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06
약먹는 천재마법사 806화
승천자 도래(1)
거대한 옥좌의 좌석은 무척이나 넓어, 서로를 마주하는 거리조차 멀게 느껴지는 거리.
하지만 안개의 사슬에 묶인 승천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온몸이 먹물에 물든 듯이 새카만 피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 채 미동조차 없는 흑발.
옥좌의 곁에 자리한 촛불에 비친 얼굴은 의외로 금욕적인 인상이다.
새카만 마력에 뒤덮여, 검게 물들어 있음을 제외하면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표정.
파지직!!
잠들듯이 감긴 눈꺼풀 사이로 창백한 안광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당장이라도 긴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뜨고 레녹을 마주 볼 것만 같은 불길한 전조.
경악한 신녀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옥좌 끝에 서서 도래를 주시했다.
승천자 도래(到來)의 육신에 레녹의 화신체를 깃들게 한다는 비현실적인 발상.
하지만 레녹은 화신을 손에 넣은 시점에서 한 번쯤 시도해 볼 법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녹 자신의 가능성이 아니라, 구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권사의 화신.
이것이 누군가가 의도치 않게 남겨둔 힘이라면, 틀림없이 도래의 육신에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
그 추측대로 엄중하고 강대한 봉인에 둘러싸인 도래의 시체에, 화신체는 너무나 쉽게 접근했고.
이미 죽은 것이 분명한 승천자의 눈꺼풀을 조금씩 밀어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녀가 필사적으로 레녹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어찌 이리도 간단하게 그릇의 통제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겁니까……!!]“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성공한 건 아니다.”
레녹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승천자의 유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까. 이제 막 가능성을 따져보고 있는 수순이지.”
[……아뇨. 불가능한 일입니다.]신녀가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교단의 모든 성물은 본디 허락되지 않은 어떤 의지도 철저하게 배격하는 바. 아무리 귀하께서 그분과……!!]“그래.”
레녹이 피식 웃었다.
“그걸 확인해 보려고 지금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나.”
사망한 지 한참이 지난 승천자의 육체. 온갖 봉인에 갇혀 오랫동안 갈취당한 마력과 심상.
무간 내부의 봉인을 생각하면 성공할 가능성도 높지 않고, 성공한다 해도 그 힘은 온전한 승천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겠지.
하지만 그 너머에서 일말의 의미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레녹이 지닌 오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교주 본인이 강림했던 것이 틀림없는 승천자의 유해.
구세계의 흔적을 기반으로 삼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레녹의 화신.
완전히 같다고는 결코 말할 수는 없지만, 또 다르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그 모호한 공통점.
그것이야말로 레녹과 교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과 유사하지 않았던가.
[귀하께서는 결국…….]신녀 역시 그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듯, 복잡한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보던 그 순간.
새카맣게 침잠한 도래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조금씩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먹물에 배인 것처럼 새카맣게 물든 피부와 머리칼.
눈꺼풀 위로 창백한 안광이 번뜩이며, 머리칼이 새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근육질의 몸 곳곳에, 새하얗게 빛나는 복잡한 문신이 새겨지는 모습.
유의미한 외견의 변화와 함께, 도래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마력이 더욱 강대해졌다.
“…….”
레녹은 그런 도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유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옥좌 사방에 내려앉은 사슬을 넘어 다가서자, 주변을 맴돌던 도래의 마력이 기다렸다는 듯 레녹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릭!!
오랜만에 산 자의 육신을 만난 것처럼, 흑색의 마력이 로브 위를 들썩이며 파고들려 한다.
체내를 급격하게 고양시키면서도, 반대로 그 기반을 좀먹고 잠식하려는 듯한 섬뜩한 흉성.
승천자 도래의 마력. 펠릭스가 미련을 놓지 못하고 사용하는 광전사의 편린.
죽어 이곳에 안치된 뒤, 그 마력은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파지지직!!
백발이 된 머리칼을 흩날리며, 천천히 눈을 뜨려는 듯 표정을 찌푸리는 도래의 육신.
그 의지에 따라 온몸에서 창백한 문신이 발광하며 쉴 새 없이 번뜩인다.
도래의 육신에 깃든 레녹의 화신이, 그 육신 안에서 교주의 힘과 만나 반응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대로라면 레녹의 화신이 도래의 육신을 얻어, 이 세상에 새롭게 현신하게 되는 것일까.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찰나, 새하얀 문신이 더욱 격렬하게 발광하더니.
똑……!
도래의 손가락 끝에서 새카만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시간이 걸린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나?”
[……예?]신녀가 멍하니 반문한 찰나, 레녹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도약.
직후 물방울이 엄청난 속도로 크기를 부풀리며 레녹이 서 있던 자리에 내리찍혔다.
쾅!!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는데, 도래의 마력이 일어나 레녹을 공격하는 기이한 모습.
하지만 레녹의 시선은 도래가 아니라, 꾸물거리며 형태를 갖추는 응집체를 향해 있었다.
“소용없는 일이다.”
[……!!]사악!!
흑색의 도포를 두른 장년 남성의 모습.
도래의 마력을 통해 외형을 만들어낸 그는 옥좌 옆에 멈춰서 레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마력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이 육신에 손을 대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렇게 말한 남자가 손을 들어 도래의 어깨위에 내려놓았다.
레녹과는 달리 어떤 저항도 없이 그 손이 승천자의 시체에 맞닿았다.
“나조차도 적응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지.”
그 모습을 본 순간, 신녀의 영체에서 정체 모를 한기가 흘러나왔다.
이미 죽어 스러진 승천자의 시체라 하나, 저것은 분명 한때나마 교주가 사용했던 그릇.
레녹이야 그렇다 쳐도 정체 모를 영혼이 멋대로 손대고 있다는 사실을 참기 어려운 것이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도래의 육신을 힐끗 바라보았다.
여전히 도래의 육신은 창백한 안광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미약하게 눈꺼풀을 꿈틀거린다.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화신의 존재감을 확인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르타의 수뇌부 중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군.”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냉소한 레녹이 물었다.
“내 화신으로 인해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온건가?”
“…….”
도래의 몸 안에 화신이 깃들어 있음에도, 정작 밖에 드러난 것이 전혀 다른 영혼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누군가 이미 도래의 육신 안에 깃든 채, 그 통제권을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의미.
그리고 레녹의 화신에게 잠시 밀려나 나타난 이 영혼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진혼정의 관계자? 아니, 틀렸군.”
그렇게 물은 레녹이 곧바로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한참 전부터 무간 안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더 윗선의 존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틀린 말은 아니로군.”
남자가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영락한 군주들 중에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나 하나뿐이었으니.”
“……군주?”
“만귀야행의 의식을 집도하던 지도자들은 모두 야행 끝에 미쳐서, 하릴없이 영계를 떠돌고 있지.”
“…….”
“네가 손에 넣은 인도자의 반지 역시, 야행의 실패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행해진 실험의 일환이었다.”
레녹이 인도자의 반지를 획득하고, 그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었는지까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를 군주라 칭한 남자가 말했다.
“영혼을 인도할 수 없을 만큼 영락한 존재. 그렇기에 반지의 주인이 무간에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건만, 역시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는군.”
그렇게 말한 남자가 천천히 레녹의 등 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흐릿하게 빛나는 신녀의 영체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본 그가 중얼거렸다.
“설마 교단의 신녀가 야행 의식을 재개해, 영락한 자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 줄 줄이야.”
[…….]“그 신기가 하늘 끝에 닿았음은 익히 들었으나, 야행 의식을 직접 주관했다는 사실은 가히 경악스럽구나.”
남자가 신녀를 향해 물었다.
“우리가 승천자의 유해를 되찾으려는 것이…… 그리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더냐. 교리를 저버리고 저자를 도와줄 만큼?”
[되찾으려 한다니요. 그 말씀부터 잘못되었군요.]신녀가 차가운 전성을 내뱉었다.
[약속을 저버린 것은 요르타가 먼저일진대, 어찌 그것을 저희에게 묻는단 말씀이십니까?]“아니, 틀렸다. 도래를 무간에 숨겨두는 일을 제안할 때부터, 교주는 우리를 속이고 있었으니까.”
남자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는 만귀야행이 실패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행이 실패한 뒤 위령탑이 흔들리면, 무간의 성소 역시 도래의 힘에 잠식당할 걸 알고 있었지.”
[…….]평온하던 그 표정이, 마치 사람이 바꾼 것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진다.
“우리의 실패가, 그자의 안배에 잡아먹힐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거야.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단 말이다!!”
쿵!!
주변의 촛불이 세차게 일렁이며 당장이라도 꺼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격하게 흔들리는 진노로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만귀야행의 실패는 괴로운 일이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분에 넘치는 욕심이라는 건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
“하지만 그 실패조차 우리의 것이어야 했다. 처참하게 실패해도, 그것을 발판 삼아 다시 도전할 수 있어야 했어!!”
야행이 실패한 뒤, 무간의 존재가 도래의 마력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만귀야행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며, 도시의 힘이 충만해 있을 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겠지.
하지만 도전이 실패하고 도시의 근간이 흔들리자, 더 강한 힘에 그들의 결실이 잡아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교주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짐작하고, 요르타의 근간을 손에 넣기 위해 이 거래를 제안한 것일까.
그 사실을 얼마나 오랫동안 곱씹은 것인지, 감정의 변화가 널을 뛰는 듯하다.
그건 남자 역시 영락한 군주로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거칠게 소리를 지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한참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낡은 미신처럼…… 잊혀지고, 또 잊어가고 있지.”
[…….]“되찾아야겠다.”
남자의 두 눈이 전에 없는 격앙된 감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뚫어져라 신녀의 영체를 노려보며 그가 말했다.
“교주에게 빼앗긴 우리의 대답도, 도래의 힘에 잠식당한 이 무간의 성소도. 그가 남긴 이 저주받은 육신마저도……!!”
“교주가 너희를 농락했다 여기면서도, 정작 그가 남긴 안배에 도시의 명운을 걸고 있나?”
레녹이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감정에 휩쓸리는 것과는 별개로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희들은 교주에게 빼앗긴 대답을 되찾으려는 게 아니야.”
“……닥쳐라.”
레녹이 웃었다.
“단지…… 교단의 방식이 보다 정답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뿐이지.”
“닥치라고 했을 텐데!!!”
콰아앙!!!
대성당의 지면이 거세게 흔들리며, 사방에 자리한 촛불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충격으로 촛불들 중 일부는 불씨를 잃고 사그라들며, 의자 주변의 빛을 한층 더 희미하게 만들었다.
순수한 격분의 감정만으로, 무간 내부에서 관측되는 저주를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의지.
레녹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 역시, 한때는 분명 규격을 논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존재였겠지.
하지만 그런 괴물조차 시간이 흘러, 대답을 잃고 영락해 죽은 승천자의 시체에 매달리고 있다.
“이 세계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나.”
레녹이 조용히 물었다.
“착각하지 말았어야지. 실패할 기회조차 여러 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고 말할 셈인가?”
“…….”
“모든 것을 걸고 실패한 시점에서, 결국 다른 사람의 대답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거야.”
흑요석 가면 너머로 레녹의 시선이 도래의 시체에게 향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처럼 말이다.”
“……무어라 지껄여도 상관없다. 이미 모든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야행이 실패한 뒤, 나는 발칸과 거래를 해 프로젝트를 지켜보며 그 대답을 엿보았다.”
“…….”
“원하던 것은 손에 넣지 못했지만, 그들이 정의하는 실패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
키리리릭!!
레녹과 마주한 남자의 형체가, 그 자리에서 조금씩 새카만 연기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실패와 몰락조차 수단으로 삼아 의미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새카만 연기가 된 남자의 의념이, 다시금 천천히 도래의 유해 안으로 스며들었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주워먹으며 연명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텨서, 세계의 결말을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흩어지는 남자의 시선이 도래의 유해 안으로 완전히 빨려들어가기 직전.
레녹과 시선을 마주친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
사아악!!
귀신이 속삭이는 듯한 섬뜩한 기척과 함께, 남자의 신형이 도래의 유해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 직후, 축 늘어진 도래의 육신을 둘러싸고 거센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다.
콰아아앙!!!
레녹을 노리고 쏘아진다기보다, 무차별적으로 터져나와 아무렇게나 주변을 휩쓸어버리는 힘의 방사.
창백한 섬광과 흑색의 마력이 뒤엉켜서 승천자의 육신을 들쑤시고,
그 여파로 옥좌 사방에 묶인 사슬이 거칠게 흔들리며 성당 전역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쿠구구구구!!!
파도처럼 일렁이는 사슬을 점멸로 피해낸 레녹이 성당 내벽에 매달린 채로 중얼거렸다.
“내 화신을 밀어내고 육신을 완전히 손에 넣을 심산이군. 아까보다 반동이 훨씬 강해졌다.”
[……귀하.]“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계획이겠지. 승천자의 마력에 적응하는 과정을 한참 동안 수행해 온 것 같군.”
아마 저 자가 방금 레녹의 앞에 나타난 것은 온전히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겠지.
도래의 육신에 레녹이 화신체를 집어넣고, 육신의 통제권을 가져오려 한 순간.
그 반동으로 인해 마지 못해 밖으로 튀어나와 레녹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 터.
레녹보다 한참 전에 도래의 육신 안에 깃들어 있었으며, 유해를 차지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레녹은 영체가 유해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보단, 그 경과를 관찰하고 있었다.
“사망한 지 한참 지났다곤 하나, 9레벨에 도달한 초월자의 육신. 그 의념이나 마력의 독립성이 너무 강해 간섭하기 어렵군.”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체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새카만 마력을 응시했다.
“도래의 유해에 개입하려면 이 마력에 오랫동안 적응하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뚫어야 한다.”
9레벨의 초월자.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부여받은 도전자.
그 존재만으로 세계와 비견될 만한 격을 쌓아 올린 괴물들이다.
육신의 죽음으로는 사라지지 않으며, 외려 죽음이라는 계기로 더 강하게 변질되기도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지금 도래의 시체를 둘러싼 마력과 의념은, 레녹조차 쉽사리 뚫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월적인 직관과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정작 레녹의 마력은 승천에 도전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만화경의 심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 여파를 감당해낼 수 있을지 계산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신녀는 그런 레녹을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망설이던 신녀가 이내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귀하께서, 저희의-]“이미 몇번이고 말했던 것 같은데.”
대번에 신녀의 말을 끊어버린 레녹이 평탄한 어조로 대답했다.
“교단의 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고, 올바른 방법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교주에 대한 감상 역시 다르지 않지. 그건 화신 술식을 익힌 뒤에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녀를 향해 시선을 돌린 레녹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교단의 방식이 이미 한번 성공한 적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지.”
요르타의 만귀야행. 마키나의 승천문.
두 도시에서 실패한 도전이, 교단의 방식보다 더 우월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교주가 선택한 대답은, 승천에 성공해 다음 세계에 도달한 것이 틀림없는 결과.
외해를 향한 광신으로 비틀렸다 해도, 분명 한번 결실을 맺었음은 변하지 않는다.
요르타의 수뇌부가 도래의 시체에 집착하는 것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일 터.
레녹은 그렇기에 신녀에게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존재함을 짐작하고 있었다.
“도래의 유해에 깃든 영혼을 빼낼 방법이 있지?”
[…….]“내 감상 따위는 묻지말고, 방법이 있다면 설명해라.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가 어째서 레녹에게 이 사태에 대한 감상을 묻는지는 알고 있다.
레녹의 화신이 교주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신녀 역시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교주 자신이 아니면서도, 교주와 엮여 있는 것이 분명한 화신체의 인과.
그렇기에 신녀는 사태를 해결하기에 앞서 레녹의 의사를 누차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만약 레녹이 교주의 의사를 대변하거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존재라면, 신녀는 반드시 이 자리에서 그 대답을 들어두어야 했으니까.
고개를 숙인 채로 침묵하던 신녀가 대답했다.
[귀하의 존재가 제가 아는 것과 같다면, 이 사태 역시 처음 저희가 약속했던 대로 갈무리가 되어야 하겠지요.]그렇게 말한 신녀가 천천히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흐릿했던 그녀의 영혼이 선명한 빛을 발하며, 남아 있는 모든 힘을 그러모았다.
우우우우웅!!!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공능이자, 그녀를 신녀로서 만들어주는 자격.
외해 너머의 의지와 직접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시의 공능.
기도하듯 양손을 마주 잡고 시선을 들어 올린 신녀가,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군주의 영이 그분의 그릇을 차지하려 한다면, 분명 그릇의 기억과 자신을 동기화하려 할 겁니다.]신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는 그자의 존재를 그릇의 기억에서 강제로 분리해내면 될 일이지요.]“강제로 분리한다고?”
[다행히 귀하의 화신과 저자의 영이 그릇 안에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을 관조하는 것만으로 해낼 수 있을 듯합니다.]“…….”
지금 도래의 육신을 둘러싸고 터져나오는 창백한 광채와 흑색의 마력.
저 두 가지 의념이 승천자의 육신을 두고 공존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반동이라는 의미겠지.
레녹의 화신이 육신 안에서 군주의 영과 충돌하는 사이, 바깥에서 그 존재를 직접 걸러내는 과정.
그렇게 해서 도래의 육신을 손에 넣고 나면, 레녹의 화신은 과연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레녹이 무심코 생각에 빠진 찰나, 신녀가 레녹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릇에 직접 접근해서, 그 안에 깃든 화신체에 직접 접촉을 시도해주세요.]파아앗!!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서는 새하얀 안광이 번뜩이며, 그 눈동자의 모습마저 가리고 있었다.
[계시의 공능을 사용해 그릇에 남겨진 생전의 기억을 직접 들여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