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78
개과천선
“…네? 류도후 선배님?”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옛일은 잊어주면 안 될까? 아, 사과하면 없었던 일처럼 잊어주는 거야? 어떻게 사과할까? 무릎 꿇을까?”
이게 무슨….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반전이었다. 과거를 뻔뻔하게 모른 척한다는 것까지는 예상 범위 내였다. 그렇지만 중증 연예인 병에 걸렸던 과거를 이렇게까지 후회하고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다.
법적 소송을 하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인기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좁은 사고방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순순히 사과한 것도 놀라운데 제발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까지 한다니? 태도만 보면 거의 다른 사람이 된 수준이었다.
“무릎 안 꿇어도 잊어드릴 수는 있는데….”
“있는데? 왜 불안하게 말을 흐리고 그래…?”
그땐 테오라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그 화는 희미해졌고 앙금도 깊지 않았다.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그것도 똑같이 큰코다쳐보면 좋겠다는 정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초록 형이 손쓰지 않게 나 혼자만의 복수를 꿈꾼 이유는 울분이 크지 않았다는 점도 있는 듯했다. 작은 잘못을 큰 보복으로 돌려주는 것도 정의가 아니니까 말이다.
같이 몰려다니던 프케이의 다른 멤버들이 류도후 선배를 원수로 여길 수는 있어도 나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지금은 ‘빚 갚기’보다 류도후 선배가 어쩌다 이렇게 달라졌는지가 궁금했다.
“시간 있으세요?”
“왜, 왜?”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어른이 된 기분이지만, 내가 느꼈던 억울함의 대가로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래서, 시간 있어요?”
“아니!”
힘이 들어간 미간. 살짝 삐뚤어진 눈썹.
위기 감지 능력이 뛰어나도 다 소용이 없었다. 자기가 거짓말할 때 어떤 버릇이 있는지 본인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그럼 가요. 시간 길게는 안 뺏을게요.”
잡혔던 팔을 풀어내고 내가 류도후 선배의 팔을 잡고 우리 대기실로 향했다.
류도후 선배는 어어, 하면서 테오라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게 됐고, 매니저분은 대기실 밖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조금 막무가내로 행동했나?
“어? 누가 이겼어? 이원이가 이겨서 포로로 류도후 선배님을 데리고 온 건가?”
“무승부 아닐까! 우리한테 승부를 가려달라고 데려온 거야!”
멤버들은 제멋대로 추측을 내놨지만 전부 오답이었다.
“사과받았어.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선배님이 전이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길래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멤버들이 있는 대기실로 데려오긴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개인적으로 물어봤어도 되는 일인데.
멤버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데려다 놓고 취조라도 하고 싶었나? 멤버들의 능력이라면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내 줄 수는 있겠지.
우리들 틈에서 쭈구리가 된 류도후 선배님은 누가 봐도 전과는 달랐다.
“류도후 선배님?”
“미안! 내가 잘못했어! 내가 또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모쪼록 용서해줬으면 좋겠고…. 기분이 안 풀리면 때리기라도 할래?”
이제 막 솔로 데뷔한 아이돌이면서 때려달라니. 이게 무슨 망발인지 모르겠다. 멤버들 모두 어처구니가 없는 기색이었다.
“류도후 선배님 얘기는 꽤 들었거든요? 제가 인맥이 넓다 보니까 교차 검증도 돼서 정보가 상당히 정확하단 말이죠. 근데 그 정보들이랑 지금 류도후 선배님 성격이 굉장히 다르긴 하네요?”
“예, 예전에 내 성격이 어떻다고 했는데?”
“굳이 듣고 싶다면야. 나이를 안 가리고 인기로 차별하는 데다 오만방자하고 까칠하고 자아도취에….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데 요약하자면 ‘연예인 병 말기’가 되겠네요.”
지금 들으니까 상당히 쓰레기 같은데? 빚 갚기를 너무 물렁하게 해버렸을까? 복수하겠다고 달려들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니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으아아?!”
두 손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류도후 선배님이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부끄러우세요?”
“…그럼 안 부끄럽겠어? 난 수치사 하기 직전이라고!”
“신기하네. 보통은 말이에요. 자기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하고,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인정하려고 들지를 않는단 말이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연예인 병이 싹 나았을까? 보통의 충격으로는 심각한 연예인 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텐데.
“아, 이중 계약? 그건 선배님 실수긴 하죠. 그런데 제가 아는 류도후 선배님이라면 인기에는 시련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정신 승리했을 것 같은데. 틀려요?”
초록 형 말이 진짜라면 심적 타격이 엄청나겠다. 붉으락푸르락하는 류도후 선배님의 안색을 보니 정곡을 찌른 듯했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짓이 착잡해 보였다.
“…초반까지는 그랬지. 근데 시간이 한 달 두 달 길어지고 프케이 멤버였던 애들이 하나둘 활동을 시작하니까 어쩔 수 없이 초조해지더라고. 그래도 결정적인 계기는 그게 아니라….”
류도후 선배님은 말을 하다 말고 우리 눈치, 정확히는 초록 형의 눈치를 봤다.
“인맥이 넓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혹시 내가 솔직하게 말해주면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뭘 도와야 하는지부터 들어보고요.”
“어려운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진상 부린 사람을 찾아줬으면 해서…. 난 기억도 다 못하고 연락처 찾기도 힘들어서….”
자기한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사죄라도 할 생각일까?
초록 형에게 한 도움 요청에서 추측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오우, 그 사람들 찾아서 다 사과할 생각이에요? 뻔뻔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입 싹 닦아도 되지 않나?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런 고생을 자처해요?”
“음, 이 대답도 도와준다고 약속하면 말할게.”
초록 형은 어렵지 않다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멤버들과 나는 류도후 선배님 입에서 나올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 사과할 거야. 모른 척하고 지낸다고 진짜 잊지는 못하잖아. 계속 만나게 될 수도 있는데 적대감은 줄여둬야 하지 않을까? 양심 문제이기도 하고….”
“제 앞에선 도망가려고 했잖아요.”
모른 척하고 내빼려던 행동을 잊지 않았다.
“그, 그건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나중에 다시 찾아왔을 거야.”
“성격이 극과 극인데 어느 쪽이 진짜예요?”
“…둘 다 진짜 나야. 예전엔 ‘인기’가 전부인 줄 알았던 거고, 지금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뿐이지. 예전의 모습은 외면하고 싶은 흑역사지만 그래도 내 모습….”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모양을 보니 어지간히 부끄러운 듯했다.
흑역사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 싶은 것일 텐데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있으니 그 마음은 어렴풋하게 이해는 됐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데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네요. 하긴, 선배님도 어렸으니까.”
고작 스무 살일 뿐이었다. 나와도 별로 차이 나지 않는, 서혼 형의 나이. 조금 늦은 나이에 지독한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인기’로 사람을 차별한다는 게 악질이긴 한데, 그래도 중범죄는 안 저질렀으니까 용서받을 수 있겠네요. 축하해요. 잘 빌어보세요.”
비아냥인가? 설마 응원은 아니겠지…?
“그래서 그 계기가 뭐였는데요. 아직 얘기 안 해줬어요.”
“아! 넘어갈 뻔했잖아요!”
“대단한 사건은 없었어. 이중 계약으로 소송에 휘말리고 나서 자원봉사를 하러 가게 됐거든. 나중을 위한 이미지 작업이라나 뭐라나 해서. 그렇게 장애인 보호시설에 갔어. 거기서 느꼈지. 나를 얽매던 ‘인기’라는 잣대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고. 난 나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의 세계는 달랐던 거야. 거기 있는 친구들이 신체에 장애가 있었다면 나는 가치관에 장애가 있었던 거지.”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절친도 사귀었고 틈만 나면 만나러 간다고 덧붙였다.
개과천선이라는 표현은 이런 경우에 사용해야겠지?
“신기하네요. 깨달음은 불시에 찾아오는 건가?”
“도후 선배님, 어쩌다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서혼 형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류도후 선배님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릴 적에 아역 배우였던 적이 있어. 무명에 가깝긴 했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배우가 되길 원했거든. 한창 천재 아역 배우 서혼으로 떠들썩하던 시기였지.”
서혼 형은 인상을 쓰며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기억해내지 못했다.
“무명이었다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나는 연기에 흥미가 없기도 했고 연기도 별로였는데 예쁘장한 얼굴 덕에 신문 CF를 찍기도 하고 대사 없는 단역으로는 자주 출연했어.”
류도후 선배는 재밌는 경험으로 여겼지만, 제 아들이 서혼을 뛰어넘는 아역 배우가 될 재목이라 믿었던 엄마는 크게 좌절했다고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그때부터 피해 의식을 가지셨던 것 같아. 다 인기가 부족했던 탓이라고 믿어버리신 거지. 그래도 그렇게 넘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하필 내 꿈이 아이돌이라는 게 문제였어. 인기로 모든 사람의 급을 나누던 엄마는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했고, 도움이 되는 사람을 골라 사귀길 바랐고….”
심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 하는 말은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어린 나이라면 더욱 쉽게 영향을 받았겠지.
“엄마 말대로 하니까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승승장구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더 믿었어. 의심할 겨를도 없었지.”
“엄마가 자식에게 나쁜 짓을 가르친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죠. 교묘한 가스라이팅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를 믿게 해요. 그 가해자가 부모라면 더더욱 그렇죠.”
그래도 부모의 흉은 더 보기 싫은지 자세한 얘기하진 않았다. 우리도 깊은 곳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 같이 살고 있진 않죠?”
초록 형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혼자서 살고 있어. 지금 계약한 소속사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잘했네요. 한동안은 거리가 필요하니까요.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줬으니까 저도 성심성의껏 도울게요. 제가 몇 명 알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연락할 용기는 있어요?”
“…수치스러워. 내가, 흑,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중2병은 호르몬의 농간이라는 핑계라도 있지, 나는 다 커서….”
힘내라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박하는 류도후 선배님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듯했다.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지온은 눈이 거의 다 감긴 채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누가 심각한 얘기를 한다고 예의상 눈에 힘을 주나 보다. 평소라면 잠깐 눈을 붙이고도 남았을 텐데.
“사과할 결심을 한 용기부터 대단해요. 그리고 그런 결심 덕분에 적어도 우리 여섯 명은 류도후라는 인간을 다시 보게 됐잖아요. 절대 헛수고가 아니에요.”
“와. 아역 시절부터 서혼 인성 좋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너 천사야?”
“하하….”
서혼 형은 부정도 못 하고 난감하게 웃었다. 저게 류도후 선배의 본래 성격이라면 얽히더라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초록 형은 우연히 얻은 쓸만한 부하를 어디에 써먹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턱을 쓸었다.
흑역사라는 약점도 있는 류도후 선배가 초록 형의 마수에서 걸려들지 않을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도 부정적인 답만 나올 테니 눈을 감기로 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왠지 류도후 선배님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