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46
약먹는 천재마법사 946화
금제(1)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며 따스한 햇빛이 지상을 내리쬔다.
사상신뢰의 벼락을 묘비삼아 고개를 땅에 처박은 아나테마의 주검.
그 바로 옆에 비스듬히 꽂혀, 눈부신 성광을 발하는 대천사의 연민.
구세계의 대천사, 카슈인의 영을 담은 유물급 아티팩트가 거칠게 번뜩인다.
교주와 만나고도 눈앞에서 그의 존재를 놓쳐 버린 대천사가, 얼마나 흥분해 있을지는 뻔한 일.
하지만 땅에 박힌 스태프를 곧바로 집어드는 대신, 마력을 끌어올려 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익숙한 기척의 흔적을 감지해 낸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발 늦었나.”
레녹이 성역 밖으로 탈출했을 때는 이미 모습을 감췄던 교단의 신녀.
우레카 나이드리가 이 장소를 재차 방문했다 떠났음이 확실해졌기 때문.
아르스노바에서 추방당한 아나테마의 이름은 금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희귀한 힘.
교단 측에서도 아나테마의 시체를 레녹에게 순순히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겠지.
사상신뢰의 벼락 때문에 시체를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무언가 손을 쓰려 했을 것이다.
‘체모나 혈액을 가져갔다면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여자가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지는 않았겠지.’
우레카 나이드리는 확실한 결과를 내기 위해 신녀의 몸으로 현장에 직접 나서는 광인이다.
굳이 시간을 내어 아나테마의 힘을 탐한 시점에서 어설픈 성과로 만족하지는 않았을 터.
눈에 띄지는 않으면서도, 신체 부위들 중에서 영적인 효험이 있는 부위를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
‘심장같은 주요 장기를 건드리지는 못했을 거다. 그럼에도 반동을 감수하고 손댈 만한 부위라면-’
아나테마의 얼굴을 뒤집고, 그의 눈가를 들여다본 레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왼쪽 눈꺼풀 아래 있어야 할 사도의 눈이, 도려낸 것처럼 텅 비어 있었기 때문.
“눈동자였군.”
영적인 개념에서 눈은 영혼을 비추는 창.
죽은 아나테마에게서 신녀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확이란 그 정도였겠지.
전리품의 일부를 빼앗긴 셈이지만, 레녹은 이 자리에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따지자면 사도를 죽이고 시체를 점유한 것은 레녹인 데다, 신녀가 성역을 펼치지 않았다면 교주를 만나는 것조차 요원했을 테니.
무엇보다 신녀 역시 아무 대가 없이 눈을 빼가지는 못했을 터.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녹의 벼락이 깃든 아나테마의 시체다.
그 몸에 손을 대어 눈동자를 도려내는 잠깐의 공정조차, 신녀에게 분명 상해를 남겼을 터.
게다가 우레카 나이드리는, 마지막까지 레녹의 몸에 깃든 제사장의 권한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건 세이나가 레녹에게 남긴 권한이, 교단 내부에서도 완전히 전승이 끊겼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분명 차후 교단을 상대할 때는 이 지식의 부재를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거칠게 발광하는 대천사의 연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교주-!!!!]우우우웅!!
강렬한 성광을 내뿜으면서 진동하는 대천사의 연민.
지팡이 끝에 달린 무지갯빛의 보석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사나운 전성을 토해냈다.
[어디냐!!! 그분은, 그분은 어디에 있지?!!!]“교주는 떠났다.”
레녹이 조용하게 대답했다.
“타인의 기억 속에 머무는 존재다. 이런 시기가 아니라면 만날 기회조차 없었겠지.”
카슈인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나와 약조하지 않았더냐!! 다시, 그분과 다시 만나게 되리라 믿고-!!!]“카슈인. 착각하지 마라.”
콰직!!
대천사의 연민을 발아래 다시 내다 꽂은 레녹이 싸늘하게 말했다.
“기회는 주겠으나 그 이상은 네 역량에 달렸다 말했을 텐데. 분명 그 사실에 대해 합의하지 않았나?”
[빌어먹을, 하지만-!!!!!]분을 삭이지 못하고 카슈인이 자신의 의념을 쩌렁쩌렁 토해냈다.
[한마디도 닿지 못했다. 단 한마디도 그에게 닿지 않았어!!!!]“…….”
[이럴 거였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대천사의 연민이 의지에 호응하며 성광의 폭풍을 터트렸다.
먼지가 흩날리고, 폐허 위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듯 수풀이 자라났다.
“…….”
교주를 만나기 전까지 희미해져가던 카슈인의 감정과 의지가, 이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다.
시들어 죽어가는 꽃처럼, 반응조차 잃어가던 그가 교주와의 대면으로 다시금 강렬하게 되살아난 듯한 모습.
확인을 끝낸 레녹이 대천사의 연민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한마디도 닿지 않았지만, 분명 만났다. 그렇지?”
[……그래. 그렇기에 더더욱 이렇게 속이 끓어오르는구나.]카슈인이 절규했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모두 잊고 사라질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카슈인. 나는 약속을 지켰다.”
귀청을 울리는 대천사의 외침에도 레녹이 차분하게 말했다.
“교주와의 대면을 앞두고도, 너와 한 약속을 잊지 않고 네게 기회를 주었지. 내 말이 틀렸나?”
[…….]카슈인의 전성이 뚝 끊겼다.
그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음을 직감한 레녹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뿐이겠지.”
[그래…… 오직 너 하나뿐이겠지. 알고 있다.]망설이든 카슈인이 힘겹게 수긍했다.
[부탁한다. 그분을 다시 만나게 해다오.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나?]“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니야.”
레녹이 웃었다.
“다만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협력을 바라는 것뿐이다.”
[……적극적인 협력이라고?]“대천사의 권능이나 구세계의 지식. 네가 아티팩트 안에서 빈둥대며 소홀히 했던 일들 말이지.”
교단에 대해 깊게 알아갈수록, 레녹은 카슈인이 가진 지식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귀도 교단의 존재가 두 번째 세계에서부터 시작된 교주의 안배라는 사실은 자명한 바.
그렇다면 대천사의 좌에 올랐던 카슈인이 알고 있는 지식은, 교단에게도 유사하게 통용될 가능성이 높다.
“너 역시 나와 한 약속을 의심하며 회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켰고, 내가 그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대천사의 연민을 강하게 움켜쥔 레녹이 말했다.
“이제는 네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좋다. 그분께서 너를 기꺼워하신다면, 내게도 언젠가는 분명 다시 기회가 오겠지.]카슈인이 수긍했다.
[불안과 번민 속에서, 이대로 사라지는 것을 바래었으나…… 앞으로는 최대한 너의 입장에 맞춰 협조하도록 하겠다.]“합의가 끝났군. 그럼 이제 들어가 있어라.”
[뭐? 잠깐, 왜 기껏 이런 말을 하게 만들고-]시끄럽게 지껄이는 카슈인을 무시한 레녹이, 대천사의 연민을 그대로 코트 안에 쑤셔 넣었다.
성역에서 나오자마자 카슈인을 압박한 건, 지금만큼 카슈인이 절박함을 느낄 순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레녹 역시 교주의 간섭을 피하는 용도로 카슈인의 존재를 써먹은 만큼,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다만 카슈인과 대천사의 연민보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하는 일들이 남아 있던 바.
아나테마의 시체 수습. 회담의 마무리. 그 밖에 처리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찰나.
“아르마스……!!”
레녹의 등 뒤에서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녹색 머리칼과 길쭉한 귀. 파리한 안색의 레이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나테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양의 머리와 역관절, 발굽이 온몸에 기괴하게 섞인 채로 쓰러진 아나테마의 처참한 모습.
“이, 멍청한 자식이……!!”
인간의 모습을 되찾지도 못한 채 절명한 시신을 앞에 두고 레이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차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담으며, 벼락이 번뜩이는 사도의 시신을 향해 그녀가 무심코 손을 뻗은 순간.
“고작, 이렇게 죽으려고 그렇게……!!”
“거기까지.”
쐐액!
레녹의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가속한 형체가, 레이지의 어깨를 강하게 걷어차 튕겨버렸다.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레이지의 몸이 땅에 처박혀 주르륵 미끄러졌다.
“큭……!!”
“레이지 미스트라. 시스테마 아우룸의 일원인 당신이라 해도, 이 이상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어.”
레이지의 팔을 한 발로 밟은 누군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색의 슈트. 어둠에 녹아드는 흑발과, 그 아래로 은은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
찰칵!!
하관을 가리는 바이저에 손을 갖다대자, 레녹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벨린 마르시아……!!”
이벨린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지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회담에 나타나지 않았다 싶었더니, 아직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냐!”
“이번 회담을 상부에서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이벨린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테마의 현신과 동시에 원로원이 움직였고,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내가 파견되었어.”
“……!!!”
냉정한 시선으로 레이지를 내려다보며 이벨린이 말했다.
“위성도시 에타노크에서 진행된 아나테마의 반역. 이 사태의 핵심 관계자로서 당신과 슬레인 오닉스가 압송될 거야.”
[이런, 우리가 한발 늦었군.]이벨린이 레이지의 등을 밟고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허공에서 거대한 금속구체가 떨어져 내리며 이벨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아앙!!
지상에 추락한 전륜금구가 회전하며 충격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지축이 거세게 진동한다.
거대한 금속구체 위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올리닉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이벨린에게 말했다.
[현궁. 에이전트의 일을 그만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같은 설명을 반복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척뇌.”
이벨린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진작에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잖아.”
[…….]“아니면 내가 원로원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 지금 당장 설명을 듣고 싶은 거야?”
[오해가 있군. 나 역시 원로원의 의사를 거스를 생각은 없네.]올리닉이 나직하게 답했다.
쓰러진 아나테마의 시체와, 그 위로 내리 찍힌 번개의 묘비를 바라보던 올리닉이 말했다.
[다만, 에타노크 외곽에서 싸우던 다른 참석자들이 복귀하고 있네.]“…….”
[어리석은 전우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 정도는 함께 가지고 싶군.]“기수신궁의 수장이 이렇게도 감성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는걸.”
이벨린이 웃었다.
“좋아. 슬레인 오닉스가 도착할 때까지는 기다리지.”
“원로원의 손을 잡았다는 말을 길게도 돌려 말하네.”
레이지가 이벨린을 노려보았다.
“너희 종족은 언제나 그렇게 유리한 자의 편에 섰었지. 알고 있어.”
“이제와서 종족이니 뭐니 말해도, 아무런 감흥도 없거든.”
이벨린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원한다면 견뢰와 대담을 마치는 정도는 허락해 줄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잖아?”
“……아니.”
레이지가 그 말에 어깨를 떨다가, 이내 시선을 푹 숙였다.
레녹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그녀가,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됐어.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아니까.”
“…….”
일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레녹에게 빚을 졌다 생각하긴 하는 것일까.
자포자기한 레이지를 끌고, 이벨린이 레녹을 향해 걸음을 돌려세웠다.
“반.”
“와 있었군.”
“조금 늦었지.”
이벨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나중에 설명해도 될까?”
“마음대로.”
“…….”
8레벨 간의 회담에 이벨린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 뒤늦게 레이지와 슬레인을 체포하려 나타난 이유.
그리고 레이지가 비아냥댄 것처럼 원로원의 손을 잡은 이유.
레녹 역시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설명을 원치 않는다면 캐물을 생각은 없다.
“예의상 궁금한 시늉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지 않길 바라는 것 아니었나?”
레녹이 웃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슬레인을 체포하는 일에 손을 거들어줄 수는 있는데.”
“……괜찮아. 레이지와 슬레인 모두 교단 측 관계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이벨린이 레이지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다만 원로원은 이번 회담에 대해 직접 듣기를 원해. 아나테마의 변심 역시 중요한 이유고.”
올리닉 정도 되는 거물이, 원로원의 의사를 거스를 생각이 없다 말할 정도라면 문제가 생긴 것일 터.
발칸에 거의 개입하지 않던 원로원 측에서, 아나테마의 변심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였다.
“원로원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결심한 건가?”
“……그럴지도 모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벨린이, 이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슬레인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니었어? 기다렸다는 듯 도와주려는 거 보면 그 녀석이 영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남의 호의를 삐딱하게 해석하는 버릇이 생겼군.”
“슬레인과 레이지의 압송은 명분 상의 이야기거든.”
이벨린이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억지로 구금해 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오닉스처럼 중재자 일족이라면 더욱 그렇지.”
“중재자 일족이라고?”
“슬레인은 인간이 아니야. 그건 알고 있지?”
이벨린의 질문에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보다는 마수에 가까운 의념이었지. 다만 장생종은 아닌 것 같았는데…….”
“오닉스는 장생종이 아니라 환수종 출신이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족오(三足烏)의 핏줄이지.”
“……삼족오?”
회담을 주체했던 흑발적안의 남자가, 사실은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였다는 말인가.
“세개의 발로 균형을 상징한다고 중재자 일족이라 불리는데, 영계에 둥지를 트고 기거하는 걸로 알려져 있어.”
이벨린이 설명했다.
“회담에서 슬레인이 아나테마의 현신을 주도했던 것도, 그가 영계를 통해 현실에서 추방당한 아나테마와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렇군.”
슬레인의 신변을 압송하려는 이유를 이해한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테마가 그랬듯이, 슬레인 역시 교단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건가.”
“아르스노바의 귀족이 사도가 되었다면, 환수종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 무엇보다 비인외종은 타고난 감정 자체가-”
“잠깐.”
그 순간, 레녹이 손을 들어 이벨린의 말을 막았다.
이변을 눈치챈 이벨린이 즉시 마력을 끌어올리며 돌아선 순간.
“굳이 험담을 할 거라면 내 앞에서 해줬으면 좋겠군.”
후욱!
어느새 이벨린의 뒤에 서 있던 슬레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인간종의 감상에 일일이 화를 내거나 반박하지는 않는다. 무지는 설득이 아니라 이해와 존중의 대상이니.”
“…….”
레녹조차도 그가 모습을 드러낸 뒤에야 인지했을 만큼 희미하기 그지없는 기척.
마치 이 자리에 본신을 전부 두고 있지 않은 듯한 기이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영계에 둥지를 트고 살아가는 환수종이라면. 그 기원은 장생종보다는 정령에 가깝다.
본신의 격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계약이라는 형태에 의존하지 않고 현세에 머무르는 경우일 터.
“날 압송하러 왔다고 했나?”
레녹의 앞까지 걸어온 슬레인이, 자신의 양손을 들어 올렸다.
“형식적인 속박이 필요하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러지 않아도 원로원과는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
“…….”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한 이벨린이 수갑을 꺼내 슬레인의 양 손에 채우면서 말했다.
“미스트라와 함께 중심지구로 호송될 예정인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루 아침에 끝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말들이 있었지.”
슬레인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나테마의 시체가 쓰러진 폐허 근처에 다른 참석자들이 복귀하고 있었다.
거대한 금속구체 위에 선 올리닉. 뿔이 달린 짐승 위에 올라탄 하백.
키리야와 함께 돌아온 크로드와 기절한 페이샤. 미러 다이버의 수장, 마커스 트랭귈러.
회담에 돌아오지 못한 이들과, 미련없이 떠나버린 이들도 있다.
“시간이 없으니 가장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지.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의 처우에 대해서다.”
하지만 슬레인은 그런 이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대신, 견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나테마는 내전의 영웅으로서 사망 이후 장례절차까지 정해져 있었지만, 그가 사도가 된 순간 의미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
“따라서 아나테마 본인의 시신은 사망자가 아닌 자산으로 취급하여 견뢰 본인에게 온전히 양도한다.”
고요한 폐허 속에서 시선을 돌린 슬레인의 대답.
하지만 레녹은 굳이 이 시점에서 그 사실을 언급하는 슬레인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레녹이 아나테마를 죽이고 시체에 벼락을 박아넣은 시점에서, 소유권이 어디로 향할지는 정해진 일.
그렇다면 이미 정해진 사실을 기반 삼아, 이 자리에서 통보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또한 아나테마 본인이 생전에 자택에 봉인해 둔 중앙도시의 금기병장 역시 승계권한을 잃어버린 바.”
그런 레녹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슬레인이 재차 말했다.
“성전의 규약에 따라, 사도를 토벌한 당사자인 견뢰에게 소유권을 이전한다. 이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