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58
수능 (2)
원래 팬이 아니었을까? 눈치 게임이나 다름없던 그 적막한 분위기에서 먼저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거든.
수능 치는 학생이 예민해져 있을 타이밍이잖아. 그래서 다가가더니 조심스럽게 극존칭으로 묻더라?
‘함이원 님, 혹시 시험 다 끝나시고 나셔서 사인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랬나? 어쨌든 단어 하나하나에 전부 존칭이 들어가는 말도 안 되는 말이었어. 웃음이 터질 뻔했는데 간신히 참았다.
걔는 지금도 해줄 수 있다면서, 대신 다른 학생한테 피해주지 않게 비밀로 해달라고 하더라. 그러더니 ‘도시락 나눠줄까요’ 하고 묻는 거야. 그 학생이 감격해서 울려고 하던데 그 도시락 특별한 건가?
그리고 같은 교실에서 수능 보는 친구 중에 한 명이 도시락 못 쌌는지 인스턴트 죽 가지고 왔더라고.
머리 쓰다 보면 금방 배고파지잖아? 함이원이 그거 봤는지 자기는 이거 꼭 다 먹고 가야 한다고 같이 먹자고 권하더라.
결국 같은 교실에 있는 학생들한테 이것저것 나누어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어. 나도 애플망고 하나 얻어먹었어. 비싼 과일도 많고 예쁘게 깎여있어서 신기했어.
호텔 쉐프가 만드는 도시락 있다던데 그거였나…?
근데 도시락 싹 비우고 나니까 함이원이 뿌듯한 표정으로 정리하더라. 뭔가 행동이 한계까지 찌든 고3과는 다르게 귀여웠어. 동갑 남자애한테 이런 말 쓰게 될 줄이야.
역시 아이돌 아무나 할 수 없구나 싶더라. 처음 본 사람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직업이구나 하고.
그 뒤엔 열심히 시험 보고 나왔어. 뒤늦은 사인 요청에 나도 슬쩍 껴서 사인 하나 받고 사진 한 장 찍었다. 사인받을만한 종이가 줄 노트밖에 없었는데 사인지 꺼내서 해주더라고.
스타답게 언제 어디서라도 사인할 준비가 되어있는 건가?
그 뒤에 얼굴까지 꽁꽁 싸매고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찾기는 어려웠을 거야.
가방 싸고 천천히 정리하면서 뒤늦게 나오는데 내가 있던 교실에서 비명이 들리더라. 아마 테오라 함이원이 여기서 시험 본 거 뒤늦게 알게 된 사람이겠지?
나 그동안은 진짜, 수능 망하면 아무리 쥐어짜도 더 노력할 힘이 안 나오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렇다고 내가 머리가 엄청 좋다거나 목표 의식이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까…. 그냥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어.
다른 거 아무것도 못 하고 공부만 해서 그런가? 삶이 재미없고…. 사는 게 지겹고 이대로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고도 싶었어.
그래도 언젠간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면서 참았거든? 근데 진짜 잘 참은 것 같아.
평생 관심도 없던 아이돌을 수능 보는 교실에서 만나질 않나, 기대보다 훨씬 좋은 점수를 받지 않나.
뭔가 앞으로의 내 인생이 조금은 스펙타클해질 것 같아.
기만이라고, 재수 없다고 욕해도 좋아. 그래도 이런 일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조금만 더 견디면 좋은 날이 이 글을 읽는 네게도 올 수 있잖아.
처음엔 연예인 만난 신기함 때문에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쓰면서 내 얘기만 잔뜩 한 거 같네.
실망했을 사람들을 위해 썰 몇 개 더 풀어볼게.
1. 함이원은 집중하면 무표정이 된다. 얼음장같이 차가워 보여서 말 걸기 진짜 어렵다. 먼저 말 걸어준 용자에게 감사!
2. 내피셜) 함이원은 수능 잘 봤다. 뭔가 행동에서 감이 오잖아. 한숨을 푹푹 쉰다거나 머리를 쥐어뜯는다거나? 근데 함이원은 평소처럼 학교 왔다가는 사람같이 보이더라. 최소한 평소 실력대로는 봤을걸? 틀리면 어쩔 수 없고….
3. 투명하게 흰 피부에 화장빨 없이도 개잘생겼다. 나 이런 말 안쓰는데…. 잠깐 보다가 고개 돌렸는데 눈앞에 아른거려서 큰일 날 뻔했다. 태어나서 본 외모 중에서 독보적으로 충격적인 외모였어.
4. 시험 시작 전에 시계 끈을 풀더니 까만 걸로 갈아 끼우고, 시험 끝나고 나갈 때 다시 갈아 끼우고 갔다. 알파벳 적혀 있었는데 징크스 같은 건가?
혹시 조작이라고 의심할 수 있으니까 봐 증거 첨부할게.
(수험표 일부 사진)(교실에서 함이원과 같이 찍은 사진)
마지막으로 이번에 수능 본 친구들과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모든 사람을 응원하며 이만 글을 마칠게.
– 빠른 후기 고마워! 철저히 정체 숨기고 갔는지 목격담이 없었는데ㅠㅠ
– 이원이랑 같이 셤 본 팬 심장 괜찮니??
– 안 그래도 떨렸을 건데 거기에 이원이랑 같은 공간에 몇 시간 동안? 수능 망쳐도 이해한다,, └이워니 만난 건 하늘이 도운 일이니까 수능도 잘 봤을 거야!
– 나 이번에 수험 친 코티진데, 저 시계 이원이가 제안한 테오라 굿즈 같아! 시계 줄 교체할 수 있게 두 가지 버전이야! 시험장에 갖고 들어갈 수 있게 아날로그에 숫자 큼지막한 애고. 사실 나도 저거 차고 갔어! ㅎㅎ
└와 함이원 찐이네. 그 시계는 차고 갈 수 있다고 보는데, 그걸 두 번이나 시계 줄 바꾼다? 자기가 테오라 함이원이라고 힌트 준 거 아니야? 이스트에그처럼 숨겨두고?
└과몰입 어떡해ㅋㅋㅋ
└맞말 같은데..?
└정신 차려ㅋㅋㅋㅋ
….
* * *
멤버들에게 수능 끝났다고 연락했더니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갔더라면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정신없이 하루를 마치지 않았을까.
집에 왔더니 맛있는 냄새와 함께 치즈 고양이 주황이가 나를 반겼다.
냐오옹.
만난 시간이 짧은데도 주황이가 나를 기억하는지 바로 현관 앞까지 마중 나왔다. 꼬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예전엔 겁먹어서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한결 당당해져 있었다. 이 집과 이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적응을 마친 듯했다.
현관 근처에서 쭈그려 앉아서 주황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을 머리 위에 가져다 댈 때마다 눈이 먼저 감겼다.
“주황이부터 챙기면 아빠 서운한데?”
“잘 지내셨어요?”
팔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채색 앞치마를 두른 아빠는 대답 대신 팔을 뻗어 나를 꽉 안았다.
“아빠보다 우리 이원이가 걱정이지. 건강은 괜찮고?”
팔을 풀고서 살이 빠지지는 않았는지, 어디 아파 보이지 않는지 관찰하셨다.
“괜찮아요. 자주 못 들러서 죄송해요.”
“바쁘고 인기 많은 아들 뒀으니 별수 있나. 아이고, 배고프겠다. 손 씻고 얼른 저녁 먹자.”
예상대로 식탁은 접시가 더 놓일 장소가 없을 만큼 꽉 채워져 있었다. 작은 접시가 도대체 몇 개가 놓인 거지?
“수고했다, 우리 아들. 많이 먹고 충전하라고 많이 차렸어. 점심은 지온이가 싸줬다고? 새벽부터 신경 썼겠네.”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전부터 도시락 이야기를 미리 알고 계셨었다. 나 모르게 종종 연락한다는 우리 집 명예 아들 지온 덕분에.
밥을 먹고 후식을 준비하며 중간중간 이야기꽃을 피웠다. 전화 통화만 가끔 했지, 집에 오는 건 오랜만이라 엄마도 아빠도 쌓아둔 이야기가 넘치는 듯했다.
챌린지나 예능, 다음 앨범 얘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나왔다. 그러나 두 분은 사전에 합의라도 하신 듯이 수능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셨다.
“수능은….”
“이원아.”
“괜찮아. 말 꺼내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는 아들이 아이돌이 된 지금이 아직도 꿈 같이 얼떨떨하니까.”
“그래. 더 욕심부리면 안 되는 거지.”
엄마와 아빠는 그간 공부할 시간이 없었을 나를 알아서 성적에 크게 기대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선행학습을 해두긴 했어도 다 까먹고도 남았을 시간. 한번 보고 뇌에 새겨버리거나 몇 년이 흘러도 까먹지 않는 기억력은 없으니까 당연한 걱정이었다.
게다가 내가 1차 목표로 잡은 대학이 가기 쉬운 학교도 아니고.
“아직 가 채점은 안 해봤지만, 느낌이 좋아요.”
“정말?”
“이번 수능 어려웠다고 그러던데. 그럼….”
“아마도요.”
바로 기대 섞인 눈빛이 돌아왔다.
수시로 접수는 해봤지만, 아마도 상황상 정시로 가게 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래서 수능 점수가 더 중요했다.
내 인생에 수능 성적이나 대학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이왕이면 철썩 붙고 싶은 게 사람 마음.
법대나 법학과를 지망하고 있어서 한국대가 아니면 입결이 훨씬 낮은 대학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한국대엔 로스쿨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히 법학과가 유지되고 있었다.
현재 가장 선망받는 로스쿨은 특정 대학교와 별개로 운영되는 국립 로스쿨.
실제로는 한국대 로스쿨이 아니냐는 비판은 있지만, 어쨌거나 한국대엔 법학과에 합격하지 못하면 눈을 낮춰야 했다.
“제 할 일은 다했으니까 이제 운명에 맡겨보려고요.”
나보다 수능 성적이 좋은 경쟁자가 넘치면 탈락하게 될 테니까.
“아빠는 예감이 좋은걸.”
“엄마 생각도 그래. 사실 엄마는 바쁜 이원이 보면 한가해지는 시기에 대학 갔으면 했는데….”
나중이 된다고 해도 내가 한가해질 날은 쉽게 오지 않을 거 같다.
아이돌에게 한가함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단어다. 인기 아이돌이라면 잠시 휴가를 보낼 순 있어도 오래 한가해진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가답안 맞춰볼게요.”
점수는 예상한 것보다 약간 높았다. 운이 좋았는지 헷갈렸던 문제가 정답이었다. 모의고사보다도 살짝 잘 봤다.
밀려 쓰지만 않았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부모님의 축하를 들으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매니저 형에게 전화해 멤버들끼리만 외출해도 되는지 미리 허락을 받아뒀다.
갈 수 있는 장소는 별로 없겠지만, 늦은 밤이라도 자유시간을 얻고 싶었다.
오늘은 내가 수능 보는 날이기도 한데, 잊고 있던 음원 수익을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테오라는 아직 정산받지 못한 상태였다. 투자된 금액이 커서 우리가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어도 올해는 무리였다.
다음 해엔 첫 정산을 받아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짐작만 해보는 상태였다.
그룹의 정산과 별개로 내가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번 돈은 차곡차곡 통장에 쌓이고 있었다. 바로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니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엄마가 저작권료 얼마나 벌었는지 궁금하다고 하지 않으셨으면 계속 잊고 지낼 뻔했다.
아직 용돈 받는 상태고 거의 안 쓰고 있어서 저작권료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잘 쓰지 않는 계좌로 등록해두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계좌를 확인해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큰 금액이 들어 있었다. 아직 이번 타이틀 ‘탈출해’의 저작권료는 들어오지 않을 시기인데도.
“이게 얼마야…?”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다시 확인해도 숫자 단위는 그대로였다. 테오라 데뷔 앨범과 드라마 OST 저작권료 정도만 들어왔을 거다.
우리 앨범이 만들어낸 숫자라고 믿고 싶지만, 아마 실상은 OST 때문이었겠지.
나우혁 배우님이 주연으로 나왔던 는 회차를 거듭하며 시청률이 상승했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각본이 잘 빠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명품 드라마로 종영하게 됐다.
방송 여기저기에서 언급되다 보면 OST를 사용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효과를 작곡가인 내가 고스란히 누리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 벌어본 돈. 소중한 사람들에게 쓰고 싶었다. 부모님께는 선물을 할 예정이고, 멤버들에겐….
돈 낼 일을 내가 전부 맡는 즐거운 자유시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