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04
비밀 이야기
“그 별명 비밀로 해주는 거 아니었어, 초록 형?”
“난 약속한 적 없는데?”
초록 형이 인, 뭐라는 그 부끄러운 단어를 오란에게 넌지시 알려줬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의도적인 구석이 있다.
오란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란 계산은 섰을 텐데! 설마 재미있겠다는 이유로 아무런 안전장치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둔 건!
마냥 아닐 거라 맹신할 수 없다는 점이 슬펐다. 초록 형이라면, 장난조차도 치밀한 계산 아래에서 칠 것 같아서.
“자자, 진정해.”
“초록 형….”
“나 질문! 인어왕자에 뭐가 있어?”
앞뒤 사정을 모르는 박하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서혼 형이나 지온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학교에서 이원이 별명이었거든. 부끄럽다고 그러는 거야.”
“아, 그런 거였어? 왜, 나쁘지 않은데! 인어왕자님!”
“하….”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아, 오란에게 닉네임을 바꾸라고 하면 되겠다!
“참, 닉네임 바꿀 생각 조금도 없어, 난.”
내가 할 말을 미리 읽은 것처럼 덧붙이는 오란 탓에 침몰하고 말았다.
그 민망한 닉네임을 달고서 오란이 무슨 짓을 할지 겁난다. 오란의 이중적인 성격이면 카페에서 나 몰래 부끄러운 글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끔찍….”
“싫어하니까 너무 신나는데?”
저 청개구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막무가내인 누군가를 말린다는 게 이토록 막막한 일이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The Little Merman? 직역해서 Merman Prince가 낫겠다. 기억해둘게.”
둘 다 별론데 기억해서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지온이라도 가만히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원이를 상징하는 단어로 딱 맞는데? 그치, 지온아?”
“어. 나중에 가사에 써볼까.”
안 돼, 제발….
먼바다를 보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써봤지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파도치는 바다가 내 심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더 심란했다.
“우리가 너 좋아해서 그러는 거 알지? 혹시 기분 나쁘면 말해줘.”
수습은 서혼 형이 담당했다. 언젠가, 이 민망한 별명이 들킬 거라고는 각오하고 있긴 했다. 내가 싫어서 장난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화가 난다거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쑥스럽고 막막했다. 이 별명이 널리 퍼져서 코티지들이 알게 된다면?
만약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하다. 가뜩이나 나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인 분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데. 이런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던져주면.
“근데 이원아, 왜 인어왕자야? 왕자는 이해가 되는데, 왜 인어야?”
“아, 그건…. 나만 비밀 얘기 안 했네. 이걸로 하면 되겠다.”
멤버들은 내 목소리에 관한 비밀을 모르고 있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초록 형도. 내 예전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나 예전에 성대 기형이 있었어. 그래서 끔찍한 목소리만 낼 수 있었고, 목소리를 거의 안 내고 지냈어. 친구가 없던 것도 그 영향이 컸고.”
“이젠 다 나았어? 수술한 거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목소리로 변했어.”
내가 생각하기에도 성의 없는 설명.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현오 형의 이야기를 추가한다고 해도 더 믿기 힘들어지기만 한다는 것을.
“안 믿어도 이해해.”
“다른 사정이 있는데 우리한테 말하기 힘든 건 아니고? 그런 거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비밀 이야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분위기상 한 행동이니까.”
말하기 힘든 사정이 따로 있어서 얼버무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초록 형처럼.
“함이원. 그대로 믿으면 돼?”
말하는 대로 믿어주겠다는 오란도 있었다. 지온과 서혼 형, 박하는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조금 더 믿어도 되지 않을까? 내 삶에 중요한 한 조각이 될 사람들이니까.
용기를 내고 싶었다. 믿음을 배신당할 걸 걱정해 움츠러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다들 나를 믿고 비밀을 꺼내주기도 했지만, 이 비밀을 꺼냄으로써 나는 이들에게 세운 얇은 벽을 허물어버릴 수 있다.
벽 안에 있던 연약한 나는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만, 벽 너머에 있던 이들의 곁에 설 수 있다.
현오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라면 지금이 좋을 것 같았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 망설임은 다시 망설임을 낳을 뿐이니까.
“내가 아이돌이 되기로 한 건….”
* * *
멤버들은 내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줬다.
막상 현오 형의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했다. 현오 형을 빼고서 나의 이야기를 할 순 없다.
그만큼 내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없는 지금까지도.
“정현오. 그 이름 기억할게. 그 형이 너에게 목소리를 주고 아이돌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 형에게 감사해야 마땅하니까.”
“나도 초록이랑 같은 의견이야. 언젠가 같이 보러 갔으면 좋겠다. 우리한테 너를 맡겨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수 있게.”
초록 형이나 서혼 형다운 반응이었다. 믿고 말고는 둘째치고, 예의부터 지키는 것.
“난 솔직히 못 믿겠다, 이럴 줄 알았냐? 왜 망설였는지 모르겠네. 불운의 화신인 나야말로 이 세상의 특이현상 아니냐?”
특이한 현상. 오란은 나와 현오 형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저 특이한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렇게 보니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처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겪는 사람이 한둘쯤 더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거지? Okay. 쉽네.”
지온의 세계는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논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본받고 싶은 사고방식과 정신력이다.
세상에 지온 같은 사람들만 있다면 서로 화내고 싸울 이유도 없을 텐데.
“형들은 어떻게 믿어? 난 못 믿겠어….”
박하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평소의 박하를 보면 허무맹랑한 소리도 천진난만하게 무작정 믿어버릴 것 같았는데. 내 캐릭터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
“이원 형이 농담으로 그런 얘기할 사람은 아닌 거 알아. 그치만….”
요약하자면 현실성이 없다는 거겠지. 나도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수술로도 목소리를 바꿀 순 없었어. 어릴 때 수술도 해봤거든.”
목 안쪽으로 수술해서 흉터는 남아있지 않지만, 수술 기록은 남아있다. 또 어떤 증거가 있을까.
“…내 이전 목소리라도 들어볼래? 녹음본 있긴 한데.”
현오 형이랑 음성 치료할 때, 변화를 보기 위해서 남겼던 거라 원 목소리보단 나아진 상태긴 하겠지만.
휴대폰을 꺼내 음성 파일을 재생시킨 후 소리를 키웠다.
“…놀라더라도 이해할게.”
[아에이오우, 아아, 현오 형, 소리를 더 크게 낼까?] [복식호흡으로 내볼래? 소리는 그 정도면 돼. 숨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으면서.] [아아―.]지금 들어도 발음이 엉망진창이다. 나야 내 목소리에 익숙하니까 알아들을 수 있지만.
이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은 그르렁거림이 섞인 악마 같은 그 음색에 먼저 정신을 빼앗기곤 했다. 뭐라는지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대부분 못 알아들을 정도.
“…이게 이원이 네 목소리였다고? 상대방 목소리가 너랑 똑같은데?”
현오 형과 나의 말하는 목소리엔 차이가 있긴 하다. 그러나 녹음된 소리로는 그 차이를 느끼기가 어려웠다. 전화상 목소리를 헷갈리기 쉬운 것처럼.
“그쪽이 현오 형 목소리야.”
“말도 안 돼….”
예전 목소리를 들려주니 더 믿기 힘들어했다.
아, 현오 형이랑 찍은 영상을 보여주면 되겠구나. 녹음으로는 목소리의 주인을 매치하기 어려우니.
“이것도 보여줄게.”
동영상을 재생한 휴대폰을 건네주자 멤버들이 바짝 붙어서 영상에 눈을 고정했다. 안면 근육을 딱딱하게 굳히고서.
솔직히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믿어주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동영상에서 ‘어떤 이름으로도’가 흘러나왔다. 가끔 현오 형이 보고 싶을 때마다 듣곤 한다.
그때마다 왜 형이 모자란 시간을 쪼개 노래를 남기려고 동분서주했는지 그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미어졌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노래는 남겨질 나를 위해 예비한 것이니까.
“노래 부르는 음색이 너무, 너무 똑같아….”
박하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담겨 있었다.
내 목소리는 영상 속에 안 나온다. 하지만 멤버들은 현오 형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와 같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매일 같이 듣는 목소리를 모를 수가 있을까.
“우연히 목소리가 똑같은 사람 둘이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전까지 아이돌은커녕 연예인 쪽으로는 생각도 해본 적 없어. 다른 사람에게 내 목소리 듣게 하기 싫었으니까.”
“그래서 학교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
“응.”
“목소리 관리를 위해서라도 말 한마디 안 한다는 건 이상하긴 하지.”
아예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해서 나를 조심스럽게 대했던 것 같다. ‘인, 어쩌구’하는 별명을 붙여주긴 했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도 반신반의 상태야. 그래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할게. 내가 아는 이원 형은 이런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박하야 나는, 안 믿어도 괜찮아.”
“왜!”
“안 믿어도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건 안 변하잖아.”
“히잉~ 이원 형!”
두 팔을 벌리고 내게 달려드는 박하 때문에 상체를 옆으로 피했다.
나는 서혼 형이 아니라 뛰어드는 박하를 안정적으로 받아들 수 없다.
감격한 마음은 알겠지만, 한 덩어리가 되어 모래사장을 뒹굴고 싶진 않았다.
“이원이가 잠들기 전에 듣던 노래가 이거였구나.”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사용해 노래를 들어서 같은 방을 쓰는 서혼 형도 내가 무슨 음악을 듣는지는 몰랐구나.
“네 마음이 들어간 곡이더라.”
“…어떻게 알았어? 내 곡인 거 티 나?”
서혼 형은 벌써 내 곡 성향을 파악한 건가? 근데, 내 곡에 성향이랄 게 있긴 하나? 이것저것 다 그때그때 손대는 편이고 장르도 안 가려서 일관성이 없을 것 같은데.
“하하. 현오 형이 곡 소개해주시던데? 에이치투원이 선물해준 곡이라고.”
“그랬었지, 참….”
“좋은 곡이고 좋은 노래야.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워. 서혼 형.”
우리 둘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자 다른 멤버들은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며 무언의 지지를 보내왔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오란이 내 옆에서 징징거리는 박하를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그 현오 형이라는 사람이랑 함이원 목소리의 변화에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는 걸 과학적으로 증명해낼 방법은 없어. 하지만 너도 차츰 깨닫게 될걸.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걸.”
“신, 말하는 거야?”
“신도 그렇고, 귀신이나 외계인, 초능력자도 그렇고. 초자연적인 존재는 있다고 믿거든. 단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박하준 너도 네가 이해한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오란 형은, 의외로 로맨티스트 같네.”
“로맨티스트? 글쎄, 그보단 사고가 유연하다고 해줄래?”
사고가 유연한 정도를 넘어서 가능성을 무한대로 열어두는 수준 아닌가?
그렇지만 오란의 말이 틀리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넓디넓은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티끌 같은 생명체일 터다. 과학으로 밝혀내지 못했을 뿐, 분명히 실존하고 있을 터다.
나는 오란처럼 사고하고 싶었다. 그러면 다음 삶, 그다음 삶에서라도 언젠가 현오 형과 다시 만나게 될 거라 믿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