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60
약먹는 천재마법사 960화
금제(15)
시간.
모든 변화를 상징하는 개념 중에서도, 가장 상대적이고 기준에 의존하지 않는 힘.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뒤로 그토록 갖고자 노력했건만, 아직까지도 그 본질에 손대지 못했던 능력.
천지만물의 모든 변화를 상징하는 후천팔괘의 선천이능.
레녹은 아나테마에게 팔괘법진의 이능 중 한 가지를 전해 받았고, 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깨닫고 있었다.
비록 시간이라는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고 다뤄내는 마법은 아닐지라도, 이것은 분명 그 편린을 움켜쥐는 이능.
위이이잉……!!!
빠르게 회전하는 법진이 발광하는 헤일로가 되어 날카로운 광채를 터트리고.
주변의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한 풍경 속에서 레녹은 그렇게 생각했다.
‘선천이능을 통해 시간을 다루는 것은 체감시간의 실질적인 조작에 가깝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거미의 앞다리가 느릿하게 휘어지고, 뺨을 스치는 물방울마저 허공에 멈춰 선다.
모든 것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레녹의 몸 역시 그들과 같은 속도로 느려지고 있을 뿐.
선천이능을 발동한 레녹의 의식만이, 극히 짧은 시간 속에서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이능을 발동한 시점에서 의식의 속도만이 영향을 받지 않고 움직이는 힘인 건가.’
의식이 시간을 앞서 가속한 것일까. 아니면 레녹의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느려진 것일까.
시간을 다루는 능력이 어렵고 난해한 것은, 술자 본인조차 정작 그 변화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 역시 변화하는 시간선 위에 서 있기에 시간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승천자들은 자신의 의식을 무한히 쪼개는 식으로 체감시간을 다루어 왔던 것이겠지.
팔괘법진의 선천이능 역시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술자의 체감시간을 조작해 인지능력을 극한까지 확장시키는 이 이능은, 어떻게 보면 승천자들이 사용하던 재주의 열화판에 가까웠으니까.
그건 아나테마의 이름을 타고 전해져 내려온 이 이능이 승천자의 재주를 인위적으로 흉내 낸 능력이기 때문이 아닐까.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거미줄을 향해 의념을 움직였다.
끼긱……!!
육체를 조작하여 이능의 수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현실의 시간 속에서 레녹의 몸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니.
중요한 것은 의지.
의념을 통해 물질계에 간섭하는 능력을 깨우쳐,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인과를 조작한다.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의지만이 기준이자 단위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면, 시간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거대거미가 펼친 수백 갈래 거미줄의 방향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천천히 뒤바뀐다.
의념을 기울여 거미줄의 방향과 위치를 하나씩 바꿔가던 레녹의 시간이 어느새 끝나고.
선천이능의 힘이 다하며 시간의 속도가 원래대로 돌아온 그 순간.
거미의 발아래 펼쳐진 거미줄이 모조리 엇나가며, 정확하게 거미의 동체를 사방에서 관통했다.
파바바바밧!!
[뀌이이이익!!!]자신이 뽑아낸 거미줄에 자신의 몸을 관통당하는 비현실적인 결과.
순식간에 허공에 다리와 몸통이 꿰인 채 몸을 뒤집은 거미가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서걱, 서걱!!
거미줄에 꿰인 몸을 발버둥칠 때마다, 거미의 몸이 마치 썰려 나가듯이 마구 토막이 나기 시작했다.
팔다리와 몸통이 조각나 떨어지고, 체액과 내장 조각을 그 자리에서 쏟아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이 토막 나고 있는 거미를 확인한 펠릭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반, 이건 대체……?”
“이 거미가 뽑아내는 건 평범한 거미줄 보다, 마력사에 가까운 물건이다.”
레녹이 손에 달라붙은 거미줄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내 의념이나 마력을 불어넣어서 조작권한을 빼앗아오는 건 어렵지 않아.”
“…….”
온몸이 토막 난 채로 경련하는 거미의 머리를 바라보던 레녹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한 번 거미줄에서 미끄러지면 거미도 제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지.”
[뀌에에에엑!!!]그 순간, 머리만 남은 거미의 입이 발작하듯 뛰어올라 레녹을 향해 달려들었다.
체액과 거미줄 파편을 내뿜으면서 마지막으로 레녹을 어떻게든 잡아먹으려는 듯한 섬찟한 움직임.
파지지직!!!
손끝에서 터져 나온 벼락이, 레녹을 향해 달려드는 거미의 머리 위로 내리찍힌 순간.
거미의 몸 안에서 수백 갈래 뇌전의 파편이 폭발하며 그 거체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뻐어어어엉!!!
풍성처럼 터져 나간 거미의 몸이 찢겨나가며, 체액과 다리, 더듬이와 내장을 흩뿌렸다.
“으으음……”
“X발, 좀 깔끔하게 죽여!!!”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광경에 펠릭스가 부리를 틀어막고, 페이샤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레녹은 태연하게 떨어지는 거미의 시체 사이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찾았다.”
“이 자식, 역시 비위가 약하다는 건 순 개소리였잖아.”
“감각을 차단해 둬서 잘 안 들리는군. 이걸 봐라.”
떨어지는 체액의 비를 피해 등을 돌린 레녹이, 손에 잡힌 무언가를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어두운 동력실 한복판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오색의 보주.
흉측한 거미의 몸 안에 숨겨져 있었다기에는 깔끔하고 아름다운 보석이다.
그것을 확인한 펠릭스와 페이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건…….”
“방금 그 거미새끼가 숨겨둔 보물이냐?”
“내단(內丹)이다.”
레녹이 보주를 두들기며 말했다.
“오래 살아온 영물이 특정한 기운을 품고 응축시켜 물질화시킨 물건이지.”
“…….”
“보통 굉장히 강력한 마력응집체로, 영약이나 촉매로 사용되며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레녹은 틈만 나면 옥션에서 온갖 촉매와 영약을 다량으로 사들이는 VIP 회원.
약물과 영약의 재료에 정통한 만큼, 레녹은 거미를 보자마자 그 몸 안에 내단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이 물건이 새로운 영약이나 약물의 제조에 있어서도 굉장히 효험 있는 물건임을 직감했던 바.
하지만 레녹이 이 내단을 두 사람에게 보여준 것은, 내단의 용도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영물이라…… 이상한 일이군.”
펠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환경에서 영물이 태어날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내단을 품은 영물이라기엔 지성이 없어 보였는데.”
영물이란 짐승이나 마수가 오랫동안 특정한 기운에 노출되어 힘과 지성을 얻은 존재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언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사하는 것이 정상.
하지만 방금 레녹에게 쓰러진 거미는 지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말을 할 줄 알았으면 진작 우리에게 둥지를 부순 걸로 개지랄을 떨었겠지.”
페이샤가 시큰둥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배때지가 터져나가는데 한마디 저주도 없이 뒤진다니, 벌레한테 그딴 인내심이 어디 있어?”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그 거미가 영물이 아니라는 건 맞다. 하지만 영물이 아님에도 내단을 품고 있던 것 역시 사실이지.”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했던 건 이 거미가 동력실에 자신의 둥지를 지어두었기 때문이다.”
“동력실에 둥지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영물이 아닌 거미가 내단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아주 강력한 기운이 동력실을 타고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지.”
“…….”
“하필 지하수도에서 그런 기운이 몰리고 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겠나?”
그제서야 레녹의 말을 이해한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그렇군. 우리가 찾던 장소가 바로…….”
“아나테마의 자택이 이 아래에 숨겨져 있는 거지.”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동력실 바닥 아래를 파고 들어간다. 준비해.”
* * *
흙더미가 무너지며 토사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리는 흙먼지 사이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쿠우웅!!
순식간에 균형을 잡고 두 발로 착지한 펠릭스가,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하수도 아래 이런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니…….”
세 사람이 지금까지 지나온 하수도의 아래 자리한 지하공동의 모습.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지하공동 안에 어떠한 악취나 오염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력실 바닥을 고작 십여 미터 파고 내려왔을 뿐인데, 아예 환경 자체가 달라진 듯한 위화감.
그런 공동의 한쪽 벽면에, 화려한 대문이 비스듬히 파묻혀 있었다.
“…….”
마치 거대한 저택의 대문을 뜯어내어 흙바닥에 묻어둔 듯한 기이한 광경.
하지만 문 너머에서 풍겨오는 강렬한 마력이, 주소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문 위에 보란 듯이 고풍스러운 필기체로 새겨진 누군가의 이름.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
그 이름을 따라 읽은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나테마의 저택이, 이렇게도 외진 외곽지대 지하에 매장되어 있었다니.”
“이 저택이 세워질 당시에는, 지금처럼 발칸의 구역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을 시기였을 거다.”
펠릭스의 뒤에서 다가온 레녹이 설명했다.
문을 빤히 바라보던 레녹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 저택이 매장되며 만들어진 시설이 하수도였다는 건 공교로운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 죽음과도 꽤 어울리는군.”
“……금기병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인간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금단의 무구라는 사실은 알고 있네.”
침묵하던 펠릭스가 물었다.
“대체 어떤 인간을 재료로 삼아 만들었기에, 그 아나테마가 이리도 애지중지하며 아껴두었는지 모르겠군.”
“나도 금기병장에 대해 아는 사실이 많지는 않다.”
레녹이 그렇게 대답하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만 고위계 초인을 재료로 삼을수록 생전의 능력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다는 소문은 들었었지.”
“…….”
인간의 몸은 나약하고 위태로우며 금방 망가지기 십상.
설사 그를 재료로 삼아 가공한다 해도 뛰어난 무구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금기를 어기는 배덕과, 여러 조건의 난해함을 극복해가며 만들어진 금기병장은.
말 그대로 생전의 초인이 사용하던 능력이나 공능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바.
그렇다면 어떤 능력을 지닌 초인을 재료로 삼아야만, 금기병장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무구의 능력이나 근원에 대한 이야기는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문고리를 잡은 레녹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났다.
“일단 금기병장이 시정부나 원로원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먼저다.”
애초에, 레녹은 싸움에 있어 특정한 아티팩트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바.
아나테마가 봉인해둔 금기병장이 레녹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무구인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있다.
다만 금기병장이 시정부나 원로원의 손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해 일단 회수하려는 것뿐.
그렇기에 레녹 역시 금기병장에 대한 일을 다급하게 처리하는 대신, 회담이 끝난 며칠 뒤에야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 또 그렇게 재미없는 이유만 대는군.”
페이샤가 낄낄대며 말했다.
“기껏 그런 물건을 얻고도 애물단지로 놔둘 거면 내게 달라고. 네놈처럼 복에 겨운 마법사보단 나한테 더 잘 어울리는 무기일지도 모르잖아?”
레녹은 페이샤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곧바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들어 올린 문고리를 문에 대고 가볍게 내리친 순간, 묵직한 울림이 지하공동을 타고 퍼져 나왔다.
쿵!!
“…….”
이어지는 침묵.
아무런 반응도 없는 문짝을 보며, 펠릭스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솟아오르듯이 나타났다.
눈을 감은 채 피눈물을 흘리는 기괴한 남자의 얼굴.
절규하듯 비명을 지르는 남자가, 입을 뻐끔거리며 목소리를 토해냈다.
=위대한 추방자. 긍지높은 반역자. 아르스노바의 개화. 중앙의 황금.
“…….”
=육천겁,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의 집.
“뭐 이리 등신 같은 수식어가 많아?”
페이샤가 투덜대는 사이, 문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긍지 높은 귀족의 초대를 받고 저택을 방문한 손님인가?
“아니.”
팔짱을 낀 채 문을 바라보던 레녹이 대답했다.
“어느 쪽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집에 방문하기 위해 합당한 질답을 거쳐야 한다.
문이 느릿하게 목소리를 다듬으며 물었다.
=아나테마가 아르스노바에서 추락한 샛별이 되었던 시기는 언제인가?
“모른다.”
=…….
태연한 레녹의 대답에 문이 침묵하고, 펠릭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 그렇게 대답해도 괜찮은 것 맞나?”
=그렇다면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지.
문이 노래하듯 물었다.
=아나테마가 그의 무훈을 노래로 만들 당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받은 적수는 누구인가?
“모르겠군.”
=아나테마가 구해낸 많은 생명들 중에서, 가장 소리높여 그의 보은을 외친 자는 누구였나?
“모른다.”
=아나테마가 여섯 번의 현신을 거치는 사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글쎄.”
=…….
문이 입을 다물고 굳게 침묵했다.
“자기애에 빠지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은 문답이로군.”
뒤에서 피식대며 레녹의 대답을 듣고 있던 페이샤가 조소했다.
“무슨 시답잖은 테스트를 하나 했더니, 이거 순전히 자기가 세운 업적이나 칭찬에 대한 것뿐이잖아. 역겹기도 하지.”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침묵하는 레녹을 향해 페이샤가 짜증스레 투덜대던 그 순간. 눈을 감은 문이 물었다.
=아나테마는, 죽었는가?
“…….”
=답변을 하지 못한 시점에서, 생사불문 자기혐오의 저주어절이 그대의 의지를 꺾어야 했을 텐데.
저택에 본디 안배되어야 있어야 할 저주문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이미 저주를 걸어야 할 술자 본인이,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
레녹이 말했다.
“내가 그를 죽였다.”
=그렇, 군…….
더듬대던 문이 천천히 말했다.
=이제 이 역할을 넘겨줄 사람도, 더는 찾아오지 않는 것인가.
“…….”
=들어가라…….
끼이익!!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면서 자택의 풍경이 일행의 눈앞에 펼쳐졌다.
오래된 문헌과 장식품이 쌓여 있는 나무 복도.
문을 열자마자 자욱한 향수 냄새가 훅 풍겨왔다.
“…….”
레녹이 천천히 문 너머로 걸음을 옮기고, 펠릭스와 페이샤가 뒤를 따랐다.
“야, 마법사.”
페이샤가 레녹을 부르며 계단을 가리켰다.
“난 위층으로 올라가서 먼저 찾아보고 있을 테니까, 1층에서 뭐 찾으면 말해.”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이군.”
레녹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아나테마의 무구가 탐이 나기라도 하나?”
“하핫, 그럴 리가 있겠냐?”
페이샤가 삐딱한 웃음을 지으면서 반문했다.
“그런 무기 하나 쥐었다고 네놈을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
“이 집이 매장된 지 수십 년이 넘었을 텐데, 향수 냄새가 X나 독하잖아.”
슬쩍 시선을 돌린 페이샤가 속삭였다.
“딱 봐도 뭔가를 숨기려고 뿌려둔 거지. 아까 저택에 달려 있던 말하는 문만 봐도, 뒤가 구리다는 건 뻔하잖아.”
“흠…….”
고민하는 레녹을 두고 페이샤가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아나테마 그 위선자 새끼가 뭘 숨겨놓은 건지 궁금해졌다. 먼저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페이샤가 순식간에 2층으로 사라졌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공포 영화를 보면 꼭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사라지곤 하지.”
“……꼭 그런 비유부터 시작해야 했나?”
“흠흠, 귀희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네.”
페이샤의 말대로 저택 곳곳에 향수 냄새가 돌기는 하지만, 어떠한 특이점이 보이지는 않는다.
수십 미터 지하에 묻혀 있는 것 치고는 평범한 저택의 풍경.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는 않는군.”
펠릭스가 난감한 기색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마 눈에 띄는 점이라면…… 자택을 장식하는 소품 중에서 꽤 정교하게 조립된 물건들이 많다는 것일까.”
“장식품만이 아니야.”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응접실의 문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문의 경첩. 창틀의 나사 부품. 모두 굉장히 섬세한 공정으로 만들어진 것들뿐이다.”
“아르마스 폰 아나테마의 취미라고 말하고 싶은 겐가?”
“글세…….”
물끄러미 저택을 돌아본 레녹이 중얼거렸다.
“그것보다는, 이런 특징조차 저택에 봉인된 금기병장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
“영향이라고……?”
“1층은 다 돌아본 것 같으니 올라가서 이야기하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를 살펴봐야 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군.”
“…….”
레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펠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와장창!!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시선을 마주한 레녹과 펠릭스가 곧바로 2층으로 움직였다.
“그리스번?”
“마법사, 여기다.”
평범한 저택의 풍경처럼 보이던 1층과는 달리, 2층에는 화려한 장신구들이 진열대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진열대 한복판에서 유리창을 깨부수고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는 페이샤의 모습.
레녹이 그녀를 보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작부터 도둑질인가? 답이 없군.”
“X발, 도둑질은 뭔 도둑질!”
페이샤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휙 돌렸다.
진열대를 발로 걷어차 박살 낸 그녀가, 쏟아지는 장신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뒤진 놈의 집을 터는 게 왜 도둑질인데? 이건 전리품이라고!”
“그야 아나테마가 남긴 자산은 모두 내 명의로 양도되었기 때문이지.”
레녹이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금기병장을 왜 회수하러 온 건지도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군.”
“…….”
“넌 지금 주인 앞에서 소유물을 훔치고 있는 거다.”
“……아무튼!! 일단 이거나 봐!!”
페이샤가 말을 돌리며 진열대 안에서 무언가를 홱 뽑아 들었다.
장신구가 아니라, 그사이에 매달려 있던 얇고 가느다란 실의 형상. 진열대 안에서 장신구들을 연결해 늘어뜨리는 용도로 사용되던 실이다.
끊어지지 않는 실을 잡아당겨 레녹의 눈앞에 뭉텅이로 늘어뜨린 페이샤가 말했다.
“이거, 평범한 실이 아니야. 마력사다.”
“…….”
“정말이군.”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펠릭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말도 안 돼. 저택이 매장당한 지 수십 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마력사가 남아 있을 수가…….”
마력사는 말 그대로 마력으로 만들어진 얇은 실.
당연하지만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마력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그 자리에서 흩어져 소멸해 버린다.
그럼에도 수십 년 넘게 방치된 이 자택에 마력사가 보란 듯이 남아 있다는 사실.
사람이든, 아이템이든. 저택 안에 마력사를 유지케 하는 원인이 남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장력은 평범하군. 마력사의 구성요소 역시 특출난 점은 없어.”
페이샤에게서 마력사를 받아든 레녹이, 양손으로 그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빤히 마력사를 내려다보던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 마력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나테마 본인의 것이다.”
“……아나테마의 마력사라고?”
그 말을 들은 펠릭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나테마는 분명 8레벨의 용술사라고 알고 있었네만…….”
“그 위선자 새끼는 중앙에서 실전된 자기 술식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
페이샤가 침을 퉤 뱉으며 웃었다.
“자기 자신에게 도취한 멍청이가 조작술식에 재능이 있었다면, 절대 숨기고 다니지는 못했을걸.”
“꼭 조작술사만이 마력사를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지. 마력사라는 매개체에 한정해서는, 다른 술사들 역시 구현은 가능하니까.”
실의 형태로 마력의 전도와 이동이 빨라, 조작술식의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작술사가 아닌 다른 술사들이 마력사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마력을 길고 얇게 실처럼 뽑아 쥐기만 하면 그것이 곧 마력사나 다름없기 때문.
마력사를 섬세하게 조작하는 일이 조작술식의 보조 없이는 난해한 일이라, 다른 술사들은 굳이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입자를 엮어 실의 형태를 취했지만, 마력의 얽힘만 놓고 보면 어설픈 부분이 있지. 말했듯이 실의 구성도 특출난 편은 아니다.”
레녹이 마력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뚜두둑……!!
조금 힘을 주어 잡아당기는 것만으로, 턱없이 손쉽게 끊어져 바스러지는 마력사의 형상.
손안에 남은 실밥을 가볍게 털어버린 레녹이 말했다.
“마력사의 완성도가 높지 않음에도 수십 년 동안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었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미 죽은 술자의 마력사조차, 처음 그대로 유지시켜 주는 힘이 이 저택 안에 존재하고 있다.”
“…….”
“저택 위에 둥지를 튼 거미가 영물이 아님에도 내단을 품고 마력사를 사용하던 이유도 그렇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마력사를 비롯한 계통술식을 보조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인 거다.”
“야, 마법사.”
뒤늦게 레녹의 말을 이해한 페이샤의 안색이 싹 변했다.
”설마, 금기병장의 능력이라는 게…….”
“아르스노바에서 가장 특별한 취급을 받아왔다는 특질계 술식.”
고개를 끄덕인 레녹이 마력사를 쥐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팔괘법진을 띄워올리는 것과 동시에, 카이세의 회중시계를 쥐고 역천의 마력을 마력사에 불어넣는다.
시간을 다루는 선천이능과, 시간을 거스르는 역천의 마력을 동시에 투사.
아나테마의 마력사를 매개체로 삼아, 이 저택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던 염상을 찾아낸 순간.
키리리릭……!!
레녹의 손 위에서 마력사가 뒤틀리며 특정한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에 이 자리에 존재했던 어떤 장비의 형상을, 흉내 내는 듯한 기이한 모습.
그것이 한 손에 끼우는 장갑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펠릭스가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손을 거머쥔 레녹이 말했다.
“아나테마가 숨겨둔 금기병장은 조작술식을 다루는 아티팩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