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45
약먹는 천재마법사 945화
답천(5)
초월자들의 방법론도, 선각자들의 해답조차 의미를 잃어버리는 세계의 마지막.
온갖 실패와 추태를 돌아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내면에서 대답을 찾고 있다.
결말을 인지한 순간부터 어렴풋이 깨닫고 있던 해답을 마주하기를 망설여왔던 것은.
그럼에도 아직까지 다른 초월자들이 남긴 대답을 파헤치고 있는 이유는.
그 모든 순간이 대답을 향한 여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네 번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레녹 자신이 그 대답이 될 수 있다면.
결과보다 우선되는 과정이 존재할 수 있다면.
“…….”
단장이 침묵하고, 교주가 한탄한다.
[가능성의 창조. 분기점의 개편…… 그것 또한 오직 그대만이 가능한 선택이 틀림없겠지요.]레녹의 대답을 이해한 듯한 단장과 달리. 교주는 레녹에게서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그러진 노이즈 너머로 교주의 시선이 일순 흐릿해졌다.
[이 세계의 모든 인과 중에서, 당신만이 우리를 쫓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군요…….]“…….”
담담하게 울려 퍼지는 교주의 말에, 레녹 역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이 맞았을까. 대답을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고민하면서도 결국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고 만다.
언제 다시 이런 순간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레녹 자신의 시간이 어디서 어떻게 끝나버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지금과 같은 우연은, 이끌리듯 대답을 던지는 필연은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은 언제나 손에 들어오지 않고, 때로는 바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소망과 염원을 품는 것마저 무지와 번뇌 속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
하지만 이렇게라도 전해두어야 하는 대답이, 세 사람에게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괴로워할 이유도 없지요…….]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교주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의 답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정해진 결과였기에.]“…….”
[운명을 뛰어넘는 순간 정해진 역할을 벗어나는 것은 필연. 각자의 길이 나뉘는 것은 우연의 이치.]레녹을 향해 천천히 돌아선 교주가 속삭였다.
[결국 어떻게든 우리의 기원은 순환하고 역행하며, 회귀하듯 원래대로 돌아오도록 설계되어 있지요. 그대라 해도 이 인과의 고리를 빠져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그렇겠지.”
레녹이 동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벗어나려 한다. 그것이 꼭 옳다고 생각해서만은 아니야.”
화아악……!!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듯 요동치고, 하늘의 빛이 강하게 점멸했다.
승천자 나오이즈 펜이 만들어낸 기적이 절정에 달해, 세계를 끌어내리는 찰나의 순간.
흑록색으로 뒤덮인 음울하고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레녹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달라지지 않은 채로는 무엇 하나 뛰어넘을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먼저 지나온 길을 답습하는 과정에 불과하겠지.”
“…….”
“운명이든, 운명이 아니든 아무래도 좋아.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고개를 젖힌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우선은 얽매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려 한다.”
[훌륭한 대답입니다.]천천히 레녹을 향해 다가온 교주가 중얼거렸다.
[예전의 내가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시작이 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지. 그보다 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인지…….]뒷짐을 진 채 속삭이던 교주의 말이 뚝 끊겼다.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고민하고, 생각을 이어붙이는 듯한 위화감.
의지와 행동 사이의 간극이 어색하게 끊어지며, 딜레이가 걸리는 듯한 묘한 반응.
불길한 침묵 속에서 공기가 날카롭게 달아오른다.
고개를 들어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교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문답을 마지막까지 이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도록 애석하게 느껴지는군요.]쩌억!!
그 순간, 교주의 등 뒤에서 세로로 된 순백색의 눈이 떠올랐다.
기억을 강제로 열어젖히며 갈라진 새하얀 눈동자.
마치 외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처럼 불길하고 창백한 염상이 레녹을 관통하듯 꿰뚫었다.
파앙!!
창백한 섬광이 레녹의 몸을 관통해, 부유하는 암영신전을 수직으로 가로지른다.
하지만 레녹은 갑작스러운 교주의 행동에도 놀라지 않고, 힐끗 시선을 뒤로 돌려세웠다.
“…….”
기억 속에서 답천의 기적을 행하는 일에 몰두하던 승천자 나오이즈 펜.
그가 어느새 레녹의 바로 뒤에 서서 레녹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텅 빈 해골의 눈구멍 안쪽에서 번뜩이는 흑록색의 안광.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듯,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레녹의 존재를 눈치챈 것처럼 강렬하고 섬뜩하게 번뜩인다.
[이 세계의 개념이 아닌 것에 감응하는 재능만큼은, 단연코 따라올 자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교주가 뒷짐을 진 채로 미소지었다.
[한낱 기억 속의 존재라 하더라도, 그와 내가 기억하고 있다면 진실. 이렇게 우리의 존재를 인지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단장과 교주 두 사람이 공유하는 승천의 기억.
세계를 초월한 두 사람이 같이 기억하는 풍경이기에,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현실에 가깝다.
그렇기에 나오이즈 펜은 승천의식을 진행하던 와중에도 그 특유의 감응력으로, 세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항하사미궁 최심부. 진둔의 요람에서 단장이 보여주었던 것과도 같은, 타인의 시간선을 강제로 침범하고 개입하는 신기.
[그대에게 나의 승천을 보여주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교주가 말했다.
[이미 그 순간의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시간선의 존재. 만약 나의 기억을 무대로 골랐다면, 즉시 이변을 눈치채고 이렇게 개입해 오려 하겠지요.]“교주.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단장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령술사가 외부 시간선을 인지하고 개입해 온 시점에서 성역의 붕괴는 필연. 기억 속에서 얼마나 버티느냐의 문제겠지.”
노이즈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교주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힘을 거둬. 여기서 끝낸다.”
단장의 말은 무척 간략했으나, 레녹은 그 말의 뜻을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교주가 기억 속에 외신의 눈동자를 띄워 올린 것은, 나오이즈 펜의 외부 시간선 인지를 막아 이 순간을 보존하기 위함.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교주의 대처가 필요 이상으로 광대했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리치 하나만을 잡아 멈춰 세울 수 있음에도 굳이 외부의 힘을 끌어온 시점에서, 다른 저의가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
단장은 그 사실을 교주의 반응과 동시에 눈치채고 제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미련을 남겨봤자 구차하기만 할 뿐…….]하지만 교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우리의 운명이 결말이 되기를 거부했다면, 먼저 거둬가야 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파앗!!
교주의 등 뒤에 떠오른 외신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번뜩이는 순간.
레녹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강제로 끌려 나오는 듯한 감촉이 일었다.
재능이나 그릇, 소질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에는 교주 역시 레녹에게 간섭할 수 없었을 테니.
본디 레녹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며, 후천적으로 부여받은 권한의 일부.
레녹보다 교주의 기원과 본질에 보다 가까운 힘이, 손목 끝에서부터 떨리며 끌려나온다.
키이이잉……!!!
세이나 나이드리가 레녹에게 남겨주었던 제사장의 권한.
교단의 신녀를 신녀로서 존재하게 하는 의식의 집행능력이 레녹의 몸에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드리의 이름을 통해 이어지는 힘은, 본디 나의 아이들을 위해 쓰여야 할 권리…….]교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앞길에는 방해만 될 힘이니, 여기서 거두어 가겠습니다.]“아니.”
하지만 레녹은 그런 교주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권한의 유무 따위로 결정될 결말이 아니지. 이건 고작해야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대답을 정한 시점에서 모든 가능성은 내 안에 깃들어야 할 인과.”
침묵하는 교주를 보며 레녹이 웃었다.
“그러니 더 이상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겠다. 설령 당신이 상대라고 해도 말이야.”
콰직!!
그 순간, 레녹의 등 뒤에서 창백한 날개가 공간을 뚫고 펼쳐지며 저릿한 전성을 터트렸다.
[교주-!!!!!]기억의 궁전과 비틀린 균열이 뒤섞여서 어그러지고,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세계의 균열. 실시간으로 무너져내리는 교주의 성역.
쿠과과과과과!!!!
바다가 쪼개어 부서지고, 하늘이 물처럼 흐릿하게 녹아내린다.
기억의 성역이 소멸해 무너지는 와중에도, 하늘에 떠오른 외신의 눈동자만은 이렇게 선명하다.
그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격렬한 전성.
[나의, 나의-]성역의 균열 사이로 오염된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그대로 솟구쳐 이 비처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증오스러운 신이시여-!!!!!]키이이이이잉!!!
추락한 대천사의 염상이 미친 듯이 발광하며 성역의 붕괴를 막아세운다.
자신의 남은 시간을 전부 불살라서라도 자리하겠다는, 그 막대한 사념이 레녹과 교주 사이를 가로막고 터져 나왔다.
[가여운 나의 천사. 그리운 나의 사도입니까…….]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교주가,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느릿하게 웃었다.
[그대 역시 나를 만나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거친 모양이군요.]“…….”
승천문 너머에서 깨어나, 뒤늦게 레녹의 손에 거두어진 2세계의 대천사, 카슈인.
교주를 만나는 것을 대가로 대천사의 연민 안에 깃들게 했던 천사의 존재를 레녹은 잊지 않았다.
아나테마를 쓰러뜨린 직후 레녹은 카슈인을 꺼내 앞으로 있을 삼자대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카슈인이 교주의 존재를 인지하고 난입할 수 있게 예비해 두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교주가 레녹에게 손을 쓰려 한다면, 카슈인의 난입을 통해 잠깐의 틈을 마련하기 위해.
[두 번째 실패는, 나로서도 무척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교주 역시 카슈인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레녹의 안배임을 눈치챘는지, 순간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럼에도 그는 카슈인이 발작하듯 터트리는 빛을 한걸음에 지나쳐, 대번에 레녹의 곁에 섰다.
후욱!!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던 시도였다면, 훌륭하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그렇게 말하며 레녹을 향해 뻗은 교주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성역의 붕괴와 카슈인의 난입에도 일체 반응하지 않던 단장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지만, 교주가 레녹과 접촉하는 순간만큼은 개입하려 한다.
레녹이 그것을 직감했다면, 교주 역시 확신하고 있겠지.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나의 실수를 모두 끌어안고 싶지만…… 좋습니다.]교주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느릿하게 손목을 꺾어 손을 거두었다.
[그대가 나이드리의 이름조차 가능성으로 삼고자 한다면 허락해드리지요.]교주가 빙그레 웃었다.
[결국 그것조차, 내가 운명 앞에서 틀리지 않았다는 방증이 되지 않겠습니까…….]“…….”
흐릿하던 목소리가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해진다.
힘을 잃고 늘어지던 말꼬리 역시, 거짓말처럼 단단하게 곤두섰다.
[어느 쪽이든 내게는 기다림조차 즐거움이 되겠지요.]레녹에게 등을 돌린 교주가 미소지었다.
[언젠가 찾아올 그 날, 다시 뵙겠습니다.]“그러지.”
찰나의 순간 벌어진 교주의 변덕과 단장의 개입.
하지만 레녹은 그럼에도 평정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슈인이 난입하는 순간 성역의 균열 사이로 빠져나갈 방법은 확보한 상황.
교주는 강대하고 신비로운 초월자이나, 아직 기억 속에 뉘인 존재를 일으켜 세울 생각은 없는 듯하다.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무엇 하나 묻지 못했지만, 아나테마의 시체가 레녹의 수중에 있다.
이 세계에서 레녹이 처음으로 마주한 금제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
올리비에라가 외겁도시의 비밀을 대가로 걸어서까지 원했던 우연과 행운의 인과.
그 시체를 활용한다면, 단서조차 얻기 힘들었던 프로젝트의 비밀에 보다 깊게 접근하는 것 역시 가능할 터.
그렇다면 오늘 여기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쿠구구구구!!!
본디 이 세계의 시공이 아닌 성역이 소멸하는 소리가, 고막 안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갈라지는 균열 너머로 단장이 돌아서고, 교주가 뒷짐을 진 채 빙그레 웃었다.
세 사람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성역의 풍경이 수천 갈래로 찢어지고.
카아아앙!!!
현실에 존재하는 위성도시의 풍경이 레녹의 눈앞에 펼쳐졌다.
“쿨럭……!!”
부서지는 성역 밖으로 걸어 나온 레녹이 기침을 토해내며 허리를 숙였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레녹의 손 아래로, 검붉은 코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단장과 교주 두 사람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부터 마주하고 있던 강대한 영압.
영혼을 짓누르는 압력이 사라진 뒤에야, 적응하지 못했던 몸이 현실에서 그 반동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
뚜둑!
머릿속의 혈관이 끊어지며 생각의 속도조차 멈춰 세우는 듯하다.
필사적으로 흐려지는 의식을 잡아세운 레녹이, 힘겹게 시선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레녹과 함께 있던 신녀 우레카 나이드리의 모습도, 성역 선포의 기축으로 사용했던 석장도 없다.
미간이 관통당한 오슈토 듀리스의 시체만이, 먼지가 흩날리는 폐허 한복판에 힘없이 쓰러져 있을 뿐.
“…….”
우연과 필연의 교차점. 그 사이에서 주고받았던 기원의 대답.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어주었는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결말을 향해 멈추지 않으리란 사실은 분명하다.
단장과 교주가 레녹의 대답을 듣고, 변수로서 삼으리란 것 역시.
하지만 그럼에도, 레녹 역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교주와 단장이 직접 만나서 시기를 조정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두고 레녹의 존재를 극도로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세 사람의 시간이 겹치는 기적이 끝났다.
찰나에 가까운 대담 속에서 레녹은 답을 정했고, 자신이 곧 가능성이 되고자 할 뿐.
그렇다면 이제는 나아가야 한다.
절뚝이며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힘겹게 몸을 끌고 창백한 빛이 터져 나오는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나테마의 시체와, 그 위에 꽂아두고 온 대천사의 연민. 마지막 순간 레녹을 도와 성역에 난입한 대천사의 영혼.
이번 회담을 마무리하고 수습하는 일은,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