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61
약먹는 천재마법사 961화
금제(16)
“틀렸어. 장갑처럼 생긴 아티팩트는 보이지도 않아.”
3층으로 구성된 저택의 옷장과 창고까지 싹 뒤집어엎어 놓은 뒤에야 수색이 끝났다.
그제서야 별다른 수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페이샤가 구시렁거렸다.
“싹 다 겉만 번드르르하고 가치는 없는 물건이잖아. 허영심 쩌는 귀족다운 집이었군.”
2층 진열대에 놓여 있던 장신구 역시 마력이 담기지 않아 가치가 높지 않은 물건들뿐이다.
아티팩트는커녕, 아이템도 되지 못하는 물건을 쥐잡듯이 뒤졌으니 짜증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레녹은 연신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걸음을 돌렸다.
“다른 곳은 다 확인했으니까 1층으로 내려가지.”
“야,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빨리 말하라고.”
“아나테마가 저택에 기록이나 일지를 숨겨두었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나 싶어서 놔둔 것뿐이다.”
“시간 낭비하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페이샤를 무시한 레녹이 곧바로 1층을 향해 점멸을 사용했다.
계단을 무시하고 층계를 넘은 레녹을 따라 펠릭스와 페이샤가 내려오자, 레녹이 응접실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시작하기 전에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으니까.”
“저택을 잠깐 뒤져댄 걸로 다리가 아플 만큼 약골은 아니라.”
비아냥대면서도 맞은편에 앉는 페이샤와, 바로 옆자리에 팔짱을 낀 펠릭스의 모습.
“아까 펠릭스와도 이야기했지만, 저택의 장신구나 가구들은 유난히 정교하게 제작된 물건들이 많아.”
레녹이 두 사람을 보며 응접실 테이블에 놓인 오르골을 들어 올렸다.
“이 오르골 역시 그렇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여섯 개의 태엽을 겹쳐 각자 다른 16가지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물건이다.”
“어쩌라고?”
심드렁한 페이샤의 반응을 두고 레녹이 말했다.
“나는 이 저택에 존재하는 모든 가구와 소품들이, 아나테마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아나테마가 가구와 소품을 직접 제작했단 말인가?”
펠릭스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묻자,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열대에 장식되어 있던 장신구들 역시 마찬가지. 분명 아나테마 본인이 직접 손을 댄 물건들이겠지.”
“아나테마 그 자식이 이런 수공예에 취미를 가질 법한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취미가 아니다.”
시큰둥한 페이샤의 말대꾸에 레녹이 오르골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이지.”
“연습……?”
“마력사 추출. 가구와 장식품의 제조. 이 두 가지 행위는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분명 확실한 하나의 의도 아래 묶여 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테이블을 쓸어내렸다.
“바로 극도로 정교한 조작능력을 연습하고 단련하기 위한 반복학습이지.”
“…….”
“아나테마는 이 자택에서, 홀로 조작술식을 사용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거다.”
“어처구니가 없군.”
페이샤가 코웃음을 치며 등을 의자에 쭉 기댔다.
“그 비늘 덩어리 새끼가 정말로 그 나이를 먹고 조작술사로 진로변경을 꿈꾸기라도 했단 말이냐?”
“특질계통의 술식이란 그리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는 소질이 아닐 텐데.”
펠릭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타고난 재능은 물론이고, 환경까지도 받쳐줘야 익힐 수 있는 술법이 아니던가.”
“그렇지. 하지만 후천적으로 특별한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서, 강제로 개화할 수 있는 계통이기도 하다.”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테마가 조작술식을 익히려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 바로 그 케이스를 만족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
“후천적인 체험을 통해 술식을 익힌다면, 역시…….”
“아나테마가 아르스노바에서 추방당할 당시 가지고 나왔다던 금기병장.”
테이블을 한 손으로 빠르게 두들기며 생각하던 레녹이 말했다.
“조작술식에 특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기병장의 힘이라면, 자신이 후천적으로 그 재능을 깨우칠 수 있을 거라 믿은 거다.”
“그 금기병장이라는 게, 이미 성장이 끝난 인간에게 조작술식의 재능을 열어줄 수 있는 물건이라고?”
“그건 직접 확인해 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지.”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아나테마가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을 만큼, 금기병장이 강력한 힘을 지닌 아티팩트라는 건 틀림없어.”
“…….”
“적어도 조작술사에 한해서는 틀림없이 그 힘을 한 차원 다른 경지로 끌어올려 줄 수 있는 물건이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기에 레녹은 당장 금기병장을 회수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빅터의 신분으로 조작술식을 오랫동안 다뤄온 경험이 있는 만큼, 금기병장을 조사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진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나테마가 보관해 둔 금기병장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만큼, 망설이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내가 지금 이 사실을 미리 설명해두는 건, 지금 이후로는 미리 설명해둘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응접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벽난로 앞에 섰다.
“지금부터 문을 열지. 준비할 시간이 촉박하니, 미리 마력을 잡아둬라.”
“……반. 아까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했었지.”
펠릭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이 저택에는 정문을 제외한 출입구가 없는데, 어디로 가야 금기병장을 찾을 수 있는 겐가?”
“저택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지.”
레녹이 그렇게 대답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벽난로 앞에서 살짝 무릎을 꿇고, 한 손을 먼지 쌓인 카펫 위에 내려놓는다.
“이 저택이 하수도 아래 매장당한 건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아나테마 본인을 비롯해 어떤 관계자도 자택을 옮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 어째서라 생각하나?”
“……저택의 위치를 옮길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 하방좌표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저택의 위가 아니라…….”
빠직!!
바닥을 긁어내듯이 강하게 움켜쥔 레녹이 말했다.
“저택보다 더 아래에 존재하고 있겠지.”
그 순간, 레녹이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마력사 수십 줄이 뻗어 나와 저택 사방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촤라라라락!!!
천장과 바닥, 벽과 기둥 사이로 달라붙은 마력사가 응접실을 가득 채우고 드리운다.
머리카락보다도 얇은 레녹의 마력사가 순식간에 벽과 바닥을 파고들고, 그 안쪽에 존재하는 무형의 부품을 건드렸다.
찰칵, 찰칵, 찰칵!!
톱니바귀가 돌아가고 버튼이 이리저리 눌리는 소음.
저택 전체가 하나의 기계장치가 되어 복잡하게 회전하는 듯하다.
마치 아주 거대한 시계 안에서 그 부품이 돌아가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다면 이러할까.
방금 전까지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위화감에 펠릭스가 안색을 굳히며 해머를 움켜쥔 순간.
“우린 저택의 지하실로 간다.”
레녹의 말과 함께, 응접실의 바닥이 그 자리에서 소멸해 버렸다.
바닥을 잃어버린 응접실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위로 추락했다.
휘오오오!!!
“이런 X발!!!”
레녹의 말을 무시하고 의자에 드러누워 있던 페이샤가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본다.
추락하는 의자와 테이블을 짐승처럼 밟고 튀어오른 그녀가, 곧바로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창대를 움켜쥐었다.
“야, 마법사!! 바닥이 꺼진다는 말은 없었잖아!!”
“4초 뒤에 충전식 마력포화 60발.”
시선을 들어 힐끗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마력감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3분할로 나누어 1.5초 간격을 두고 시간차 저격.”
“뭐?”
키이이잉!!
레녹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발아래 어둠 저편에서 붉은 마력광이 번뜩였다.
침입자를 감지하고 초고온의 열선을 수십 발 넘게 터트리는 보안장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솟구치는 레이저를 보며 펠릭스가 양손으로 해머를 움켜쥐었다.
“대응하겠네!!”
마력을 끌어올려 해머 단면에 덧대며, 어깨를 비틀고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피격권을 벗어난 레이저를 절반 가까이 피해내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앞을 가로막고 레이저를 그대로 쳐내 빗겨냈다
쿠콰콰쾅!!!
펠릭스가 엄청난 속도로 휘두르는 해머의 궤적을 따라, 연이어 솟구치는 레이저가 모조리 꺾여 비틀렸다.
사선으로 꺾인 붉은 레이저가 공동 지하 벽에 충돌하며 요란한 화염을 터트렸다.
후우웅!!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화염 덩어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레녹이 재차 말했다.
“재질 불명 절단장치 300문. 6초 뒤에 전개되어 통로를 완전히 폐쇄할 거다.”
“X발, 진짜……!!”
쌍욕을 내뱉은 페이샤가 창대를 역수로 쥐고, 날을 벽면에 꽂아넣었다.
불꽃을 튀기면서 떨어지는 속도를 확 죽인 페이샤가, 벽을 박차고 제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쐐액!!
레녹과는 반대방향으로 머리부터 떨어져 내린 페이샤가, 손목으로 창을 회전시키며 가속.
동시에 그녀가 떨어지는 방향을 따라 수백 개의 톱날이 벽면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드르르르륵!!!
접촉하는 순간 온몸을 토막 내버리는 톱날 사이로, 창 한 자루를 찔러넣고 비틀어 박살 낸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만큼 격렬한 불꽃이 우수수 떨어지며, 어둠만이 가득한 공동을 환하게 밝혔다.
톱날 사이로 번뜩이는 레이저를 펠릭스가 쳐내는 사이, 레이저의 빗속에서 반대로 톱날을 박살 내며 페이샤가 길을 연다.
으지지직!!!
가볍게 손목을 위아래로 털어, 아음속의 속도로 창대를 진동시킨 페이샤가 소리 질렀다.
“마법사, 바닥이 안 보이잖아!!”
“기다려라. 방향을 찾고 있으니까.”
펠릭스와 페이샤의 비호 사이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추락하던 레녹이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자색의 마안광이 번뜩이며 날카롭게 회전한 순간.
“그쪽이군.”
공동 균열 사이로 금이 가며 세 사람의 신형이 그대로 떨어졌다.
콰아앙!!
“쿨럭!!”
“으웨엑…….”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펠릭스와 페이샤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곧바로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쿵!!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 두 사람을 억지로 땅에 잡아당기는 듯한 기묘한 모습.
“씨발, 뭐야?”
쌍욕을 내뱉은 페이샤가 한 손으로 바닥을 박박 긁어내자, 그 안에서 보랏빛으로 번뜩이는 거대한 광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암석의 정체를 확인한 페이샤가 표정을 와락 찌푸렸다.
“중력석? 이딴게 왜 여기 있는 건데?”
중력석은 광석 자체의 무게가 굉장히 무거운 것은 물론이고, 그 존재만으로 일대의 중력을 멋대로 뒤바꾸는 물건이다.
희귀하고 값어치가 높긴 하지만, 가공을 거치지 않으면 용도가 한정되어 있어서 중앙에서도 자주 볼 수는 없는 광석.
그런 광석이 일행의 발 아래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공동의 거의 모든 곳에 박혀 빛나고 있었다.
“아나테마가 여기에 가져다 둔 물건이지.”
페이샤의 뒤에서 걸어나온 레녹이 대답했다.
“지하실의 깊이에 비해 우리가 지나치게 오래 추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물건을 사용해 추락하는 시간을 늘려두고 있었던 거지.”
“중력석 하나만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주변을 봐라.”
“…….”
휘오오오!!!
아나테마의 저택 지하에 존재하는 거대한 원형공동.
중력석을 깎아 만든 매끈한 바닥과 돌기둥. 말 그대로 신전의 형상을 띈 것처럼 화려한 신상과 장식품 역시 가득하다.
지하실이 아니라 거대한 신전으로 보일만큼 넓고 방대한 규모에, 두 사람이 순간 입을 다문 찰나.
“중앙도시의 귀족이라면 재산이 부족하지는 않았겠지만, 이건 생각 이상이군.”
힘겹게 중력석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펠릭스가 물었다.
“지하실 전체를 중력석을 깎아 거대한 신전으로 만들어 버린 겐가?”
“그뿐만이 아니지. 중력석의 위치와 방향을 조절해서 저택에는 영향이 가지 않도록 조절하기까지 했다.”
“…….”
“중력석의 힘이 신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절하면서도 신전의 중앙으로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수백미터 끝에 보이는 신전 중심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모든 조치가, 저 물건을 이 신전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던 거다.”
“…….”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자색의 수정체.
그 수정체 안에, 유리색으로 빛나는 수투(手套) 한 짝이 부유하고 있었다.
청금색에 가까운 영롱한 광채를 내뿜으며, 수정체 안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번뜩이는 장갑의 형상.
손목이 아니라 팔뚝을 중간까지 뒤덮는 모습은, 장갑이 아니라 얇은 건틀렛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수투의 주변에서는 얇은 실 덩어리가 회오리듯이 회전하면서, 유물을 보호하듯 휘감고 있었다.
“저게…….”
“아나테마가 아르스노바에서 가지고 나온 금기병장.”
레녹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쩌면 아주 강력한 조작술사의 유품일지도 모르는 물건이다.”
중앙도시의 조작술식. 그것도 고위계 초인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금기병장.
무엇보다 그 아나테마가 스스로 조작술식을 배워가면서까지 손에 넣으려고 한 물건이라면-
“야, 마법사. 그딴 건 잘 모르겠고.”
잔해 사이에 팔다리를 쭉 뻗은 채로 엎드린 페이샤가, 힐끗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 새끼. 그냥 죽여 버린다?”
“그게 무슨……?”
화악!!
펠릭스의 말에 대답하듯, 짙은 어둠 사이에서 한 남자가 흩어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들켰습니까?”
훤칠한 체격을 지닌 남자가 사이한 미소를 지은 채로 페이샤의 등을 밟고 서 있었다.
시체처럼 죽은 낯빛. 뱀같은 눈으로 페이샤를 내려다보며, 손에 쥔 단검을 그녀의 목에 들이대고 있다.
“……!!”
펠릭스가 얼굴을 굳히고,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응시했다.
“아~ 이딴 식으로는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힐끗 레녹을 돌아본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 뭐 어쩌겠습니까. 저도 먹고 살려면 최선을 다해야지요.”
“……”
“그러니 다들 천천히 뒤로 물러나 주시지요.”
페이샤의 목에 단검을 강하게 부른 남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여성분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저 남자는…….”
페이샤가 완벽하게 뒤를 잡힌 시점에서 상대 역시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
펠릭스가 침음성을 흘리면서 빠르게 주변을 확인하는 사이, 레녹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 소식에 어두운 건 여전하군.”
“예에?”
“네가 인질로 잡고 있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어라라.”
모처럼 빈틈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가 식은땀을 흘린 찰나, 페이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 이 X발 새끼야.”
찌지직……!!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페이샤의 머리를 따라 단검이 깊숙이 박히며 피가 흘러내렸다.
“이걸 지금 인질극이라고 하는 거냐?”
목 근육이 베여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세우는 페이샤의 터프한 반응에, 남자의 안색이 변한 순간.
팔을 들어 올릴 만큼의 공간을 확보한 페이샤가 거침없이 바닥을 후려갈겼다.
콰앙!!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충격파가 터지면서 그녀의 몸이 붕 떠올랐다.
동시에 페이샤의 등 뒤에 올라타 있던 남자 역시 덩달아 허공으로 떠오르고.
“잠깐……!!”
“죽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몸을 한바퀴 뒤집은 페이샤가 거침없이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콰아아앙!!!
남자의 신형이 쏜살같이 날아가 광대한 신전 복도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쿨럭!! 으웩.”
맥아리없는 비명과 함께 피를 흘리며 축 늘어지는 남자의 모습.
레녹은 그제서야 걸음을 옮겨 쓰러진 남자의 앞에 섰다.
“데드라이즈의 장군을 인질로 잡으려 하다니, 멍청한 짓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이럴 수가…….”
그제서야 자신이 인질로 잡은 페이샤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강자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축 늘어졌다.
“운이, 운이 없어요… 왜 당신처럼 재수 없는 마법사들을 만나면 매번 이렇게 되는 겁니까?”
“오랜만이다, 흑마법사.”
레녹이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며 냉소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판데모니엄의 흑마법사.
명의 조상이자, 보석술사 자운 오디스의 육체를 차지한 고대의 망령.
에르몽이 레녹보다도 먼저 아나테마의 신전에 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