만이 아닐 텐데. 결과적으로 날개 한쪽이 망가져 버린 건 당신을 보호하려다 생긴 일이다.”
[아, 쓸데없는 짓이었지. 날 보호하는 대신 그 마법사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데 집중하는 게 좋았을 텐데.]길레온이 담담한 말에 올리비에라가 고개를 저었다.
[직접 상대해 본 건 잠깐이지만, 폭발적인 마력과는 달리 몸의 심지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접근전에서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베일 아래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듯이 중얼거리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자신이 한번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대한 어떠한 감상이나 소회조차 없다.
누구도 모르는 구명의 방법이나 비책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도 그것을 반기는 광인의 자세인가.
길레온은 결국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날 선 대화를 지켜보던 카이세가 피식 웃었다.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마, 올리비에라. 부상을 입은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흠. 보고 있었느냐?]“자성영역까지 꺼내 쓰고도 그 정도 타격이라면, 그만큼 전투가 아슬아슬했다는 말이겠지.”
카이세가 고개를 흔들었다.
“심장 같은 중요 장기에 혈청을 사용했으니, 한동안 반동이 심하게 올 거다. 잘못하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
그녀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가 쌓아 올린 영역과 술식은 초월적인 위력을 자랑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파훼되고 무너졌을 때의 반동 역시 심대한 법이다.
카이세는 올리비에라의 영역이 어떤 식으로 폭주되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반동이 결코 올리비에라에게 사소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혈액으로 만들어진 혈청을 심장 같은 장기에 들이부은 만큼, 올리비에라의 컨디션 역시 마냥 멀쩡하지는 않을 터.
회복력의 저하나 피로감보다도 혈액의 거부반응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카이세가 차가운 눈빛으로 길레온에게 눈짓했다.
“발전소 안쪽에 아직 멀쩡한 숙소가 있겠지. 길레온, 그녀에게 쉴만한 장소를 안내해 줘.”
올리비에라는 길레온을 뿌리치고 서슴없이 카이세를 지나쳐 걸었다.
베일 사이로 카이세만 들을 수 있을 만큼 희미한 전성이 울려 퍼졌다.
[그 마법사가 어디에서 왔는지, 네놈은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매 순간 마모되어 가는 건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카이세를 향해 고개를 돌린 베일 안쪽으로 마안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고 감춰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 마법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해도 상관없지. 하지만 프로젝트만큼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걸 기억해 둬라.]올리비에라가 말했다.
[그건 계약이야. 우리의 운명을 저울추에 올려놓은 악성계약이지.]“알고 있어.”
[그래?]베일 사이로 그녀가 공허한 조소를 짓는 듯했다.
[사실 난 아직도 잘 모르겠군.]외마디 전언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방금 전 마법사와의 전투로 큰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한데도, 길레온조차 그 행적을 짐작하기 어렵다.
맥퀸 역시 제 주인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녀를 보필하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경계에 집중하려 했던 것일 터.
카이세는 담담한 기색으로 녹아내린 발전소 공터의 정경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연구 데이터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고 복구할 거다. 그 사이에만 발전소 안에 침입자가 들어오지 않게 막아주면 충분해.”
“알았다. 지금쯤이면 작전에 참가한 마지막 멤버도 돌아오고 있겠지.”
길레온이 칙칙한 눈동자를 들어 대답했다.
“그 남자까지 복귀하고 나면 외부의 습격을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을 거다.”
“아니, 그 쪽에게는 따로 맡겨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따로 맡겨야 할 일이라고?”
카이세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연구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이제 알 것 같거든.”
* * *
반쯤 무너져 내린 아파트 건물 안쪽.
그나마 멀쩡한 호실을 찾아낸 펠릭스가 문고리를 비틀자, 단단한 금속 손잡이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철컥!!
“여긴 괜찮은 것 같군.”
펠릭스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어깨에 들쳐메고 있던 레녹을 무너진 소파 옆에 내려놓는다.
레녹은 펠릭스의 어깨에서 내려오자마자 품 안에서 빠르게 약을 꺼내 씹어 삼켰다.
“쿨럭, 쿨럭……!!”
각성제와 진통제를 병합해 빠르게 전투의 부작용을 덜어내기 위한 작업.
올리비에라와 싸우며 소모했던 마력과 기력은 가감 없이 레녹의 유약한 신체에 돌아오는 타격이 된다.
억지로 누르고 있었던 폐해를 수습하고, 고통을 덜어내는 사이 코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붉게 물드는 앞섶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빠르게 응급처치에 몰두하는 레녹의 모습.
펠릭스와 이리야는 그런 레녹을 괴로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반. 내가 어리석었어.”
기침을 해대는 레녹의 등을 조심스럽게 받쳐 든 새머리거인이 말했다.
“너와 떨어진 순간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발전소로 뛰었어야 했다. 부상을 입은 네게 가장 막중한 업무를 맡기고, 헛짓거리만 하고 있었다니…….”
“아뇨, 마가트 님. 이건 제 불찰입니다.”
이리야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반 님이 벌어주신 시간에 카이세를 상대로 유의미한 수확을 거두지 못했어요. 반드시 그의 신병을 확보했어야 했는데…… 너무나 큰 실책입니다.”
“쿨럭……!! 서로 고해성사라도 하자는 건가……?”
레녹이 피식 웃으며 코피를 닦고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레녹의 몸을 펠릭스가 단단하게 부축해 세웠다.
“휴식을 취해야 해. 마력이 지금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야.”
“시간이 많지 않아.”
레녹이 중얼거렸다.
“저쪽의 전력이 정비되기 전에 이쪽이 먼저 태세를 수습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피폭현상을 해결하기는커녕, 이쪽이 오히려 저들에게 추살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작금의 기이한 현상에 대한 열쇠를 카이세가 쥐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상, 이쪽은 어떻게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레녹은 한 번의 실패만으로 카이세와 직접 대면할 기회를 이대로 날려 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태로 다시 한번 발전소로 향하겠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있겠나?”
“…….”
할 말을 잃은 펠릭스를 오히려 레녹이 이상하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그랬으면 거기서 도망쳐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내가 말하는 건 완전히 다른 부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아즐란 님을 찾겠다고 말했었지.”
“결백을 찾아서 상황을 알려주는 것뿐만이 아니야. 그것만큼이나 빨리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
“무슨 뜻이지?”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아파트는 은신처로 삼기에는 너무 조건이 안 좋아. 여기서 오래 쉬었다가는 금세 발각당할 거다.”
펠릭스가 힘으로 반쯤 뭉개놓은 현관문을 밀어젖힌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지. 저 유령함선이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마드리치 오니온의 것이라면, 생각나는 적당한 장소가 있어.”
일행은 곧바로 짐을 챙겨 들고 아파트를 나왔다.
거리 곳곳에 가득 들어찬 음습한 한기. 귓가를 아른하게 울리는 귀곡성이 피부 위로 소름이 돋게 만든다.
마드리치 오니온의 군령술식이 구역 전체를 범위에 두고 탐색을 시작했다는 증거.
하지만 레녹은 곳곳에서 느껴지는 군령들의 기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번화가 외곽에 위치한 작은 수족관의 모습.
텅 비어버린 수족관에는 종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수종생물들이 수조 안쪽을 헤엄치고 있을 뿐이다.
펠릭스 역시 이런 장소를 은신처로 잡은 것은 처음인지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이곳으로 괜찮겠나?”
“마드리치 오니온의 군령술식은 물길 안쪽에서 그 영향력을 인지하기 어렵더군.”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드루이드의 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아마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전직 대법원장의 은신처가 바다 아래쪽 깊숙한 비처에 숨겨져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군령술사 본인의 힘이 물길 아래서는 어느 정도 차단되어 감춰질 수 있다는 증거.
그렇다면 마드리치 오니온이 다른 이들을 찾을 때도, 물길 반대편에 위치한 이들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기척을 감춰주는 부적과 아예 기척 자체를 다른 생명의 것으로 치환시켜주는 닉스의 휘장.
두가지 아티팩트를 중심으로 간단한 결계진을 그리고, 수족관을 에워싸 법진을 구축했다.
후웅……!!
따스한 온기가 불어오는 것과 동시에 어두웠던 수족관의 풍경이 희미하게 밝아진다.
펠릭스와 이리야가 그제서야 수조의 벽에 기대어 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후우…….”
레녹을 신경 쓰느라 억지로 집중을 붙들고 있었지만, 아까의 격전으로 그들 역시 적지 않은 체력과 마력을 소모한 상황.
고위계 초인들의 전투에서 세 사람 모두가 목숨을 부지해 탈출한 것이 기적이나 다름없다.
“살아 돌아간다면……. 방금 사용한 아티팩트 값은 확실하게 지불하겠습니다.”
결연한 이리야의 말에 레녹이 피식 웃었다.
“불길한 소리를 하는데 재주가 있군.”
“이런 때에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이리야에게 핀잔을 준 펠릭스가 레녹의 눈치를 보며 슬쩍 헛기침을 했다.
“흠흠, 물론 나도 값을 지불하지 않겠단 건 아니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디까지나…….”
“발전소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쓸데없는 펠릭스의 말을 끊고, 레녹은 자신이 어떻게 카이세를 만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카이세와 나누었던 대화, 시공간 연구가 가리키는 목적과 올리비에라의 등장까지.
한껏 집중한 표정으로 레녹의 말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아연하게 변했다.
“시공간의 영역 자체를 고정시켜, 실험을 위한 테스트베드로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야말로 인간의 상리를 뛰어넘는 발상이로군요.”
“이번 작전이 아니었다면 정신병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흘려넘겼겠지.”
펠릭스가 괴로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의 말을 지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폐해까지 이 구역에 고스란히 보존해두었어. 실로 악독한 처사로군.”
“악독한 처사라…….”
레녹이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이리야가 다시 말했다.
“카이세 바쥬르가 사용하던 힘은 제가 겪었던 어떤 이능보다도 독특하고 기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체감시간에 손을 댈 수 있더군요.”
“…….”
“그 이능에 당해 카이세의 신병을 확보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이리야의 말을 듣고 있던 펠릭스가 머리를 짚었다.
“부상이 그 자리에서 시간을 역행해 회복되었다고? 이미 인간조차 아니로군.”
“본신 위계 자체는 성위급에 가까워 보였습니다만, 그 마력과 육신은 위계의 범주를 뛰어넘어 있습니다. 어쩌면 프로젝트를 통해 이미 인외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카이세 본인이 지금 이 공간이 괴리된 시공간이라는 걸 이해했다는 거다.”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연구가 성공한 시점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해, 그 과정에서 내 존재가 변수라고 가정하고 결론을 이끌어냈어.”
“그의 동료들도 이미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군.”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군요…… 어쩌면 지금 당장 구역을 탈출해 관리관에게 연락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폐쇄구역에 존재하는 과거의 초인들이, 자신들이 과거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 사건 자체가 그들의 손을 떠나 통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달았을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레녹은 그런 이리야의 말에도 한참 동안 생각하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속 생각해 봤지만 카이세는 아무래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어째서지?”
“돌이켜 보면 카이세가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하지만 우리가 상대한 이들 중에 시공간의 괴리를 눈치챈 이들은 없었지.”
“…….”
“거기다 지금 우리를 찾고 있는 군령들의 무리를 봐. 만약 마드리치 오니온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를 찾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까?”
서서히 표정이 변하는 두 사람을 보며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유령함선을 이끌고 폐쇄구역의 끝으로 달려나가, 괴리된 경계선을 직접 확인하려 드는 게 당연해.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카이세가 진실을 알릴 생각이 없다는 말이군요.”
레녹이 조용히 눈을 빛냈다.
“함께하는 조력자들에게도 말을 아끼고 있다면,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건 아마 틀림없이 우리의 존재 때문일 거다.”
“그 남자가 따로 우리와 접촉하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펠릭스의 말에 레녹이 조용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반드시 이쪽이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남겼을 거다.”
“반, 잠깐만…… 그건……?”
씩 웃으며 손에 쥔 무언가를 흔드는 레녹의 모습에, 다른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유리병 안쪽에서 찰랑거리는 선명한 적색의 혈액.
레녹은 카트에 담겨 있던 카이세의 혈청을 몰래 하나 빼내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