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84
클리어리
온난화니 뭐니 해도 겨울은 겨울인지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서 추웠지만, 하늘은 쾌청했다. 바람도 잔잔한데다 햇볕도 따끈했다.
현오 형이 우리를 반기는듯한 날씨. 그러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우리 사이엔 정적만 감돌았다.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올까 부모님께 부탁드릴까 망설였는데 규영 형이 데리러 와준 덕에 ‘몸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마음까지 편하길 바라는 건 사치였다.
왜냐하면 규영 형의 차에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나머지 클리어리 멤버 형들이 함께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리어리 멤버는 총 다섯. 현오 형과 규영 형을 제외하고 세 명이 더 있었다.
규영 형이 끌고 온 대형 SUV 뒷좌석엔 그 세 명이 앉아있었는데 대화조차 쉽지 않았다.
규영 형에게 전해 들었다고 해도 나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 통성명도 겨우 할 수 있었다.
현재 작은 분식집을 열었다는 윤희건 선배님,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회사원이 됐다는 김설 선배님, 그리고 대학교 3학년이 됐다는 장제우 선배님.
실제 성격이 어떨지는 몰라도 지금은 말조차 쉽게 걸 수가 없었다.
예전에 현오 형에게 멤버들이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편이라고 얼핏 들었었다. 그래서 상황이 어려웠어도 으X으X 힘낼 수 있었다고 했는데….
현오 형의 평가와 완전히 다른 어두운 모습에서 얼마나 충격이 큰지, 얼마나 낙담했는지 전해져왔다.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기분으로 잠자코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은목서가 현오 형 나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리어리 선배님들이 나를 지나쳐 지나갔다. 그러곤 현오 형의 나무를 앞에 둔 후에는 동상처럼 굳어졌다. 눈동자만 정신없이 나무 여기저기를 살펴대는 것 같았다.
나무 아래엔 현오 형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거기서 시선을 오래도록 떼어내지 못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김설 선배님이 먼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이 고르게 정리되어있다고 해도 얼음장처럼 차가울 텐데 차가움을 느낄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현오야. 정현오. 정말로 네가….”
현오 형과 동갑이라는 김설 선배님은 가슴을 손으로 쥐어뜯으며 웅크렸다. 마구 흐트러진 호흡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던 윤희건 선배님은 감정을 터뜨렸다.
“왜 우리한테 이렇게 늦게! 왜! 우리가 이제야 알아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희건아. 현오가 원했다잖아.”
“현오 형한테는 우리가 가족 아니었어? 가족한테도 숨기는 사람이 어딨어! 2년이나 지나서 알게 되는 가족이 어디 있냐고?!”
처절한 절규에 차가운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동화되는 감정에 눈물을 참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때, 나는 잘못된 선택을 내렸던 걸까.
“이원아. 입술 깨물지 마.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유언, 을 거절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그 와중에도 나를 신경 써주는 규영 형 때문에 더 면목이 없었다. 나는 위로받을 처지가 아니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오히려 더 심장을 아리게 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멤버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속의 현오 형은 환하게 웃기만 했다.
“…난 안 믿어.”
한참을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하던 장제우 선배님이 한마디만 남기고는 몸을 돌려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하아….”
규영 형이 인상을 쓰며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겼다.
“제우는 현오를 친형처럼 의지했었던 애라 충격이 더 클 거야. 막내라 예쁨도 많이 받았고.”
아마 장제우 선배님도 머리로는 모든 게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은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워서 외면하고 싶을 뿐이겠지.
강요해서 될 일도, 하루아침에 간단히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한참을 묵묵히 은목서를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 속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을 터다. 나만 해도 그러니까.
“오늘은 미안해요. 아직 감정 정리가 안 돼서. 언제 시간 내줄래요? 바쁘겠지만….”
“미리 연락해주시면 최대한 길게 시간 내볼게요. 규영 형 통해서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내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 공감할 수 있다.
이런 가정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내가 비슷한 상황이었더라면 어떻게든 매달려서 그간의 일들을 듣고 싶을 테니까.
그건 현오 형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기다릴게요.”
염치없게도 나는 그날이 기다려졌다. 슬픔을 가슴 속 깊이 가라앉히고 나면 이들은 현오 형을 같이 추억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규영 형에게서 연락이 온 건 열흘이 지나서였다.
슬픔을 추스르기에 적당한 기간이 정해져 있을 리 없지만, 현오 형과 인연이 있는 이들이 많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내겐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었다.
결국 우리가 만나게 된 곳은 규영 형과 희건 선배님이 같이 사는 아파트.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나눌만한 공간을 찾기가 힘들어서 규영 형이 먼저 제안해주셨다.
띵동?
벨을 누르자마자 바로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니 거실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형들을 마주 보고 앉은 상태로 앉았다.
“…안녕.”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는데 인사부터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말문을 열기도 쉽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없이 많은데 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여져서.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제우 형은 가만히 앉아서 똑바로 나를 쳐다봤다.
마주친 눈동자가 고요할 새 없이 끊임없이 파도가 치는 거센 바다처럼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규영 형 편에 준 자료랑 일기 읽었어. 그리고 현오 형이랑 찍은 영상도 봤고.”
겨울 어느 날 찍었던 현오 형이 노래하고 내가 건반을 친 영상을 규영 형에게 전송했었다. 완전히 외워버릴 정도로 반복해서 본 나와는 달리 이들에겐 처음 보는 동영상이었을 터다.
“현오 형한테서 네 이름 들은 적이 있었어. 그래서 테오라가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설마 싶었지. 근데 진짜였구나.”
“아….”
“근데 난 네 목소리가 현오 형 목소리랑 비슷하다고 들은 적 없거든. 신기한 우연이 있으면 우리한테 말할 법도 한데 말이야.”
현오 형과 제일 친했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는 제우 형은 이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라고 해도, 형제라고 해도 모든 일은 공유하지 않지만, ‘목소리가 비슷하다’라는 이야기 정도는 지나가듯 얘기할 만했다.
“너랑 친하게 지낼 즈음에 현오 형이 발성 치료에 몰두하더라고?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도와주고 싶은 동생이 있다던가…. 그거, 너지?”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 두 번째 만남이다. 첫 번째 만남에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믿음이 생기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나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진실을 고백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 마지막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현오 형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을 고백한다면 믿어주기는 할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게 지금으로선….
“말해. 거짓말하지 말고 얼버무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판단은 듣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 때문에 여기까지 와준 애한테 화풀이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제우야,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겠지만….”
“형은 찝찝하지 않아? 나만 그래?”
“….”
“현오가 아꼈던 동생이잖아. 후회할 말은 하지 마.”
“설이 형은 인내심이 강해서 괜찮나 본데 난 아니라서.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제우 형이 예민하게 날이 서 있긴 해도 다른 형들도 까슬한 거스러미를 적당히 덮어두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넘어가기엔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중간에 빠진 퍼즐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을 수도 있고, 내 태도에서 이상함이 드러났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판단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이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형이 떠난 후에 갑자기 제 목소리가 지금처럼 바뀌었다는 것뿐이에요.”
“…뭐?”
“설명이 부족하다는 건 알지만, 있는 그대로 사실만 나열해보면 이게 전부예요.”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거실엔 정적이 가득했다.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제우 형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이가 없는데 왠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아서 웃기네. 작정하고 속이려고 했다면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겠지?”
제우 형은 어깨에 힘을 빼고 허탈하게 숨을 뱉었다.
“미안하다. 네가 현오 형한테 성대 이식이라도 받고 입 다무나 싶어서 까칠하게 굴었어.”
“아직은 성대 이식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서요.”
만약 성대쯤은 쉽게 이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내게 성대를 줄 방법을 찾아봤을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현오 형이라면.
제우 형이 왜 그런 의심을 하게 됐는지는 알 것 같다. 현오 형이 호구처럼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지 않았을까.
“내가 오해했어.”
“제 얘기를 믿어요?”
어느 날 목소리가 바뀌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형들은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한데 안 믿으면 어쩌겠어? 그렇다고 해도 네 책임은 아니야.”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부정하는 바보는 아니거든.”
규영 형, 제우 형뿐만 아니라 희건 형과 설이 형도 트집을 잡아봤자 이미 나온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단다.
“때로는 적당히 넘어가는 게 정신건강에 좋더라고. 뭐, 우리가 아무리 고민해봤자 알아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지.”
작게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이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된 듯했다. 조금 얼떨떨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했던 걸까? 아니면 형들의 사고방식이 시원시원한 걸까? 어쩌면 두 가지 모두 해당할지도.
“가끔 우리끼리 모일 때 연락해도 될까? 바쁘지 않으면 들러서 같이 놀아주면 더 좋고.”
“현오 친한 동생이면 우리한테도 동생이지.”
“그렇긴 하네.”
클리어리 멤버들의 사모임에 나를 초대하는 규영 형의 발언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깨만 으쓱하면서 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요.”
우리 멤버들에게 현오 형과의 일을 털어놓긴 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주제로 긴 대화를 이어 나갈 순 없었다.
이제야 마음 놓고 현오 형과의 추억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 기대한 적 없던 일인데 설레는 것도 같았다.
나는 가슴 속에 담아둔 형의 기억을 보여줄 사람을 갈망해왔을까.
사람들이 왜 고해성사를 하고, 상담을 받곤 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놓는다는 행위 자체가 위안이 될 수 있는 거였다.
“우리 가게에 놀러 와. 이원이 너나 너희 그룹 애들한테는 공짜로 줄 테니까.”
희건 형이 자기네 가게가 어디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다른 형들이 희건 형의 떡볶이는 꼭 먹어봐야 한다고 입을 모으며 개업하자마자 바로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지금은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의 맛집이라고 자랑했다.
“에이, 과장이야. 난 사장이라 그다지 안 바쁘니까 언제든 와. 엇, 인기 스타가 직접 와서 먹기는 힘들겠구나.”
자그마한 분식집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나나 멤버들이 가기는 힘들 듯했다.
“동생 생긴 기념으로 내가 오랜만에 솜씨 좀 부려볼까!”
클리어리 형들이 나와 친해지려고 과장해 행동하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순 없었다. 나도 힘껏 노력하기로 했다.
흐뭇해할 현오 형을 떠올리면서.
형이 내게 가져다준 새로운 인연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