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21
밑 준비
하눌 엔터 대표 손중기는 요즘 입가에 미소가 마를 날이 없었다. 테오라 이전에도 아이돌 두 그룹을 런칭한 경험이 있지만, 이번에야 대형 아이돌 기획사 사이에서 제대로 방귀 좀 뀌는 위치에 올라섰으니까.
“내 새끼들이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인기가 없을 수가 있나. 그 얼굴에! 그 실력에!”
“팔불출이 다 되셨네요. 손 대표님.”
“내가 준 거라곤 돈이랑 관심밖에 없는데 알아서 쑥쑥 커 주잖아. 기특한 녀석들인데 제정신이면 예쁜 게 당연하지. 허허.”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손 대표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일부러 테오라 얘기를 꺼냈다. 그걸 알면서도 손중기는 소속 아이돌 자랑을 한껏 늘어놨다.
맞장구를 쳐 주면서 속으로 본론을 꺼낼 타이밍을 노리던 남자는 곧 결실을 얻게 됐다.
“그건 그렇고. 우리 나 배우는 어쩐 일로 같이 식사하자고 했으려나? 대본 고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나우혁은 고급스러운 일식집에 손중기 대표와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하눌 엔터의 간판 배우인 나우혁의 요청에 손중기는 일부러 일정을 비웠다.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 손 대표님 안목이 필요해서요.”
어디 평범한 매니저가 연예기획사 대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세심하고 철저한 매니징뿐만 아니라 대본을 고르는 안목이 큰 역할을 했다.
누군가는 손중기에게 신기가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자기 스타에게 필요한 대본을 쏙쏙 골라냈다.
인기가 필요한 신인 배우에겐 시청률이 대박 나는 대본을, 명성이 필요한 배우에겐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쥘 수 있는 독립 영화 대본을 가져다주었다.
배우 이미지에 잘 맞는 역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 드라마,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뒷소문까지 체크하는 정성을 들였다.
매니저 시절의 손중기를 아는 사람들에겐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눌 엔터의 개국공신인 나우혁은 그런 능력을 가진 손중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나 배우, 나 현장에서 손 뗀 지 오래라니까. 솜씨가 다 녹슬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엄살 피우시는 거 압니다.”
“현업에서 은퇴한 지가 언젠데. 이제는 경영에만 집중해야지.”
“골라주신 대본으로 작품 잘 풀리면 회사에도 이득 아닐까요? 대표님.”
손중기는 나우혁의 계속된 설득에 못 이겨 넘어가는 척 요청을 받아들였다. 내일이면 대표실 책상에 대본이 잔뜩 올라와 있을 것이다.
“나도 나 배우한테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이제 생각났네.”
“제 부탁도 들어주셨는데 들어드려야죠.”
“그렇게 묻지도 않고 수락하면 못써.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하눌 엔터 대들보한테 나쁜 일을 주시겠습니까.”
조금 번거롭되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는 일일 가능성이 컸다. 한 엔터사를 이끌어가는 대표의 부탁이라면 본인이나 소속 연예인을 위한 것일 터다.
“다름이 아니라 테오라 단독 콘서트를 열어볼까 하는데….”
“데뷔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단콘을요? 대표님이 예뻐할 만하네요. 그래서 저한테 할 부탁이?”
나우혁은 참치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은 후에 손중기의 대답을 기다렸다. 녹진한 참치 뱃살이 혀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콘서트 게스트로 나오라고.”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우혁이 콜록거렸다. 이런 부탁을 자신의 드라마 OST를 작곡해준 테오라의 함이원이 아니라 손중기 대표가 먼저 했다는 것부터 의외였다.
“콘서트는 언젠데요?”
“9월 초부터 중순으로 잡아두고 있는데 확정 스케줄은 아니고.”
“기간 보니까 전국 투어인가 봐요? 스케줄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괜찮을 거예요. 지금 드라마 캐스팅 확정지어도 바로 들어가진 못할 테니까. 그런데 그 제안을 대표님이 하시는 게 신기하네요.”
요즘은 게스트를 부르지 않고 딱 그 아티스트에게 집중해서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고는 들었다. 손중기도 테오라의 콘서트를 인맥 자랑 대회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특별한 인맥이라면 자랑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테오라가 인기 아이돌이긴 해도 손중기 눈에는 아직 순진한 햇병아리였다. 뻔뻔하게 욕심부릴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리더인 남초록이나 홍오란이 있어서 그나마 자기 몫은 챙기긴 하는 듯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알아서 잘하는 애들이라 챙겨줄 것도 없는데 이런 거나 챙겨야지 뭐. 소속사 대표면 거창한 업무 하고 다닐 줄 알지? 알고 보면 다 잡일이야, 잡일.”
그나마 돈 빌리러 다니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서 투덜대는 손중기의 입가엔 지우지 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미리 얘기해두는 거니까 애들이 직접 부탁하러 오거든 흔쾌히 받아주라고.”
손중기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게스트로 나가겠다고 승낙했을 것이다. 미래가 창창한 친구들이랑 친해질 수 있다면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이어도 내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대표가 나서서 부탁하는 이유는 아마도 예뻐하는 애들이니 잘 챙겨주라는 뜻일 테다.
“알겠습니다. 누구 부탁이신데요. 저야말로 잘 봐달라고 부탁드려야죠. 제 커리어가 달려 있는데.”
“다 녹슨 감이지만 오랜만에 갈고 닦아서 대작 골라봐야겠구만. 우리 나 배우한테 잘 보이려면.”
나우혁의 재계약 기간이 반년도 남지 않았다는 걸 서로 모를 리가 없었다. 잘 보여둬서 나쁠 일은 없었다.
나우혁이 재계약을 하지 않으리란 걱정은 사서 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대단한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나우혁 쯤 되는 배우라면 계약 조건만으론 넘어가지 않으니까.
손중기는 나우혁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줬고, 앞으로도 연기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간의 정도 있으니 웬만하면 하눌 엔터에서 계속 계약할 것이다. 만약 어마어마한 조건에 넘어간다고 하면 축하해줄 용의도 있었다. 눈물도 나고 배도 많이 아프겠지만 말이다.
만족스러운 거래를 끝마친 두 사람은 화제를 전환해 드라마와 최근에 개봉한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 사람은 브라운관의 황태자, 다른 한 사람은 배우를 빛나게 해주는 대본을 알아보는 미다스의 손. 둘은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형님, 아우가 되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후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거래도 성공적으로 끝낸 뿌듯함과 오랜만에 잘 통하는 대화 상대를 만난 기쁨을 안고서.
* * *
광고를 반복적으로 소비자에게 노출할수록 광고를 잘 기억할뿐더러 광고 효과도 높아진다고 한다.
아이돌도 마찬가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호감을 얻으려면 반복적인 노출이 필수였다. 그를 위해선 꾸준한 활동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껏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해온 테오라지만, 이번 앨범 활동에선 포텐이 터졌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멤버들도 미친 듯이 올라가는 인기를 체감했다.
출퇴근길을 지키는 팬들의 숫자가 2배, 3배로 늘어나고 방송 제작진의 태도가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전에는 테오라를 거들떠보지 않던 콧대 높은 가수들마저도 아는 체를 해왔다.
“우리 대단해졌나 봐! 사람들이 막 우러러보는? 그런 느낌 아니야?”
“우리는 평소랑 똑같은데.”
“달라진 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겠지. 자기가 상대해줄 만큼 급이 올라갔다 이거 아니겠냐.”
홍오란이 시니컬하게 코웃음 쳤다. 자신들과 어울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거라면서. 일종의 선민의식일까?
“음. 흔한 일이지….”
아역 배우로 연예계를 겪어온 서혼 형이 씁쓸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이 세계엔 ‘인기가 곧 법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완전히 없앨 수 있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인기 있으면 살아남고, 인기 없으면 도태되는 게 이 세계의 암묵적인 규칙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테오라가 국내를 넘어서 전 세계를 평정해버리면 먹이사슬 꼭대기에 올라간 최상위 포식자가 되겠지만, 그때에도 같은 생각일 거다.
아무래도 나는 ‘인기도’를 기준으로 나눠서 차별하는 냉정한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
“나 아까 선배님한테 인사받고 놀랐잖아. 예전엔 인사도 제대로 안 받아줬는데.”
“그걸 민망해하지도 않던데.”
초록 형과 서혼 형이 꼬집지 않아도 확연한 차이를 모른다면 바보일 것이다.
“프로다운 태도 아닌가? 배워야겠다 싶던데.”
친분도 급을 따져가면서 쌓는 계산적인 행동을 배우겠다는 홍오란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기 뜻대로 할 거라 말려 봤자 심력 낭비라서.
“오란 형, 차가워!”
“뭐, 까칠하게 대하진 않을 테니까 신경 꺼.”
오란은 비즈니스 모드로 두루두루 적당히 친절하게 대하겠단다. 친분을 깊이 쌓는 것보단 적을 만들지 않는 쪽이 낫다나?
“차라리 그게 정신 건강엔 좋을지도? 절친은 우리 멤버들이면 넘치지. 안 그래?”
“설득력 빵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록 형이 말하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연예계에 문어발, 오징어발 인맥을 쌓는 정도를 넘어서 모두를 감시하는 판옵티콘을 세운 것 같은 초록 형이 그런 얘기를 꺼내다니.
“다 겪어본 나니까 할 수 있는 말이야. 넓은 인맥 물론 좋지. 그런데 나 같이 타고 난 사람이면 모를까, 억지로 가지긴 힘든 거더라고.”
내 얘기를 하나? 내가 초록 형처럼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가지기는 힘들 거다.
사람과의 관계는 계속 기름칠하면서 유지해야 하는데 내게는 일종의 스트레스가 될 게 뻔했다. 그걸 유지할 정신적 여유도 없고, 적성에 맞지도 않으니까.
“‘진짜 친구’ 하나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데, 우리는 최소 5명은 되잖아? 설마, 우리가 절친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강요 내지는 협박처럼 들리지만 일리는 있었다. 굳이 압박하지 않아도 우리가 진짜 친구가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을 텐데 괜한 걱정이다.
“응!”
“대충 그렇다고 쳐.”
“가족보다 더 오래 붙어있는데 그럼 가족보다 더 친한 사이지!”
만나는 시간으로 친함의 깊이를 가늠할 순 없다. 그래도 보통 자주 만나고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친해지게 되는 법이니까.
“가족보다 친하다고 하면 어머님 서운해하시겠는걸.”
“괜찮아! 엄마 앞에선 우리 엄마가 최고라고 할 거니까!”
하품하던 지온이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검토하다 말고 툭 던지듯이 대꾸했다.
“A white lie? 현명해.”
직설적인 칭찬에 박하가 헤헤 웃으면서 지온 옆에 들러붙었다.
“다들 세트리스트 순서 어때?”
전에 했던 팬콘이나 온콘보다 곡 수가 확 늘어난 데다 중간에 들어가게 될 이벤트 형식의 코너가 들어갈 타이밍도 신경 써야 했다. 세트리스트 최종 검토는 내 담당이라 더 신경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컨셉은 마음에 들고 곡 순서도 괜찮아. 그런데 중간 쉬는 시간은 더 조절해야겠는데?”
“아직도 빡빡해 보여?”
포토타임이나 팬 이벤트를 끼워 넣긴 했는데 우리 곡들이 워낙 체력 소모가 커서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았다.
“게스트 섭외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여기저기 연락 돌려보는 중.”
서울, 경기 콘서트는 그래도 괜찮은데 지방에서 할 때는 스케줄 때문에 섭외할 수 있는 게스트가 제한됐다. 고려할 사항도 많아서 초록 형은 일단 스케줄이 어떤지 떠보는 중이라고 했다.
“서울 콘에 나우혁 배우님 섭외됐다면서?”
“응. 혹시 몰라서 부탁드려봤는데 바로 좋다고 하시더라고. 우리 콘서트 하는 거 아는 느낌이었어.”
같은 소속사인데다 팬들도 다들 알만한 배우여서 게스트로 적합했다. 한 곡만 부르고 수다 타임이 되겠지만, 분위기를 띄우기엔 딱 적당했다.
“서울 콘에는 이원이가 부른 OST도 추가해. 팬들이 좋아할 테니까.”
“그럴까. 같이 부를 수 있게 편곡해볼게.”
할 일이 많아졌지만 그만큼 콘서트에 바짝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