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53
약먹는 천재마법사 553화
과거의 괴물(5)
복도 한편에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펠릭스를 보며 카이세가 뒤로 손을 뻗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끌고 있던 수십 개의 유리병이 담겨 있던 카트.
붉은 혈액이 출렁이는 유리병을 꺼내든 카이세가 거침없이 그것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챙그랑!!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복도 바닥으로 퍼져 나가고, 펠릭스가 거침없이 혈액을 밟고 내달린 그 순간.
펠릭스의 다리 한쪽이 뒤로 휙 틀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거체가 그대로 한쪽으로 고꾸라졌다.
꽈아아앙!!
“……!!”
거인의 동체가 복도 벽면으로 빗겨나가 처박혔음에도, 펠릭스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단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것처럼, 굳은 눈빛을 빛내며 튕기듯이 뒹굴어 일어섰을 뿐.
다리 자체가 망가지거나 기능을 잃은 것이 아니다.
핏물을 밟은 그 순간 펠릭스의 다리가 시간이 역행하듯 강제로 뒷걸음질 치며, 균형을 박살 낸 것이다.
그리고 펠릭스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카이세 바쥬르. 시간을 직접 다룬다고 했지.”
부우웅!!
해머의 단면이 허공을 격하고 공기를 후려친 순간, 강력한 충격파가 카이세를 향해 터져 나왔다.
카이세 역시 곧바로 혈청을 하나 더 꺼내어 허공에 내던졌다.
챙그랑!!
허공에 혈청을 던져내는 것과 동시에 무위로 돌아가 흩어지는 충격파의 형상.
직후 카이세의 앞에 내려앉은 펠릭스가 양손으로 해머를 쥐고 그대로 내려찍었다.
“어딜……!!”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든 길레온이 철갑날개 한쪽을 밀어 넣고 해머의 참격을 받아낸다.
쿠우우웅!!!
해머를 가로막고 선 길레온과 철갑날개 뒤에서 말없이 펠릭스를 응시하는 카이세의 모습.
펠릭스는 그런 카이세를 향해 해머를 더욱 격렬하게 밀어붙이며 말했다.
“당시에도 규격 외라고 칭해지던 당신의 능력을 반이 직접 확인했다면 틀림없겠지. 그 힘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도 이제 알 것 같군.”
해머를 강하게 움켜쥔 새머리거인이 카이세 뒤쪽 카트를 향해 눈짓했다.
“방금 사용한 혈청. 당신의 혈액을 미리 추출해서 만든 물건이겠지?”
“호오.”
“특이한 마력이나 체질을 가진 능력자들을 몇 번 상대해 본 적이 있다. 대부분 자신의 혈액이나 체액을 매개로 하여 능력을 사용하곤 했지. 그때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오오……!!
부서진 복도 아래쪽으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을 정면으로 맞으며 펠릭스가 말했다.
“능력을 통제하기 힘들어, 미리 추출해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있더군. 그 피에 담겨 있는 술식적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겠지.”
“…….”
카이세의 피로 만들어진 혈청. 레녹 역시 그 의미를 깨닫고 올리비에라를 힐끗 돌아보았다.
스스로의 심장을 손으로 찌른 직후 그녀가 사용했던 알 수 없는 혈청. 연관 짓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이겠지.
카이세의 혈청에 담겨 있는 역천의 마력. 올리비에라는 그 힘을 사용해서 즉사에 가까운 치명상을 억지로 무마시켜버렸던 것이다.
‘아마 직전에 입은 부상을 중화시키는 용도로 사용한 듯한데…….’
그 범위와 효능이 어디까지인지, 카이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얼마나 먹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마스터, 네트워크 패킷 구조가 통째로 바뀌고 있어요. 회선 자체를 전부 갈아치우고 있는 것 같아요.]레녹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다비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진척상황 자체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실시간으로 방화벽을 늘려가고 있어서 소요되는 시간이……!!]“…….”
지금 이 시점에서 다비의 해킹을 눈치채고 대응해 올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무너지는 지반 사이에 선 레녹과 길레온의 철갑 날개 뒤쪽에서 카이세의 시선이 교차한다.
“역시, 고정장치의 네트워크를 흔들고 있는 건 네 힘이었군.”
카이세가 다소 창백해진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만들어낸 독립 네트워크 시스템을 짧은 시간에 이 정도까지 해킹해서 파고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현장에 나왔어.”
아까 전에 비해 확연하게 나빠진 낯빛. 어딘가 가빠 보이는 호흡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력.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카이세 역시 고정 장치의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무리를 했다.
저 혈청의 숫자를 생각하면 아마 단시간에 피를 대량으로 뽑아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세가 레녹의 추적을 피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레녹과 대면하고 있는 이유.
그건 카이세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응을 확인했으니 충분해. 일단 여기까지다.”
카이세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카트 손잡이를 쥐고 휙 넘어뜨렸다.
그 순간, 카트 안에 한가득 들어 있던 혈청 수십 개가 일시에 박살 나며 핏물 한 바가지를 그대로 흩뿌리고.
철갑날개를 뚫고 해머를 휘두르는 펠릭스의 온몸을 그대로 뒤덮었다.
끼기기긱……!!
마치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소음과 함께 펠릭스의 거체가 속절없이 뒤로 밀려난다.
하지만 해머의 단면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래의 마력이, 카이세의 마력에 저항하며 그 육신이 뒤로 역행하는 것을 막아냈다.
“후우우우……!!”
낮은 기합을 흘린 새머리거인의 목에 핏대가 서는 것과 동시에, 펠릭스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팟!!
순식간에 카이세의 등 뒤로 돌아간 펠릭스의 어깨가 사선으로 회전.
육중한 해머가 그대로 카이세의 두 다리를 박살 내고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찰나.
길레온이 망가진 철갑날개를 떼어 그대로 걷어차 펠릭스의 안면에 처박았다.
우드드득!!
철갑날개의 형상이 우그러지며 펠릭스의 어깨 근육 회전을 방해한 아주 잠깐 사이.
카이세가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혈청을, 그대로 자신의 목에 꽂아넣었다.
푸욱!!
“다음 분기점에서 보지.”
웃으며 중얼거린 카이세의 말을 끝으로, 바닥에 쏟아진 모든 혈액이 파도처럼 일어서 그 몸을 뒤덮고 회전한다.
직후 아슬아슬하게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해머의 형상.
뻐어어엉!
그 완력에 핏물이 터져나가듯 사방으로 비산했지만, 이미 그 안에 카이세의 모습은 없었다.
“……!!!”
그제서야 카이세가 혈청이 담긴 카트를 끌고 나온 것이, 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해서였음을 깨달은 펠릭스가 미간을 찌푸리고.
망가진 한쪽 날개를 바라보던 길레온이 입술을 깨물고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지반이 통째로 무너지며 레녹과 올리비에라 역시 깊은 싱크 홀 아래쪽으로 내려온 상황.
“올리비에라, 협조해라.”
한결 가뿐해진 기색으로 도포를 털고 있는 올리비에라를 향해 길레온이 빠르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발전소 안으로 용병이 진입하면 추살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럴 필요는 없다.]태연한 올리비에라의 대답에, 마찬가지로 그녀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던 레녹도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길레온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팔짱을 낀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시간이든 장소든 전부 공교롭게 되었어. 머리는 잘 굴렸지만, 운이 없었군.]방금 전까지 레녹을 향해 내보이던 살벌한 기세와는 상반되는 묘한 태도.
달라진 올리비에라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펠릭스가 거침없이 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미끄러져 들어서려던 그 순간.
복도 끝에서 터져 나온 샛노란 정광이 폭발하며 그대로 펠릭스의 몸을 밖으로 밀어내 버린 것이다.
콰아앙!!
동시에 복도 사이를 부수고 뛰쳐나오는 거대한 석상의 모습과 그 사이에서 활강하는 초진동 스피어의 형상.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맥퀸이 고성을 내지르며 그 너머에서 빠져나오고, 그 뒤를 맹렬하게 질주하는 피투성이 추적자의 형상.
두 자루 스피어 끝에 매달린 채 날아오른 것은 레녹과 펠릭스에게도 익숙한 여성이었다.
“이리야……!!”
“마가트 님!!”
거침없이 내리찍히는 석상, 아르주마르타의 주먹을 피해 내려앉은 이리야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여긴 지하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카이세를 찾아야 한다.”
저릿저릿한 손을 털어낸 펠릭스가 고통을 참는 기색으로 물었다.
“시간이 없어. 빨리 그의 신병을 확보하지 않으면……!!”
“파르덴 맥퀸과 싸우는 사이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리야가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기껏 반 님께서 직접 틈을 만들어주셨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주변을 돌아본 레녹이 빠르게 말했다.
“이리야를 찾았으니, 결백을 대신해 다음 지침을 내리지.”
“카이세를 찾으러 동력실 안으로 진입해 흩어지면 되겠군.”
“쉽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르주마르타의 등 뒤에서 걸어 나오는 파계승, 한쪽 철갑날개를 펼친 길레온,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마력을 내뿜는 초인들을 바라보던 이리야가 스피어를 움켜쥐고, 펠릭스가 해머를 추켜들며 자세를 낮춘 그 순간.
레녹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카이세의 신병을 확보하는 건 일단 미뤄둔다. 이쯤에서 물러나지.”
“……뭐?”
“반 님, 그게 무슨……?”
“저들의 반응을 봐. 지금 저 모습이 우리와 사생결단을 내려는 이들의 것으로 보이나?”
레녹이 올리비에라의 모습을 보며 피곤한 기색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시간을 끌고 있다. 지금의 구도를 단숨에 뒤집고도 남을 만한 강력한 변수가 있는 거겠지.”
“변수 말인가?”
“아마 카이세의 작전에 참가한 과거의 괴물은, 저들뿐만이 아니라-”
사아아아악!!!
당황한 펠릭스와 이리야의 머리 위에서, 문득 싸늘한 한기가 내려와 주변을 빈틈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귀신들의 절규.
맑았던 한낮의 하늘 사이로 칙칙한 안개가 끼고, 알 수 없는 원혼의 형상이 사방에서 날아다닌다.
발전소 근처에서 갑작스레 뒤바뀌는 환경변화에 펠릭스와 이리야 모두 레녹이 어째서 이렇게 서두르는지 깨달았다.
카이세의 명령을 따라 발전소 밖을 경계하고 순찰하던 초인전력이 본진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 카이세를 찾아 발전소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오히려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
레녹의 말대로 당장 탈출해서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한다.
품안에서 낡은 연필 자루 두개를 꺼낸 레녹이 펠릭스와 이리야에게 그것을 던졌다.
“카이세가 이쪽의 계획을 막기 위해 상당히 무리를 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충분하다. 일단 물러나서 소모된 전력을 보충하고…….”
품 안에서 대천사의 연민을 꺼내 든 레녹이 그것을 양손으로 쥔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폐쇄구역 외곽을 돌며 크로드 아즐란을 찾는다.”
사용자를 강제로 공간전이시켜 대피하게 만들어주는 긴급탈출 아티팩트, 에낙필의 다섯 손가락.
하지만 펠릭스는 이것을 받아들자마자 고개를 내저었다.
“반, 이런 물건을 8레벨의 극위마법사 앞에서 사용하는 건 자살행위야. 우리 모두가 산채로 공간마찰에 갈려나갈 거다.”
8레벨의 마법사, 올리비에라와 공간을 박리시키는 이능을 지닌 길레온 앞에서 이런 아티팩트를 사용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에낙필의 다섯 손가락으로 이 자리에서 탈출하려는 세 사람을 굳이 막을 필요도 없다.
공간 전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에 개입해 방향을 틀어버리기만 해도 세 사람의 육신은 엄청난 마찰열 속에서 증발해 버릴 터.
하지만 레녹은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었다.
“저쪽의 간섭은 내가 막을 수 있다. 신호를 줄테니 준비해.”
“뭐……?”
레녹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후우웁……!!]동시에 품 안에서 끙끙거리던 다비가 양 볼을 가득 부풀리더니, 정령의 몸에서 눈부신 마력을 토해내고.
고정 장치가 위치한 지하 동력실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
다비가 미리 뚫어놓은 방화벽 내부 네트워크 일부를 과부하시켜 접합부 기능을 마비시키고.
동시에 동력실의 시설 전력을 모조리 끌어와 장치에 끌어넣어 장치의 전력을 폭주시킨다.
지반 아래쪽에서 터져 나오는 불길의 형상에 레녹을 주시하던 과거의 초인들의 안색이 확 바뀌고.
고정장치가 망가지며 터져 나오는 공간붕괴의 파동 사이로, 펠릭스와 이리야가 에낙필의 다섯 손가락을 심장에 꽂아 넣었다.
“어딜……!!”
길레온이 빠르게 능력을 발동시켜 세 사람의 도주를 막으려 했지만,
레녹은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품 안에서 오래된 나무염주를 꺼내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아아앗!!
등대지기 라피스에게 선물로 받았던 유물, 정토신해진언.
천견이 사용하던 유물이자, 공간을 격리시켜 멈춰 세우는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다.
길레온의 힘과 정토신해진언의 힘이 충돌하며 상쇄되어 버린 찰나의 순간, 세 사람이 그대로 공간을 뛰어넘어 발전소 밖으로 도약했다.
파아앗!!
“쿨럭!!”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지면을 나뒹군 레녹이 기침을 내뱉었다.
“시공간 괴리 현상을 푸는 데는 실패했나……?”
카이세가 다비의 해킹을 무리해가며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레녹은 고정 장치의 통제권을 억지로 쥐고 있기보단 그걸 통째로 망가뜨려 박살 내버리려 했다.
운이 좋다면 장치를 박살 내는 걸로 괴리 현상 자체가 풀릴 테고, 그게 아니어도 도망치는 순간 잠깐의 시간을 보태줄 수는 있을 터.
다만 이걸로 폐쇄구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해결하기는 무리가 있던 모양이었다.
이리야와 펠릭스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발전소의 하늘을 향했다,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장비를 챙겨 들었다.
한 손으로 가볍게 레녹의 목덜미를 잡아들어 올린 펠릭스가, 어깨에 그 몸을 걸치고 질주했다.
두두두두!!!
빨래처럼 펠릭스의 어깨 위에 내걸린 레녹의 몸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순식간에 그 안색이 창백해졌다.
“우욱, 펠릭스……!! 천천히……!!”
“반, 네 말이 맞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발전소에서 도망쳐야 했어.”
펠릭스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하며 미친 듯이 발전소에서 거리를 벌렸다.
“하늘을 봐라. 잠깐이라도 늦었다면 우리는 이미…….”
“…….”
그 말을 들은 레녹이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힘겹게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어느새 흐릿해진 발전소의 하늘 위로 일렁이는 원혼들의 파도.
그 사이로 희미한 파동과 함께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유령함선의 모습.
쿠오오오오!!!
새하얀 원혼의 안개 사이를 고고하게 헤치고 나아가듯, 허공 위에 떠오른 장대한 함선이 하늘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유한다.
배 위에 탄 무수한 군령들이 숨을 헐떡이며 노를 젓고 사슬을 당기다, 닻을 내리고 정지할 준비를 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그 실체를 실감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스케일.
레녹은 저 유령함대가 누구의 힘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레녹 자신이 직접 상대해서 최후의 순간 결착을 지었던 강적이자, 8레벨의 군령술사가 지니고 있던 권역, 망령쇄례한.
“마드리치 오니온이 돌아왔다.”
* * *
끼이이이……!!
음산하기 그지없는 소음과 함께, 칙칙하게 변해 버린 하늘.
길레온은 말없이 발전소의 하늘 위에 떠오른 유령함선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 내전에서 몇 번이고 목도했던 권역의 힘이지만, 군령술 특유의 음산한 기세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8레벨의 군령술사. 수천, 수백의 원혼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영계의 심판자.
마드치리 오니온이 사용하는 권역은 다른 술사들과 비교해도 그 외견만큼은 가히 압도적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끼이이이!!
하늘 위를 날아다니며 울부짖는 원혼들의 귀곡성.
기이한 음색으로 고통에 젖은 비명들이 다양한 화음을 걸치며 중첩되며, 이내 하나의 목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한심하기 그지없군. 가뜩이나 일이 바쁜데, 웬 버러지들에게 방해를 받고 있었던 게냐.]함선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나른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는 마드리치의 음성이 하늘 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세 놈은 어디있지? 이 지겨운 작전이 언제 끝나는지 내 직접 들어야겠다.]그 대답은 발전소 아래쪽 무너진 싱크홀과 지하복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벌컥!!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오니온.”
광활한 발전소 시설의 외곽 송전탑에 걸터앉은 카이세가,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동력실 근처 지하 복도에서 펠릭스와 사투를 벌이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
몸을 일으킨 카이세는 손에 수십 다발이 넘는 전선들을 빼곡하게 들고 있었다.
“시공간 고정장치 데이터 백업을 마치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말이야. 이제 장치를 재구성해서 시험결과만 복구하면 끝이다.”
“카이세……!! 아까부터 대체 뭘 하고 있던 거냐?”
맥퀸이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조금만 더 붙잡아둔다면 그 세 놈을 한 번에 생포할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여지를 준 건 네 대응 때문이 아니냐!!”
마드리치 오니온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버티면 이 자리의 전황 자체가 완전히 뒤집히는 구도.
카이세는 그걸 알면서도 술식을 사용해 전장에서 회피하며 상대에게 대처할 시간을 주었다.
조금만 시간을 더 끌며 오니온의 복귀를 기다렸다면 단번에 모든 소란을 수습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카이세는 그런 맥퀸의 말을 듣고도 찡그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작전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어. 저 마법사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아직 모르고 있군.”
“그게 도대체 무슨……!!”
“마법사가 왜 아직까지 남아서 시간을 끌고 있는지, 그 이유를 좀 생각해 봤거든.”
카이세가 연신 미약한 기침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시간이 끌릴수록 유리해지는 건 이쪽인데, 저들이 버티고 있다면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나?”
“…….”
“아니나 다를까 외부 개입을 막아놓은 고정 장치의 통제 시스템을 통째로 해킹해 들어오고 있더군. 올리비에라와 충돌을 각오하면서까지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거야.”
“……저 마법사가 전뇌공간의 조작에도 이미 통달해 있다는 말이냐?”
창백한 기색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른 카이세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 손으로는 막을 수가 없는 수준이라, 현상유지를 포기하고 아예 고정장치의 데이터 백업에 전념해야 했다. 마지막에 해킹이 시작되는 발원지를 마법사 본인의 몸에서 찾아내지 못했다면, 라마할 구역 전체가 정전에 빠졌을지도…….”
“…….”
할 말을 잃은 맥퀸을 뒤로하고, 카이세가 전선을 떨구고 그대로 송전탑 위에서 뛰어내렸다.
십수 미터 높이의 탑 위에서 가뿐하게 착지한 그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레녹이 사라진 방향을 턱짓했다.
“올리비에라와 비견될 만큼 강력한 무력. 발전소 시설에 개입이 가능한 독특한 전뇌간섭능력. 이게 모두 우연이라고 믿나?”
“…….”
[경지에 오른 전격마법 사용자였다.]팔짱을 낀 채로 그 말을 듣고 있던 올리비에라가, 얼굴 위로 베일을 다시 드리우며 말했다.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격의 개념을 넘어서, 전뇌의 조작에도 통달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바로 그거야.”
카이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간파하고, 공략에 특화된 능력자를 보낸 듯한 구도. 이게 가리키는 결론은 하나뿐이지.”
올리비에라의 무력에 정면으로 대치가 가능하면서도, 카이세의 연구를 돕고, 또 개입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지성과 직관을 지닌 마법사.
그런 재능과 역량을 동시에 보유한 괴물이, 수십 년 넘게 살아온 그들조차 처음 보는 상대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 마법사는 아마-”
카이세는 그렇게 말하려다, 이내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다, 중요한 사실을 앞두고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반이라는 이름이라고 했지.”
레녹의 정체와 비밀을 어느 정도 알아차렸으면서도, 결국 카이세는 그 사실을 다른 동료들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그 남자를 추적해서, 연구가 다시 완성되기 전에 내 앞에 데려와. 할 수 있겠나?”
[죽여서 데려와도 괜찮겠나?]고오오오……!!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폐허가 된 발전소의 정경.
침묵에 잠긴 네 초인들을 앞에 둔 카이세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상관없어. 그럼 고작 그 정도였다는 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