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56
약먹는 천재마법사 856화
인수인계(24)
라바테논 마법대학 원소학부 강의동.
이른 아침부터 학부생과 취재진이 강의동에 내걸린 벽보를 확인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몇 달 만에 대학에 복귀한 에반 바일런이, 오늘부터 정식으로 강의에 참가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레녹은 바깥의 분위기를 신경 쓰는 대신, 연구실 구석에 앉아 한가로이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중앙의회 직속으로 설립된 바일런 연구소가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폭발 사고 때문이 아닌, 계획된 일정이라 연구소 측에서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공용마법 연구를 위해 준비된 인프라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순수하게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학계에서도 병렬이론으로 저명한 마브 라파엘 박사가 가장 먼저 연구소에 합류하며-]“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는데, 불미스러운 소식부터 먼저 전하게 되어 미안하군.”
탁!!
카시아가 레녹의 앞에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내려놓는 사이 학장, 사이올러스가 말했다.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맞은편에 앉은 학장이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연구소를 둘러싸고 흘러나오는 자극적인 뉴스 문구를 바라보던 노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설마 자네의 이름을 허락도 받지 않고 차용해 쓰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네. 아는 의원을 통해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어있더군. 내 불찰이야.”
“학장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레녹이 커피잔을 들며 대답했다.
“저 역시 마탑과 약조한 사항들을 대학에 모두 공유하지는 않으니까요. 당연히 합의되었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세 번째 논문을 발표하자마자 연락을 끊고 잠수해 버렸으니 누가 알겠어요.”
카시아가 커피잔을 든 채로 서서 투덜거렸다.
“연구에 집중하는 건 좋지만, 아무 연락도 받지 않고 지내니까 이렇게 이용당하는거라고요.”
“카시아.”
“제가 틀린 말 했나요?”
학장의 엄한 목소리에도 카시아는 레녹의 눈치를 조금 보기만 할 뿐,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발표한 논문들, 업계 전반에서 사용할 수 있게 오픈하고 싶다는 건 알겠는데 로열티를 받는 것만으론 통제가 전혀 안 돼요. 이건 당사자가 직접 손을 쓰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해결 불가능한 일이라구요.”
“…….”
“애초에 지금 연구소의 일, 며칠 전에 있던 폭발사고가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됐겠어요?”
카시아가 스크린을 휙 가리켰다.
“폭발사고 이후로는 의회 쪽 일처리가 이상할 정도로 빨라져서 수습이 됐지만, 에반과 연락이 되지 않으면 저희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맞는 말입니다.”
레녹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할 일이죠.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사과를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라, 모처럼 좋은 논문을 써놓고 빛이 바래는 건 너무 아쉽잖아요.”
흥분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카시아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고, 학장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인 건 시의회 쪽 태도가 굉장히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거지. 아마 폭발 사고 당시에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자네 앞으로 떨어질 특혜는 발칸의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것 중에서는 역대 최고 수준이 될 거야.”
“해당 안건을 제의하고 실행에 옮긴 의원들의 명단을 추후 건네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학장의 말에 레녹이 동의했다.
“중앙의회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당분간은 이걸로 충분하겠죠.”
“…….”
그러자, 학장과 카시아가 의미 모를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묘하게 레녹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하던 카시아가 모른 척 목소리를 다듬으며 물었다.
“흠흠, 그래서 그건 어떻게 할 거예요?”
“뭘 말입니까?”
“연구소 말이에요. 바일런 연구소.”
카시아의 얼굴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떠올라 있었다.
“학교를 떠나 그쪽 연구소로 갈 생각인가요?”
“…….”
“뭐, 제가 꼭 말리겠다는 건 아니에요. 연구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고, 칼라일 연구소도 좀 더 동기부여가 될-”
“연구소에서 소장직을 제의받기는 했습니다.”
레녹의 말에 학장과 카시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동요하는 기색을 숨길 수 없어보이는 모습.
“공용마법체계의 배포와 확장을 위해 개선된 연구환경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하더군요.”
“자, 잘 됐군.”
학장이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연한 안색으로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시설과 인력은 시의회 직속 연구기관들 중에서도 최상급일 테지. 나도 자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라바테논을 떠나 더 나은 곳으로 보내줄 의향이 있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손이 무척 떨리고 있습니다만.”
“수전증이야. 자네도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될 걸세.”
“7레벨의 성위마법사께서 말입니까?”
학장의 손에 들린 커피가 덜덜 떨리다 잔 밖으로 흘러넘칠 지경이다.
레녹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연구소장직을 받아들이더라도 학교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최소한 겸직이 될 수 있도록 계약 조건을 논의해 봐야겠죠.”
학장의 안색이 확 펴졌다.
“그런가?”
“학장님, 좀…….”
카시아가 기겁해서 말릴만큼 들뜬 학장의 목소리.
레녹이 웃으며 대답했다.
“가르치던 학부생들이 아직 학교에 남아있기도 하고, 강의하는 것도 적잖게 도움이 됩니다. 자주 신경 써주지 못하는 건 마음에 걸리지만…….”
“자네가 학교에 남아있기만 한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1년에 한 번 강의를 한다 해도 모두가 환영할걸세.”
학장이 강하게 테이블을 두들겼다.
“원한다면 아예 자네를 중심으로 새로운 학부를 만들어줄 수도 있어. 아니, 공용마법체계의 존재를 생각하면 마땅히 그래야겠지. 지금 당장 행정처에 말해두겠네!!”
“아뇨, 그렇게까지는…….”
레녹이 난처한 기색으로 웃었다.
적극적으로 레녹을 포섭하려는 학장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학자이며 선생이기 어려운 것처럼, 꾸준히 실적을 내면서도 원활한 소통이 가능한 재원은 흔치 않다.
이 교육기관을 책임지고 운영해 온 만큼, 학장으로선 레녹의 존재가 그만큼 귀하게 느껴지겠지.
그럼에도 괴신궁 사태 당시 레녹에게 목숨의 빚을 진 적이 있는 만큼, 학장으로서도 마냥 편히 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레녹이 학교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던 저를 데려와 이 학교에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이 있으니까요.”
레녹이 웃었다.
“그 사람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원소학부에 남아있을 생각입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카시아와 학장의 표정이 동시에 흐려졌다.
“에반. 리첼렌 석좌교수는 이제……”
“이건 확실하게 말을 해줘야겠군.”
침중한 기색으로 양손을 맞댄 학장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싱클레어 마탑과 꾸준히 교류하고 있지만, 아리스의 안식년이 늘어나는 건 그녀의 의사라는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야.”
“…….”
“아리스의 성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마음을 달리 먹었을지도 모르네…… 그래도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무심코 품 안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엘릭서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끼며 레녹이 대답했다.
“왜 돌아오려 하지 않는지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
“사실 지금도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의미라는 것도 부질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레녹은 아리스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다.
레녹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는 별개로, 레녹의 대답만이 옳지는 않을 테니까.
아리스 리첼렌이 연구하고 손에 넣으려는 결실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믿으니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녀의 결단을 이해하고 보내주었던 그 순간조차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학장은 그런 레녹의 얼굴을 어딘가 서글픈 듯 바라보다, 이내 억지로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네에게 줄 선물이 하나 있네.”
“선물 말입니까?”
“자네가 애타게 기다리는 석좌교수만큼이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물건이지.”
“묘하게 불쾌한 설명이로군요.”
“흐흐, 눈치챘나?”
음침한 웃음을 흘린 학장이 등 뒤에 무언가를 휙 숨긴 채 천천히 레녹을 향해 다가왔다.
먹잇감을 노리는 늙은 맹수처럼 발끝을 세운 채로 걸어온 학장이 팔을 휙 돌려 레녹의 앞에 무언가를 힘차게 내려놓았다.
“자, 이걸 보게!!”
쿵!!
학장의 몸 반절을 가릴 만큼 커다란 액자.
황금빛의 장식과 수려한 필기체로 쓰인 상장이 액자 안에 포개져 있었다.
상장에 적힌 내용을 읽은 레녹이 웃었다.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증이라. 마침내 결정이 된 겁니까?”
“사실 진작에 됐어야 하는 일이지. 내부 심사는 진작 끝났는데, 중앙의회에서 개입해 검수하는 바람에 좀 늦어졌네.”
학장이 신난 듯이 액자를 두들기며 외쳤다.
“원래라면 자네가 논문을 발표한 직후 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의회의 인증을 받았으니 다른 도시에서도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건 좋은 일이지.”
“이런 수료증을 주는 줄은 처음 알았군요.”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거야.”
뿌듯한 미소를 지은 학장이 레녹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제 자네는 시의회 공인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료자이자, 우리 라바테논 마법대학의 정식교수일세.”
“…….”
박사학위와 정식교수라.
레녹은 그제서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학장이 내려놓은 수료증을 바라보았다.
공용마법 발표 이후로 반쯤은 교수라 불리곤 했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정식 직책은 아니었던 바.
그것을 이제서야 온전한 방식으로 전달받게 된다는 사실은 감회가 남달랐다.
8레벨의 위계. 대마법사의 경지. 만화경의 심상과 피에 물든 견뢰의 행적.
레녹이 그동안 손에 넣은 명성과 권능에 비하면 빛이 바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레녹이 누군가를 죽이고 투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증거다.
목숨을 걸고 피 튀기며 싸워왔던 시간만큼이나, 연구실에 눌러앉아 마법을 연구해온 시간에도 의미가 있다.
그것을 생각한 레녹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료증을 집어들었다.
“감사합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군. 지금껏 학교를 위해 헌신해 주어서 참 고맙네.”
학장이 살짝 울컥한 듯이 눈시울을 훔치며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왜 이렇게 제자들이 계단을 밟아가는 모습이 마음을 울리는지…….”
레녹이 정색했다.
“계단을 오르지는 않았습니다만. 비유가 잘못됐군요.”
“그게 그렇게 단호하게 교정해야 할 정도의 말이었나요……?”
카시아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면서도, 기뻐하는 학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바일라 소장님을 불러올게요. 에반의 교수직 취임을 축하하는 의미로 술을 준비해두겠다고 하셨어요.”
“아, 내게도 이런 날에만 꺼내는 귀한 술이 있네. 바실리스크의 송곳니를 푹 담가 만든 독술인데, 셋이 먹다 넷이 죽어도 모른다고 아주 소문이 자자-”
“당장 버리지 않고 뭐하는거예요?!”
[부우, 부우우~]비명을 지르며 경악하는 카시아와, 그 소리에 쿨쿨 자다 깨어난 털뭉치 정령이 다가와 레녹의 다리에 몸을 부비적거렸다.
[……흐음. 흐으음~]품 안에서 굉장히 불편한 기색으로 꿈틀대는 전뇌정령의 반응에, 레녹이 웃으며 다비를 쓰다듬었다.
“몇 달 만에 보는 건데, 인사라도 해주지 그래.”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다구요.]다비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비좁은 레녹의 품 안에서도 자랑스레 가슴을 쭉 펴며 외친다.
[저 녀석이 학교에 눌러앉아 콧방울이나 만들면서 쿨쿨 자는 동안, 저는 벌써 여섯 개의 꼬리를 만들고 나날이 성장을-]“그래, 알았다.”
다비의 주둥이를 두들기며 일어난 레녹이, 곧바로 외투를 갖춰입고 문고리를 잡았다.
바실리스크의 맹독을 알코올과 몇 배율로 희석시켜야 치사량에 미달할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학장과 카시아가 즉시 고개를 휙 돌렸다.
“에반? 어딜 가는 거예요?”
“같이 한잔 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죄송하지만, 오랜만에 바깥에 나온 김에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처리해둘 생각입니다.”
외투를 걸친 레녹이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에, 시의회의 제안 역시 정리를 하고 오는 게 편하겠죠.”
“……시의회의 제안이라면.”
“네.”
문고리를 잡은 레녹이 곧바로 연구실을 뒤로하며 대답했다.
“바일런 연구소장 자리. 그쪽에서 준다는 걸 사양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쿵!
굳게 닫힌 문 뒤에서 학장과 카시아가 멍하니 시선을 마주했다.
“어라?”
“……방금 전까지 꽤 훈훈한 분위기 아니었어요?”
* * *
파바바밧!!!
요란하게 터지는 카메라의 불빛.
마치 기관총처럼 귀를 따갑게 만드는 셔터소리가 겹쳐 들린다.
35번 구역과 36번 구역 사이에 위치한 화이트스톤 국립공원.
평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산길 한복판에는, 수백이 넘는 취재진이 진을 치고 단 한 사람의 등산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바일런 교수님!!”
“교수님, 이쪽으로 한 번만 돌아봐 주세요!”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혹시 이번 사태에 대해 남기실 말이 있다면 저희 단독 인터뷰로 1면에 실어드릴 수-”
“…….”
레녹의 목소리를 한마디라도 담기 위해 녹음기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재빨리 막아선다.
그런 경호원들 사이로 말 한마디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레녹의 모습.
연구소로 향하는 길을 오르는 그 모습은 일말의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정적이었다.
기자들이 그런 레녹의 반응을 보며 수군거렸다.
“눈에 초점이 없어. 피로에 절어 보이는군.”
“연구에 미쳤다더니, 그 말대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시의회에서 저 교수를 그렇게 찾던 이유가 있지. 의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워커홀릭 아닌가.”
“공용마법 연구를 하고 있었을까? 학습장치에 새로운 마법이 추가되는지 소식이라도 알면 조회수가 폭발할 텐데.”
일련의 폭발사태 이후 새롭게 단장한 화려한 연구소 정문에는, 이미 수십 명이 넘는 연구원들이 직접 레녹을 마중나와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이 성큼 앞으로 걸어나와 레녹의 손을 붙잡았다.
“바, 바일런 교수.”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라파엘이 말했다.
“바일런 교수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소. 정말 환영하오.”
“…….”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에반이 순식간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워 올렸다.
“반갑습니다. 라파엘 교수님.”
“나, 나를 아는가?!”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라파엘의 대답에, 에반이 잡힌 손을 악수하듯 부드럽게 흔들었다.
“교수님의 마력입자 병렬배치 이론에 대해서는 저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기존의 마력이론과 상반되면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고려해 볼 수 있도록 범용성을 신경 쓴 흔적이 인상적이더군요.”
“허억……!! 그, 그걸 어떻게!”
“제가 논문을 쓸 때 느꼈던 것을, 아마 교수님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라파엘을 보며 에반이 웃었다.
“교수님께서 저를 대신해 연구소를 먼저 맡아주셔서 다행입니다. 서로에게 배울 점이 많지 않을까 싶군요.”
“나, 나야말로 그 말을 하고 싶었네. 어떻게 이렇게 내 심정을 잘 알고 있는 건지……!!”
몇 마디 대화 만에 에반에 대한 호의가 최대에 달한 라파엘의 모습을, 헤이워드가 옆에서 경악한 기색으로 지켜본다.
하지만 라파엘은 주변의 반응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에반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은 뒤 곧바로 그를 연구소 안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자네를 위해 바일런 연구소의 연구성과를 숙지하며 난 이미 이 프로젝트에 흠뻑 빠져들었네. 지금 바로 소개해 주지!!”
“영광입니다.”
“공용마법체계는 정말 대단한 성과야. 마음 같아서는 몇 년이고 여기 머무르며 나와 자네의 연구를 병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
수십명의 연구원과, 수백의 취재진, 그리고 그와 비슷할 정도로 몰린 구경꾼들이 연구소 안으로 밀물처렴 밀려들어 간다.
그 중심에서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떠들며 환희에 찬 라파엘과, 그 말을 들으며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에반 바일런의 모습.
“잘됐군.”
그리고 그런 연구소의 정경을, 레녹은 연구소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암반 끝자락에 걸터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가디건을 걸친 채, 연초를 문 채로 지팡이를 깔고 앉은 조용한 모습.
하지만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거리를 뛰어넘어 지켜보듯 초점이 깊게 가라앉아있다.
“화신체를 이용한 분신운용이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이야.”
멀리서 라파엘과 함께 연구소를 돌아보기 시작하는 에반을 보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에반 바일런을 흉내내게 시키는 건 어렵지 않고, 조금만 더 연습하면 빅터도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가면쟁이를 흉내 내면 다른 유기체들이 많이 놀랄 텐데요.]“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지.”
곰곰히 생각하던 다비가 수긍했다.
“……어쨌든, 마력을 배분하고 패턴을 쪼개 동시에 투사하는게 중요해. 이건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레녹이 한쪽 눈을 감고 화신체 조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화신체를 안정시켜서,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도 원활한 조작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다.”
연구소 습격 사태에서 라파엘을 통해 손에 넣은 자연술식의 안정화 연구일지.
술식의 내외부를 동시에 관측해 안정화시킨다는 요령을 숙지한 레녹은, 그것이 화신체에게 꽤 손쉽게 적용 가능한 요령임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레녹이 화신체를 조작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직접 화신체를 외부에서 관측하고 있는 바.
필요한 것은 화신체 내부에 관측을 위한 새로운 투시술식을 집어넣고,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관측해 형태를 고정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광라무해궁의 사도화로 인해 그 존재가 한없이 불안정해진 화신체를,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로 조작해 형상화시킬 수 있는 바.
레녹은 그렇게 안정된 화신체를 에반의 모습으로 변장시킨 뒤, 그것을 곧바로 연구소 방문 일정에 자신을 대신해 출격시켰던 것이다.
“50, 75, 63, 82. 정지.”
일정한 거리를 넘어선 순간 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에반의 표정이 살짝 굳어버린다.
곧바로 에반의 화신을 멈춰 세운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제야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분신.
“대략 81m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화신의 조작이 뻑뻑해지기 시작한다.”
레녹이 중얼거리는 말을 다비가 품 안에서 전자 스크린에 열심히 받아적었다.
“7.334m 간격으로 멀어질 때마다 마력소모가 곱절로 늘어나고, 자연술식의 요령으로 안정화시킨 화신체의 흔들림이 강해지는군. 마력을 그만큼 투사하면 괜찮아지지만, 전달 과정에서 손실도 심해져.”
레녹 자신이 직접 영창해 부리는 마법이라면, 본래 이런 식으로 마력소모가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화신체는 레녹 자신이 아니라, 또 다른 자아를 강제로 각성시켜서 만들어낸 술식생명체다.
하물며 레녹의 화신은 레녹 자신의 자아가 아니라, 구세계의 권사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존재.
레녹이 아무리 정교하고 섬세한 조작솜씨로 화신체에게 마력을 전달해 봤자, 화신체가 받아먹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102. 121. 156. 틀렸어. 150m를 넘어가면 그때부턴 사실상 통제 불가능이다.”
짜증스레 고개를 꺾은 레녹이 지팡이를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1세계의 권사는 마력인지능력 자체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군. 내 생각보다 지나치게 수율이 낮아.”
[자리를 옮길까요?]“아니, 여기서 더 가면 연구소의 보안시스템에 발각당할지도 모른다. 일단 조심하는 게 좋겠군.”
저렇게 많은 인파 사이에서 화신체를 조작하는 것은 처음인 만큼, 레녹 역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최악의 경우 에반 바일런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 레녹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건 막아야 할 터.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의 기척과 마력의 변동에 유심히 주의를 기울이던 그 순간.
후욱!!
귓가에 뜨거운 바람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잔뜩 온도를 올린 열풍 같으면서도, 마치 형태와 의지를 갖추려는 듯한 묘한 움직임.
레녹이 그것을 인지하고 날카롭게 시선을 아래로 뻗은 그 순간.
쿠지직!!
발아래 흙더미가 들썩이더니, 시체 한 구가 튀어나와 그대로 고개를 뒤로 홱 젖혔다.
“아, 아…….”
상반신만을 흙더미 위로 빼놓은 채, 성대를 가다듬는 것처럼 묘한 신음을 흘리는 시체.
“아아아아- 아, 들리나?”
순식간에 음정을 조정해 언어를 토해낸 시체가, 암반 아래쪽에서 레녹을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기 어려울만큼 썩어 문드러진 얼굴. 눈알이 제대로 붙어있지 않을 만큼 오래전에 죽은 시체.
레녹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시체가 먼저 짤막한 감상을 토해냈다.
“인상적이로군.”
“…….”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인 시체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발칸의 음지를 지배하는 대마법사가 고작 인간 하나의 행보에 이리 정성을 들이다니. 내가 들은 소문과는 상당히 다른데.”
“자기소개조차 남의 입을 빌려서 해야 하는 놈에게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군.”
레녹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사령술사. 내게 볼일이라도 있나?”
시체를 움직여서 메신저 대용으로 사용할 정도의 고등술식.
하물며 레녹조차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울만큼 아득하게 먼 거리에서 시전이 가능한 계통이라면 하나뿐이다.
술식체계 전반이 죽은 시체를 대상으로 작동하는 사령술. 그것도 위계를 완성해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시체조작을 다루는 성위급 이상의 술자겠지.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난 그냥 메신저일 뿐이니까. 특히 이번 일에는 더욱 그렇지.”
시체가 끈적하게 눌어붙은 듯한 음색으로 웃었다.
“이번에 그쪽이 시의회의 일에 개입한 일에 대해, 무척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 일 처리 방식에 대해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지.”
“짧게.”
레녹이 멀리 보이는 연구소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시체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8레벨의 극위능력자들끼리 회담을 가질 예정인데, 관심 있나?”
“…….”
레녹의 시선이 다시 시체를 향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