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19
너 수상해
“뭐?”
아차. 홍오란에게 대꾸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연애하냐는 황당한 소리를 들어서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말 걸지 말랬지?”
“내가 말 안 걸려고 했는데, 니가 여자 사귄다면 사정이 다르지.”
“안 사귀거든?”
“거짓말. 바쁜 와중에 폰 보면서 누구랑 톡을 그렇게 하는데? 친구도 우리밖에 없는 게? 밤마다 통화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눈을 굴리며 지난 내 행동을 되짚어봤다.
오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긴 했구나. 맨날 단체생활을 해도 개인 휴대폰을 가지게 된 이상 연락은 자유롭다.
요즘은 SNS로 이성을 사귀는 사람도 있다니 불가능한 일까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도 ‘연애 금지’라는 규칙을 가진 테오라의 일원인 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혼 형이나 초록 형은 내가 누구와 연락하는지 안다. 박하는 내게 직접 물어봐서 알려줬고, 지온은 내가 통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난 며칠간 이어진 냉전이 의도치 않게 오란을 감쪽같이 속이는 데 도움을 줬다. 평소처럼 지냈다면 아무리 내가 숨기려고 해봤자 하루도 못 가서 들통났을 텐데.
별생각 없이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궁금해 미치게.”
궁금해서 미치겠다고? 그거 좋은데…?
아무래도 곧이곧대로 털어놓지 않는 편이 좋겠다. 웬만하면 나도 못되게 굴지 않겠지만.
지금은 오란이 좋아할 만한 일이라면 일단 하기 싫어지는 예외적인 상황. 게다가 범무 형과 친해지기만 했지, 본론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홍오란 너랑 말 안 해.”
“삐졌다고 막 가자는 거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오란이 목소리를 높일 줄 몰랐다. 조금 놀랐다.
더 우물쭈물했다가는 우리가 싸우고 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그룹 차원의 문제가 될 것 같았다. 대충이라도 둘러댈 필요성이 느껴졌다.
“진짜 연애 안 해. 여자도 아니고.”
“…남자? 설마 너 남자랑 썸 타냐?”
잔뜩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묻는 오란.
“…뭐? 왜 생각이 거기로 가? 아니야!”
이게 사실을 알면 얼마나 쪽팔리려고 그러지. 범무 형한테는 또 얼마나 민망해지고 싶어서?
오란이 편견이 없다는 의외의 TMI만 획득하게 됐다. 홍오란은 확인시켜주지 않으면 내 말을 믿지 않을 기세였다. 의심만 많아서는.
홍오란에게 내가 자기 형과 긴밀한 연락을 이어가고 있음을 들키기 일보 직전, 초록 형이 계단으로 올라왔다.
“둘이 거기서 뭐 해?”
“리더로서 딴짓하는 멤버 어떻게 생각해.”
“딴짓?”
“함이원 요새 수상한 거 못 느꼈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한다고 단번에 수상하다니. 부정적인 쪽으로 온갖 상황을 상상해서 대비하는 게 오란답긴 하지만.
아니, 근데 오란의 눈에는 내가 차기 앨범 준비하느라 바쁜 이 시기에 딴짓을 할 사람처럼 보이나?
멤버들을 뒷전으로 두고 내 감정에만 푹 빠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다니 충격이다.
난 갓 아이돌이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 가지고 달리고 있는데. 오란은 내가 테오라라는 그룹에 얼마만큼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 얼마든지 접어둘 수 있는데.
사람을 너무 무르게 보는 경향이 있다. 홍오란도 그렇고, 다른 멤버들도 그렇고 언젠가 내가 얼마나 매운 사람인지 알려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아, 그거?”
“뭐야. 형은 이미 아는데도 함이원 안 말렸어?”
오란의 매서운 추궁에 초록 형이 나를 슬쩍 쳐다봤다. 내가 어쩌고 싶은지 묻듯이.
1초 정도 눈이 마주친 게 다인데 초록 형은 모든 것을 읽어낸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능력…? 눈치가 고도로 발달하면 초능력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걸까?
“아, 그거 내 친구.”
“웃기시네. 형 친군데 몰래 숨어서 연락한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숨어서 연락하다니. 우리 방해 안 하려고 자리 피한 거지. 학교 문제로 고민하길래 내 소꿉친구 소개해줬어. 너도 알걸? 한국대 들어갔다고 전에 말한 적 있는데.”
“…정말이지?”
의심 많은 오란도 단번에 넘어가게 하는 설득력 있는 언변. 초록 형은 그 짧은 틈에 범무 형님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내고 그럴듯한 변명까지 지어냈다.
초록 형에게 거짓말을 시킨 모양새라 조금 미안하다. 동시에 초록 형이 작정하고 거짓말하게 두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저러다가 만렙 거짓말쟁이가 되면 정신도 못 차리고 홀딱 속아 넘어갈 사람이 잔뜩이라서.
“함이원. 지켜볼 거다, 너.”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만 지나면 홍오란은 이제 내 손안에 든 쥐다.
오란은 계단을 신경질적으로 내려가서 연습실로 들어갔다.
“진심을 담아서 미안하다고 하거나 대충 용서하면 끝날 문제를 길게도 끈다. 너희 둘 다. 우리도 슬슬 피곤해지려고 하니까 얼른 해치워. 알았지?”
“내일까지 꼭 해결할게.”
오란이 사과를 하거나 내가 봐주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하면 되는데 그 간단한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알 수가 없다.
서혼 형에게 너무 마음 상하지 말라고 다독임을 받았다. 오란이 미안한 마음이 있어도 그걸 표현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해서 어색해서 그렇다는 말과 함께.
그럴듯한 이유다. 오란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는 모습? 상상하다가 닭살이 돋았다.
“으, 내가 지고 들어가야 하나…?”
오란에게 만족스러운 사과를 받아내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범무 형이 잘 타일러준다고 해도 다음에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서 회의감이 든다. 일단은 진행하던 작전은 끝까지 해보겠지만.
“이원이 네 생각보다 오란이가 형한테 많이 약할걸? 잘 해봐. 우리가 응원할 테니까.”
초록 형은, 음, 나를 응원한다기보단 오란이 골탕먹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게 그거니까 넘어가자.
친구가 없을 때는 ‘소중한 친구랑 왜 사소한 감정 가지고 싸우지?’라고 생각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막상 친구랑 싸움 축에도 못 끼는 싸움을 해보니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끼리도 싸우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가 유난히 유치하게 느껴지지만, 초록 형이 싸움은 다 유치한 거랬다.
음료를 사러 가는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던 초록 형이 깜빡 잊었다는 듯 말을 걸었다.
“아, 오란한테 둘러댄 내 친구 말인데, 이따 번호 보낼게. 친해져도 좋고. 성격도 무난하고 너한테 도움이 될 녀석이니까.”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니게 만들겠다는 뜻이구나. 초록 형의 소꿉친구라면 나도 소개받고 싶다. 초록 형의 어릴 적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려나?
“걔네 아버지가 법대 교수님이고 걔도 지금 로스쿨 준비하는 중이니까 이것저것 물어봐.”
법대 쪽으로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를 기억하고 일부러 친구를 소개해주는 듯했다.
초록 형은 배려도 용의주도하게 해주는구나 싶다.
“고마워.”
“내 흉보면 금방 친해질 수 있을걸.”
“흉을 보라고…?”
이런 경우는 처음 듣는다. 친해지라고 친구를 소개해주면서 자기 흉을 보라고 권하다니? 너그러운 것에도 정도가 있다.
“걔랑 세 살인가 네 살 때부터 알던 사이라 나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친군데, 요즘 답답해하더라고. 내 실체를 아니까 TV에서 나 나올 때마다 입이 근질거리신단다.”
연예인이 된 초록 형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터다. 왜 답답해하는지는 이해가 간다.
“이 한 몸 희생해서 두 명이 즐거워할 수 있다면 기꺼이~.”
초록 형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두 명…?”
초록 형 흉보면서 즐거워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 본인이 권하니까 어쩔 수 없다.
근데 초록 형이 남기고 간 말에서 뼈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나 하나 희생해서 멤버들을 즐겁게 해주라는? 에이, 설마…!
* * *
“범무 형!”
[안녕, 이원아.]나지막하게 깔린 웃음소리 덕에 더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형님이었다.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고 톡 프로필 사진으로만 봤는데도 얼굴에 ‘온. 화.’하고 써 있었다.
이름 그대로 남성적인 선을 가진 범무 형님은 전체적으로 오란과 닮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렇지만 눈 하나만큼은 정말 쏙 빼다 박아서 형제긴 형제구나 싶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이원이도 한국인 맞구나? 식사 챙기는 걸로 인사를 하네. 밥, 은 사실 아직 못 먹었어.]“아직도요? 8시가 넘었는데….”
[들어가는 길에 먹고 가려고. 노원 쪽인데 이쪽에 이원이 네 맛집 리스트에서 추천할만한 가게 있을까? 혼자 먹을만한 곳으로.]“있어요! 팟타이 어때요? 저도 가끔 혼자 가서 먹었던 덴데….”
톡을 하다가 ‘함이원표 맛집 리스트’에 대한 얘기를 해버렸다. 열심히 위치를 알려주고 가게까지 가는 도중에도 통화는 계속됐다.
조금 더 뭉그적거렸다가는 타이밍을 놓칠 것 같았다. 오늘 내에 오란에 대해 말을 꺼내야 하는데!
심호흡을 하고 서두를 뗐다.
“어, 저기, 범무 형. 오란이 말인데요….”
[이원아, 오란이가 많이 괴롭히지?]“…네?!”
“아…. 아셨구나.”
[알아. 오란이가 형인 내겐 귀여운 동생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귀엽게 행동하지는 않지. 그래도 몇 년 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진 거니까 좀 봐주라.]박하의 증언에 따라도, 예전보다 훨씬 순해진 거라고 하긴 했다. 도대체 과거에는 얼마나 심했길래.
[초딩도 아니고 좋아하는 애는 왜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원이 너 못 괴롭히게 따끔하게 혼내둘게.]“좋아하는 애….”
[오란이가 내심 너한테 엄청 고마워할걸? 누구보다도 운 없는 체질을 저주했는데, 그걸 고쳐주는 은인을 싫어할 수 있겠어?]목소리를 받기 전에 누군가 내 성대를 고쳐줬더라면, 평생 그 은혜에 걸쳐 감사했으리라.
그럼 오란은 고마움을 장난으로 바꿔서 표현하나? 이상하긴 한데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나도 고마워. 우리 오란이의 불운을 없애줘서.]“아, 그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냥 나타나 줘서, 오란이에게 희망을 보여줘서 고마워.]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사를 받으려니 민망하다. 그렇지만 그 감사를 사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범무 형이 얼마나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는지 전해져와서.
[앞으로도 자주 연락해, 이원아. 알겠지? 오란이 흉을 봐도 좋고. 아, 나 가게 도착했어.]“톡으로 연락해요, 범무 형.”
[오란이는 나한테 맡겨둬. 걱정 말고.]인사와 함께 통화가 끊겼다. 오늘따라 왜 남 흉보라는 사람이 많지?
범무 형과 통화를 끝내고 난 내 심정은 얼떨떨함 그 자체였다.
분명 홍오란 행동을 이르려고 범무 형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범무 형에게 친하게 지내란 소리를 들어버렸다.
범무 형이 아무리 친절해도 역시 홍오란의 형제였다. 오란보다 귀염받겠다는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최초의 작전은 얼렁뚱땅 성공했다.
앞으로 홍오란의 반응을 관찰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