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16
약먹는 천재마법사 916화
딥웹(5)
“설마 이런 테스트를 걸어올 줄은 몰랐는데.”
락타샤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르스노바에서 오백로가 유행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 아니, 오백로가 사실 술법진 학습에 도움이 됐었다고?”
“중앙도시의 풍습에 대해서는 딥웹에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유명한 풍습이라면 모르겠는데,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놀이까지는…….”
살짝 입술을 깨문 락타샤가, 그녀를 따라온 다른 관리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중에서 오백로를 해본 사람 있어?”
“어렸을 때, 몇 년 정도 잠깐?”
“심심풀이 삼아서 가끔 만져본 적은 있지.”
“프로 기사를 상대로 이길 정도는 돼.”
관리자들 역시 오백로에 대해 아주 문외한은 아닌 듯했다.
기본적으로 두뇌회전을 즐기는 이들인 만큼, 여러 가지 난해한 게임에 손을 대본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그 보드 게임, 하다 보면 확실히 파고들 구석이 많거든. 시간을 너무 잡아먹어서 그만뒀지만.”
“그렇지만 설마 술법진 학습을 위한 게임일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결계술사나 해볼 걸 그랬나?”
“…….”
옆에서 듣고 있던 레녹이 픽 웃어버릴 만큼 실없는 농담.
락타샤가 조금 안심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사실 나도 원격 오백로 배팅 사이트에서 마스터 랭크를 찍어본 적 있어. 대부분이 할 줄 안다니까 다행이군.”
“마스터 랭크? 그 정도면 우리 중에서 가장 잘하는 거 아니야?”
“다들 오백로를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는데. 앞으로는 내기할 때 오백로도 추가해둘까?”
“그것보다 일단 검색엔진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게 먼저야.”
락타샤가 그렇게 말하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인공지능이라 하지만, 여기는 딥웹 안이야. 우리도 보조 연산장치를 있는 대로 끌어다가 사용할 수 있다고.”
예상치 못한 조건에 당황하긴 했지만, 관리자들이 승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은 형태가 없는 무형의 전뇌공간.
관리자들 역시 육신을 버리고 네트워크 안에 자아를 의탁한 전뇌생명체들이다.
그들의 연산능력을 보조하는 연산장비 역시, 강인공지능과의 승부에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바.
그렇다면 굳이 승산을 가늠해 보지 못할 것도 없다.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선 락타샤가 신상 앞에 걸어 나가며 말했다.
“먼저 지원해 볼 사람? 없으면 내가 가장 먼저 나가도록 하지.”
* * *
[C12 반전. 축차 3방향 전환. F58부터 72까지 차례대로 순환하며 점유.]탁!
돌을 내려놓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인공지능 하이베르크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으로 제 승리입니다.]“빌어먹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상 앞에 펼쳐진 거대한 장기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리자가 좌절한 기색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 2049번째 승리군요. 다시 도전하시겠습니까?]“…….”
담담한 인공지능의 말에, 다른 관리자들이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각자 나름 오백로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며 검색엔진의 인공지능에 도전한 지 3시간째.
관리자들 전원이 이렇다 할 손도 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패배해 버린 것.
3시간 남짓한 사이 2000번이 넘는 게임을 둔 것은 사고가속으로 게임속도를 끌어올렸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그들은 눈앞의 인공지능을 상대로 단 한 번의 승리조차 거두지 못했다.
[본 인공지능은 오백로 테스트에 대해서는 기회를 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좌절한 관리자의 머리 위로 인공지능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오백로에 존재하는 행운은 실력 여하에 따라 통제가 가능한 영역으로, 변수조차 실력으로 제압이 가능합니다. 우연히 보안이 풀릴 가능성은 없으니 안심해 주시길.]“……지금 사람 놀리는 거냐?”
극히 드문 행운이 겹쳐도 눈앞의 인공지능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괜스레 투덜대며 물러서는 관리자의 모습을 두고, 레녹이 힐끗 시선을 뒤로 돌렸다.
하이베르크의 일방적인 승리가 50판 정도 이어진 뒤로, 관리자들이 접근 방식을 다르게 짜기 시작했기 때문.
전뇌공간에서 노트북 하나를 불러내서 작업을 시작하거나, 방금 패배한 게임을 복기하는 관리자도 있다.
군데군데 모여앉아서 자기들끼리 오백로를 두며 훈수를 두는 관리자들까지.
“야, 거기가 아니라니까. R22에 두고 반전을 노려야지!”
“아니, 그랬으면 내가 점유했던 13구역이 다 뒤집혀버린다고.”
“그래도 전진해서 상대 쪽 영역을 점유해야 할 거 아니야.”
“응 아니야. 그랬으면 너처럼 200수도 못 두고 돌 던졌어.”
“뭐 이 새끼야?”
서로 복기하고 훈수를 두다 언성이 높아지고,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하는 관리자들의 모습.
레녹이 그 모습을 흥미로운 기색으로 구경하는 사이 락타샤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틀렸어.”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군.”
“처음 50수 이후로는 상대의 의도가 읽히지조차 않아.”
락타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100수가 지난 뒤로는 완전히 균형이 무너지고, 150수 이후로는 버티기에 급급하지. 이기기는커녕, 얼마나 버텼느냐를 가지고 우리끼리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다고.”
“…….”
“계속 지켜봤으니 알겠지만, 한 국면을 두고도 의견이 갈려서 훈수도 잘 안 통해.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아서 보조연산장치를 가지고도 수싸움이 안되고.”
한번 수를 둘 때마다 점유할 수 있는 공간과 사방에서 뒤집히는 흑돌과 백돌을 일일이 고려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
온갖 해킹 툴과 복잡한 코드를 만져온 해커들조차 나중에는 운에 맡기듯이 수를 던지기에 급급하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승천자가 만들어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의 게임이라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승천자의 역량으로도 그 변수를 모두 측정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락타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검색엔진의 접속권한을 그쪽이 가져도 좋으니까, 협력해 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긴급 프로토콜을 해제하고 성능을 확인하고 싶어.”
“내가 검색엔진의 권한을 손에 넣으면 아까 논의한 분배 비율은 다 무용지물이 될 텐데.”
“지금처럼 검색엔진을 눈앞에 두고 멍청하게 구경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락타샤의 단호한 대답에, 레녹이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턱을 매만졌다.
“프로토콜의 해지라…….”
“대마법사인 당신이라면 오백로 실력도 굉장히 뛰어나겠지? 인공지능의 말대로라면 그런 게임이니까.”
락타샤가 확신하듯 말했다.
“우리들 중에선 당신이 가장 승산이 높아. 처음부터 그걸 알고 내가 부탁해 오길 기다리고 있던 것 아니야?”
“아니. 그것보다는 미리 확인해 보고 싶은 추측이 하나 있어서 말이다.”
“추측?”
“인공지능의 대국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군. 내 판단으로 미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어쩌면…….”
레녹이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더 지켜본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군. 이 이상은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다. 나도 참가하지.”
신상의 앞에 선 레녹이 락타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다만 승산이 높다는 말은 틀렸다.”
“……뭐?”
당황한 락타샤를 두고 돌아선 레녹이, 신상의 앞에 놓인 장기판 맞은 편에 섰다.
한참 자기들끼리 복기에 집중하던 관리자들 역시, 레녹이 나선 것을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술법 소양으로는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을 합해도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마법사의 도전.
거대도시에서 가장 흉험한 악명을 지닌 마법사가, 보드 게임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흥미를 갖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것.
“……견뢰에게 이런 보드게임을 할 인내심이 아직 남아 있었군.”
“도중에 두다가 판을 엎어버리기라도 하는 거 아니야?”
“홧김에 검색엔진을 지워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해. 대마법사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고.”
수군대는 관리자들을 무시한 레녹이 장기판 위에 손을 얹었다.
레녹의 참가 의사를 인지한 인공지능이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새로운 대국을 시작하시겠습니까?]“시작하지.”
파앗!!
그 순간, 장기판 위에 빼곡하게 놓여 있던 흑돌과 백돌이 순식간에 레녹과 신상의 양옆으로 회수된다.
텅 비어 있는 장기판 위에 서슴없이 선수를 두는 인공지능의 모습.
레녹이 흑돌을 쥐고 들어 올리려던 그 순간, 다비가 긴장한 기색으로 의념을 보내왔다.
[마스터. 혹시 연산장치가 필요하다면…….]“아니, 괜찮아.”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흑돌을 장기판 위에 내려놓았다.
“이 대국에선 연산장치가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다.”
뛰어난 연산능력만으로는 결코 모두 고려할 수 없는 무한에 가까운 변수.
반대로 우수한 술법적성만 가지고도 결코 승리할 수 없는 복잡한 규칙.
하지만, 중앙도시의 기술자들이 오백로를 검색엔진의 권한 갱신 조건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오백로를 잘 두는 것뿐이라면, 중앙도시 이외의 관계자들도 검색엔진에 접근할 수 있을 터.
레녹이 지금까지 지켜본 대로라면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와서야 레녹이 대국에 참여하는 것은, 지금까지 얻은 데이터를 가지고 자신의 추측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그렇기 시작된 대국이 이어지기를 2시간 12분.
[HA434 반전. BB312부터 398까지 순차적으로 점유 완료.]“……이럴 수가.”
거대한 장기판 위에 빼곡하게 놓인 흑돌과 백돌.
서로 간에 주고받은 1053수.
[장생(長生). 무승부로군요.]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던 첫 번째 게임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끝이 났다.
* * *
[기나긴 아르스노바의 대국 역사 속에서 장생(長生) 무승부가 나온 것은 오직 13번.]대국이 끝나자마자, 인공지능이 처음으로 레녹에게 던진 말은 그것이었다.
[13번의 사례 모두가 8레벨 이상의 대술법사들 간의 대국에서 발생한 사례였습니다.]“…….”
[장생(長生)이란 장기판 위의 모든 돌이 어떤 수를 두어도 죽지도, 뒤집히지도 않는 길항상태를 유지하는 불변의 모순. 오백로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무승부 규칙 중 가장 희귀하고도 가치 있는 일이지요.]인자한 미소를 지은 신상이, 대국 외에 처음으로 건네는 안내음성.
모든 사람이 숨소리조차 죽이고 인공지능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부드러운 눈길로 레녹을 바라보던 인공지능이 말했다.
[인간. 그대는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한 술법사군요. 특히 중요한 국면에서 수싸움을 거는 직관은, 본 인공지능의 연산능력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술법의 이치로는 규명할 수 없는 인과가 오백로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재능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는-]“이 정도면 충분하군.”
인공지능의 말을 모두 듣지도 않고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선 레녹을 보며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붙이지 못했다.
대마법사의 실력이 예상 밖이라 해야할까, 아르스노바의 기술력이 그만큼 비현실적이라 해야 할까.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여는 것은 락타샤의 몫이었다.
“일개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저런 찬사를 쏟아내는 건 해커 일을 시작한 뒤로 처음 보는군.”
담담한 눈길로 레녹을 올려다본 그녀가 물었다.
“어땠지? 첫판에 무승부를 거뒀으면, 다음에는 그래도 좀 더 승기를 잡을 수 있-”
“못 이길 것 같군.”
“…….”
눈을 끔벅거리는 관리자들을 보며,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실력과는 별개로, 패인을 없애는 능력만큼은 저쪽이 위다. 하루 아침에 뛰어넘기는 힘들겠어.”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설명해줄 수 있겠어?”
락타샤의 말에 레녹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오백로를 통해 술법진 작성 능력을 학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두 가지 능력이 완전히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야. 법진을 작성하는 능력과, 오백로를 두는 능력에는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지.”
“…….”
“저 인공지능은 그 중에서 술법적 소양으로 커버할 수 없는 오백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가진 술법적 판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를 두는데, 그때마다 저쪽이 우위를 가져가게 되더군.”
레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인공지능이 한 말을 들었다면 짐작하겠지만, 그간 아르스노바에서 진행된 오백로 대국 데이터를 저쪽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저 강인공지능이, 아르스노바에서 진행된 오백로 기보들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락타샤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방금 내가 만들었던 장생(長生) 무승부가, 아르스노바에서 몇 번이나 있었는지 언급할 리가 없지.”
“…….”
“심증이 있었을 뿐이지만, 이걸로 확실해졌군.”
피곤한 기색으로 어깨를 주무른 레녹이 말했다.
“판단이 밀릴 때마다 기보를 통해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고 있다. 대국 시간이나 요령 부족이 문제라면 단시간에 해결하기 어렵지.”
오백로는 진둔이 결계술을 보다 쉽고 편한 방식으로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낸 보드게임.
하지만 오백로의 모든 요소가 결계술의 적성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레녹이 오백로를 통해 진둔의 결계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진둔의 사상전역에서 일어난 기적이었기 때문.
오백로가 결계술의 적성을 판단하는 방법이 될수는 있지만, 오백로를 잘 두는 모든 사람이 뛰어난 결계술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진둔의 결계술을 정통으로 계승받은 레녹은, 당연히 오백로를 두는 데 있어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공지능과의 대국에서 상대방의 수를 이해할 수 없어질 때가 있었다.
그건 인공지능의 술법 적성이 레녹보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술법적 재능과는 다른 오백로의 ‘요령’을 인공지능이 익히고 있기 때문.
기억과 삶이 존재하지 않는 인공지능이 그런 요령을 익히고 있다면, 당연히 그 데이터베이스는 아르스노바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 수가…….”
“빌어먹을, 그건 반칙 아니야?”
레녹의 논리정연한 설명을 들은 다른 관리자들의 안색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아르스노바의 기보를 손에 넣지 않는 이상, 저 인공지능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뜻이잖아.”
“아니면 우리가 저 인공지능의 데이터를 뛰어넘을 만큼 많은 오백로의 기보를 수집하거나.”
“어느 쪽이든 불가능한 일이로군.”
중앙도시의 귀족들 사이에서 오백로가 얼마나 유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사이 쌓인 기보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할 터.
하물며 그 대국의 수준 역시 지극히 높았을 텐데, 그런 기보를 여기 모인 관리자들이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당신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너희들이 두는 대국을 보면서, 인공지능의 대응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지.”
“…….”
“그런데 내 판단으로 납득할 수 없는 수가 나올 때마다, 인공지능이 대국의 주도권을 가져가더군.”
신상을 돌아본 레녹이 말했다.
“그걸 보며 내가 지닌 소양에는 포함되지 않는 오백로를 잘 두기 위한 요령이 있음을 이해했다. 그 뒤로는 실제로 겪어보며 확인했을 뿐이지.”
“…….”
관리자들이 인공지능을 상대로 버티는데 급급할 사이, 이 마법사는 거기까지 내다보고 무승부까지 게임을 끌고 간 것인가.
대국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승패를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까지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 들다니.
의식만이 전뇌공간에 접속되어 있음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직관에 관리자들이 무심코 감탄했다.
“아르스노바의 인공지능을 상대로, 일부러 장생 무승부까지 대국을 유도했단 말인가…… 대마법사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
“우리처럼 보조 연산장치도 없이 승부를 거기까지 끌어간 거잖아. 그 머리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지?”
“견뢰, 인공지능의 비밀을 간파한 건 좋지만 이길 수 없다면 결정을 내려야 해.”
락타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색엔진이 숨겨진 주소를 은폐하던가, 아니면 추출해서 다른 곳에 보관해야 할 거야.”
“어째서지?”
“지금쯤이면 다른 해커들도 우리가 이 근방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테니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세력에게 검색엔진을 탈취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방화벽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최악의 경우 바이러스나 멀웨어를 투입해서, 손도 쓰지 못하게 오염시켜 버릴 수도 있어.”
락타샤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이미 아슬아슬한 상태야. 견뢰가 오백로 승부에서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긴 했지만. 지금은…….”
레녹이 당장 승산을 논할 수 없다고 인정한 시점에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 사실을 이해한 다른 관리자들이 나직하게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준비를 제대로 해서 왔어야 했는데.”
“설마 중앙도시의 인공지능이 오백로 승부를 걸어올 줄 누가 알았냐고.”
“천번이 있었다면 몰랐겠군. 내가 알기로 에반 마르티네스가 진둔의 결계술을 계승받았다는 소문이…….”
“야, 야!!”
“입 닥쳐. 뭐 하는 거야?”
누군가 흘리듯이 중얼거린 말에 다른 관리자들이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아버렸다.
견뢰와 천번의 결전이 끝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꺼내기엔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발언.
생각에 잠긴 레녹의 모습을 몰래 훔쳐본 관리자들이 방금 망언을 지껄인 관리자를 타박했다.
“아니,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견뢰보단 천번이 도움이 되었을 거란 건 맞잖-”
“본인이 듣고 있는데, 여기서 그 염열술사랑 비교하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어?”
“의식째로 소각당하고 싶어?”
관리자들이 레녹의 눈치를 보며 입을 막으려던 사이.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레녹을 향해 락타샤가 물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여기서 작업을 끝내고 주소지를 봉인하려 하는데 괜찮겠어?”
“…….”
“오백로의 기보를 모아서 새로운 대국 인공지능을 만들어볼 생각이야. 준비가 되면 다시 부를 테니까, 여기서는-”
“오백로의 기보에 수집할 가치가 있었다면, 굳이 그걸 버릴 이유가 있을까?”
“……뭐?”
“죽기 전에도 오백로를 두고 떠날만큼 애착을 가졌다면, 그 기보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버려두었을 것 같지는 않군.”
레녹의 독백에 락타샤가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도 이해할 수 있게-”
“잠깐 현실에 다녀오지.”
“뭐? 기다려! 지금 여기서 접속을 풀어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 없……!!”
당황한 락타샤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곧바로 몽상전의경의 영역 밖으로 걸어 나왔다.
후욱!!
전뇌공간의 영역이 껍질처럼 벗겨지며, 지하공동 바로 옆의 경사로 앞에 내려앉았다.
경사로 위에 걸터앉은 레녹이 품 안에서 온갖 물건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치익!
-아, 반. 볼 일 다 끝난 거야? 그러지 않아도 무슨 회담 관련으로 연락이 왔는데.
레녹의 인기척을 느낀 제니가 지하공동의 스피커를 사용해 전언을 보냈다.
-회담 참석 일정을 안내하기 위한 사절을 보내고 싶다더라. 조금 있으면 마탑에 도착한다는데, 혹시 만날 생각이 있으면-
“조금 뒤에 이야기하자.”
촤악!!
레녹이 품 안에서 거대한 두루마리를 꺼내 활짝 펼쳤다.
은은한 은빛이 맴도는 파피루스 아르겐테우스. 진둔의 요람에서 레녹이 손에 넣은 승천자의 술식병장.
마력이나 술식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유물급 아티팩트로, 생전의 진둔은 결계법진을 미리 각인하는 용도로 썼다.
레녹은 이 파피루스를 연비가 나쁜 점멸술식을 충전해 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던 바.
하지만 레녹이 파피루스를 통해 찾는 것은 미리 저장해 둔 술식이나 법진이 아니었다.
사락……!
까칠한 파피루스 표면을 맨 손으로 훑어낸 레녹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오백로의 기보가 실력을 늘리는데 유의미한 가치가 있다면, 분명 진둔도 기보를 보관하고 있었을 거다.’
죽기 직전 오백로를 통해 레녹에게 결계술을 전수하고 떠날만큼, 진둔은 스스로 만든 게임에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가 평생 동안 두었던 오백로의 기보를 허투루 버리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진둔의 요람에서 레녹은 기보가 적혀 있는 종이나 데이터를 본 적은 없다.
그렇다면, 진둔이 지금까지 두었던 오백로의 기보가 남아 있을 법한 아티팩트는 바로-
‘에단 바쥬르는 파피루스 아우레우스를 마력이나 술식이 아니라, 자신의 여행일지를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했었어.’
더듬거리며 파피루스를 짚어나간 레녹이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만약 파피루스 시리즈에 글귀나 문구를 저장하는 능력이 존재한다면, 분명 진둔도-’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으로 오백로의 장기판을 그리듯이 파피루스를 문지른 순간.
스르륵……!!
텅 빈 파피루스의 종이 위로, 오백로의 장기판과 백돌이 놓이는 것을 확인한 레녹이 멈칫거렸다.
레녹이 흑돌을 놓자, 파피루스 위에 다시 백돌이 새겨진다.
“그렇군.”
일련의 국면이 단발적인 우연이 아닌, 약속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깨달은 레녹이 웃었다.
“이건 기보가 아니라…… 진둔의 취미도구였던 건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몽상전의경의 영역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치직!!
락타샤가 놀란 표정으로 무심코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저, 정말 돌아왔군. 어떻게 한번 접속을 끊고도 멀쩡하게…….”
“검색엔진. 아직 남아 있겠지?”
“이제 막 정리할 참이었어. 별다른 방법이 없다면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한 번만 더 해보지.”
“뭐?”
락타샤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곧바로 신상 앞에 섰다.
도전자를 인식한 인공지능이 신상의 얼굴을 빌려 인자한 미소를 그리고.
[새로운 대국을 시작하시겠습니까?]“시작하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느긋하게 장기판을 두들겼다.
“다만 이번에는 내 실력으로 승부를 보지는 않을 거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별건 아니야.”
피식 웃은 레녹이 품 안에서 곧바로 길쭉한 파피루스를 꺼내 들었다.
촤악!!
파피루스 아르겐테우스. 결계술의 법진을 그리고 기록하여 저장하는 아티팩트.
하지만 진둔은, 이 기록장치에 자신이 평생 동안 두었던 오백로를 전부 기록한 뒤.
자기 자신과 대국을 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해 왔었던 것이다.
영원에 가까웠던 승천자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취미도구.
“어느 쪽 도구가 더 성능이 좋은지 겨뤄보자고.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