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55
약먹는 천재마법사 855화
인수인계(23)
흑색 바이저에게 악마 거인의 능력을 들은 이후, 레녹은 무패의 계약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옥의 거래. 무패의 계약. 패배하지 않는 힘이란 무엇일까.
정해진 승패를 억지로 뒤집어엎는 인과역전의 권능인가.
아니면 승패가 정해지는 분기점을 멈춰 세워 길항 상태를 유지하는 힘일까.
온갖 초인과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며 승리만을 목표로 해왔던 레녹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
하지만 이지스의 초인이 레녹의 앞에서 서슴없이 꺼내 들 정도라면, 분명 힘의 크기에 구애받는 공능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레녹은 악마 거인을 빼앗은 김에, 이지스를 상대로 그 능력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지만-
“이래서는 실험조차 안 되겠군.”
뚜둑!!
[으윽……!!]갈퀴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진 거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황색 바이저가 힘없이 땅에 떨어진다.
그의 옆에는 먼저 악마 거인에게 휩쓸려 나가떨어진 다른 대원들이 쓰러져 있었다.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은 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악마의 모습.
자신의 힘에 취해 버린 듯한 그 기묘한 악마의 몸짓을 지켜보던 레녹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패배하지 않으려면, 일단 패배가 가능한 상황까지는 몰고 가야 한다는 건가.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악마 거인의 자체적인 체급이 너무 강해서, 기진맥진한 이지스의 대원들로는 발동 조건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연구소는 물론이고 발전 시설의 요새화를 뚫기 위해 적지 않은 기력을 소모한 초인들로는 상대조차 되지 못하는 것.
[반대로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저희로서도 묻고 싶군요, 견뢰.]비틀린 손목을 부여잡은 옥색 바이저가 조용히 답했다.
[처형대장이 사용하는 건 흑마법 중에서도 그릇 이상의 힘을 끌어내는 금술입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려 하지만, 옥색 바이저의 시선은 레녹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했다.
연구소에서 발전 시설까지 이어진 일련의 소란 사이, 저 마법사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깨달았기 때문.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야…….’
필멸의 경지에 오른 마법. 마력이 아닌 힘조차 제것처럼 자유로이 휘두르는 초월적인 공능.
한계를 짐작할 수 없는 무한한 영창, 여기 모인 초인들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전투 경험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견뢰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멀쩡하게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에 있다.
견뢰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거나, 인간들을 벌레처럼 깔아 보지 않는다.
피와 싸움을 좇아 소란의 중심에 서면서도, 그 눈은 냉정하게 주변을 돌아보고 모든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장소와 상황, 조건과 환경. 심지어 사람조차 가리지 않고 골라가며 원하는 대로 판을 조립해 나간다.
효율이나 시간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목적을 위해 경청하고 인내하며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자제심을 가졌다는 증거.
그것은 옥색이 보기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광증이었다.
어째서 상원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입장을 공지해 주려 했는지, 베일에 싸여 있는 원로원이 개입해 사태를 중재하려 했는지 알 것만 같다.
에이전트의 국장이 경고했던 것처럼, 시의회의 공직자들이 같은 감상을 토해냈던 것처럼 피에 물든 악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함이 저곳에 있다.
겉으로는 흑마법에 대해 물으며, 옥색 바이저가 빠르게 입장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처우를 생각하던 찰나.
후욱!!
그녀를 비롯한 다른 이지스 대원들의 몸이 그 자리에서 뒤로 튕기듯이 밀려났다.
[윽……!!]“과격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순식간에 다른 대원들을 밀어내고 흑색 바이저 하나만을 남겨둔 레녹이 손을 뻗었다.
가만히 서 있던 흑색 바이저가 손짓에 따라 레녹의 앞으로 끌려 나왔다.
“가까이 와라.”
강제로 심상 전개를 취소당했으니 속이 뒤틀리고 있을 텐데도 비명 한 번 없이 버티는 모습.
겨우 균형을 잡고 서 있는 흑색 바이저의 헬멧을 레녹이 두들긴 순간.
터엉!!
바이저가 튕겨나가듯이 벗겨지며 젖은 흑발을 지닌 청년이 얼굴을 드러냈다.
토혈이라도 했는지 피범벅이 된 날카로운 얼굴. 고통 때문인지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레녹은 그런 청년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거인의 팔에 매달린 사슬을 청년의 목 위에 걸쳤다.
철컥!!
족쇄처럼 채워진 사슬에 청년이 표정을 찌푸리고, 악마 거인이 어깨를 으쓱인 순간.
“계약해 봐.”
“……뭐라고?”
“원래라면 이자와 계약할 예정이었겠지? 마저 끝내봐라.”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왼손을 허공으로 늘어뜨렸다.
“무패의 공능. 다른 놈들의 힘으로 조건을 만족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직접 실험해 볼 생각이니까.”
손끝을 타고 피어오른 나선의 벼락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처절하게 비틀리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레녹이 지닌 전격계 고유마법 중에서도 대인 위력으로는 상위권에 위치한 파괴마법.
[나뢰살(螺雷殺)]빠지지지직!!!!
당장이라도 청년을 태워 버릴 듯이 눈앞을 새파랗게 물들이는 청광.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원들의 비명과 고함 소리.
“소용없는 일이다.”
하지만 청년은 이를 악물고 레녹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계약이 넘어간 시점에서 내가 그걸 되찾아오는 건 불가능해. 어느 쪽이든 개죽음이 될 거다.”
지옥의 거래를 통해 소환한 흑악의 거인은 청년의 통제를 온전히 따르는 존재가 아니다.
악마가 레녹이 마음에 들어서 입장을 바꾸었다면 그것으로 끝.
청년이 소환의 주체라고는 해도 악마의 의사를 거스르고 계약을 되찾아올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개죽음이라 말할 수 있다니, 배짱은 좋군.”
레녹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네게 한 이야기가 아니야.”
“……뭐?”
청년이 반문한 찰나, 목에 걸린 사슬이 강하게 호응하는 것이 느껴진다.
레녹의 뒤에 서 있던 악마 거인이 자신의 의지로 청년과 계약해 그 힘을 끌어내려 하고 있던 것.
그제야 레녹의 말이 자신이 아닌 악마에게 직접 명령한 것임을 깨달은 청년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린 순간.
허공에서 비틀리는 벼락을 움켜쥔 레녹이 그대로 나뢰살을 청년의 명치에 때려박았다.
파아아아앗!!!
상반신 앞뒤로 새파란 뇌광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수십 갈래 꽃잎처럼 피어올랐다.
피어나는 모든 꽃잎이 엄청난 양의 열기와 분열을 품고 공간을 짓무르며 넘실거리고.
그 몸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릴 것을 깨달은 이지스의 대원들이 움직이려던 순간.
레녹이 꽂아 넣은 나뢰살의 번개가 거짓말처럼 청년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화악!!
“어……?”
“사라졌어?”
그 비현실적인 마력의 소멸에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라파엘과 헤이워드마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격렬하게 뻗어 나오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마법을 받아낸 청년의 육신까지 멀쩡한 모습.
하지만 레녹의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소멸이 아니다.”
“……쿨럭!”
청년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물들더니, 이내 그대로 쓰러져 고개를 숙인다.
신체 기능 대부분이 마비되어 버린 것처럼 힘겹게 손을 떨면서 겨우 의식을 유지하고 있을 뿐.
“흡수나 분해, 혹은 해체도 아니군. 반대로 전이와 가까운 개념인가?”
레녹이 자연스럽게 청년의 앞에서 한발 물러나며 중얼거린 직후.
우우웅!!
악마 거인의 손끝에서 새파란 벼락이 터져 나와 통제실의 하늘 위로 폭발하듯 솟구쳤다.
레녹이 터뜨린 나뢰살의 전격이 한발 늦게 악마 거인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것.
콰아아아앙!!!
“우와아악!!”
불안정하던 발전 시설이 완전히 반파되며 파편이 떨어지자, 헤이워드가 기겁하며 몸을 굴려 파편을 피해냈다.
하지만 레녹은 그런 주변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에 반응하는 순간, 특정한 공간으로 날려 보내 물리적인 피해를 없애는군.”
“쿨럭, 쿨럭!!”
주저앉은 청년에게 묶여 있던 사슬이 떨어지고, 악마 거인이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손을 거둔다.
레녹의 말에 따라 청년과 잠시 계약하긴 했으나, 그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모습.
“내 마법을 일시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면서도 광활한 이계(異界)라…….”
허공에서 느릿하게 흔들리는 사슬을 바라보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이게 무패의 계약을 뒷받침하는 지옥의 개념인가?”
“쿨럭!! 원래는 이런 식이 아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청년이 대꾸했다.
“네 마법을, 저쪽에서 받지 못해 강제로 반환된거지. 그 때문에 반동이 전부-”
“계약의 주체인 네게 쏠렸다는 말이군. 이해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패의 공능. 적어도 이 악마 거인의 능력에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것 같다.
피격과 동시에 술자에게 가해진 자극을 알 수 없는 아공간으로 날려 보내는 공능.
이런 공능을 계약으로 술자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적을 상대해도 쉽게 패배하지 않겠지.
하지만 정작 레녹이 쏘아낸 마법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탓에, 전이 과정에서 소모되는 반동을 계약자가 모두 뒤집어쓴 것이다.
흑색 바이저가 이 과정 자체를 지옥의 계약이라 불렀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공간의 정체는 흑마법에서 [지옥]이라 정의하는 공간일 가능성이 높을 터.
그렇다면 명은 어째서 이런 소환수를 상시 옆에 데리고 다녔던 것일까.
악마 거인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명은 소환수의 힘에 의존해야 할 만큼 약한 마법사가 아니다.
어쩌면 악마 거인의 공능을 통해 전이되는 아공간, 소위 지옥이라 불리는 그 공간에 명이 무언가 용무가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이 대뜸 뒤편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촤악!!
“우와악!!”
비명과 함께 끌려 나온 라파엘과 헤이워드가 흑색 바이저의 발치에 미끄러졌다.
떨떠름한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이지스를 향해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라. 이 정도면 후퇴할 명분으로는 충분하겠지?”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아직 할 일이 남아서.”
연구소에서 공용마법을 상당 부분 연구한 것은 사실이니, 돌아가기 전에 들러 데이터를 가져갈 생각이다.
새로운 공용마법을 만드는 데 있어 괜찮은 발상이나 테마가 있을지도 모르지.
[…….]가까이 다가온 이지스의 대원들이 곧바로 라파엘과 헤이워드의 신병을 넘겨받는다.
경계 어린 기색으로 레녹을 천천히 돌아보며, 하나둘씩 사라지는 대원들의 모습.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흑색 바이저가 천천히 걸어 나가려던 찰나.
“흑마법을 각인받았다기엔 술식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더군.”
레녹이 물었다.
“고대의 혈통을 흉내 낸다 말한 것도 그렇고…… 출신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정보들이 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묘지기였나?”
순간, 흑색 바이저의 분위기가 한없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제껏 냉정을 유지하던 것과는 상반되게 느껴질 만큼 예민하고 민감한 반응.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왕을 신처럼 숭배하는 흑마법사 집단. 흑림에 기거하며 잊혀진 술식의 전수를 목표로 한다 했던가. 그쪽 흑마법사를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너와 비슷한 걸 알고, 퍽 유사한 마법을 다뤘었지.”
스스로를 명의 제자라 칭하다, 외려 명에게 직접 살해당한 흑마법사 바에곤.
그 출신이 묘지기라 불리는 흑마법사 집단. 명을 숭배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레녹은 알고 있었다.
흑색 바이저가 알고 있는 흑마법에 대한 굉장히 심도 깊은 지식과 경험.
레녹은 그것이 각인으로 습득한 지식이 아님을 직감하고, 그의 출신이 어디일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
“원래부터 흑마법사 출신이었다면, 각인받은 술식이라 해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겠지.”
품 안에서 새로운 연초를 꺼내 물고 레녹이 말했다.
“이지스 내부에서 유달리 강력한 초인들이 비슷한 과정으로 힘을 끌어올린 게 아닐까 싶군.”
[……그게 너와 같은 마법사에게 무슨 상관이지?]“묘지기들이 숭배하는 흑마법사에게 볼일이 있다.”
레녹이 느긋하게 답했다.
“놈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싶군.”
[…….]명을 알고 지낸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정작 레녹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가 아주 강력한 흑마법사이자, 굉장히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며, 한때는 이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 중 하나였다는 것 정도.
어떻게 판데모니엄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가비행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를 자행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단장의 뜻에 함께하고 있는 것인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명을 만나야 한다면, 판데모니엄보다는 다른 곳에서 그 흔적을 찾는 편이 낫겠지.
그리고 레녹은 묘지기들이 명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명을 신처럼 숭배하며 믿고 떠받드는 이들이라면, 적어도 명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흑색 바이저는 물끄러미 레녹을 바라보다가, 이내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착각하고 있군. 난 더 이상 묘지기가 아니다. 더 이상 그쪽과 어떤 연관도 없지.]“묘지기들의 행방에 대해서도?”
[그들은 흑림에 머무르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활동을 위해서일 뿐. 한곳에 적을 두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들이다.]“…….”
[내가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많지는 않아. 하지만…….]주저하던 흑색 바이저가 대답했다.
[명왕이 처음으로 가비행을 시작했던 성소라면, 묘지기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가비행의 성소?”
[구체적인 장소는 나도 알지 못한다. 흑림 안에서 가장 낮은 지저의 끝에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흠…….”
지저의 끝이라. 그건 역시 방금 레녹이 체감한 지옥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당장은 명을 직접 만나기 위한 단서를 찾아낸 것에 만족해야 할까.
고민하던 레녹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색 바이저가 천천히 걸음을 돌려세웠다.
이지스의 대원들이 모두 시설을 떠나자, 지축이 흔들리며 건물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진다.
쿠르릉!!
마모된 석재와 철골의 파편이 사방에서 비처럼 떨어지며 그대로 바닥을 거세게 두들겼다.
하지만 레녹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파편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콰앙!!
머리 위에 우산처럼 드리워진 검게 물든 거인의 팔뚝이 대신 파편을 받아내자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그래, 네가 있었지.”
말없이 한 팔로 레녹의 머리 위를 가로막고선, 떨어지는 철근 파편을 대신 맞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명의 소환수로 마주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의외로 비언어적인 표현이 무척 선명하다.
잔혹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생각보다 감정이 풍부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쿠과과과!!
무수히 쏟아지는 돌덩이를 끄떡하지 않고 받아내는 악마 거인을 보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레녹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편하게 만들어준 건 고맙지만, 널 거두는 건 어렵겠군.”
[……?]악마 거인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색 바이저는 이것을 흑악의 거인이자, 무패의 계약을 상징하는 증거라고 불렀다.
레녹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데다, 독특한 능력을 품고 있는 소환수라는 건 틀림없는 일.
문제는 이 악마가 소환사의 통제를 듣지 않는 데다, 소환술식에 얽매이지 않을 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데 있었다.
지금이야 레녹의 편을 들어 여기에 서 있지만, 언제 마음을 바꿔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악마 거인이 어째서 레녹의 편을 들었는지 모르는 이상, 적이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난 흑마법사도 아닌 데다, 주인 없는 소환수를 오래 유지시킬 만큼 소환술식에 정통한 것도 아니야.”
레녹이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보존 마력이 떨어지면 알아서 돌아가도록. 널 소환한 술자도 떠났으니 문제는 없을 거다.”
[……!]그제야 레녹이 자신을 여기 놓아두고 갈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악마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마치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내듯 비통한 몸짓으로 근육질의 상반신을 이리저리 뒤트는 모습.
다비가 그 기괴한 동작을 레녹의 품 안에서 미심쩍은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쩔그럭.
눈치를 보던 악마 거인이 황급히 자신의 팔뚝에 묶인 사슬을 잡고 레녹의 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레녹이 그것을 잡지 않고 내려놓자,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슬을 잡아 손 위에 올려두는 모습.
절그럭절그럭.
어떻게든 여기서 자신을 데려가라 말하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의지.
레녹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너와 계약하지 않고 남겨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다만 앞으로는 내가 하는 일을 성실하게 돕겠다는 약조를 해야 할 텐데, 괜찮겠나?”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 팔목에 묶인 사슬을 냉큼 목에 걸고 잡아당기는 모습.
말을 못 하는데, 외려 말을 하는 것보다 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레녹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 손을 뻗었다.
“계약 성립이군. 우리 일단 가벼운 일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볼까?”
* * *
이른 아침. 라바테논 마법대학 원소학부 강의동.
평소에는 인적이 드문 유리색 공동 아래, 수백 명이 넘는 취재진과 학부생이 섞여 웅성이고 있었다.
세 번째 논문. 공용마법을 발표한 이후 단 한 번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개인 연구실.
에반 바일런이 근 몇달 만에 라바테논에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