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54
약먹는 천재마법사 854화
인수인계(22)
“아, 아니…….”
라파엘 교수를 바일런 연구소의 인수인계 과정을 위해 선임한다는 루이센의 선언.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던 라파엘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시의회에서 나를 바일런 연구소의 인수인계를 위한 책임자로 선정했다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아니, 거기서 수긍하면 안 되지 않소!”
레녹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파엘이 격하게 항의했다.
“나, 나는 엄연히 따지자면 연구소와 관련 없는 외부인이 아닌가. 인수인계를 위해서라면 헤이워드 박사처럼 내부 관계자에게 맡기는 것이……!!”
“아,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요!”
“굳이 따지자면 연구소에 공식적으로 소속된 모든 인력들이 그러하지요.”
루이센이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헤이워드 박사는 엄연히 연구소에 고용계약을 맺은 당사자. 특히 바일런 교수에게 정식으로 양도되어야 할 인적 ‘자산’입니다.”
“자, 자산?”
라파엘이 그 표현에 할 말을 잃고 두 눈을 크게 뜬 사이, 루이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일런 교수에게 소유권이 이전될 예정인 자산에게 직접 인계를 맡긴다는 건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을 테니까요.”
“…….”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라파엘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변했다.
중앙의회 상원에서 지금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실감했기 때문.
헤이워드를 비롯한 연구원들을 한낱 도구로 취급하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설명.
레녹에게 쩔쩔매던 루이센이라는 청년 역시, 정작 의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충격으로 비틀거린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내, 내가 외부인이라서 연구소의 인수인계를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라파엘 교수는 마력배열의 병렬이론을 성립하며 이름을 알린 학자이며, 학계에서도 명망이 높은 인격자입니다.”
루이센이 라파엘을 무시하고 레녹에게 재차 설명했다.
“연구소에 정식으로 강연을 위해 초빙된 인력이자, 현 사태를 모두 인지하고 옆에서 지켜본 극소수의 관계자이기도 하지요.”
“…….”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 접으면서 루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다단한 현 상황을 고려했을 때, 바일런 교수와 반 님 양측이 모두 만족할 유일한 후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흠.”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는 레녹의 반응에, 루이센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라파엘과 헤이워드를 일체 무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레녹에게 한껏 집중하는 모습.
“혹시 본 의회의 권고사항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아니, 그것보다는…… 그 발상부터 참 의회답다 싶군.”
레녹은 미소짓는 루이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루이센이 방금 한 말과, 상원에서 이런 식으로 나온 저의를 금세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야. 천성의 문제라는 게 대개 그러하지.”
“…….”
시의회는 단순히 바일런 연구소를 넘기는 것만으로 이번 사태를 수습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소에 소속된 인력과 설비, 성과들을 통째로 양도하는 것을 넘어, 라파엘의 재능을 연구소에 묶어두는 것으로 보상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은 레녹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이론 연구학자이며, 인간적인 성품을 가진 교수.
하지만 흥미가 생기는 일에는 앞뒤를 가리지 않을 만큼 연구자로서의 기질이 강한 재인이기도 하다.
중앙의회는 이런 라파엘의 성정을 인지하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겠지.
루이센이 덧붙인 명분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본질은 라파엘의 신변을 연구소에 묶어서 선물해 주겠다는 부분에 있었던 것이다.
“에반 바일런에게 관련 사항을 통보해두지. 연구소의 소유권 이전을 확인한 만큼, 다음의 일은 그쪽에서 판단할 문제다.”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시선을 돌렸다.
“다만 그 제안은 라파엘 교수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린 것 같은데.”
“그, 그 말이 맞소.”
퍼뜩 정신을 차린 라파엘이 언짢은 듯한 기색으로 루이센을 노려보았다.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일을 처리하려 하다니, 이건 시의회의 책임을 내가 덤터기쓰는 꼴이 아닌가!!”
“…….”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난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오. 그…… 여기저기서 부르는 사람도 많고, 약속도 많고, 심지어 보, 복-”
“복?”
잔뜩 흥분했다는 건 알겠지만, 설마 그 조직의 이름을 여기서 직접 말할 생각인가.
라파엘이 폭주해서 어디까지 갈 생각인지 레녹이 퍽 흥미로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루이센이 고개를 갸웃거린 찰나.
필사적으로 이성을 부여잡은 라파엘이 황급히 말을 더듬으며 바꾸었다.
“내게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는 사람도 있소!!”
“…….”
“물론 바일런 교수와 만나고 싶은 마음에 강연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시의회에서 이런 식으로 내게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원로원에게 확답을 받았습니다.”
“뭐, 뭐라고?”
루이센이 태연하게 라파엘의 말을 끊으며 두루마리를 다시 펼쳤다.
“어디 적혀 있었더라…… 아, 이쯤이군요.”
“아니, 내가 수락할 생각이 없는데 대체 무슨 확답을 받았다고!”
“드루이드와의 합동연구를 위해 발칸 내부에 존재하는 그린벨트에 출입하신 적이 있지요?”
루이센의 말에 순간 라파엘의 입이 딱 닫혀 버렸다.
“출입권한을 습득하기 위해 원로원의 자문을 몇 번 받으신 걸로 압니다만.”
“…….”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라파엘을 보며 루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로원에서 그때의 일을 두고 교수님께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 그건…….”
라파엘의 두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도움을 좀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린벨트에서 예정보다 좀 늦게 나오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 것도 맞지만-”
“그때 일 때문에 교수님께서도 이번 방문에 드루이드를 대동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루시엔이 두루마리를 다시 덮으며 말했다.
“이번 안건의 인수인계를 도와주신다면 해당 문제에 대해서는 상원의 권한으로 깔끔하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지금 밀려 있는 학회가…… 학교에도 돌아가야 하는데…….”
“교수님, 뭘 그렇게 복잡하게 고민하고 그래요?”
그 순간, 마술사 실포드가 라파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중절모를 기울인 실포드가, 교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일을 받아들이면 연구소장으로 취임할 바일런 교수를 만나볼 수 있을 텐데요?”
“……!!”
“밀려 있던 채무를 갚는 조건으로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교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구요.”
“그, 그건…….”
홀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실포드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는 라파엘의 모습.
레녹은 그런 실포드와 루이센의 반응을 보며 뒤에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저들은 라파엘이 왜 연구소를 찾아왔는지, 어떤 기질인지조차 전부 알고 있다.
외부인인 라파엘에게 인수인계를 맡긴다는 것은, 결국 연구소에서 진행된 모든 일을 라파엘이 직접 숙지해야 한다는 의미.
그리고 천성이 연구자인 라파엘은 연구소에서 진행된 공용마법 연구에 강한 흥미를 느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라파엘은 돌아가는 상황도 잊고 연구소에 눌러앉아 공용마법을 연구하려 하겠지.
시의회는 그런 라파엘의 성정을 훤히 내다보고, 양측에 도움이 될 만한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한 것 자체가 라파엘이 원로원에 빚을 졌기 때문이긴 하지만, 반대로 한번 그들과 엮인 이들은 누구라도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는 방증.
“그래, 어쩔 수 없지.”
그 말대로 라파엘은 이미 실포드의 말을 완전히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겠소. 내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일런 교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소이다. 대신…….”
라파엘의 눈동자가 순간 강한 열의로 번뜩였다.
“바일런 교수에게 반드시 연구소로 한번 직접 찾아오겠다는 확답을 받아주시오.”
“이를 말이겠습니까, 교수님.”
실포드가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모든 일이 바일런 교수를 위해 준비되는 것일진대, 해당 사항은 아주 정성스럽게 라바테논 대학으로 전달될 겁니다.”
상황을 받아들인 라파엘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루이센이 라파엘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사이.
레녹은 슬쩍 고개를 돌려 뒤에 남겨진 헤이워드를 바라보았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
“…….”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는 헤이워드의 모습.
자신의 신변과 연구소가 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도 머리를 긁적이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아니. 그럴 리가…….”
헤이워드가 눈치를 보다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바일런 교수가 부재중인 이 시점에서, 누군가 연구소장 자리를 임시로 맡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긴 했지.”
“…….”
“라파엘 교수의 성품은 솔직히 나랑 별로 맞지는 않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알아줄 만해.”
이쪽으로 걸어오는 라파엘을 보며 헤이워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같이 일하기엔 부족함은 없겠지.”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듯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민하는 라파엘에게, 헤이워드가 빠른 어조로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벌써 연구소 관련 시설과 인력에 대한 인수인계를 시작할 생각인가.
레녹이 팔짱을 낀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이, 루이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연구소의 설립 과정에서 바일런 교수와 원활한 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점. 연구 주제를 비롯한 프로젝트 진행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점.”
“…….”
“마법사 양성 계획이 발상에 비해 수단과 결론이 미욱했던 점을 모두 고려하여 결정된 사항으로, 오늘 4시 34분을 기준으로 모든 권리를 바일런 교수에게 양도함을 승인합니다.”
슬쩍 레녹의 눈치를 본 루이센이 재차 말했다.
“다만 바일런 교수가 마탑과 긴밀한 기술 협약을 맺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마탑에게 역시 연구성과를 공유할 권리를 부여하고 탑주에게도 연구소의 지분을 양도할 예정이니, 추후 자세한 비율조정과 이득분배는 상호 간의 합의를 통해-”
듣고 있던 레녹이 말을 툭 끊었다.
“나와 바일런이 알아서 나눠 가지라는 말을 길게도 지껄이는군.”
“으, 으음…… 핵심을 요약하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더듬거리는 루이센을 두고 레녹이 차갑게 웃었다.
“이유가 뭐지?”
“예, 예?”
“연구소에서 진행되던 마법사 양성 계획. 시의회가 가진 초인양성 기술을 베이스로 진행되던 것 아니었나? 기술이 유출된 것을 감수하고 이번 사태를 덮어두기로 한 이유가 있을 텐데.”
“…….”
중앙의회가 이번 사태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연구소의 존재가 아니라, 연구소에 숨겨져 있던 프로젝트에 대한 비밀과 기술이다.
그것이 유출된 이상 레녹을 의회로 호출해 납득 가능한 합의점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
하지만 레녹이 흑색 바이저와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 그 잠깐 사이에 시의회 내부에서 의견이 변했단 말인가.
침묵하는 루이센을 두고 실포드가 나섰다.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추론과 확답은 다르니까. 직접 설명해라.”
“가장 큰 건 역시 마탑의 존재 때문이죠. 지금 발칸 내수시장이 마탑으로 인해 급격하게 활성화된 건 알고 계십니까?”
실포드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현재 마탑을 통해 수입되는 아이템은 공용마법만큼이나 뜨거운 화젯거리죠. 중앙의회는 당신이 어떻게 나오든 지금의 흐름을 깨트리기 싫어할 겁니다.”
“…….”
“하지만 무엇보다 기점이 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잠시 말을 멈춘 마술사가 중절모를 살짝 눌러써 표정을 가렸다.
루이센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목소리를 낮춘 그가 속삭였다.
“당신이 에반 바일런을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
“솔직히 말해 원로원에서도 놀랐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연구자도 대마법사의 눈에는 벌레처럼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실포드가 묘한 표정으로 레녹을 바라보며 말했다.
“견뢰가 광증조차 접어두고 연구원 하나를 위해 움직였다면, 중앙의회에서도 계획을 수정할 명분으로는 충분하겠지요.”
“그게 끝인가?”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앞으로 바일런 교수를 향한 시의회의 태도 역시 조금은 달라질 거구요.”
씩 웃은 실포드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두들겼다.
“의회 꼭대기에 눌러앉은 노괴들 중 절반은 전란에서 살아남은 귀신이라,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무력이 없으면 경시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
“바일런 교수가 이 정도로 견뢰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쪽도 조금은 생각이 달라지겠지요.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진작 무덤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지팡이를 짚고 보란 듯이 걸어 다니고 있다는 거지만…….”
그렇게 말하던 실포드가 레녹의 지팡이와 자신의 지팡이를 가리키며 낄낄 웃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하나씩 장만하고 있네요. 남 말할 처지가 아니긴 하죠?”
“…….”
마술사의 두서없는 헛소리를 무시한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중앙의회의 무제한적인 양보. 하지만 이건 바일런의 이름을 빌려 연구소를 세운 시점에서 당연히 받아내야 할 성과였다.
레녹 역시 연구소를 통째로 빼앗아 손에 넣는 정도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나설 생각이 없었으니까.
연구원이나, 연구소를 지키는 전력을 상대로 손속을 두었던 것 역시, 오래지 않아 이쪽의 손에 들어올 자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그 사실을 지금 반의 신분으로 논의하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남은 것은, 여기서 중앙의회가 저지른 일에 대해 확실한 설명과 보고를 듣느냐의 문제겠지만-
“좋아.”
천천히 마력을 가라앉힌 레녹이 고개를 젖혔다.
“조만간 상원을 한번 찾아가겠다. 연구소에 일에 대해 들을 테니, 핵심 관계자들을 추려서 명단을 가져오도록.”
“허허, 그 부분은 제 소관이 아닌지라.”
능청스럽게 말을 돌린 마술사가, 옆에 어영부영 서 있던 루이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자마하 상원의원님.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 아니, 난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모르면 알아 와야죠.”
“뭐?”
“알아 오라고.”
루이센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실포드가 그대로 그 목덜미를 쥐고 휙 집어던졌다.
순간 루이센의 몸이 구멍에 빨려들어 가는 것처럼 작아지다, 외마디 비명만을 남기고 휙 사라졌다.
실포드가 뿌듯한 기색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으니까 잘 할 겁니다.”
레녹은 그런 실포드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굳이 손을 쓸 만큼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
“네? 무슨 말인지 잘-”
“네 같잖은 연기가 더 짜증이 난다는 말이었다.”
“하핫, 너무 노골적이었나요?”
실포드가 멋쩍은 표정으로 크게 웃어젖혔다.
루이센을 억지로 날려 보낸 그 행동이, 반대로 루이센을 레녹에게서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순식간에 들켜버렸기 때문.
레녹이 마술사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꼭 그자를 죽여 버릴 것처럼 대하는군. 난 전령의 목을 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아니야.”
“물론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웃는 표정으로 실포드가 강조했다.
“당신이 언제 그렇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답니다.”
“…….”
“오늘 시의회의 결정이 늦어진 이유 역시, 상원에서 의견이 갈리면서 시간이 끌렸기 때문이죠. 원로원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내 앞에서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애초에 대행자의 자리를 당신이 거부하지 않았다면, 제가 맡을 일도 없었겠죠.”
실포드가 중절모를 살짝 눌러썼다.
“다만 의회에서 당신을 만나보지 않은 의원들 사이의 인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만큼 이 도시에서 견뢰의 악명은, 뭐라 해야 할까…….”
“안다.”
말을 고르는 실포드를 보며 레녹이 피식 웃었다.
“어느 정도는 내가 자초한 부분도 있지.”
“……음. 꼭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듯한 정령의 질문을 레녹이 무시한 사이, 실포드가 슬쩍 말꼬리를 돌렸다.
“이 도시에서 당신의 이름이 남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주변의 예민한 반응을 좀 더 손쉽게 납득할 수 있으리란 말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실포드가 레녹의 눈치를 살짝 보며 물었다.
“제 말이 너무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아니겠죠?”
“아까부터 말했던 것 같은데.”
레녹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그 어르고 달래려는 태도가 더 거슬린다고.”
“아하핫, 농담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슬슬 한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번개처럼 레녹의 앞에서 자취를 감추는 마술사의 모습.
쿠르르릉!!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시설의 천장 사이로, 이곳을 지켜보는 다른 초인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흐트러진 마력을 수습하며 일어서는 흑색 바이저와, 악마 거인에게 휩쓸린 뒤에도 자리를 지키던 특무기관의 대원들.
더 이상 적의를 비추지는 않지만, 여전히 레녹을 이 공간에 묶어두려는 듯한 묘한 태세.
빤히 대원들을 바라보던 레녹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희 주인과 이야기가 끝났는데, 아직도 내게 볼 일이 남아 있나?”
[……귀하와 중앙의회의 거래는 불문에 부쳐져야 할 일. 저희에게 이번 안건에 대한 지령이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옥색 바이저가 낮게 가라앉은 음색으로 대답했다.
[윗선에서 아무런 통지가 없다면, 저희는 기존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우선시해야겠지요.]“피곤한 일이로군. 공직자들은 다 그런 식인가?”
레녹은 침묵하는 흑색 바이저를 바라보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지팡이를 두들겼다.
“좋아. 생각해 보니 아직 너희에게 시켜볼 만한 일이 남아 있었지.”
쿠웅!!
양팔에 굵직한 흑색의 사슬을 매단 흉악한 형상의 악마 거인이 팔짱을 낀 채로 이지스의 대원들을 오시한다.
흉험한 외견에 어울리지 않게, 일이 끝날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던 거인이 양팔을 활짝 펼친 그 순간.
차르륵!!
흑색의 사슬이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레녹의 손 위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지옥의 거래. 무패의 계약이라.”
피식 웃은 레녹이 지팡이를 짚지 않은 다른 손으로 사슬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흑마법에서 정의하는 패배하지 않는 힘이 무엇인지 한번 확인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