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77
복수?
한동안 밀려오던 스케줄을 쳐내고 조금 한가해질 즈음, 신경 쓰이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은 해체된 프케이의 리더였던 류도후 선배님이 컴백한다는 소식이었다.
계약 문제로 한동안 활동하기 어려울 거라더니 생각보다는 일찍 활동을 재개했다. 나와 류도후 선배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테오라의 다른 멤버들은 ‘그래?’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벌써 꽤 지난 일이긴 하지만, 꼭 되갚아 주겠다는 그 당시의 각오는 또렷하게 기억했다.
인기로 사람의 계급을 나눠 차별하던 그 사람이 지금의 우리를 마주하게 되면 어떤 심정일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인기가 더 앞서게 된다면.
특별히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이 류도후 선배님 스스로가 역전된 위치에 치욕스러워하지 않을까?
이미 인기 아이돌의 반열에 오른 테오라의 멤버인 나, 긴 공백을 깨고 이제야 솔로 데뷔를 하는 류도후 선배.
어쩌면 현재의 구도 자체가 상당히 자존심 상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 겪어본 지금은 단순 시비로만 끝났던 그때의 상황이 천만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참았으니 더 격해질 확률은 높지 않았더라도 자칫 잘못했다간 큰 트러블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얌전히 넘어갔다고 해도 복수를 단념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복수는 물리적인 복수가 아니었다. 류도후 선배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인기’와 ‘인지도’로 콧대를 눌러주겠다는 것뿐.
오랜 기간을 인내할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전부 우리 멤버들과 내가 그간 열심히 해온 결과물이었다. 운이 따라주긴 했지만, 떳떳하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함이원, 류도후한테 관심이 좀 많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류도후 선배님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뉴튜브 영상으로 류도후 선배를 연구하던 차였다.
옆에서 그런 내가 이상하게 보이기라도 했을까. 홍오란이 아까부터 계속 류도후 선배의 영상을 찾아보는 내 행동을 지적했다.
“뭐어? 이원 형이 누구한테 관심이 많다고?!”
“…류도후? 그 선배는 좀 아닌데. 이원아.”
웬만하면 사람을 나쁘게 보지 않는 서혼 형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길 정도라니. 전에 다 같이 만났을 때 박대당한 기억이 남아서 그런가?
소문도 안 좋게 난 걸 보면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법인가 보다.
“무슨 관심? 관심도 종류가 있잖아. 설마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는 관심은 아니리라고 믿어.”
절대 아니어야 한다는 초록 형의 말투엔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내가 류도후 선배와 업무적으로 엮이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프케이 류도후? 이원, 취향이 나쁘지 않아?”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알아, 알아. 농담이었어.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볼까?”
“음….”
생각해보니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그 당시엔 의도적으로 ‘기죽이기’를 시도했더라도, 우리를 별 볼 일 없는 ‘쩌리’ 취급하더라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초록 형의 위험하고 은밀한 해결책 말고도 우리 스스로 콧대를 눌러줄 방법이 있다.
“예전에 M.com 음악방송 스케줄 갔을 때 나 혼자 복도에서 류도후 선배랑 만난 적이 있는데….”
“아! 이원 형이 한참 만에 이상한 표정으로 돌아온 일!”
멤버들은 쓸데없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알려주겠다는 약속까지도.
“그때 건방지다고, 적당히 열심히 하라는 식으로 시비를 걸어왔는데 아무 말도 못 했었어.”
“이원이가 말수는 적어도 할 말은 하는 앤데,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지. 류도후가 패거리를 우르르 데리고 와서 겁을 줬다거나.”
초록 형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전부 유추해냈다.
“진짜구나? 갓 데뷔한 어린애를 상대로? 푸릇한 새싹은 미리미리 밟아둘 작정이었나. 근데 이원이 넌 왜 그걸 이제야 말해?”
당시에 멤버들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놨더라면 위로도 받을 수 있었을 테고, 초록 형이 어떻게든 손써줬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바란 방향과는 달랐다.
“…극단적인 상황은 바라지 않아서?”
“내가 들었으면 이중 계약 건을 더 복잡하고 크게 터뜨려서 한 10년 동안은 솔로 데뷔는 꿈도 못 꾸게 했겠지. 아쉽네.”
그러니까 그걸 원하지 않았다. 꿈을 단숨에 좌초시킬 만큼의 잘못은 아닌데 초록 형은 너무나 극단적이었다.
자신이 잘못한 만큼, 딱 그만큼만 업보를 되돌려받기를 바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과거에 해온 행동을 반성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고생 끝에 솔로로 데뷔한 후에도 연예인 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타인을 무시하고 다닌다면 언제든 사람들의 눈 밖에 날 테니까.
잘 나가던 연예인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연예인과 셀럽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대체재를 찾는 일은 아주 쉬웠다, “이원이는 스스로 빚을 갚고 싶은 모양이구나?”
복수라기엔 소소하니 빚을 갚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그냥 우리가, 내가 그 사람보다 훨씬 인기 있다고 뽐내보려고. 똑같이 해줄 수도 있지만, 그건 우리랑 안 어울리니까.”
“그치. 우리 격이랑은 안 맞지.”
인기로 층이 나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우리가 있음을 각인시켜주면 된다. 그건 우리가 직접 알려주는 것보다 스스로 깨달을 때 더 타격이 클 거다.
“이원.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
“나도 새삼 이원이 다시 봤다니까. 데뷔 초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 되갚아 줄 때만 기다리다니. 우리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뒤끝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잖아?”
웬만한 잘못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다. 그런데도 류도후 선배의 일을 여태 기억하는 이유는 나를 화나게 해서가 아닐까?
“…나 뒤끝 길지도.”
“워워. 본인 피셜 뒤끝 길다고 한 말 들었지? 다들 몸 사리라는데?”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화나서 기억이 오래 남았던 것 같다고 해명했는데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나를 놀리는 데 진심인 멤버들 앞에서 심각했던 내 잘못이었다.
“아무튼 요약하자면 나 혼자서 잘 해보겠다는 거야. 애초에 그게 목표이기도 했고.”
잠시 진지하게 고민한 멤버들은 내 마음대로 해보라고 허락해주었다. 내가 때려봤자 솜 주먹일 거라는 듯이 마음껏 복수하라는 그 시선에 목과 귀, 볼까지 차츰 열기가 올라왔다.
그렇게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처럼 보지 말라고!
…따끔하게 말해주고 싶지만, 다섯 배, 아니 오십 배로 돌려주는 멤버들을 떠올리며 말을 삼켰다. 이건 단지 작전상의 후퇴일 뿐이었다.
“싸가지 없는 이원이 볼 수 있는 건가? 내가 다 기대되는걸?”
“맘대로 해….”
아무리 말려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사람들이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은 이런 데 쓰는 거겠지?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참 명언이었다.
* * *
류도후 선배와 만날 기회는 빠르게 만들어졌다. 당분간은 우리가 음악방송에 나갈 일이 없어서 혹시나 계속 엇갈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스케줄을 확인하니 기우였다.
우리는 화제의 아이돌로, 류도후 선배는 역경을 딛고 솔로 활동을 시작하는 검증된 스타로 여기저기 바쁘게 불려 다니는 중이었다. 마주치지 않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재회는 방송국 복도에서 이루어졌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하는 걸 보니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시간 여유가 있는지 확인한 뒤, 매니저 형들과 멤버들을 먼저 대기실로 보냈다. 류도후 선배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도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
뒤를 힐끔거리면서 입 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치는 멤버들의 얼굴에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류도후 선배를 가뿐히 이길 것 같나 보다. 내가 하려는 게 승부를 가리는 운동경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심각해지는 꼴을 못 보는 멤버들 덕분에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렸다.
“…뭐야?”
“안녕하세요. 류도후 선배님. 테오라 함이원입니다.”
“인사는 아까 같이 받았는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볼일이라고 하면 볼일일지도요. 뜬금없지만 예전에 저랑 만났을 때 기억하세요?”
“너랑 만났던가? 글쎄…? 기억 안 나는데. 내가 워낙 만났던 사람이 많아서 다 기억할 수는 없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너도 아이돌이니까 이해하지? 벌써 시간이! 난 바빠서 이만 가봐야….”
뭐가 곤란한지 자리를 얼른 피하려는 눈치였다.
나는 류도후 선배가 입을 떼고 난 후로 눈을 돌리지 않고 관찰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류도후 선배가 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괜히 류도후 선배의 뉴튜브 영상을 연구한 게 아니다. 댓글을 샅샅이 살핀 결과 쓸모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류도후 선배는 거짓말을 할 때면 미간에 힘을 주는데 그 탓에 눈썹이 조금 삐뚤어진다고 했다.
팬들은 역시 눈썰미가 대단하다. 댓글의 설명대로 반듯했던 눈썹이 조금 삐뚤어져 있었다.
아마도 나와 만났던 기억이 없는 척을 해야겠다고 그 짧은 새에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그때의 자기 행동이 떳떳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기억 안 나시는구나. 그때 저희한테 무대 잘한다고 칭찬해주셨는데요. 선배님 선구안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테오라가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 우승한 걸 보면요. 자기 자랑 같아서 재수 없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칭찬을 했어? 언제…?”
“너무 열심히 해서 선배님들 무대를 깽판 친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왜 이런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떠오를까. 부정적인 기억이 오래간다더니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이었구나.
“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류도후 선배가 느끼는 당혹감을 전달해줬다. 뭔가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서 기대했던 복수의 짜릿함이 없었다.
줄줄 거느리고 다니던 패거리가 없어서일까? 그간 이중 계약으로 고초를 치러서일까?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돈다’라는 연예인 병의 자아도취 증상은 이미 사라진 듯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부라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내가 약한 사람 약점을 잡고 시비를 거는 역할을 맡은 것 같다.
류도후 선배가 아직도 인기로 계급을 나누고 있다면 나는 류도후 선배보다 위 계급에 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닌가?
내가 생각하던 복수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작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뭐지…?
류도후 선배는 비록 시원하게 사과는 못하더라도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는 듯했다.
뭐, 본인이 반성하고 있으면 됐나…?
계속 악역을 맡아줬으면 복수할 기운이 났을 텐데, 김이 새버렸다.
“류도후 선배님.”
“으, 응?”
저렇게까지 주눅들 필요는 없는데.
“예전 일 기억나시죠? 위압적인 분위기 조성해서 저한테 시비 거셨던 거요. 깔끔하게 사과해주시면 저도 없었던 일로 할게요.”
원래 계획과는 다르지만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직구가 더 잘 먹힐 것 같아서 한 선택이었다.
잠깐 사이에 류도후 선배는 얼굴 근육을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더니 바짝 다가와 팔을 덥썩 붙잡고 매달렸다.
“으아악! 미안! 미안해! 내가 죽을 죄를 졌으니까 제발 잊어줘!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